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심방 준비(설교 정리)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삶을 살자 사 58:6-11 김삼환
첫째,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8절) 둘째,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8절) 셋째,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8절) 넷째,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9절)
생활의 열매 왕상 17:1-9 김창인
1. 믿음의 생활 (1-)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반드시 성취 하십니다(사57:19). 그러므로 그 말씀을 믿는 그대로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는 대 로 되고 믿는 만큼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회당장 야이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믿는 그대로 열두살난 딸이 살아났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엘리야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데 엘리야는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증거 했습니다. 엘리야가 믿는 그대로 되었습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2. 준법의 생활 (2-7)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법칙입니다. 즉 신앙의 법칙은 성경이요, 모든 생활 의 법칙이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권면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됩니다. 단지 권고하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은 지키지 아니하면 죄가 됩니다. 동시에 법은 지킬수록 질서가 성립되고 평화 가 정착됩니다. 그러므로 준법생활에는 “생활의 안정”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의 법을 즉시 준행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킨 결과입니다.
3. 사명의 생활 (8-9) 사르밧은 시돈에 속한 작은 마을입니다. 시돈은 이세벨의 친정나라요 바알우상숭배의 본 거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바알우상 숭배가 창궐한 이방의 한 과부에게 명하여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했든지 하나님께서 그녀를 선택하사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셨습니다. 즉 공궤의 사명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 사명은 감당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시돈왕 엣 바알은 이세벨의 아버지였고 이세벨은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르밧 과부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고 큰 흉년의 위기를 무난히 넘겼습니다. 사명의 생활에는 승리라는 열매가 맺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제사장의 축복 민 6:22-27 류철랑 장로교회 헌법에서는 목사의 직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며, 성례를 거행하고, 교인을 축복하며,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의 부과된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목사는 성도 들을 축복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 보호(Protect)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애 굽에서 장자의 죽음이 있을 때에도 지켜 주셨고, 홍해를 건널 때도 지켜 주셨습니다. 내 가 내 힘으로 건강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고, 믿음을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 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건강도 가정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합니다. 다윗 은 힘있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 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7:8-9)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지켜 주심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Gracious)의 복입니다. 은혜를 햇빛으로 비유하는 것보다 더 좋은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햇빛은 모든 식물을 자라게 합니다. 각종 동물들의 건강을 지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밝은 얼굴로 돌아보시 고 그 빛난 광채를 비춰주실 때 생명과 기쁨이 스며듭니다. 은혜는 믿는 자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속적인 영향력입니다. 다윗은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 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27:13)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은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처지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은혜요, 자기에게 은혜 베푸실 것 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셋째, 평강(Peace)의 복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의 총체로 온전함이요 안녕입니 다. 평강 속에는 완전한 행복의 조건인 평안과 형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강의 복은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얻는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이 비단 옷을 입은들 무슨 낙이 있겠으며 좋은 환경이 무슨 기 쁨을 주겠습니까? 마음속에 평안이 있으면 초막에 살아도 세상이 부럽지 않아요. 평강 은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평강의 복을 받아 마음의 평정 을 항상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부천동광교회 목사
현재적 하늘나라 신 26:7-9, 마 5:1-8 이성희
팔복 가운데 첫째와 마지막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팔복 가운데 다른 복은 시제가 미래이지만 천국의 복은 현재형입니다. 하늘 나라는 미래의 얘기가 아니 라 이미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미래 에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1. 하늘나라는 현재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뜻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 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보고 있고 마음에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공간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우리 마음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음의 평안입니 다. 하늘나라는 마음의 질서입니다. 하늘나라가 마음에 없는 사람은 불안합니다. 소망 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하늘나라도 마음에 있습니다.
2. 하늘나라는 현재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뜻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 체 안에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그 가운데 와 있습니다. 로마서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평강과 희락 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 이다’라고 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고 하면 내 마음이 지옥입니다. 타인이 천국이면 내 마음이 천국이며 우리의 모임이 천국입니다.
3.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의 소유입니다. 성경은 불의한 자, 음란한 자, 도적이나 탐하는 자, 술취하는 자, 토색하는 자 등은 하 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늘나라가 있을 여 유가 없습니다. 미래에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공동체에 하늘나라가 임재한 것입 니다. 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 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살면 세상도 얻 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도 소유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현재적 복을 누립니다. 연동교회목사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2 김갑식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 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 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딤전6:11-12)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이름 중에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런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에게 소속된 사람 또는 하나 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 라고 불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디모데에게 교훈하였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1. 유혹을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혹은 피하는 것이 가장 지혜있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의 유혹과 어리석 고 해로운 정욕을 추구하는 삶에서 피할 것을 교훈합니다. 아담 화와를 유혹하여 실낙 원 시킨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유혹의 손 길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유혹을 피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 니다.
2. 선한 싸움을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는 완전 군장한 병사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는 전신갑주를 입고 완전 군장을 꾸려 마귀를 대적해 줄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쩌 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하루도 안일하게 쉴수 없는 전쟁 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데 이 싸움은 방법에서나 과정에서 불의가 없는 선한 싸움이어야만 승리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3. 영생을 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세에 좋은 곳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 때문 에 현실의 어려움과 힘든 것도 다 참고 견디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현실 에 안주하려는 생각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믿고 바라는 내세의 소망은 영생 이기에 이상적인 바램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영생을 믿음으로 취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내속에 있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위기에몰렸을 때 민 16:41-50 김창인
1.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1-42)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고라를 중심으로 작당한 250명이 모세를 대 적했습니다. 모세를 대적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를 하 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사 그들을 정리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고라당파의 죽음을 이유로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들어 돌로 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랫동안의 종살이로 불평불만에 이골이 난 백성들의 폭동은 겉잡 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도 속수무책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 라보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 해결해 주셨습니 다. 위기에 몰렸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함께 엎드려야만 합니다 (43-46) 여호사밧왕 때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에돔 자손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 유 다로서는 불가항력적인지라 여호사밧 왕을 위시하여 온 국민이 함께 하나님 앞에 간구하 였습니다. 그 날 밤에 침략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서로 죽임으로 자멸하고 말았습니 다. 위기에 몰렸을 때 유다 백성은 하나같이 모두 다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움을 간구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위기에 몰렸을 때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 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아 론으로 속죄제를 드리게 하므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성도는 위기에 몰렸을 때 함께 하나 님 앞에 엎드려 합니다.
3. 문제 속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47-50) 광야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해 행진 할 때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 다. 요단이 넘치는 시기였기에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큰 문제를 피하라 하지 않 으셨습니다.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신 다음에 건느게 하셨던 홍해의 경우와는 달랐습니 다. 그 큰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요단을 건널수 있었습니 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피하지 말고 부딪치라는 뜻입니다. 그때 문제가 해결되는 법입 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가운데 염병이 시작되어 겉잡을 수 없이 사람이 죽어갑니다. 아론 은 향로를 들고 백성들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속죄제를 드렸더니 염병 이 그쳤습니다. 그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눅 5:1-11 장성규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특히 3가지가 중요합니다. 1.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몬에게 주님께서 나타나 서 그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자체가 큰 축복 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를 드나들어도 신앙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 이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그 분이 주님이신 것 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그러한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도 그러한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목수 가정에서 자랐고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만 살 던 어업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전문어부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밤 세워 조업을 하였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가 너무너무 많이 잡혀서 친구의 배를 불러서 두 배에 가득 싣고 나왔습니다. 지식과 경험으로는 실패해도 말씀에 순종하면 성 공합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성 공합니다. 3. 사람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 잡은 시몬은 깜짝 놀라서 “주여 나 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굴복을 하자 주님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 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취하라는 말씀은 “생포하라, 포로로 만들 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사람을 잡아내서 예수님의 것이 되게 하라 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곧 자기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서 거듭난 사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한 것입 니다. 무릇 신앙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을 취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 도보다 더 좋은 신앙성공의 길은 전에도 지금도 내일에도 없습니다. 면목교회목사 광성교회목사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3-35 홍 기 창조주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에게 처음으로 물으신 질문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을 심판대 앞에 세우시고 물으 시는 질문 역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한 것들 을 기준으로 상과 벌을 내리신다. 그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 문은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다.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계 시는 이유는 우리를 참된 신앙의 소유자로 세우시려는데 있다. 우리 신앙인들이 매 순간 마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준비하 며 사느냐에 따라 ‘참된 신앙인’인가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질문을 생활 속에서 들을 수 있는가? 모래 시계를 보듯이 자신 의 날을 계수하며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날을 계수하는 사람이다.(시90:12) 우리는 우리 인 생의 모래 시계를 볼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없어진 시간과 아직 남 은 시간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기회는 아직 남은 시간들이다.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채우는 사람이 성공한 인생의 소유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다. 우리가 남은 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채우기 위해서는 영적인 귀를 열고 “지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 문을 듣고, 이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영적인 귀를 열고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 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자. 성공한 인생, 복된 인생은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마다 “네가 무 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며 사는 사 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네가 무엇 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듣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도 이 질문을 듣는 귀를 열고, 나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살되, 하루 하루를 뜻있고 가치있게 살자. 거기에 하늘의 상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 가득한 인생의 소유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제주남원
따라가라 그리하면 응답을 받으리라 마 15:21-28 김삼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로 와서 애원을 합 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 이 어머니 는 자신의 딸을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딸에게 들어간 흉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없 었기에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을 고쳐주소서.” 예수님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냉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갈기갈기 찢어지고 많은 사람에게 개 취급을 받았던 이 여인이 주님에게 이런 엄청난 모욕과 저주를 받을 때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고침을 받는 길을 알았습니다. 은혜를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애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 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여인 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너의 믿음이 그렇게 클 수가 없구나. 너는 네 딸과 함 께 행복하게 살 것이고 오늘 이 시간부터 네 딸에게 역사 하는 더러운 귀신은 나갈 것이 니라.” 구원이 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든 저주가 물러가고 천 국 같은 새로운 삶이 주님으로부터 이 가정에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 러분! 주님을 따라가되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얻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런 사람을 도우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치료 가 오고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지도 자들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주님 을 따라갈 때 주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고치시는 분은 주님이지만 따라가는 것은 내 몫입니다. 응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용기는 내 몫입니다. 결단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주님이 길을 열어 주시 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지만 물러서는 사람과 머무는 사람은 멸 망을 당합니다. 기독교는 앞으로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움직이는 종교이며 살아 역사하 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고, 삶이 한없이 무겁고 곤궁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면 주님은 반드시 그 믿음대로 되게 하시고 길을 열 어 주실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내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요 17:1-5 김재남
토즈라고 하는 신학자는 자아발견의 제일조건으로 “내 소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지금 나의 소원이 고상한 것인가, 아니면 저급한 것인 가? 남이 알아도 자랑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남이 알면 부끄러운 것인지 그것으로 자신 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소원, 나의 기도 제목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거룩한 기도가 있는 자가 되라 고 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 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절)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학적 으로는 이를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대제사장 기도라고 부릅니다. 왜 요한사도는 겟세마 네 동산에서의 기도보다는 이 기도에 더 비중을 두고서 있을까요? 그것은 이 기도가 지니는 독특한 힘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눈앞에 닥친 엄청 난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거룩한 기도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는 마가나 마태나 누가가 복음을 기록할 시대와는 사뭇 다른 핍박의 시 대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생명을 잃을 처지에 누구나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보다는 마가 의 다락방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훨씬 당대에 크게 공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 땅에서는 밀과 포도 농사가 주종을 이룹니다. 평지에서는 밀을, 산지가 많은 지방 에서는 포도농사를 합니다. 산지는 특히 돌이 많습니다만, 오히려 그 돌 때문에 포도 농 사가 더 잘 됩니다.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 건기에도 밤이면 공기 속에 있는 수증 기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이슬을 만들고, 이 이슬들이 모여서 포도 성장에 필요한 수분 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고난 앞에서도 거룩한 기도를 해야 하는가요? 그것은 그 메마른 현실 속에서도 은혜의 이슬을 만들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 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 의 덫에 걸려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으로 거듭난 주 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서머나교회의 실상
계 2:8-11 김창인
1. 부요의 실상 (8-9) 세상에는 가난한 부자가 있고 부요한 극빈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리석은 부자가 가난한 부자입니다(눅 12:21). 자기를 위해서는 주체 못할 정도로 부자였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 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롬2:28-29).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였습니 다. 서머나 교인들은 가난했기에 교회의 살림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실상은 믿음이 부요한 자였습니다.
