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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Wild Rose) :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관목
꽃 : 5-6월에 피고 새가지 끝에 원추화서를 이루며 지름 2cm정도이고 백색 또는 연홍색이며 소화경에 털이 없거나 선모가 약간 있고 꽃받침잎은 피침형으로 뒤로 젖혀지며 안쪽에 융모가 있습니다.
잎 : 표면에 털이 없고 뒷면에 잔털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고 탁엽에는 빗살 같은 톱니가 있고 밑 부분이 엽병과 합쳐집니다.
줄기 : 장과로서 둥글고 지름 8mm정도로 9-10월경에 적색으로 익는다. 종자는 길이 3㎜정도로서 백색이며 털이 나 있습니다.
열매 : 열매는 장과로서 둥글고 지름 8mm정도로 9-10월경에 적색으로 익습니다. 종자는 길이 3㎜정도로서 백색이며 털이 나 있습니다.
원산지 : 한국
찔레꽃 노래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白蘭兒) 노래, 1942년 태평레코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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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사곡 ) ■ ■ ■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칸 그립습니다.
작년 봄에 같이 앉아 백인 사진 /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2.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그대와 / 연분홍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 ■ ■ (원곡) ■ ■ ■
(대사)
찔레꽃 붉게 피는 계절이 오면 언덕 위에 초가삼칸 그리운 고향
달뜨면 산에 올라 노래하던 동창생 지난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을
천리객창 타향에서 다시금 보니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네.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2.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3.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제주산책 '찔레꽃' 노래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여 차를 달리면 중산간 지역에 한림읍 명월리라는 동네가 있다, 조그마한 동네이지만 明月이라는 이름에서 범상치 않은 마을임을 느끼게 한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명월천에는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명월대와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들이 아직도 옛날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유서가 깊은 마을이다.
지금은 한림으로 개명된 옛 명월포에는 진상품을 실은 배가 한양으로 들락거렸고,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명월포로 입항했고 여몽 연합군도 뒤를 이었다, 목호의 난 때에는 최영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하기도 했다, 지금 복원되어 있는 명월성은 이런 역사적 풍랑을 품고 있는 곳이다,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 우거진 명월대 앞에는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명월국민학교'가 있고, 학교 정문 앞에는 조그마한 조립식 건물이 하나 서있다, 한 평이 될까 말까한 건물에 관리인도 없는 건물, 하나밖에 없는 문을 열어 제치면 방안에는 덜렁 음향기계 하나가 방문객을 반긴다, 안으로 들어가 노래 듣기 단추를 누르면 팽나무 우거진 명월대 위로 이런 노래가 울려 퍼진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 /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일제 강점기이던 1941년에 가수 백난아(白蘭兒)가 발표한 노래 '찔레꽃'이다. 백난아는 1923년 한림읍 명월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금숙, 17세에 함경도 회령에서 열린 전국가요콩쿠르에 2위로 입상하면서 가수로서 발을 내딛었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수 백년설이 백난아를 스카웃하여 수양딸로 삼고 자기의 성씨를 물려줘 백난아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그러한 사연으로 가수 백난아가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찔레꽃 노래는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의 곡으로 한민족의 대표적 정서인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 당시에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지금은 대표적인 '국민 애창곡', '겨레의 노래'로 자리 잡고 있는 노래이다.
1941년에는 한림읍 명월리를 찾아온 작곡가와 작사자, 가수 백난아, 세 명이 명월대에 올라 찔레꽃 노래를 부르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가수 이미자는 10살 무렵 부산 피난시절에 동아극장에서 가진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의 꿈을 품었다고 하고, 북쪽 배불뚝이의 18번 애창곡이 바로 찔레꽃이라고 한다.
백난아는 1992년 12월에 타계했고, 2007년 북제주문화원에서는 그녀의 고향인 명월리에 아담한 노래공원을 만들고, 공원 한쪽에는 그녀를 추억하는 찔레꽃 노래비를 세웠다.
