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어머니는 안나, 아버지는 요아킴, 고향은 나자렛.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원조 아담이 지은 죄를 이어받았음이 우리 신앙의 교의(敎義)인데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도 과연 원죄의 물듦이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모 마리아는 원죄의 물듦이 없이 태어나셨음을 믿어 왔습니다. 성모님 축일 중 성모승천 축일과 성모무염시태 축일이 가장 큰 축일입니다. 일찍이 한국 천주교회는 우리나라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고, 명동성당 주보이신 성모 무염시태 축일은 12월 8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성모 마리아만이 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초대 교부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음을 공의회 문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을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밝힌 바 있어 추호의 다른 의견 없이 말끔히 일단락 되었습니다.
1858년, 지금부터 꼭 150년 전, 프랑스 남쪽 루르드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벨라뎃다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을 때 벨라뎃다가 성모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다.”
그 루르드는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제일 많이 찾는 성지입니다. 나는 28년 전, 1980년에 그곳으로 첫 순례를 했고 그 후 3차례나 순례를 한 바 있습니다. 루르드 성지에서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마사비엘 동굴 벽에 걸려 있던 목발 몇 개입니다. 그것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합니다. 병자가 순례 왔다가 기적적으로 나아, 짚고 온 그 목발을 버리고 간 것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광장은 휠체어를 탄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마다 기적을 바라고 왔거니 했는데 환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성지까지 온 은총에 그저 감사드릴 뿐이라고 안내자가 전하는 말에 참 옳은 말이라 고개들을 끄덕이었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기적수(水)에서 목욕을 하는데 낸들 거를 수 있습니까? 벨라뎃다에게 “파보아라.” 해서 솟아나온 물인데.
저녁에는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하는데 세계만방에서 온 순례자들이 하나의 마음이며 나도 이 대열에 끼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느끼며 주님께 두 손 모았습니다. 벨라뎃다 소녀에게 지으라고 하셨다는 바로 그 기념성당에서 우리 순례자들은 다른 나라 순례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이때 내가 사제로 살고 있음에 다시 두 손을 모았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참으로 천주의 모친이십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죄 없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가 1,28; 1,3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가 1,46-50)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한다고 해서 예수님께 대한 신심이 부족하겠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파티마 세계 사도직 푸른 군대 월례미사를 봉헌하려고 입장하는데 성모님 노래가 아름다웠습니다.
해와 같이 찬란하고
달과 같이 아름다운 저 여인은 누구신가!
별과 같이 반짝이고
저녁노을 위에 계신 저 여인은 누구신가!
성호를 긋고 교우들에게 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부른 입당 성가를 들으면, 누가 제일 좋아하시겠습니까? 성모님이시라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성모님보다도 더 좋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고 계시는 것을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세상 곳곳의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아이들의 심장을 바쳐야 내일도 해가 뜨고 천지개벽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야문명의 발상지인 멕시코의 미신행위가 성모님 발현으로 멈추어, 자식들을 바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정말 기막힌 성모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멕시코 과달루페에 발현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 적재적소에 발현하시어 아들 예수님이 세워놓으신 십자가의 활력을 생생하게 전파하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이 유별나게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대단한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보다 더 지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도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다. 대한민국은 일찍이 성모님께 봉헌된 나라입니다.
파리 외방선교사들이 심어 놓은 성모신심
우리나라에 첫 선교사들인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들어올 때, 그들 자신이 온통 성모님 신심에 푹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성모님 신심으로 선교하라’는 지시까지 받고 온 터라서 한국에 올 때, 배 위에서부터 성모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교회사에서 봅니다.
장자크 올리에(Jean Jacgues Olier) 신부는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1657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풍성한 영적 결실을 맺은 설교가였으며, 설교를 통해 많은 기적을 일으킨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올리에 신부는 파리의 변두리에 있는 성 쉴피스 성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성 쉴피스 신학교를 세워 거룩한 사제들과 주교들을 많이 배출시켰습니다.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바로 이 성 쉴피스 신학교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이 신학교의 정신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순교 성인 다블뤼 주교(1818-1866)는 바로 이 쉴피스 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서품을 받았습니다. 쉴피스 신학교에 다닌,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리는 아베마리아를 작곡한 구노가 바로 다블뤼 주교님의 동기 동창이었습니다. 구노와 다블뤼 주교님과의 사이는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습니다. 구노는 외방 선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이었습니다. 구노는 선교사의 꿈을 접고 신학교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였지만 마음속에는 선교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선교사로 한국으로 떠나는 다블뤼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습니다. 가끔씩 모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순교’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 본 구노는 경악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무사히 돌아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으레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 뛰어간 구노는 실신 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 조선에서 순교.”
구노는 눈물로 성모송을 바치며 순교한 벗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며 순교자로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실 벗을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Ave Maria Gratia Plena Dominus Te Cum-
아베 마리아는 우리 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입니다.(전주교구 ‘숲정이’ 인용)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올리에 신부의 모범을 따라 한국에 와서도 성모님께 대한 봉헌을 실천하였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우리나라를 성모님께 어떻게 봉헌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61년, 선교사 4명은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한국 신자의 배로 갈아타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됐던 섬을 지나갈 때 모두가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보호 아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조선 포교지는 최근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께 봉헌되었고 각 구역이 성모님의 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구장이 계신 수도 서울은 ‘성모 무염 시태’의 지역이고, 다블뤼 주교님의 구역은 ‘성모 성탄’의 이름을 가졌고 페롱 신부의 구역은 ‘성모 승천’의 구역입니다.”(한국천주교회사 中에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은 올리에 신부가 1643년, 성 쉴피스 성당을 장엄하게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먼 이국 조선에서도 그 봉헌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이 19세기에 세 분의 목자들을 통해 세 번 즉 1841년 8월 22일, 1846년 11월 2일, 그리고 1861년 4월 21일 성모님께 봉헌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푸른 군대와 마리아 사제 운동모임에서는 교황께서 한국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습니다. 요청서에 세 분의 주교님과 160여 명의 신부님들이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교황께서는 요청을 받아들여, 우리와 같은 정신으로 한국을 봉헌하겠다는 전보를 비행기 안에서 푸른 군대 한국본부로 보내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여의도 광장에 가시기 전에 서울 명동 대성당에 가시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한국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셨습니다. 이 봉헌식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땅의 모든 성전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무염시태 대성당에 모였습니다. 이는 온 세상 신자들의 깊은 기도, 초창기에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마음에 간직하여 바치던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나이다.’라는 기도를 새로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찍이 1837년에 범 주교님이 어느 성모 축일에 드디어 이 땅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자, 무염시태 성모를 이 나라의 주보로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성좌에 청한 바 있었습니다. 이 소원은 그의 후계자인 고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서도 공주의 수리치골에서 이 겨레와 이 나라의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께 조용히 봉헌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자마자, 순교자의 피로 물든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의 가장 뚜렷한 상징인 이 곳 종현 언덕 위에 이 명동 대성당이 세워지고, 민 대주교님에 의해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께 1898년 5월 29일 성대히 봉헌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국 겨레의 운명에 있어 성모 축일과 날을 같이 한 일들도 여럿 있으니, 근래에 와서는 1945년의 8.15 해방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계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모성월에, 한국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성스럽고 가장 훌륭한 아들 딸들이 성인성녀로 오르게 될 이날에 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땅의 온 겨레와 교회를 예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의 자애로운 보호에 의탁하는 바입니다.”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 인용)
*<속아서 된 신부가 본 천당> /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
중에서
[출처]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 김환철|작성자 라파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