2. 충성의 실상 (10-)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 하였다고 했습니다(히 3:5-6). 즉 모세보다 나은 예수님을 보여 주기 위하여 충성을 예 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충성은 주인의 충성이요 모세의 충성은 사환의 충성이라는 겁 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현재도 환란 중에 충성하고 있지만 장차 더 가혹한 환란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환란에는 10일이라는 기한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목을 내놓고 충성하 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자가 많은 충성된 교회였습니다.
3. 영화의 실상 (11-)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합니다(요 5:29). 생명의 부활이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사람들의 부활인데 예수님의 영광 에 참여하여 영생하게 됩니다. 여기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백보좌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하고 그 결과 영벌을 받게 됩 니다. 이것을 심판의 부활 혹은 둘째 사망이라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는 둘 째 사망이 없을 뿐 아니라 주와 함께 영생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환란 중에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영화로운 몸으로 영생하 게 된다는 뜻입니다. 광성교회목사
신앙의 뿌리를 내리라 마 13:1-9 장성규
나무든 민족이든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는 깊이 내려질수록 흔들리지 않고 높이 실하 게 자랍니다. 뿌리는 나무의 생명과 열매와 직결됩니다.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 다.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흔들리지 않고 늘 푸르고 싱싱하여 열매를 백배, 육십 배, 삼십배를 맺고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시들하다가 좀 지나면 죽어 버리고 맙 니다. 그러한 사실을 이제 읽은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1.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입니다. 밭은 이 말씀 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전도는 이 씨를 마음 밭에 뿌리는 것입니 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복음의 씨를 잘 키워나가는 것이 뿌리를 깊이 내리 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뿌려진 씨나 돌짝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넝쿨에 떨어진 씨는 중간 에 죽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려 열매를 백배, 육십배, 삼십배 맺습니 다. 2. 될수록 교회를 옮기지 말아야합니다. 깔뱅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야 하는 것처 럼 교인들은 젖인 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내 친어머니 젖이 가장 좋은것 같이 내교회에서 차분한 신 앙생활을 해야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에 우선해서 신앙에 다가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주님 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말하 면 신앙 제일주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성수주일(안식일성수), 십일조생활, 헌 금생활(마 6:21)등을 통해서 합니다. 이런 정성을 많이 쏟으면 많이 쏟을수록 뿌리가 깊 어집니다. 4.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많이 다녀도 믿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 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보혜사(돕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하십시다. 교회를 옮기지 맙시다. 먼 저 신앙에 정성을 쏟고 성령 충만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뿌리를 깊이 내리고 백 배의 열매를 맺으십시다. 면목교회목사
밭에서 이삭을 룻 2:1-7 김삼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베들레헴에 살다가 흉년을 만나자 모압 지방으로 건너갔습니 다. 그러나 모압 땅에 가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갓 결혼한 두 아들까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때 맏며느리인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였던 룻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 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이삭 을 줍던 밭의 주인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삭 줍던 여인이 주인의 아내가 되 고, 슬픈 여인이 한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 었습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이나 절망과 재난이 우리 성도들을 가로막을지라 도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 로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고 만군의 하나님 창조자가 만드신 온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룻은 과거 에 얽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슬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였습니 다. 교회는 밭입니다. 이곳은 이삭을 줍는 곳입니다. 기도의 이삭을 줍고, 은혜의 이삭 을 줍고, 말씀의 이삭을 주우러 나오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은혜를 받습니다. 이삭 을 주우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자에게는 이삭을 통하 여 문제가 해결됩니다. 룻이 이삭을 통하여 보아스를 만나게 되듯이 우리는 이삭을 통하 여 부유한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못난 채로 나오고, 죄 지은 채로 나오는 것입니다. 답을 교 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모든 사정을 아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 의 손길을 펴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벽 제단을 쌓으면 쌓을수록, 무릎을 꿇으면 꿇을수록 주님과 우리 사이는 가까워집니다. 열 매를 거두는 날이 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언제나 좋은 길이 있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를 잊어버리십시오. 미래를 이야기하십시오. 성공하는 인 생, 발전하는 국가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브라함과 다윗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 성교회목사
군대로 계수된 자들입니다 민 1:1-4 김재남
현대인에게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잃고 사는 데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 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깨우쳐 주십니 다.(3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실패한 이유가 있다면,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라 는 점을 잊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게 불러내실 때에 이미 그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 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출12:17) 오늘 본문 말씀 중에 “군대”라는 단어는 원래 “싸움을 위하여 조직화된 군인들”이 란 뜻을 지닙니다. 이 조직화된 군인의 모습을 민수기에는 각 지파대로 계수함과 함께 깃발아래 모이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장) 그러므로 대단한 훈련과 군인정 신이 요구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결단코 구경꾼이나 여행객이나 순례자나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다우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전의 것을 벗어버려 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벗어야 할 것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가졌던 열등의 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출애굽할 때에 은금보화를 가슴에 달고 나오게 하셨 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군중들 앞에서 보인 것이 무엇 입니까? 바로 열등의식을 드러낸 일입니다. 정탐꾼 10명은 그저 열등감에 사로 잡혀서, 그 땅의 사람들은 아낙자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나 발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양각나팔이 되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14:9) 하나님은 갈렙의 이러한 담대함과 그 열심을 보고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민14:24) 여기서 ‘마음’ 은 히브리어 원어에 ‘영’이란 단어를 씁니다. 즉 영적으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을 지닌 자처럼 당당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이기에 영적 도전과 싸움이 따릅니다만, 이 영적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에게 담대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 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 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마 4:18-25 김창인
1. 만남의 지경 (18-19) 평생 바다에 나가 배만타고 고기만 잡아야 했던 어부들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셨고 친히 불러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된 만남이 없 는 경우를 봅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만남에서 시작이 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만 남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성부 성자 성령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만남으로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 질 수 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삭개오가 만났을 때 그는 변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즐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사람을 살 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만남의 지경이 넓어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2. 생각의 지경 (20-22)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인 다운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생각의 지경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이 그물 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거기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배 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이었지만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맛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생명을 소유하게 된 사람은 이처럼 생각이 넓어지게 됩니다. 무엇 이 생에 있어서 더 우선이 되어야 하고 값진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의 지경이 넓혀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삶의 지경 (23-25) 신앙인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와 믿고 난 뒤의 삶은 분명히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천국복음을 듣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고침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 의 삶이 변화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치유된 삶이 그 들 앞에 놓여지게 된 것입니 다. 이일로 인하여 제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났 다고 하면서도 그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 삶의 지경은 전혀 넓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처럼 삶의 지경이 넓혀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광성교회목사
기도로 이긴 싸움 에 4:13~17 장성규
형태는 달리하지만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대표적 싸움은 정보 전쟁, 경제전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싸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 전 쟁, 영적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전쟁의 대상을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2절에서 “우 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혈과육이란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이 적입니까? 세가지입니다. 정사와 권세입니다. 이것을 악한 정부, 악한 권력을 뜻합니 다.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입니다. 그들은 곳곳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불의한 기업가들, 나쁜 국회의원이나 교사들, 조직 폭력배, 부패한 관리, 악덕상인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불의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입니다. 사단, 마귀, 귀신들이 그들입니다. 그것들은 화해하고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 싸 워서 이겨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의 적들과 싸울 때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본문 말씀에서 그 답을 주십니다. 본문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만의 음모로 파멸되기 직전 모르드개와 에스더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싸움에서 취한 에스더의 행동입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에스더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1. 모르드개와 동족들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모르드개로부터 하만의 음모를 왕 에게 보고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은 에스더는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 니다. 에스더는 비록 왕후이지만 왕이 부르지 않을 때는 왕에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열게 하실줄 믿었습니다. 2.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3. 기도를 끝낸 후에 행동했습니다.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 11:24)는 믿음 대로 믿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매달릴 뻔한 나무에 하만을 달게 했고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도로 이긴 싸움입니다. 우리도 모든 싸움을 기도 로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면목교회목사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에4:7-17 김재남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책 옆을 보면, 금분으로 칠해져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어떤 모양 을 내기보다도 실용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속지 옆면들을 금분 으로 칠해두지 아니하면 얇고 얇은 종이가 끝이 말려 들어가 사용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금분이 밖에서 지켜 주듯,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켜 줄 수가 있습니까? 이솝의 우화가운데 농부의 딸에게 구혼한 사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찾아 와서 농부에게 딸을 달라고 합니다. 농부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전전긍긍합니 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딸을 자네에게 주고 싶어도 자네의 이빨과 발톱을 보면 우리 딸이 자네에게 가려 고 하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 그것을 모조리 뽑고 오면 딸을 자네에게 줌세!” 얼마 후 에 사자가 이빨과 발톱을 죄다 뽑고 농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곤봉으로 그 사자를 정신 없이 때려잡았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들도 많습니다. 일제의 급격 한 우경화로의 선회가 그것입니다. 역사를 왜곡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지나온 날의 잔학 상을 은폐하고, 심지어는 미화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 까? 일제의 선하지 못한 이런 모습들 앞에서 어리석을 정도로 미력할 뿐입니다. 100여 년 전, 구한말 우리 조상들이 좀 하나가 되고.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되라고 명하십 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삽 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대신 바사의 아하수에르왕이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2인자인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대민족을 몰살시키려 합니다. 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에 미색을 겸비하여 왕후의 자리에 있던 에스더의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 하심 속에서 하만이 처형되고, 죽을 뻔한 유대민족은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맛소라 사본 중에는 에스더서가 가장 많은 사본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춘향전만큼이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에스더서인데, 거기에는 동족을 위기 가운 데 구출한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신앙적 결단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시 81:8-16 김창인