초행길인 방문자에게는 너무 작고, 너무 아담한 규모에 놀랄 수도 있겠지만 백난아의 그리움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찔레꽃 노래에 어울리는 공원은 이런 공원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찔레꽃 가사에 나오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은 영락없는 제주도를 상징하고 있고, 찔레꽃은 봄이면 어김없이 제주도에 지천으로 널리는 꽃이다, 이 땅의 장년들이라면 가난하던 어린 시절에 찔레 순 껍질을 벗겨 먹어본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런 찔레꽃을 망국의 세월에 흘러 흘러 들어간 북만주 벌판, 북간도에서 바라보는 찔레꽃은 무슨 색깔로 피어날까. 아마도 하얀 찔레꽃은 고향을 그리는 사람의 가슴에서는 붉게 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옛 적 고려시절에 몽고제국에 처녀를 바치던 시절에 머나먼 대륙 땅으로 공녀로 팔려갔던 찔레라는 처녀가 부모형제를 그리다가 십 수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없어지고,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사라진 식구들을 찾아 헤매다가 하얀 눈밭에 파묻혀 죽고, 봄이 되어 눈이 녹고 그 처녀가 죽었던 자리에 피어났다는 꽃이 찔레꽃이랬던가? 찔레가 죽어간 하얀 눈밭을 닮아 하얀 꽃이지만 그 심정만은 피처럼 붉을 수밖에 없는 꽃이 찔레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한림읍 근처를 지나가게 된다면 명월리에 들려 찔레꽃의 가수와 찔레꽃의 노래와 찔레꽃의 전설이 삼위일체가 되는 노래 찔레꽃을 듣고 지나가시라!
찔레꽃 노래공원 조그만 건물에 무조건 문을 열고 들어가 노래 듣기 단추를 눌러 보시라!
명월대를 둘러싼 거대한 팽나무 고목들 위로 슬픔과 애환과 전설이 흐를 터이니....
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답니다.
<찔레꽃>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 가수 백난아(白蘭兒)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가수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대표 트로트곡 '찔레꽃'입니다. 만주로 독립운동 떠났던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을 가사로 표현하고 있는 그 시절 대표적인 민중가요였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유행가이건 그리운 고향생각을 유발하건 간에 가사를 떠올려 부르다보면 첫머리의 내용이 이상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찔레꽃이 붉게 핀다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어디에도 붉게 피는 찔레꽃은 찾기가 힘듭니다. 찔레꽃은 이 노랫말과는 달리 붉은 꽃이 아니라 흰색으로 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노래의 가사는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붉은색이 약간 도는 경우가 드물게 있어도 사실 그걸 가지고 노래가사에 넣고 붉은색 운운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서 붉게 피는 찔레꽃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를 하나 소개해보겠습니다.
토착적 유머와 함께 농민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던 작품 김유정 작가의 '동백꽃'에 나오는 배경은 강원도 산골 마을이랍니다.
그런데 아시는지요? 정작 강원도에는 동백꽃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동백나무는 남쪽 해안가 등지를 중심으로 자라는 나무랍니다. 그런데도 소설 제목은 동백꽃이라 하였고 그 무대는 강원도 산골 마을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요?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노란색 동백꽃은 없습니다. 그리고 동백나무는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도 안 나죠. 그럼 무엇을 보고 동백나무라 했을까요?
바로 생강나무입니다.
강원도에서 동백꽃은 '생강나무'를 일컫는 속명인데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개동백나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노랗게 피어나는 생강나무는 향긋한 향을 풍기는 봄에 피는 우리네 대표적 야생화랍니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바로 생강나무였습니다.
<해당화(海棠花)>
약간 빗나갔는데요 다시 돌아가죠! 이렇게 각 지방마다 식물 명칭을 다르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그중 하나가 바로 붉게 핀다고 하는 정체모를(?) 찔레꽃이 아닐까 싶은데요.
가수 백난아씨는 제주도가 고향입니다. 찔레꽃 가사에 나오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은 영락없는 제주도를 상징하고 있는데요. 찔레꽃이 붉게 피는 남쪽나라라는 대목에서 해당화가 오버랩되기 시작합니다.
<해당화(海棠花)>
해당화는 바닷가의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흔히 자라는데요. 특히 남쪽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관목이랍니다.
찔레꽃 = 해당화라는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실제 찔레꽃과 해당화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흰 해당화입니다. 영락없는 찔레꽃 모습 아닙니까? 색깔만 다를 뿐 매우 닮아있죠!
