예술은 예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예술과 사회의 연관성, 특히 예술과 정치의 관련을 부정하고 예술의 독창성, 창조성을 옹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프랑스의 문예학자 쿠쟁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미학이론을 근거로 에술은 미에 대한 예술가의 순수한 관심에 의존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 또한 이러한 주장을 했다.
순수예술론은 나름대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당시 예술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예술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나는 종교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신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였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공통점은 예술을 철저히 도구로 본다는 점이었다. 물론 전자는 신에 대한 찬미의 도구였던 반면, 후자는 돈을 위한 도구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예술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시각 - 참여예술론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술 또한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견해다. 이 시각은 예술가도 한 명의 사회인이며 예술 활동 역시 하나의 사회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변명하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은 주어진 사회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 두 가지 입장의 문제점
순수예술론은 다른 활동과 구별되는 예술의 자율적 성격을 옹호하고, 예술의 논리에 입각한 발전을 추구했다는 데 장점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폐해는 예술의 수준 자체가 저하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예술의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예술론의 단점은 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 사회 현실에 대한 도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모순과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 현실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뿐이다. 이 경우 순수예술은 순수라는 미명하에 그 현실을 옹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참여예술론은 지적한다. 결국 완전한 순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참여예술론의 장점이다. 그러나 참여예술론이 예술을 하나의 도구로 이해하고 그 자율성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면 이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예술의 질적 저하를 낳게 된다. 깊은 성찰과 훌륭한 형식을 갖춘 예술 작품이라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조야한 참여예술 작품보다 그 가치가 못하다는 식의 평가를 받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술도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참여예술론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순수한 예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순수예술론의 주장도 올바르다. 예술은 사회적 활동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회적 활동과는 다른 자신의 특징을 가지며, 더욱이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참여 예술론이 극단화되면 '정치적 선전도구로서의 예술'이 나타나고 순수예술론이 극단화하면 '예술지상주의'가 나타난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는 시각일 것이다. 이 시각은 예술의 사회적 성격과 자율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예술은 사회적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서도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술 활동 자체도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가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4. '인간을 위한 예술'을 위하여
순수예술이건 참여예술이건 어느 하나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순수예술이나 참여예술은 모두 당시의 사회상과 연관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순수예술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그것은 종교와 자본주의적 상품 논리에서 예술의 독자성을 지키려 했던 시도였다는 점에서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그 논리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옹호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사실주의, 자연주의 계열 작품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때는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참여예술론도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고통과 투쟁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현실을 고발할 때는 훌륭한 입장이 될 수 있지만 스탈린 시대의 예술처럼 당의 선전 도구로 전락할 때는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결국 참여예술과 순수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예술이란 이 두 측면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은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는 하나의 전망으로 모아진다. 첫째,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노동하고 사랑하고 고뇌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술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예술은 반사회적이 되고 예술지상주의가 된다. 둘째, 예술은 바로 예술이라는 그 나름의 형식을 통해서 인간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술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실에 참여하는 것만이 예술의 목적이 된다면 조야한 정치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 편이 훨씬 낫다. 물론 이 두 경우 모두 인간이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을 위한 예술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이 인간을 위해서 예술 활동을 해 왔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깨닫고 예술 작품을 평가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가치 있게 활용하는 눈을 기르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