1. 말씀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8-9)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 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행17:11-12). 한마디로 성경공부의 결과가 믿음에 큰 도움이 되는가 하면 절 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열심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공부 중에 는 하나님 공부가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사람을 알고 자연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공부를 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2. 입을 넓게 열기를 원하십니다 (10-12)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넓게 열어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 아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4:48).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시 43:21)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것이 구속함을 얻은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르 기 위해서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크 게 외쳐 간구하는 자에게 그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은 입을 열어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3. 행동 신앙하기를 원하십니다 (13-16) 한번은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 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 7:21). 입 술의 교인은 쭉정이 교인으로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즉 생활 신앙하는 자가 구원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행동화 하기를 원하십니 다. 본문에 보면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 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감독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 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약 1:22). 이처럼 하나님은 믿는 대로 행동하기를 원하 십니다. 행동하는 자에게는 만족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광성교회목사
건강한 믿음 빌 3:1-9 류철랑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믿음을 유 지할 수 있을까요? 먼저 삼가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2절) 개는 건강한 믿음에 전염 병을 옮겨주는 거짓 교사를 말합니다. 믿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말다툼도 삼가 해야 합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 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합니다. 또 영적지도자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 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주의 종들에 대 한 존경심과 순종하는 마음을 통해서 건강한 믿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삼가 조심하여 영 적 건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둘째, 배설물을 배설해야 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알렉시스 케럴은 세포에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배설물을 계속 제 거해 주었더니 조직 세포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방치 해두니까 부패해서 죽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율법대로 낳은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 이스라엘 열 두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라는 것,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8,9절). 우리 들에게 있는 잘못된 습성, 삐뚤어진 성격을 버립시다. 셋째, 성령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먼지투성이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나드향유 한 옥합을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요12:1-3).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여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 니다. 봉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 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0-11) 봉사 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는 것은 곧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봉사는 결코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두 문, 두 길, 두 종말 마 7:13-14 장성규
주님은 본문에서 “두 문, 두 길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넓은 문, 넓은 길로 가지말 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결과 때문입니다. 1. 먼저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은 활짝 열린 문이요 누구나 다 들어가 고, 무엇이든지 들고 들어 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일 듯 말 듯한 조 그마한 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바늘 문 같이 작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빈손 으로만 들어가지 안으면 안되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쉬운 넓은 문을 택하지만 주님 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넓은 문이 쉽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도 그 문은 생명의 문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께서 들어 가라시는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문이 좁은 문입니 다. 이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 다. 회개하는 삶이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제일 먼저 요구받는 것이 회개 입니다. 회개는 참된 신앙의 관문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회개하는 일이란 그리쉽지 않 습니다. 육신적인 자기를 죽이는 일이 좁은 문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작업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를 죽여야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사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2. 이제부터 넓은 길, 좁은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넓은 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길은 책임적인 신앙생활을 가르킵니다. 제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지금은 좋지만 멸망으 로 가는 길이고 좁은 길은 지금은 어려워도 생명과 영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 님은 좁은 길로 가라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록 좁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영 생의 길이면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신 앙의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까? 우선 목표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목표가 있 는 길과 없는 길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목표를 향해서 갈 때만이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해야합니다. 술과 담배 노름과 같은 것을 끊으라는 것 은 극기와 절제 생활을 하라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잘 믿으려면 이런 좁은 길을 걸어가 야 합니다. 면목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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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도 아버지 집, 늙어서도 아버지 집 눅 2:41-51 김삼환
우리는 너무 험한 세상에서 어렵고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는 길을 잃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평생동안 길을 잃지 않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린 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축복을 다시 받게 하고 회복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 님의 집, 곧 교회가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 이미 성전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 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사흘동안 집으로 오지 않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다가 그를 만난 곳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 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인 줄 믿습 니다. 현대인들이 모든 분야에서 방황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4천년 동안 그렇게 무지하고 우상 숭배하던 우리 나라는 예수를 믿어 문화가 발달하고 선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 의를 이루게 되고 그밖의 여러 가지로 지금 우리 나라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어디 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주의 교회가 이 땅 방방곡곡에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 민족 위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은혜 받는 집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집이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집입니다.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이 교 회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행복한 가정과 좋은 국가를 이루는 모든 은혜가 교회를 통하 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와 우리 사회는 심히 병들어 있습니 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까지 모든 계층이 다 썩어서 어떤 방향도 없고 목표도 사라졌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기도의 불을 붙이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아버지 집에만 나오면 길이 열립니다. 민족이 삽니다. 가정이 살고 기업이 일어납니 다. 어려서도, 늙어서도 아버지 집에 나아가는 믿음으로 설 때 우리의 가는 길이 시온 의 대로처럼 열려질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복중의 복 계 2:1-7 김창인
1. 인정의 복 (1-3)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를 잘 보살피시는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편 지하면서 복 중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알고(2절) 아노라(3절)”고 하셨습니다. 말을 바꾸면 “내가 너 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인정하셨 고 또 악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고 열심한 것을 인정하셨습 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인정받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2. 깨달음의 복 (4-5) 우리에게 충고도 하고 권면도 하여 깨우쳐 주는 것은 큰 복입니다. 자녀이기에 충고와 권면과 책망을 합니다. 그 목적은 깨달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 구가 권고나 책망을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충고와 동시에 책망을 합니다. 이로 인하여 에베소 교회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첫사랑을 잃었으니 속 히 회개하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이 복 중의 복입니다.
3. 제자의 복 (6-) 사람은 누구를 닮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석가를 닮는 자는 석가의 제자가 되고 공자를 닮는 자는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 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 가는 자입니다.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인들은 니골라당의 행위 즉 패거리 짓는 일을 미워했는데 예수님 도 그것을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 하는 것이 예수 닮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됨이 복 중의 복입니다.
4. 승리의 복 (7-) 군사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목적입니다. 패하는 것은 수치와 치욕입니다. 본문에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씀은 군사적인 용어로서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합니 다. 성도는 예수님의 군사로서 마귀의 유혹과 핍박에 맞서 계속적으로 승리해야만 합니 다. 승리가 복 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겁니 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말 씀이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광성교회목사
진정한 예배자들 시 99:6-9 류철랑
진정한 예배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진정한 예배자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의 내용만 듣지 말고, 말씀이 일으키는 에너지의 파동을 잡는 영적인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예배는 말씀을 듣는데서 머물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예배자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진정한 예 배가 완성됩니다. 둘째, 간구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들은 믿음으로 간구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예배에는 말씀 선포가 있고 기 도가 있습니다. 말씀 선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시간 입니다. 예배자가 진정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 위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 으십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은 민족의 문제를 놓고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그 들의 기도가 백성들의 재앙을 막았고,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면할 수 있었고, 모세 가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 습니다(출17장). 모세, 아론, 사무엘은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진정 한 예배자의 모델입니다. 셋째,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6,9절) 우리가 하 나님을 높여 찬양하고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이 귀하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감 사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말씀을 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힘을 다해 찬 양합시다. 시편2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이 있는 곳에 계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했습니다. 그의 찬송은 옥터를 뒤흔들고 쇠사슬이 풀어지게 했습니다. 찬송이 있는 곳에 하나님 이 함께 계심을 보여준 것입니다(행16장). 내가 어둠 속에 있고 핍박과 시련 중에 있을찌라도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느끼며 찬양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찬송합시다. “너 선한 마음 가진 자 다 주를 찬양하라!” 예배 때마다 말씀을 들으며 새 힘을 얻읍시다. 말씀을 실천하여 축복을 받읍시다. 구하 는 것을 받으며 삽시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신령한 예배자들이 됩시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장성규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가 양문 옆에 있는 베데 스다 라는 간헐천 행각에 누워있는 한 환자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38년이나 된 환 자로서 그 간헐천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가 거 기까지 갔다 놓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 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환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습 니다. “낫고는 싶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낫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입니 다. 그렇게 대답하는 환자에게 주님은 세 마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환자는 그 명령 을 좇음으로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 세 가지 명령이 무엇입니까? 1.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구를 붙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서 붙들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야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라, 네 믿음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도 항상 의존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만 되는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병이 낫지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진정으로 고치 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일어나야 합니다. 2. 네 자리를 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자리는 이 환자가 이제까지 깔고 있던 자리입 니다. 이 자리는 자기가 병자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자리요, 다른 사람의 도움 을 기다리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만 누워있으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돕던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하게 된 자로서 주체성 있게 살아라. 책임적으 로 살아라’ 라는 말씀입니다. 3.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움직이라, 활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병이 나 았으니 이제는 건강한 사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하라는 말씀입 니다. 움직이는 사람, 일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 해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건강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서, 전도하기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38년된 환자는 예수님의 이 세 마디 말씀에 순종하여서 낫고 돌아갔 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면목교회목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6-8 지은재
한국교회는 90년대 종말론과 관련하여 심한 몸살을 앓은 일이 있습니다. 돌연한 종말 을 목표에다 놓고 신앙을 부추기면 세상을 등지기 마련이고 현실도피적인 형태로 나가 기 일수입니다. 성경적 종말론은 이 세상을 끝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허락될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는 것이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 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을 회집하는 바로 그 일에 현실적인 관심사에 되어야만 합 니다. 이것이 내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에 부응하는 신앙생활입니 다. 종말 교회가 증인이 되는 구체적인 내용을 ‘마28:19-20’에서 세가지로 밝히고 있는 데 ‘제자를 삼으라/세례를 주라/가르치라’라고 하는 세가지 대 위임을 받고 있습니 다.
