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가을빛 머금은 차생활의 멋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시들의 하나인 김현승님의 ‘가을의 기도’이다. 언제 들어도 마음을 다듬어 주기에 충분하다. 가을날, 비옥한 시간을 위한 간절한 바람을 헤아려 본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다. 절대 고독은 절대 가치를 추구한다. 절대자에게로 다가가려는 간절한 의지를 실현시키려는 삶의 여정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까. 그 험난한 삶의 여정을 헤치고 무욕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이 기도해 본다. 영혼과 연계된 그 절대가치를 얻기 위한 나의 기도는 무엇일까.
불교가 국가의 근본이었던 고려 때에는 뛰어난 학승이 특히 많았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한 분인 원감국사(1226~1292)는 그 삶 자체가 드라마와 같다.
국사의 속성은 위(魏), 이름은 충지(沖止), 원감(圓鑑)은 시호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도에 매진하고자 했으나 부모의 허락이 없어 관직으로 나가 19세 때 문과에 장원한다.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는 장래가 촉망되는 문재(文才)였으나 29세에 출가하여 김해현 감로사의 주지로 있다가 61세에 제6세 국사가 되었다. 원나라 세조가 흠모하여 연경으로 초청해 극진한 대우와 금란가사 등의 귀한 선물을 내렸다. 시문에도 능하여 동문선에 그의 작품이 실려 있고, ≪해동조계제육세원감국사가송(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에 그의 시가가 전한다.
속세를 떠난 청아한 삶을 노래한 국사의 차시(茶詩) <난송선사 인공의 운에 따라 답하다(次韻答蘭松禪師印公)> 속에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가을이 담겨 있다.
鷄山最深處 신성한 높은 산 가장 깊은 곳
高臥遠紛華 속세 벗어나니 권세와 부귀는 멀어지기 마련
鏡裏元無翳 거울 속 같은 밝은 길은 원래 가려진 것 없으니
壺中自有家 내 머무는 곳은 저절로 선경 속 집이라네
庭空松子落 텅빈 뜨락엔 솔방울 뚝뚝 떨어지고
室靜篆煙斜 고요한 방안엔 향 연기 꼬불꼬불
何以療飢渴 무엇으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다스릴까
香蔬與釅茶 향기로운 나물과 진한 차가 있나니
수도에 매진한 도력 높은 난공선사 인공이 차를 보내며 어찌 살고 있는지 안부를 편지삼아 시 한 수 보내오셨나 보다. 정성과 염려가 가득 담긴 차와 시를 받은 선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예부터 우리는 최고의 선물로 차를 보내곤 했다. 특히 고려 때에는 차는 고귀한 물건으로 여겨져 임금이 신하에게 차를 내리기도 했다. 왕실과 대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차를 선물하고 마시며 평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선사는 감사의 마음으로 답시를 썼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이 속은 신선세계로 세속의 욕심은 흔적조차 없다. 행여나 벼슬길 미련이나마 남아 있는지 물어볼 것도 없으니 이곳이야말로 호중(壺中)이다.
호중은 선경(仙境)을 의미한다. 중국 후한(後漢) 시대에 시장에서 약 파는 어떤 노인이 있었다. 시장을 파하면 머리맡 병 속으로 뛰어들곤 했는데, 비장방(費長房)이란 사람이 노인을 따라 병 속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이 옥당(玉堂 : 신선세계)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실컷 즐기고 돌아왔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신선세계는 호리병 속처럼 분리된 공간이다. 그러나 한 발만 들여놓으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가 ‘별천지’라고 여기며 곁에 두고도 못 보는 것은 아닐까. 국사는 스스로 비방장이 되어 그 피안의 세계에 들어간 것을 노래했다. 차 한 잔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며 선경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묻는다. 벼슬하는 것보다 만족스러운지를.
드디어 국사는 노골적으로 들려준다. 솔방울 하나가 얼마나 넓은 공간을 채울 수 있는지. 향 피운 연기 따라 얼마나 많이 옥당을 오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조용히 우리에게 묻는다. 화려한 치장과 좋은 음식이 행복의 척도인가. 나물 한 그릇, 차 한 잔의 만족감을 모르면서 어찌 큰 것의 즐거움은 알겠는가.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선사의 단조로운 삶. 솔바람 소리 고요한 산사의 생활에서 탈속한 도인의 면모를 엿본다. 진한 차로 마음을 다스리며 고요히 득도의 길을 가는 삶이 평화롭기만 하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가을을 가슴 가득 품어본다. 청량한 가을 햇살 속에 향기로운 나물과 진한 차향이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