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시위진압 아닌 [정격작전] 방불
공수부대, 시위대를 마치 적군처럼 다뤄 분노한 시민들 [식칼]들고 계엄군 대항도
7공수 33대대 권승만중령 [광주청문회]서 "결코 과행진압안했다" 발뺌
[얼룩무늬의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가량의 공수부대원들.
오후 3시30분쯤 유동삼거리에 나타난 얼룩무늬들은 그 곳에서부터 세겹으로 횡렬을 지어 엄숙한 모습으로 도청쪽을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이들의 등에는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친 M-16소총이 대각선으로 둘러메져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는 날개 달린 하얀말이 벌떡 일어서서 뛰는 자세를 새긴 마크가 붙어있었다. 예로부터 백마는 근엄한 장수의 표상으로 상서로움을 상징해 왔다. 그러나 이날의 백마는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하는 장군을 태운말이 아니라 국민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유린하는 악마로 표변해버렸다.] (김영택 저 [10일간의 취재수첩])
18일 오후 3시를 전후해 광주시 북구 유동삼거리에는 비상라이트를 켠 군용트럭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술에 취한듯 출혈된 눈과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7공수 33특전대대 선발대 70여명은 진압봉을 움켜쥔채 유동삼거리 인근 수창국교앞에 집결, 대열을 정비한다. 뒤이어 대열후면에 서있던 차량으로부터 해산을 권유하는 방송이 시작된다. 시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구경하는 우리들에게까지 무슨 해가야겠느냐]며 일부시민들은 오히려 공수대원들과의 간격을 좁힌다.
[1단계로 선무방송을 하고 해산시키려 했으나 많은 돌을 던지고 구호를 힘차게 제창하며 해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2단계로 최루탄을 사용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3단계로 70여명의 병력을 시위대에 투입하고 이어, 대대병력을 투입하여 작전을 전개, 주동자를 연행하자 군중이 해산했다.] (권승만중령 - 88년 12월 국회청문회 증언내용)
그러나 유동삼거리의 당시상황은 진압책임자의 이같은 주장이 교본을 충실하게 각색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해산종용 방송에서부터 무차별 체포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1∼2분남짓. 체포명령과 함께 튀어나온 공수부대원들에겐 남녀노소, 학생·시민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일단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구타하고, 쓰러지면 잡아끌어 인근 트럭위로 던져버리는 상황이 금남로일대를 뒤덮는다.
구타와 연행을 피해 골목길로 혹은 건물안으로 숨어든 시민들조차 공수부대원들에겐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사송고를 위해 지사사무실에 있던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가 김영택씨의 증언.
35대대3백명 추가투입
[진압을 피해 동아일보 광주지사로 뛰어들어온 청년들은 착검한 총을 들고 쫓아들어온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채 끌려갔다. 이들은 시위와 무관한 신문지사사원들까지 구타하고 실신시켜 연행해갔다. 서석병원 앞에 있던 군용트럭에는 연행자들이 부상을 입은채 다시 구타를 당했다. 병원 맞은편에서는 신혼부부마저도 끌려와 군화발로 짓밟히고 진압봉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됐다.]
70명으로 시작된 공수대원의 진압작전은 10여분뒤 10여대의 트럭에 분승한 33대대잔여병력 2백여명과 35대대병력 3백여명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시내 전지역으로 확산된다.
33대대는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한 금남로로, 35대대는 충장로 제봉로등 금남로연결지점을 중심으로 진압지역을 확대해나간다.
그모습은 [진압]이 아니라 [공격]작전을 방불케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공수부대원들이 곧바로 몰려든 곳은 공용터미널. 당시 공용터미널 인근에서 시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임열학 (금호용역대표), 석인호씨 (대인동 수혜주차장근무)의 증언.
[시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자동차보험옆 송월장여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후 상황은 온통 난리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6·25를 겪어봤지만 그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잡히는대로 박살을 냈다. 쫓겨온 학생들이 인근 은혜장 옥상으로 올라갔으나 공수부대가 끝까지 쫓아오자 무작정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오죽했으면 그 높은 옥상에서 뛰어내렸겠는가. 대한극장앞에 서있는 트럭에는 학생 7∼8명이 가마니 엉키듯 실려있었다. 잡히면서 두들겨 맞고, 트럭 밑에서 죽도록 맞고, 트럭위에서 또 맞으니 실신 안하고 배길 사람이 있겠는가.]