* 제자 삼는 일이 사라진 교회 ‘제자를 삼으라’ 라는 말은 증인이 되는 구체적인 일입니다. 옛날에는 사제지간이 된 다하면 부자지간의 관계와 버금가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 면서 평생을 같이 하면서 사상과 삶을 학습해야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도와 제자를 삼는 일은 상당한 의미상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선포행위가 전도라면 제자 삼는 일은 내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 임까지가 포함된 강력한 일, 집요하고 더 끈질긴 행위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바라는 신앙형태가 뭡니까? 교회 생활에 참여치 않고 신앙생활 하자는게 아 닙니까? 이 교회나올테니 부담갖게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과거 무슨일을 했는니 심방 할테니 이름, 주소 적고 여전도사 보내어 심방하게 하고 그런일은 딱 질색입니다. 소 위 ‘묻지마 교인’들의 경향성에 목회자도 부화내동한다고 하면 심한 얘기로 ‘공생하 는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화 작업-스승의 삶이 내 속에 어떻게 용해되고 스며들어 다시 화육(말씀이 육신 되 듯)의 과정으로 리모델링 되어야만 하는데 이런 일이 차츰 사라지고 기독교문화인이나 기독교 관광인들로 전락하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목회자의 뇌리 속에 스치고 있습 니다. 성도들이여!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되고 나와 관계한 모든 이들로 하여금 제자화가 이루 어지도록 종말교회로서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실 분들은 여기 없습니까? 제자를 삼는 일- 바로 예수 증인이 되는 일은 우리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 나라 앞에 발가벗고 서는 일입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알몸으로서는 작업이 일어나야 합니 다.
* 신자와 불신자의 확실한 차별을 선언하자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신자도 세상속에 살아가는데 불신자와 유달리 행동할게 뭐냐? 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화 작업을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하나 님 나라)가 전부인 줄 알도록 인식해야 하고 그들이 신자들을 대하면 두려움과 경외감 을 갖도록 하는 ‘차별화’작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교회는 나만 제단이라고 하는데 목회자는 수십만이 양산되고 있고 무인가 내지 초인가 신학교(인가를 초월한다고 하는 자들)를 책임없는 목회자들이 경쟁적으로 신학생들을 쏟아내는데도 이런 차별화 작업 을 귀하게 받드는 목회자들은 별로 볼 수 없다는 아픔이 현실 목회자인 제게도 있는 고 통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은 땅의 것을 전부인양 알고 살아간다. 목표를 땅에 것 배부른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저력의 신은 배 소위-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 다. 오늘 크리스챤은 뭡니까? 세상 사람들의 목적과 목표에다가 플러스 알파입니까? 그 플 러스 알파가 예수의 권능과 권세, 성령충만입니까? 도무지 차별화가 사라지고 있는데 오늘 교회의 모습이라는 너무 비관적입니까? 유대인의 철저한 신앙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규칙’이 있었기에 유대주의가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물론 유대주의라는 형식, 바리새파의 형식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식이 없으면 내용도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것을 꼭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성수주일하기, 십일 조 생활화, 새벽기도 사수, 성경읽기 생활기록표 만들기 등등 이런 기본적이고도 원색 적인 형식을 무시해 버린다면 신앙의 내용/복음의 내용도 사문화 되어 버리고 말 것입 니다.
* 증인으로서 목숨걸 자들이여 나서자 종말교회는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증 인’이라는 말은 영어의 martyr입니다. martyr라는 말은 순교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내가 믿는 진리 내 모든 과거의 것을 버리고 예수 앞에 항복한 그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 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전투야말로 심각한 투쟁이요 자기 몸부 림, 고민입니다. 이 심각함이 없어졌다는 것은 교회의 병입니다. 초대교회는 제자삼는 일과 증인으로 나서는 일 - 곧 선교의 일에 최선을 쏟았는데 그것 이 제1 우선 순위였는데 그것이 교회의 존재함의 1차적인 설명이었는데 교회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있는가? 반문해야만 돼요! 우리는 증인으로서 목숨을 모두 걸고 나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나서면 죽는 일 같지 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이잖아요! 초대교회로 돌아가 는 일을 내 생활 현장에서 구현하는 종말교회 되시길 기도합니다. 고신 일 산백석교회목사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요일 4:7-12, 18-21 김삼환
우리가 찾는 것이 많이 있지만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길 잃은 나그네요 실패자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사랑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 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사랑입 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와 하나되신 사랑입니다. 일방 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최고의 복음이고 기쁨이며 소망입니다. 이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사랑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가슴은 하나님의 사랑 을 담는 유일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있는 에로스나 필리아나 스토르 게 같은 사랑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오래 못 갑니다. 변합니다. 이기적이고 부작 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이며 거룩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 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찾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국가와 가정의 문제는 바로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 에 있는 것입니다. 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고 가정이 붕괴되고 청소 년들이 갈 바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주님의 사랑 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나와 너와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나 인류의 어떤 문제든지 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경제 문제나 교육문제나 정치 문제나 어느 것이라도 사랑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면 길이 있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담겨져 있을 때에 비로소 에로스의 사랑도 살고 필리아의 사 랑도 살고 스토르게의 사랑도 삽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 니다. 성도의 행복이 여기 있습니다. 성도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등 에 한번 업혀 살아보십시오. 주님의 손을 한번 잡아 보십시오. 주 예수의 흘리신 보혈 의 그 크신 사랑을 한번 깨달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나 최고의 능력입니다. 어느 것 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거룩함이 사랑입니다. 명성교회목사
유익한 휴식 막 1:32-39 김재남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 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 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 여 왔노라 하시고 (막1:35-38)
선사가 마당을 열심히 쓸고 있는 동자승에게 말합니다. “녀석아! 호보림산이요, 심조불 산이라.” 동자가 궁금히 여겨 묻습니다. “선사님! 그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한참 후 선사가 말합니다. “건너 산을 쳐다보아라! 산림보호 산불조심이라지 않느냐!” 허리 를 굽혀 정신없이 일하다가 지치기 쉬울 때에, 한번씩 허리를 들고 먼 산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휴식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먹는 것이라고 해 서 모두 몸에 유익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3가지 유형의 휴식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경우인데, 쉬면서도 내내 불평하고 갈등합니다. 둘째는 노아의 경우입니다. 홍수심판 후에 자기 텐트에서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지냅 니다. 자식들 앞에서의 부끄러운 휴식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경우인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건강한 휴식을 보여주십니다. “새벽 오 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 백수의 왕 사자는 절대로 과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먹이감이라도 추격할 때에 자 기 힘에 벅차면 포기하고 맙니다. 그리고 헐떡거리면서 숨을 고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이 파열되고, 허파가 터질 때가지 뛰는 경우를 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휴식을 화려하게 보내는 헤롯왕과는 달리 아주 검소한 자리에서 취하 고 계십니다.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훨씬 영적인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내일을 위한 준 비로서 시간일 뿐만 아니라, 기도하시고 일어난 자리는 정결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나라 살림이 어렵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너도나도 해외로 나간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여 름 휴가 한 철을 보내고 나면 이 나라 강산이 쓰레기통이 된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럽습 니다. 이번 휴가철은 정말 주님의 제자다운 건강한 휴가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 61:1-3, 요8:31-32 서은성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할 수 있습니까? 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책감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 로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구 약에서 계약을 체결할때는 동물을 잡아서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함께 지나가면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둘 중에서 계약을 어기면 이 동물과 같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계약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죄인입니다. 율법을 범한 인간이 피 흘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셨 습니다. 이피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가운데 있지 않 고 생명의 성령가운데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과거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 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아픈 마음의 상처와 과거의 부끄러 운 모습이 우리를 얽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 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십니 다. 새 은혜를 주시고 새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생각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빌4:6-7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 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 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내 생각을 벗어나 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용서와 수용과 사랑은 내생각을 벗어 날 때 가능합니다. 생각에 매여 사는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열어 야 할 것입니다. 연동교회목사
신앙을 즐기자 신 12:5-14 장성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긴 여행 중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임시적이고 일회 적입니다. 그러나 주거 생활이 안정되면 제 좋은 대로만 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은 오 늘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주거와 생활의 안정을 이루면 반드시 행해야 할 생활 원칙입 니다. 1. 가족이 즐거워야 합니다. 본문 7절 중간에 보면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 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땀을 흘리고 일하는 것이고 그 일의 대가로 즐기는 것입니다. 가난하거나 불행한 가정을 보면 일을 안해서가 아니라 그 대부분이 가장들이 그 노동의 대가를 가정으로 가 져오지 않고 친구들이나 엉뚱한 곳에서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챤 가정들이 대부분 행복한 것은 남편들이 가정적이어서 일의 열매를 가정으로 가져와서 함께 즐기기 때문입니다. 2. 교회를 정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원대로 하였거니와 너 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하였고 5절에서는 “오직 너희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자녀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가서”라고 하셨 고, 14절에서는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희 번제를 드리고 또 내게 명하신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는 이 교회 저 교회를 드나들면서 마음대로 했지만 안정되면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 교회를 정해서 신앙생활 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신앙을 즐겨야 합니다. 12절에서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앞 에서 즐거워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대부분 두려움이나 율법적인 동기에 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 것은 미신과 외상신앙을 낳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동기의 신앙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즐 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시고 광야 40 년의 길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즐기라고 하시고 오늘 의 우리에게는 죄와 사망과 두려움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즐 기라는 것입니다.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수하의 노동자들과 즐기라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에게 영광 을 돌리는 신앙생활을 즐겨야 합니다. 면목교회목사
주님을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요 12:1-8 김삼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 든 만물을 만드실 때 그 속에 ‘사랑’이라고 하는 귀한 선물을 넣어 지으셨습니다. 그 래서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든 세포와 유전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 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큰 일을 한 지도자들은 지식과 영도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큰 사랑과 뜨거운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나의 힘이 되 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뜨겁게 하나 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 부유하고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 잘 된다 고 생각을 하십니까? 마음의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토록 과격하고 쉽게 흥분하고 서로에게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오늘 이 사회를 무엇 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빛 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황홀하게 합니다. 사람을 가치 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은 오직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만 왕의 왕 이 되시는 주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그 품안에 안아주시고 인도해 주 시는 것입니다. 오직 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깨닫고 감사할 때 인간은 이 세상에 서 복되게 살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사랑, 에로스의 사랑은 돌아보면 후회스럽고 상처뿐입니다. 그때는 좋았지만 돌 아보면 부끄럽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도 이 세상의 사랑을 좇아 아버지를 떠나 갔지만 결국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믿을 수 없습니다. 만 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왕 이 함께 하는 삶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함께 걸 어갈 때 우리는 힘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의 손을 잡을 때 영원히 행복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할 때 이 나라는 풍 요롭게 되고, 가정은 행복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 문은 열려지게 되어 하는 모든 일에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복있는 사람 시 1:1-6 김재남 프랑스 민담에 “황금 쥐와 사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황 금 쥐를 만납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서 그 쥐를 잡습니다. 손에 잡자마자 황금 쥐는 황 금으로 변해 버립니다. 황금으로 변한 쥐를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자 같이 길 가던 친구 가 그것을 만져보던 중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러자 황금 쥐는 살아서 달아납 니다. 달아나는 고양이가 그 쥐를 삼키고는 황금빛을 띱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죽음 힘 을 다해 쥐를 삼킨 고양이를 뒤쫓습니다. 