<흰 해당화(海棠花)>
조팝나무꽃을 흔히 싸리꽃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닮은꼴이 있다면 누구든 대표적인 명사를 떠올려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상사화라고 하지만 실제 꽃무릇이나 백양꽃, 진노랑상사화 등 다양한 이름이 있고 또한 참나리. 말나리. 중나리 등 다양한 종류들을 통틀어 나리꽃이라 부르며 수염며느리밥풀꽃. 꽃며느리밥풀꽃. 새며느리밥풀꽃 등을 통틀어 그냥 며느리밥풀꽃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심지어 원추리를 '산나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가사나 책 등에 산나리라 적어 놓았다면 과연 누가 원추리라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나리꽃 종류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해당화(海棠花)>
찔레꽃의 가사를 쓴 김영일 선생은 섬마을의 해변가에 피어나는 해당화를 보곤 찔레꽃이라 여겨 노랫말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사를 쓸 당시에는 찔레꽃은 또 다른 해당화의 이름임을 모르고 적었을 수 있었을 겁니다. 김영일 선생이 식물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쉽게 부르는 대표적 명사를 생각했을 테니 말입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의 구절은 해당화가 붉게 피어나는 제주도의 어느 마을을 묘사한 내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실제 찔레꽃이 아니라 해당화가 찔레꽃으로 바뀌어 불린다면 붉게 피어나는 말과도 사실 일치되는 대목입니다.
<해당화(海棠花) 열매>
그런데 실제로도 남쪽의 섬사람들 사이에서는 해당화를 큰찔레꽃 또는 홍찔레꽃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답니다. 남쪽나라 섬이 고향인 분들은 나이 많으신 어른들께 한번 물어보십시오. 해당화를 보곤 찔레꽃이라 부르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해당화(海棠花) 열매>
'찔레꽃'에 망향의 한 담아낸 백난아
시대초월한 '首丘初心' 노래의 백미
'망향초 사랑' '낭랑 18세' 등 애수·모성적 감각 감칠맛 창법
10세 이미자가 반한 가수…고향 제주에 '찔레꽃 노래비 공원'
활동 초기 백난아 모습.
훈풍이 불어오는 오월, 산기슭이나 볕 잘 드는 냇가 주변의 골짜기에는 하얀색, 혹은 연붉은 빛깔의 꽃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피어납니다. 그 이름도 정겨운 찔레꽃입니다. 가지는 대개 끝 부분이 밑으로 처지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습니다. 이 찔레꽃이 여러 종류가 있다면 여러분은 깜짝 놀라시겠지요. 좀찔레, 털찔레, 제주찔레, 국경찔레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 하얀 꽃입니다. 하지만 유독 불그레한 꽃이 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국경찔레입니다. 흔히 찔레나무로도 불렀지요.
고향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온 사람들은 두고 온 고향을 내내 잊지 못합니다. 아련한 추억의 스크린에 고향의 모든 것은 온통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기어이 눈물방울을 적시게 하지요. 그러한 그리움의 테마들 가운데 우리는 단연코 찔레꽃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을 통과해온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고향은 항시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시련으로 가득했던 공간입니다. 그 어렴풋한 실루엣 속에서 찔레꽃은 언제나 향수의 단골 테마로 떠오릅니다.
바로 그 때문일까요. 1942년 가수 백난아(白蘭兒·1923∼1992)가 취입한 노래 '찔레꽃'(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태평레코드 5028)은 한국인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어떤 고난에 시달려 마음이 쓰리고 아플 때, 혹은 고향 생각에 시름겨울 때 우리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찔레꽃'의 한 소절은 마음의 소란을 차분히 위로하며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로 다가옵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에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겁던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곡조에 맞춰 흥얼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지닌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가 가슴 속으로 소르르 흘러들어오게 되지요.
가사를 어디 한번 훑어볼까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고 했으니 이 노래는 필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비롯하여 바람찬 북쪽으로 울면서 떠나갔던 북간도 유랑민의 처연한 삶을 다룬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타향에서 바라보는 달과 별은 항상 서러움을 재생시켜주는 장치입니다. 고향집을 떠날 때 친구들과 이별을 하던 장면이 추억의 장막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재생되고 있습니다.
'자줏빛 옷고름'은 또 얼마나 한국적인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적절한 소도구이겠습니까?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틈날 때마다 옛 친구들과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꺼내보며 눈물에 젖습니다.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왈칵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 떠돌이 유랑민의 부평초 같은 신세이겠지요.