[광남로로 시외버스 한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공수대원들이 버스를 세우더니 젊은 사람을 끌어내리고 무조건 두들겨 팼다. 이제 막 시외에서 들어온 사람이 무슨 시위에 참여했겠으며,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잡히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가정집으로 숨어든 학생들조차 공수대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당시 재수생이던 정두신씨 (당시20세·한국전력근무)는 금남로에서 쫓겨와 가정집에 숨었으나 결국 붙잡혀 두번씩이나 기절할 정도로 구타를 당한다.
[공수대원을 피해 북동의 어느 가정집 부엌으로 숨었으나 쫓아온 공수부대원에게 끌려나왔다. 나오자마자 곤봉으로 머리를 구타당해 심하게 피를 흘리고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후 눈을떠보니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또 기절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도착한 곳은 전남대 운동장이였다.]
같은 시각 광주공원. 당시 광주공원에서도 침례교의 [한미전도집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집결해있는 상황. 이같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곤봉을 휘둘러대는 공수대원의 만행을 접하며 일부 시민들은 인근 음식점에 있는 식칼을 들고 나와 저항하기도 한다.
전도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광주공원을 찾았던 김신덕씨 (당시 34세·현재 로케트정밀근무)의 증언.
[아무것도 모른채 공원에 있는데 벌겋게 상기된 공수부대원 몇명이 접근해 왔다. 검문이고 뭐고 없이 무조건 곤봉을 휘둘러 댔다. 항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이 저럴수있나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해 인근 동백음식점으로 나왔다. 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공수대원들의 진압방식은 무자비했다.]
지산동과 산수동 일대를 돌며 시위를 하던 3백여명의 학생들도 공용터미널인근에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황급히 이동하던중 전남여고 인근에서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한다.
[경찰과 대치하던중 순십간에 공수부대원들이 밀려왔다. 곤봉으로 내리치고 피를 쏟고 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도망을 시작했다.
도망하다 보니 공수대원들에게 맞고 짓이겨져 얼굴껍질이 거의 벗겨지다시피한 동료학생을 만나 택시에 태워 보냈다.] (홍순희씨 - 당시 조대공전2년)
곤봉과 대검을 동원한 33·35대대의 진압작전은 밤7시께 막을 내린다. ?(33대대작전종료 - 오후 4시30분, 35대대작전종료 - 밤7시) 3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2백76명이 체포 (전교사작전상황일지)되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이같은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당시 군지휘관은 이 모든 상황을 송두리째 부인한다.
33대대 권승만중령의 광주청문회 증언내용.
발견즉시 곤봉 휘둘러
공수부대가 초기에 과잉진압을 해서 사태가 악화됐렀고 하는데. [33대대가 한 금남로진압작전에는 절대 과잉진압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고 공수부대원은 3백명에게 불과한데 광잉진압이 되겠는가.] -거리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지휘관이 그렇게 몰지각하고 무식한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전교사가 육참총장에게 보고한 교훈집에 보면 군부대가 일가족을 위협, 시민들로 부터 야만적인 증오감을 느끼게 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래도 과격진압 결론을 수용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광주사태 전기간중 전병력이 한 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조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청문회에서 정반대의 증언을 한다. [광주사태의 확산원인은 분명히 군의 과격행위에 있었던 점을 시인하나 원인행위는 학생에게도 있었다. 방법이 과격해 시민의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켜 악화됐다.]
당시 광주시장이었던 구용상 현전남지사도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평화롭게 시작된 학생시위가 시민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확대되고 유혈화된 것은 초기에 대검까지 사용한 공수부대의 과행진압때문이었다는 판단을 당시에 내렸었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수차례 직접 목격했으며 진압직후 이 사실을 내무장관에게 보고했다. (본보 93년5월20일 인터뷰).
*구지사의 증언처럼 공수대원들의 야만적인 진압을 체험한 학생들은 이날 밤 늦게 까지 진행된 심야시위 과정에서 각목등 초보적인 자위무기를 갖추게 되며 여기에는 오후까지만해도 시위를 지켜보기만하던 일반시민들이 함께한다.
시위대의 주축이 학생에게 시민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