고양이를 잡자마자 고양이는 묵직한 황금덩이 로 변합니다. 너무 무거워서 땅에 내려놓자 고양이는 살아서 황금빛을 띠며 달아 납니 다. 달아 나는 고양이를 이번에는 사자가 삼킵니다. 이 나그네는 사자를 향해서 우렁차 게 소리칩니다. “너 이 놈 거기 서거라! 내 손이 네 몸에 닿기만 되면 너는 죽어 황금 덩어리가 되는 줄 모르느냐!” 그러자 굶주린 사자는 그 나그네도 삼켜버렸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허망한 생각에 내 자신이 사로잡혀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복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복(barak)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을 그 어떤 일 도 하지 아니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저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수고하고 노력해서 받는 복(asar)이 있습니다. 이 복은 우 리가 노력하고 애쓴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시편의 첫 편을 여는 복,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복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서 얻을 복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의 삶은 악을 멀리합니다. 악과 타협하며 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 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며 중히 여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성령 안에서 즐기며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 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복 있는 자는 믿음에 굳게 서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 당장 어려움이 있더라 도 잘 참고 견디면 선한 열매를 얻을 하나님의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속합 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 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3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 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비록, 없을지라도 합 3:17-19 류철랑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 뿐이라더니 여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 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곡식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비록, 없을지라도”라고 말합니다. 첫째, 비록, 없을지라도 선민의식을 가지라 우리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 입니다. 우리는 사상가여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선민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해 뽑힌 자들입니다.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비하시키면 안됩니다. 자존감을 가 지고 자중자애(自重自愛)하세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 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요15:16) 하셨습니다. 선 민사상을 가지고 택하신 목적대로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 바랍 니다. 둘째, 비록, 없을지라도 즐겁게 살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8 절)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즐거움이란 자 신의 가치나 존엄성을 값있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기쁨은 하 나님의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기쁨, 감사, 찬양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서 생깁니다. 우 리는 비록 없을지라도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즐거움이 떨어지면 빚이라도 내야 합니 다. 행복해지기전에 미리 웃으면 행복해집니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듯이 웃음으로 불 행을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셋째, 비록 없을지라도 높은 곳으로 걸으라 하나님은 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이 힘주시면 사슴처럼 높은 산도 뛰어 오를 수 있습 니다. 높은 곳은 거룩한 곳이요, 영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하고 사자처럼 달려가게 합니다. 높은 곳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 이 주신 땅입니다. 발바닥으로 밟아야 할 땅입니다. 영적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비록 없을지라도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갑시다. 환경이 좋아야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 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을 불어넣어 열심히 일하세요. 비록 없을지라도, 부요 의식을 가 지고 기쁘게 사십시다. 비록 없을지라도, 영적인 생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 가시기 바랍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잠 6:16-19 장성규
참된 신앙은 자기 판단이나 생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 입니다. 1.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눈을 미워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거짓은 진실의 반대말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이시고 진리입니 다. 그러나 거짓은 그 조상이 마귀요 살인자입니다. 미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 신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시84:11) 3. 거짓 증인을 미워하십니다. 거짓 증인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잠언 19:5절에서는 “거짓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4.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미워하십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인간을 죽게 하는 자 들 폭력으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들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평강이시 며,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5. 형제를 이간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사탄이란 말의 뜻은 “이간자”입니다. 형제를 이간하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간으로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일어나고 깨 집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둘로 나누었던 것을 하나 로 싸매시기 위해서입니다.(엡 2:14∼16) 6.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십니다. 악인이란 회개하지 않은 자. 마음이 완악한자.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용서하지 않는자 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제사를 싫어하십니 다. 7. 악한 계교를 미워하십니다. 악한 계교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꾀입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많은 불행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자기 꾀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 다. 8. 우상 숭배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우상이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는 조각품입니 다(사 20:19). 그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물론 사람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 님께서 미워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78:58절에 보면 “진노하신다”고 하였고 동 59절에서는 “분내어 이스라엘을 미워하사”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만 하지 않아야 하겠고 거짓말이나 거짓증언이나 이간질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 고 악인이 되서도 안되고 악한 계교를 써서 형제를 넘어뜨려도 안되고 우상 숭배적 신앙 을 가져서도 안되겠습니다. 면목교회목사
요단까지 내려갑시다! 왕하 5:8-14 김재남 사람에게 관점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점에 따라 잃을 것도 얻게 되고 잃 은 것도 되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1860년대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퍼킨이란 분이 말라리 아 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약을 조수들과 함게 실험실에서 만들었지만, 무색 투명 해야 할 약이 보랏빛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실패했다고 했지만, 퍼킨은 그 보랏빛 물질을 모브(mouve)라고 부르면서, 더 좋은 무엇이 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최초의 인공염료가 되어 색의 세계에 일대 변혁은 물론, 영어에 무려 7,500개의 새 단어를 가져올 줄은 퍼킨 자신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걱정 근심으로 옷을 찢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바로 이스라엘 왕 입니다. 아람왕이 자기의 군대장관 낭만을 보내왔습니다. 문둥병자인 군대장관을 고쳐달 라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왕은 이렇게 판단합니 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빌미를 잡으려고 한다고요. 그러자 온 나라가 시끄럽게 됩니 다. 이 야기를 전해들은 엘리사가 그 문둥병자를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는 자기에게 나아온 나아만 장군을 요단강에 보내어 고침을 받게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 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지나간 과거를 되짚어보면 그토록 안절부절했던 일이 별 것이 아 닌 것으로 지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더더욱 믿음의 백성들에게 보헤사 성령님이 계시어 주의 백성을 도우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그토록 쉽게 고침 받게 했을까요? 그가 지 니고 있는 확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믿음 위에 굳건히 선 자만이 누리 는 영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자기 거처에 왔을 때에 지체하 지 않고, 그를 요단까지 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는 철저한 믿음 대문입니다. 엘리사 는 자기 믿음의 끝에 이 나아만 장군을 세워 피스톤처럼 요단까지 밀어버립니다. 나아만 의 회의와 편견 그리고 교만은 마음은 이 힘찬 믿음의 피스톤에 밀려나가고 급기야 어린 아이와 같이 겸허한 자가 되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서 치유함을 얻습니다. 나 아만은 너무나 기뻐서 엘리사에게 가지고 온 예물을 받치려 하지만 엘리사는 이마저 사 양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고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초점을 전혀 잃지 않고 오늘 우리와도 새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 행 20:6,16 김창인 바울의 제3차 여행 중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기록에는 두 가지 명절이 등장합니 다. 그러나 실상은 세 가지 명절입니다. 즉 유월절(1월 14일)과 무교절(14일-21일)과 오 순절입니다. 이 명절을 통해서 주신 은혜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1. 구원의 은혜 (유월절) (6)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종살이 430년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 문설주에서 양의 피를 보 면 넘어갔고 양의 피가 없는 집에는 들어가서 장자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애굽 천지에 는 장자가 죽어 초상집 뿐이었습니다. 그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 때 애굽 왕이 명하여 이스라엘로 애굽을 떠 나게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본문 의 바울은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2. 고난의 은혜 (무교절) (6) 흔히 고난을 은혜로 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사람 들은 고난에서 성공의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애 굽의 종살이는 실패였었고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고 더 강해졌습니다. 무교절에는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의 종살이를 되새기곤 하였습니다. 즉 평안할 때 받지 못하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고난도 하나님 의 은혜였습니다. 본문의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감사할 일이기 때문 입니다. 3. 성령의 은혜 (오순절) (16)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나서 오십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목민의 생활에서 가나안에 정착하 여 농경생활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농사지어 가장 먼 저 밀을 거두어 제일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하는 명절이 오순절 즉 맥추절입 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에 성령충만의 역사를 체험한 이후에는 물질의 은혜보다는 성령충만의 은혜를 감사하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명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오순절을 꼭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의 은혜는 성령체험의 은혜 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 50일간의 생활에서 유월절, 무교 절, 오순절을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감사에 참여해야 되겠습니 다. 광성교회목사
좌우지간 전 11:1-6 류철랑
첫째, 좌우지간 투자하라 한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은 있는 것을 투자하지 않은데 있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절) 다른 말로 바꾸면 돈이 있거든 사업에 투자하라 언젠가는 투자한 것에 이윤이 붙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심어야 거두 는 거고 투자해야 이익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고 수고한대로 먹게 하십니다. 잘 심으면 많이 거두고 수고를 많이 하면 할만큼 이익도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2절에서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여기 저기 투자하라고 합니다. 위험하게 하지말고 안전하게 하라고 합니다. 투자에 대해 성경 의 가르침이 너무나 섬세합니다. 좌우지간 투자하여 백배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둘째, 좌우지간 도전하라 인생은 좌우지간 모험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사고나 획일적인 생각으로는 아 무일도 못합니다. 새로운 영역에 부딪치며 앞으로 나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전하는 사람은 조건이 다 갖추어지고 반드시 때가 되 었다고 생각해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될는지 잘 안될는지 해보기 전에는 모릅니 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운명은 밝은 생각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피하여 달아납니다. 도전자가 되십시오. 셋째, 좌우지간 열심히 하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6절상)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 은 시간까지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부지런히 씨를 뿌리면 많은 수확이 나올 것입니 다. 뿌린 씨앗은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떨어지기도 하지만 옥토에 떨어 져 30배 60배 100배로 결실 합니다. 뿌린 씨앗 3/4을 허비한다해도 씨는 뿌려야 합니 다. 내가 뿌린 씨앗의 100%가 다 결실하기를 바라면 안됩니다. 1/4의 결실이 3/4의 손해 를 메우고도 많은 소득을 가져다 줍니다. 아침에 실패했다고 저녁에 할 일도 실패하지 는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한 일꾼이 노동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좌우지 간 열심히 합시다. 소원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목표 지점에 이르기 위한 결심에 변함이 없습니다. 소원은 막연한 희망이어서는 안됩니다. 그 목표를 위한 투자와 도전과 열심히 있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해봅시다. 부천동광교회목사
천천히 가는 자는 복이 있나니 창32:25-32, 마20:20-28, 고전9:24-27 손인웅
현대인들의 그 옛날 야곱과 같이 숨가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과속으로 질주하는 야곱을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2등의 운 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1등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경쟁과 대결 그리고 속임수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의 명분과 많은 재산과 두 아내와 열 한 자녀까지 얻었으나, 그의 마 음속에 도사리고 앉아서 괴롭히는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야곱 은 자신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필요로 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과속으로 질주하는 야곱의 다리를 부러뜨리심으로 제동을 거셨습니다. 둘째로 20년 세월동안 정신없이 뛰다가 유턴(U-turn)하는 야곱을 생각해 봅시다. 야곱 은 이제 모든 꿈을 이루었습니다. 타향살이 20년에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이 그리워서 고 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밧단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까울수록 야곱의 마음은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 서 야곱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전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야곱은 얍복강변에서 우선 멈춤신호등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 다. 야곱은 어두운 밤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정지명령을 받고 하나님을 붙들고 씨 름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더 전진할 수 없다 는 점을 인식하였습니다. 야곱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세속적인 욕망이 강한 인격과 이 기적인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넷째로 서행 경고 조치를 받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야곱을 생각합시다. 하나님 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 이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혀서 절뚝거 리며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과도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경제개발이라 는 미명 아래 창조 세계의 모든 생명체들의 피를 흘렸으며 환경을 훼손하였습니다. 현 대 문명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인간과 창조세계와 모든 생명체는 더욱 더 심하게 손상 되고 지구촌의 수명이 단축되는 것입니다. 과속하는 인생, 유턴하는 인생, 우선 멈춤신호 앞에서 정지하는 인생, 서행을 생활화하 는 인생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의 제자리를 찾도록 노력합시다. 덕수교회목사