가요곡 '찔레꽃'에는 식민지 시절, 온갖 어려움과 악조건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다부진 정착의 삶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우리 겨레의 고단하지만 낙천적인 생존의 과정이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중천에 높이 떠서 슬피 우는 새를 꾀꼬리라 했는데, 이 대목은 아무래도 종달새(노고지리)가 맞을 듯합니다. 종달새도 요즘은 예전처럼 보기 흔한 새가 아니지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오늘 이 '찔레꽃'을 3절까지 일부러 소리 내어 한번 불러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뒤 가슴 속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찬찬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눈 쌓인 금강산을 유람하던 어느 해 겨울, 만물상 가는 길목의 금강산호텔 2층, 손님도 없는 식당에서 혼자 마이크를 잡고 부르던 북한 처녀의 '찔레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북한 처녀가 1절을 부르고 제가 선뜻 자청해서 2절을 불렀으니 뜻밖의 남북 합작이 되었지요. 눈을 감으면 낭랑하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엮어가던 북녀(北女)의 노래가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합니다. 이 노래는 북에서도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처녀는 전해주었습니다.
'찔레꽃'의 원곡을 부른 가수 백난아는 1923년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방어를 낚는 어부였다고 합니다. 본명은 오금숙이지만, 가수 데뷔 이후 태평레코드사의 선배가수 백년설이 자신의 예명에서 성을 따 백난아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예명에도 이처럼 성씨가 적용되는가 봅니다.
백난아가 가수로 데뷔한 해는 1940년, 그러니까 17세 때의 일입니다. 일제말 함경도 회령에서 열렸던 태평레코드사 주최 전국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2위로 뽑혔지요. 당시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작사가 박영호, 천아토, 김교성, 작곡가 이재호, 가수 백년설 등이었습니다. 백난아의 첫 데뷔곡은 '오동동 극단'과 '갈매기 쌍쌍'입니다. 같은 음반에 실린 이 두 작품은 처녀림 작사, 무적인 작곡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아리랑 랑랑'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입니다.
원래 태평레코드사는 오케(OKHE)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지만 백년설, 백난아, 진방남, 박단마 등이 전속가수로 활동하면서 대중들의 높은 인기를 집중시켰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발표했던 백난아의 대표곡들은 '황하다방' '망향초 사랑' '무명초 항구' '북청 물장수' '간도선' '직녀성' 등입니다. 이 가운데 1941년 발표한 '망향초 사랑'(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의 창법은 장세정의 히트곡 '연락선은 떠난다'에 비견될 정도로 백난아 특유의 애수와 하소연이 느껴집니다. 8·15 광복 후 백난아는 서울, 부산 등지의 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했습니다.
후배가수 이미자는 그녀의 나이 10세였던 부산 피란 시절, 동아극장에서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의 꿈을 품었다는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백난아는 1960년대까지 수많은 악극단 공연에 참가했고, '내 고향 해남도' '님 무덤 앞에' '금박댕기' '호숫가의 엘레지' '봄바람 낭낭' '낭랑 18세' 등의 대표곡을 잇따라 발표했습니다. 분단 이후 백난아의 노래는 킹스타레코드와 유니버설레코드사에서 주로 취입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어머니의 품속처럼 푸근하고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모성적 감각의 창법. 바로 이것이 백난아 노래의 빛깔이라 할 수 있지요. 식민지 후반기에 데뷔하여 1992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수 백난아는 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2007년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는 백난아 노래를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 의해 '찔레꽃 노래비 공원'이 세워졌습니다.
◇이동순(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찔레꽃(1942년 노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찔레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첫 발표 시기는 1941년 5월이라는 설도 있다.
김영일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곡으로,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찔레꽃을 소재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어 '국민가요'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 중 3절에는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데다, 푸근하고 따뜻한 백난아의 창법과 잘 어우려져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전문 프로그램인《가요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발표된 곡이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계속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북조선에서 공연을 가졌던 김연자의 증언에 따르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함께 김정일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인 제주도에 찔레꽃 노래공원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찔레꽃' 가수 백난아의 유작들 왜 이제야 공개됐나
입력 : 2009.07.25 03:17 / 수정 : 2009.07.26 09:25
[박성서의 노래 속의 WHY]
13세에 데뷔한 천재 가수 해방·유신·신군부 거치며 금지곡 지정 등 수난 겪어 제 모습 복원은 시대적 과제
가수 백난아(1927~1992·본명 오금숙)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17년이 됐다. '찔레꽃', '낭랑18세'로 올드 팬들에게 익숙한 그의 이름을 딴 '제1회 백난아가요제'가 제주시와 백난아기념사업회(회장 오경욱) 주최로 이달 26일 제주 한림 협재해수욕장에서 열린다.