수가 더 많아지는 교회 행 9:26-31 장성규 1. 평안 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생명입니다. 만약 교회가 평안하지 못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들과 화목하지 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과도 화 목해야 합니다. 욥기 22:21절에서도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해지고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50절에서는 “너희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우에서의 소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들을 화목케 할 수 있습니다. 2. 든든한 교회란 흔들리지 않는 교회, 믿을 만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하나같 이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뿌리를 내리는 교회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자녀들이 대를 잇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웬만한 풍랑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가 년조는 짧았지만 그런 든든히 서간 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 혀 기도에 힘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3. 수가 더 많아 졌다고 하는 것은 종합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 회의 성장을 말할 때 흔히 내적, 외적 성장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수는 외적 성장 으로 취급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 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가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더하여 지는 열매 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갈 뿐 아니라 그 수가 날마다 더하여지는 교 회가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두가지에 힘을 기우려야 합니다. 하나 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일낮 예배뿐 아니라 모든 공적예배와 기도회, 그리고 심 지어는 특별한 집회에까지 모이는 일에 힘을 기우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25절 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옴 을 볼수록 그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쉬지 않는 전도입니다. 전도는 기독 교의 생존법칙입니다. 주님께서도 전도하러 오셨습니다(막1:39) 성령님도 전도하시기 위 해서 오셨습니다(행1:18) 그래서 사도바울은 딤후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 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면목교회목사
잔치가 있는 삶 시 107:4-9, 눅 15:11-24 홍정근 1.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를 떠나 모진 실패 후에 탕자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자기 를 제대로 보게 되고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았습니다. 아버지를 떠 난 삶이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이렇게 힘들 었습니다. 정말 나를 받아 주실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자기 수준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탕자는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갖은 고 생 끝에 비로소 갖게된 은총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광야 사막 길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 입니다. 아버지 품에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가진 것이 있을 때 문 생각나지 않았습니 다.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나에게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달려가 목을 안고” 거지 행색을 하고 돌아 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스 펄전은 이 때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여나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실 까 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옮겨 놓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렸을 것입니 다.” 아버지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 하 나 만으로 아버지를 기뻤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 중 요했습니다. 아버지를 아들이 돌아왔기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고 돌아오기 를 기다렸습니다. 포기를 모르는 사랑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다리는 사랑 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지금도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3.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들이 돌아 왔을 때, 몸은 왔으나 마음을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인의 마음이었습니 다. 아버지를 그를 다시 아들의 신분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기쁨 이 회복되었습니다. 함께 즐겁게 잔치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가 있는 삶입니다.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삶입니다. 노래가 있고 흥이 있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재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회 복해야 할 모습입니다. 연동교회목사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갈 2:19-21 강동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은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 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는 것입니 다. 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을 끝까지 괴롭힌 것은 율법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바울에게 아무 평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것 이 바울이 내린 율법에 대한 최후의 결론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처럼 여러분의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결국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는 것을 신령한 연합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 예수님께서 떠나가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어느 한 공간,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과만 함께 계실 수 있 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떠나심으로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동 거하십니다. 3. 이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마땅히 드려야할 섬김은 생각 하지 않고 내 유익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 운데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연합체가 되어 성령의 거룩한 열 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동신교회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 20:1-9 김삼환
성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 히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살 때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일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 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우리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성전에 나오는 자 를 기뻐하십니다. 거룩한 교회를 통하여 인간을 축복하십니다. 성전을 귀히 여기고, 사 랑하고, 가까이 하고, 성전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개인이나 가정, 민족은 인류 역사에 큰 일들을 하였습니다. 어디에 축복이 있습니까? 어느 곳에 기쁨이 있습니까? 성전에 있습니다. 마음에 일어나 는 그 허무함과 갈등을 토해 놓을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죄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 나는 곳이며 평안을 얻는 곳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강건하여지며 위로를 받는 곳이 교회 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샘물이 솟아나 목마르지 않게 하는 곳,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 아가게 하는 곳, 우리를 담대하게 하며 건강한 인격을 형성시켜 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더 사 랑하십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깨끗한 것만 걸러내 는 곳이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만 모이는 성역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는 곳입니다. 온갖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주의 보혈로 씻음 받는 곳이 며 용기 없는 사람과 죽고 싶은 사람이 와서 살게 되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그 얼굴에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얼굴에 천국이 없는 분들을 있습니다. 교회는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는 곳입니다. 교회는 다 토해 놓고, 주님 앞에 맡기고, 은혜를 받는 곳입니 다. 주님 앞에 못 내어놓을 것이 없습니다. 다 내어놓으면 은혜 받고 용서함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같은 주의 품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단비가 내리는 땅을 만듭시다 삼하 21:1-14 김재남
인생의 삶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육적인 삶과 혼적인 삶과 영적인 삶이 그것입니다. 혼적인 삶은 인간의 이성에 따른 삶이긴 하지마는 그 이상은 아닙니다. 나의 판단이 바 르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반드시 박으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영적인 삶은 하나님 이 바라고 기뻐하시는 삶으로서, 비록 양보하고 주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속에는 항상 하 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머물게 됩니다. 첫째, 육적인 삶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울 은 항상 잔인할 만큼 본능적입니다. 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처형할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브온 백성들을 집단으로 살해합니다. 바로 그 일이 훗날 다윗 때에 하 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의 몸에서 난 아들들과 외손자들을 7 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줍니다. 피를 부른 자는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 맙니다. 그 리하여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하십 니다. 둘째, 혼적인 삶으로 기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등극했지만, 당장 신원이 이뤄 지지는 않습니다. 3년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받던 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의 죄 를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이를 듣고 기브온 백성들을 불러 한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그 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만큼, 복수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사울의 집안 식구들 7명을 넘겨받아 사울의 고향에서 처형합니다만, 비는 내리지 않고 가뭄만이 계속됩니다. 마음의 한은 풀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혼적인 삶의 한계입니다. 셋째, 영적인 삶의 다윗의 경우입니다. 다윗은 3년 기근의 난관 앞에서 기도합니다. 병 력을 이끌고 무자비한 약탈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은 자들인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사울의 첩 리스바 여인이 6개월 동안 처형된 아들과 조카들의 시신을 눈물겹게 지키는 일에 감동됩니다. 자신이 오래 방 치한 사울,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수습해 후장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제야 기 도를 들으시고 그 땅에 비를 부어 주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기 때문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문 땅에 하늘의 비가 내리도록 우리 모두 다윗의 마음을 갖도 록 합시다! 아름다운교회목사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계 1:4-7 김창인
1. 복의 근원 예수 (4-5중)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 윗은 나단의 깨우쳐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회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는 부귀영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고 건강장수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 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시51:11).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성령을 가장 귀한 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5중)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축복의 전부입니다. 그 복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2. 해방자 예수 (5하-)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사59:2). 즉 죄가 하나 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롬4:25). 오늘의 본문을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전부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 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자이십니다. 3. 재림 주 예수 (6-7) 우리는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구원이 시작됩니 다. 그리고 현재 받고 있는 구원이 있는데 영혼의 구원입니다(벧전1:9). 그 다음에는 앞 으로 받을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 때에 몸이 부활하므로 받는 육신의 구 원입니다(벧전1:5). 여기에서 구원이 완성되어 영화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재림을 철석같이 약속하셨고(요 14:3) 또 승천하실 때에 재확인하셨습니다(행1:11). 오늘의 본문을 보면 “볼지어다 구 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 끝에 누구든지 재림 주를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재림 때 성도들은 부활하여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약속하신 예수님은 재림하시는 재림 주이십니다. 광성교회목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수 24:14-18, 마 16:13-24 이성희
모호성은 현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분야에 경계가 무너지고 구분이 없어 지는 시대입니다. 모호성은 신앙에 있어서는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1. “너희는”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압니다. 성 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라고 물으십니다.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 너의 마음을 알고 싶다. 너는 나를 어떻게 고백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십니다. 신앙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 다른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신 믿어 줄 수도 고백 해 줄 수 도 없는 문제입니다. 에스겔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14) 분명 한 자기 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는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바알신, 태양신, 황제신을 섬기는 중 심지였다. 유력한 신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웅장한 신전이 즐비한 그 곳에서 “너희는 나 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물음입 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주님만을 믿고 주님만을 사랑하 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만 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물음을 기억합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고백된 이 신앙고백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되었 습니다. 황제숭배로 서슬이 시퍼런 로마치하에서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예배처소 인 카타코움에 숨어 예배하면서 이 신앙을 고백 했습니다. 소수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 던 그들이었으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 고 이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모두 이 위대한 영적 비전을 회 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연동교회목사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 렘 17:5-8 장성규
하나님은 사람들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의지하거나 의뢰하면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의뢰하면서 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의뢰하면 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 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권력과 성실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 면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죄입니다. 그래서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저주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삶 자체가 고통 스러운 비극일 수밖에 없고 그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7절에 보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 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믿지 않는 자를 의지하고 자기를 맡기겠습 니까? 믿는 자에게 자기를 맡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하나 님을 잘 믿습니다. 뜨거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집이나 형제나 전도를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란 하나님께서 우주 만 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자이시고 섭리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됩니 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님의 그러한 사랑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마음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치 “물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복을 주셔서 그 잎이 청청하며 가 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게 하시고 결실이 그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나 그 권력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뢰하 는 삶을 살아서 그와 같은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면목교회목사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김재남 중국 “출요경”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대월지국에서는 돼지를 살찌우 기 위해 덖은 보리를 먹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를 본 망아지가 어미 말에게 말로 태어 난 것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어미 말이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터이니 건 초라도 잘 먹고서 다리에 힘을 길러라!” 명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살진 돼지를 잡는다고 동네가 시끄러웠습니다. 얼마 후에 대궐에서 관리들이 나와서 건강한 말을 궁 궐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궁마(宮馬)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것이 문제입니까? 오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숨짓고, 낙담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집을 세우는 여인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3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사울과 요나단 의 경우입니다. 악한 아비 때문에 선하고 착한 아들 요나단이 빛을 보지 못합니다. 아비 가 자식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사울과 함께 전장에 나가 전사하게 됩니다. 둘째는 엘리 와 그 아들들의 경우입니다.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그대로 방치합니다. 책임 없는 부 모, 버릇없는 자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은 이들도 망하고 맙니다. 셋째는 오벧에돔 의 경우입니다. 하나님 법궤를 잘 모신 아비 덕에 자식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오 늘 본문에 소개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은 그 어미 대문에 고침을 받습니다. 후에 이 딸 이 자라서 어떤 후일담을 말하게 될까요? 우리 어머님 때문에 우리 어머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무엇을 가졌기에 이 복을 받게 됩니까? 주님까지도 엄청나게 칭찬한 믿음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가나안 여인을 소개하는 곳에서 “보라” 말로 시작됩니다. (22절) 얼마나 감격스러우면 이 말로 시작하여 여인을 소개하려 할까요? 그리고 주님께 서 칭찬하시는 말씀(28절)에도 “오! 여자여(최고의 극존칭, 마리아에게 부르신 용어) 네 믿음이 크도다” 도대체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기에 주님께서도 이렇게 칭 찬하시며 기뻐하셨을까요? 원수의 땅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땅으로 여겼던 두로와 시돈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인간을 생각을 뛰어넘고 나온 믿음이 주님을 감격케 합니다. 그 믿음은 주님의 시험을 능히 이기고 남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힘을 우리도 우리 믿음에서 확인해 보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 잠 20:3-7 김창인 1. 화평의 둥지 (3-4) 예수께서 회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 다. 우리의 믿음은 화평케 함에 깃들어 번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하 면 불화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마귀의 자식이요 라는 뜻이 됩니다. 마귀의 자식은 언 제 어디서나 불화를 조성합니다. 불화 속에서는 믿음이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의 본문을 보면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마련한자마다 다툼을 일으키 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툼을 멀리함"은 화평을 가리킵니다. 그 화평속에 믿음이 깃들 기 까닭에 자신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2. 충성의 둥지 (5-6) 믿음의 별명을 몇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감사 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입니다. 역시 믿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 랑으로 표현이 되기 까닭입니다. 또 셋째는 진실입니다. 믿음과 거짓과 동거할 수 없는 이유 때문입니다. 넷째는 충성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아만"이라는 말을 우리 성경에서 믿다라고 번역하는가 하면 충성하다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과 충성은 뿌리 가 같고 동질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충성의 둥지에 깃드는 것입니 다.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충성 의 둥지에 깃들게 됩니다. 3. 정직의 둥지 (7-) 유다왕들 중에 신앙이 독실하고 충성스러운 경우 반드시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 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기 때문입니다(왕상15:5). 이 말씀에서 “여호와 보시기에"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표준으로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 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표준으로 사는 것을 정직이라고 합 니다. 이 정직의 둥지에 믿음은 깃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 기에서 완전히 행함은 완벽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표준으로 사는 정직을 가 리킵니다. 정직의 둥지에 믿음이 깃들게 됩니다. 광성교회목사
예수의 선한 일꾼 딤전 4:6-10 류철랑
일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할 일을 바로 파악하여 그 일을 하는 사 람입니다. 선한 일꾼이란 좋은 일꾼이요, 효과적인 일꾼입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어 떻게 길러질까요? 첫째,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일꾼은 선한 교훈으로 길러집니다. 선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어 려서부터 성경을 배운 사람입니다. 신자는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합니다. 성경말씀 을 믿음을 키워주는 양식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의 선한 일꾼으로 자랍니다. 둘째,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허탄한 신화란 “말도 안되게 실없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거짓 된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을 기준으로 여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 은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립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허탄한 신화를 쫓게 합니다. 주님의 선한 일꾼은 하나님께 속하여 주님 을 따릅니다. 허탄한 신화의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도로 걸어가는 바른 신앙이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선수가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듯이 선한 일꾼이 되는데도 연습이 요구됩니다. 주님의 좋 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경건의 연습을 통해 영적 순발력과 일꾼으로서의 능력을 길러 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금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연습을 해야합니다. 새벽 에 기도하는 일도 찬송하는 것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들 모두 경건의 연습니다. 경 건의 연습을 통해 예수의 선한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수고하고 진력해야 합니다. 수고란 힘을 다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힘에 지나도록 일하 고 그 많은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면서 수고한 것을 염두에 두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 께 어떤 일꾼이 될까를 설정해 봅시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주님께 이익을 남겨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합니다. 수고하고 진력하여 주님께 공헌하기로 작정하시기 바 랍니다. 주님께 잘했다 칭찬 듣는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일꾼은 일이 즐거워야하고 믿는 사람은 믿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일을 사랑하고 일 을 즐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우리를 내쫓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선한 일꾼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 부천동광교회목사
감사의 이유 합 3:16-19 박은성 1. 본문 16절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가 미래의 구원을 소망하고 찬양하였지만 그 구원이 있기 전에 겪어야 할 환난을 기억하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벌하시기 위 해 바벨론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을 심히 두렵게 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하며 구원을 확신하였다 해도 이미 예언 된 환난은 취소되지 않고 닥칠 것이며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 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실히 닥칠 실질적 재앙 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현실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결코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위대 하심과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확신이 있 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2. 하박국은 바벨론 침략으로 인해 심히 두려워했지만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 실은 확신함으로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이제 그의 구원의 근거이며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신에 찬 어조로 노래하였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실존이 위협 당할 만큼의 한계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무화과나무, 포 도나무,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 소와 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터전의 전 부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수확을 걷을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 앞에서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겠노라고 고백한 사람은 하나 님의 선지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의 자세입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은 우리 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심지어는 신앙까지 잃게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환난 중 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기 어려울지라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 아니하실지라도 기뻐하 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소출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수고의 열매를 거두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 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이 확실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중요하기 때문에 감사하 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다대중앙교회목사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잠 2:6-8, 약 3:13-18 이성희 지혜는 아래에서 돈으로 살 수 있다거나 학습이나 수양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 다. 지혜는 신령한 것이며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혜는 자라고 자라야 합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다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른에게는 어른다운 지혜 가 필요합니다. 어린이의 지혜는 어른의 지혜는 아닙니다. 지혜는 성장해야 바른 지혜 가 됩니다. 그리고 지혜란 아래에서 나면 안됩니다. 아래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흔 히 꾀라고 합니다.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와야 참 지혜입니다. 1. 지혜는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행함으로 보여야 합니 다. 생활의 슬기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지혜가 없고 지혜는 있는데 생활에서 응 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혜는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 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음 미하고 맛보아야 합니다. 지혜는 세상에서 그 맛이 나타나고 행함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 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생활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참 지혜가 아닙니다. 2. 아래에서 난 지혜가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아야 합 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내가 힘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내가 이익을 얻습니다. 다 른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내가 일어섭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세상적, 정욕적, 마 귀적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하는데 육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영의 사 람이 아닙니다. 3. 위에서 난 지혜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폅벽과 거짓이 없는 것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위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위에 서 온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땅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에 서부터 손을 펴시고(시 144:7),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사 32:15). 태양열 전기는 태양의 열을 전기로 만들어 저장하여 사용합니다. 나비의 날개는 전지 역 할을 하여 에너지를 모았다가 난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모아서 저장하고 사 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갈되고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난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게 됩니다. 연동교회목사
크리스챤과 애국 롬 9:1-5 장성규