제주도 한림 출신의 백난아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학술심포지엄과 백난아 기록전시회도 함께 개최될 이번 행사에는 미공개 자료 60점도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이 자료들은 1940년대부터의 친필 악보와 발표 당시 음반 전단지, 포스터, 사진들이다. 왜 이 자료들은 백난아가 숨진 지 20년 가깝도록 묻혀 있었을까.
백난아가 활동을 시작한 건 1940년 11월이다. 당시 나이 13세로 '오동동극단'과 '갈매기쌍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주위에서 변성기 이전 목소리라는 우려를 했을 정도로 나이가 어렸다.
우리나라 최연소 가수로 당시 태평레코드 전속가수가 된 백난아의 노래 대부분은 광복 이전에 발표됐다. 이후 작사가 박영호 등이 월북했던 탓에 발표곡 중 상당수가 월북작가의 곡이라 해서 한동안 방송이 금지됐다.
작곡가 입장에서는 이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인 채 사장되어 묻혀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후 가사 일부와 제목 등을 다른 인물에게 개작시켜 작자표기를 달리함으로써 월북작가의 곡이라는 화살을 교묘히 피해갔다.
▲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 시절 백난아의 모습. 빛바랜 사진 속이지만 청초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사실상 이러한 노래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기까지 가사가 변형된 채, 또 작가가 바뀐 채 불려온 것이다. 광복 후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이 노래들은 1961년 5·16 이후 또 한 번의 철퇴를 맞는다. 가요를 '퇴폐의 온상' '사회악'으로까지 치부해 노래를 2절까지 밖에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 노래의 가사들이 일부 훼손된 채 불릴 수밖에 없었다.
2005년 KBS '가요무대' 900회 특집방송에서 가장 많이 불린 곡으로 선정될 만큼 국민적 애창곡인 백난아의 대표곡 '찔레꽃'의 경우 월북작가의 곡이 아님에도 한때 금지곡으로 묶여 방송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금지 사유는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동무'라는 단어 때문이다. 1절 끝 부분의 '못 잊을 동무야', 2절에서의 가사 '노래하던 세 동무'에서의 '동무'가 이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해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별수 없이 노래가사를 '못 잊을 사람아', '노래하던 동창생' 등으로 바꿔 불러야 했다.
▲ 이번에 공개된 작곡가 김교성의 ‘님 무덤 앞에서’ 친필 악보. 김교성은 백난아의 대표곡‘찔레꽃’에 곡을 붙였다. /박성서씨 제공
이런 수난의 역사도 이제 모두 과거가 됐다. 이제 월북작가의 곡들까지 모두 해금되었다. 아울러 원 노래들의 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 가요를 제대로 기록하고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아울러 발표 당시 그대로의 친필 악보나 음반 가사지 등의 발굴은 우리 가요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1992년 백난아 타계 이후 그의 셋째언니 오귀숙 여사(2008년 타계)가 보관해 온 것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필자에게 건네준 자료들과 그동안 개인적으로 틈틈이 발품 팔아 소장해온 자료들이다.
친근한 목소리와 탁월한 가창력으로 남긴 아름다운 노래, '찔레꽃', '낭랑18세', '아리랑낭랑', '황하다방', '망향초사랑', '직녀성' 등과 더불어 '1인다역(一人多役)'으로 가요계에 헌신했던 백난아는 광복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따 백난아양재학원을 운영했다.
직접 '부-케악극단'을 창단해 이후 15년간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을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수도예술학원을 설립해 후학 지도와 양성에 뜻을 펼치기도 했다. 어려운 시대에 펼쳐 보인 백난아의 시대를 뛰어넘는 활동과 정신이 백난아가요제를 통해 되살아나기를 기대해본다.
찔레꽃의 전설 1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는 찔레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이 예쁘기도 했지만 예의도 바르고 착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예뻤던지, 사람들은 예쁜 탓에 궁녀로 끌려갈 것이라고 소근 대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그녀는 궁궐로 간 것은 아니지만, 몽골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북방 몽골족에게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찔레를 받아들인 몽골족 주인은 마음씨가 워낙 좋아서 찔레에게 호된 일을 시키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편안히 잘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살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찔레의 몽골생활은 공주처럼 호화롭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찔레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 그리운 부모, 그리고 그리운 동생들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해도 고향이 좋고 지위가 낮아도 내 부모가 좋고 남루한 옷을 입어도 내 형제가 좋았습니다. "고향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무수히 피어났겠지. 부모님과 동생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지극히 찔레를 사랑해 준 부모님, 말썽을 부리고 심술을 피웠건만 그립고 그리운 동생들, 그리고 그리운 고향 향수는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10년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찔레를 가엾게 여긴 몽골 주인은 사람을 고려로 보내서 찔레의 가족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찔레의 고향 집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서 고려로 갔던 사람은 찔레의 가족을 찾지 못하고 그냥 몽골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찔레의 고향 향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주인님. 저를 한 번 고향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몽골 주인은 찔레의 간절한 소망을 쉽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찔레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혼자 고향의 가족을 찾아 고려로 떠났습니다.
고려로 돌아온 그녀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시 산속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리운 동생을 찾지 못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찔레는 오랑캐의 나라로 다시 돌아가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도 고향에서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찔레는 몇날 며칠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고향집 근처의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녀가 동생을 찾아 헤매던 골짜기 마다, 산마다, 개울마다, 그녀의 마음은 흰 꽃이고, 그가 흘린 눈물은 빨간 꽃이 되고, 동생을 부르던 그 아름다운 소리는 향기가 되어서 온 산천에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그 꽃이 찔레꽃이라고 합니다.
찔레꽃의 전설 2
어느 산골에 찔레와 달래라는 두 자매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고려가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고려의 처녀들을 원나라에 조공으로 받쳤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오랑캐 나라에 부모형제를 남겨두고 어느 처녀가 끌려가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정에서는 '결혼도감' 이라는 관청을 만들어서 강제로 고려의 처녀들을 징집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찔레와 달래에게도 불운이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약초를 캐러 간 두 자매는 관원에게 발견되어 공녀로 끌려갈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때 찔레가 아픈 아버지가 계시니까 자기 혼자만 공녀로 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관원들도 감동을 하여 달래는 풀어주고 찔레만 데리고 갔답니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는 다행히 원나라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서 호의호식하며 패물이 넘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찔레는 오직 아버지와 동생 생각뿐이었습니다. 날마다 동생과 함께 올라갔던 뒷동산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과 동생 달래 생각에 찔레는 몸도 마음도 점점 쇠약해졌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인은 찔레가 죽을 것 같아서 고심 끝에 찔레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답니다.
몸을 추스려 1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찔레는 자기가 살고 있든 집이 무너지고 없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찔레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와 달래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찔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옆집 할머니가 나타나서 찔레가 원나라로 붙들여 간 이후에 아버지가 감나무에 목을 매어 돌아 가셨고 달래는 아버지가 죽은 후 정신없이 뛰쳐나간 후 소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찔레는 산과 들을 달래를 찾아서 헤매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눈이 내리는 날 찔레는 지쳐 쓰러져 서러움과 원한을 가슴에 안고 죽고 말았습니다.
찔레가 죽은 몸 위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소복히 쌓였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찔레가 죽은 자리에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찔레의 고운 마음은 눈처럼 새하얀 꽃이 되었고 찔레의 원한 맺힌 서러운 마음은 빨간 열매가 되었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꽃을 찔레라 불렀습니다.
[출처] 찔레꽃의 전설|작성자 소낭
첫댓글 다 읽느라고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서 요로코롬 많은 자료를 뽑았데요.
이제서 나두 제대로 알았시유!
생각나시냐요? 찔레꽃 노래를 멋드러지게 불러서 우리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던 바탐 섬 가이드. ㅎㅎ
우매 그 기억이 아물 아물.. 가물 가물... 아! 옛날이여!
아니 찔레꽃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나 ?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찔레꽃 희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이라 할수도 없고 #%$@"
그러니 자주 들어오고 만나 봐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