1. 나라는 가족공동체입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가족단위의 공동체로 살아왔습니 다. 그러다가 가족이 많아지니까 씨족단위의 공동체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또 커지니까 부족단위의 공동체로 발전되었고 그것도 커지니까 도시국가가 되었다가 드디어 현대국가 형태의 나라가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나라를 조국이니 모국이니라고 하는 것 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혈연공동체입니다. 이것보다 더 가깝고 끈끈한 공동체가 없 습니다. 2. 나라는 나 자신입니다. ‘나라’는 국가의 순 우리나라 말입니다. 이 ‘나라’라는 말의 어원을 양주동 선생은 ‘나루’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나루’는 강이나 내의 포구인데 저쪽은 너의 쪽이고 이쪽은 내 땅이다. 내것이다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은 나라란 말은 ‘나’는 ‘아(我)’라는 말이다. 그래 서 나라 라는 말은 我(나)다 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굉장히 좋아합 니다. 나라는 곧 ‘나’들의 공동체입니다. ‘나’들이 태어난 땅이고 나들의 할아버지 와 할머니가 사시다가 간 곳이고 나들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들이 살고 있는 땅이 곧 나라이고 내 조국인 것입니다. 이런 내 나라 내 조국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도 물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 면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나라 내 조국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1. 내 조국 내 나라를 좋아해야 합니다. 내 조국의 하늘과 땅, 강, 사람과 역사를 좋아 하고 아껴야 합니다. 이런 조국에 대한 사랑은 자기에게 유익과 즐거움을 줍니다. 2. 환경을 보전하고 기초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물 좋고 산이 좋다고 해서 ‘금수강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극도로 오염되었고 산이 더러워졌습니 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쓰레기를 줄이고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고 화학세제 사용을 줄여야 합니다. 3. 무엇보다 전도를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한 말씀 은 그냥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 조국 내 형제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라는 전제를 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 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 내 나라 내 민족을 참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면목교회목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 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 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 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태평 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삿3:7-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쓰시 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에 기술이나 능력을 쓰시는 것도 아닙 다. 그러한 조건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그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어 사용하십 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도 무식한자도 천민도 실패자도 노장인 옷니엘도 사용하십니 다. 1.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9절) “갈렙의 아우 옷니엘” 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사람의 소개 방 법이 아닙니다. 대체로는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는 왜 갈렙을 먼저 소개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갈렙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 할 수 있겠으나, 여호수아 15:16-17에 보면 옷니엘이 기럇세벨을 점령한 공로로 갈렙의 딸을 아내로 취합니다. 이것은 순종의 사람 갈렙(신1:36)과 공유적인 특성을 가진 순종 의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옷니엘 (10절) 성경에서 주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성령이 먼저 임하시고 능력을 받아 쓰임 받았음 을 볼 수 있습니다. 옷니엘도 역시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자 “구산 리사다임”을 점령 할 수 있었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의 뜻은 “두배나 사악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의 신이 임하시면 두배 뿐 아니라 몇십배로 강한 적이라 할찌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 니다. 3. 평화를 위해 희생한 옷니엘 (11절) 옷니엘이 사사로 부름 받았을 때는 이미 80세의 고령으로 이제는 쉴만한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젊은 날의 공로를 가지고 편히 산다고 한들 무슨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 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평화가 없이는 자신이 평안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평화를 위해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치는데 용감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희생으로 40년간 이스라엘은 태평하였던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권능이 있을지어다 행 4:32-37 김삼환
오늘 이 시대는 권위를 부정하며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 은 낮아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자의 삶을 사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는 정말 힘있는 자이시고 능력 있는 자이시며 온 인류를 다스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십니다. 인간의 권력은 잠간이지만 주님은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누구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약한 자가 되셨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의 손 에는 총이나 칼이 없었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귀하고 높으신 분이지만 그 주변 에 힘있는 자를 두지도 않았고 오히려 창녀와 거지와 병든 자와 세리와 약하고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영원하여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모 든 것 다 바쳐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휘두르는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데서 낮아지시고 섬 김의 본을 보여 주신 주님의 사랑의 힘인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은 우리를 살리고 거룩하게 합니다. “오직 성 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힘이 나라 를 살리고 가정도 살립니다. 이 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결국 다시 교도소로 붙들려 옵니다.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혈 서를 쓰기도 하지만 헛되고 맙니다. 누가 우리를 이 사망과 저주와 불의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이 죄악의 도성에서 이 민족을 새롭게 하고 이 모든 범죄에서 우리를 구원하 여 주실 이가 누구이십니까? 이런 죄악과 불의한 삶을 끊을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습니 다. 성령이 와야 죄에 얽힌 몸과 병든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음욕이 지배하지 못하고 믿음이 지배하게 됩니다.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이는 성령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 이 위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도 바울과 같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만대에 축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생활 속에 있는 믿음 시 39:1-7 김창인
1. 절제의 생활 (1-2) 바울사도는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덧붙였습니다(고9:24-25). 그러 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절제를 해야 합니다. 무절제한 생활은 파탄에 이르는 것 처럼 무절제한 신앙은 실패하는 법입니다. 말과 행동과 생활의 절제로 성도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야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 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행위와 말의 절제를 의미합 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절제의 생활 속에 믿음은 꽃피고 열매를 맺습 니다. 2. 묵상의 생활 (3-5) 어느 시인은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 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시104:34). 즉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새겼더니 그 하나님 까 닭에 마음이 즐거워지더라는 것입니다. 묵상에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그 즐거움 속에 믿 음은 지라고 생기를 얻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 신을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인생임을 묵상합니 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겨보는 사람만이 인생이 무엇임을 바로 깨닫습 니다. 이사야가 묵상 중에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생각하게 된 것과 같습 니다. 묵상의 생활 속에서 믿음은 꽃이 핍니다. 3. 소망의 생활(6-7)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부자에 대하여 바로 가르칠 것을 명 하고 있습니다. 즉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 시는 하나님께 두도록 하라는 것입니다(딤전6:17). 재물은 돌고 도는 것이기 까닭에 정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두는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 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림자같이 짧은 인생을 살뿐임으로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즉 재물에 소망을 둘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두는 소망의 생활 속에 믿음은 뿌리 를 내릴 수 있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어떤 사람들의 습관 히 10:22-25 류철랑
법률이 하는 일보다 습관이 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습관은 버릇입니다. 나이를 먹을수 록 습관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신앙생활을 대부분 잘하고 있지만 잘못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습관이 잘못되어서입니다.
첫째, 예배하는 곳에 잘 안 모이는 습관입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앙생활이 건강하게 되려면 예배하는 곳에 잘 모여 야 합니다. 모임을 떠나서 교회가 없고, 모이지 않고 신앙생활은 안됩니다. 유대인이 안 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내 이 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느냐 멀리 하느냐는 모임에 충실하냐 못하냐에 달렸습니다.
둘째, 말씀을 잘 안 듣는 습관입니다. 렘22:21에 보면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 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안 듣는 것이 “네 습관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역경 중에서 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들으세요. 지혜 있는 자가 들으면 학식이 더해질 것입 니다. 어리석은 자가 들으면 지혜롭게 됩니다.
셋째, 기뻐하지 않고 불평하는 습관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원망하고 불평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 도들에게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한다면 어떻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겠어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매사 잘될 때만 기뻐한다면 강보에 쌓인 아기와 다를 바가 없 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나를 내버려두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님을 믿는 자들의 앞날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계획이 펼 쳐지게 하려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시 100:2). “항상 기뻐하라”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습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 다. 잘못된 습관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금송아지 창 32:1~4, 행 17: 22~25 이성희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백성에게 가장 큰 실수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실수는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얘기하지 않고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미리 얘기한 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 노하십니다.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에서 이미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섬기 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일을 하였기 때문에 노하 십니다. 금송아지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고 다시 이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 다. 1.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는 그들을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시는데 우상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되면 십계명의 1 계명에서 4계명까지 한꺼번에 어기게 됩니다. 때로는 우상과 조형물을 혼돈할 때가 있습 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텔레반 정권은 세계 최대의 불상인 바미안의 불상을 세계적 반대에도 불 구하고 폭파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의 장승이나 불상이나 단군상에 대한 견해도 다시 정립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 서 중요한 일입니다. 2. 모세를 신격화하는 인본주의였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이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인도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나친 인간의 신격화는 본인 에게나 하나님께 전혀 도움이 되지 아니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제우스, 헐메스라고 신격화하여 굉장한 대접을 받습니다. 바울이 사양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이익 을 얻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을 신격화하고 대접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이 비 종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교주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3. 재물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인 금을 가지고 와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좋고 비싼 것이어야 이끌만한 신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금본위제도는 세상의 잣 대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잣대는 아닙니다.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지폐에는 온갖 균이 득실거립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신에 자신이 얽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신이며 우리 걸 음의 인도자이십니다. 연동교회목사
복된 장마비 겔 34:25-31 장성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비를 가지고 3가지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창세기 6장 이하를 보면 노아 당시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비를 40주야 내려서 지면에 있는 것을 멸 절 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통혼했기 때문이고 (창 6:1~3) 다른 하나는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기 때문(창 6:5~7)이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비로 심판의 도구를 삼으신 것입니다. 2.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열왕기상 7장에서 뒤의 몇장까지를 보면 엘리야 선지자 와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과의 갈등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아합이 우상의 나라 시 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이고 그 나라의 우상까지 들여와서 참 하나님 야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온 나라를 우상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 하기 위해서 비를 3년 6개월 간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로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3. 때에 알맞는 비를 내리시거나 복된 장마비를 내리셔서 은혜와 복이 되게도 하십니 다. 때에 맞는 비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 11:13~15절 사이의 말씀에 약속되어 있고 복된 장마비에 대해서는 오늘의 말씀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올해는 가뭄으로 때에 맞는 이른 비가 지나 갔으니 복된 장마비를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영적 장마비입니다. 대지가 메마르면 다른데서 물을 가져와서 공급할 수도 있지만 영혼이 메마른것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 다. 그러므로 더 급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복된 장마비를 맞는 것입니다. 영혼의 복된 장마비가 무엇입니까? 은혜충만,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복된 장마비인 은혜충 만, 성령충만을 받으면 수 많은 복을 받지만 본문에 있는 것 중에 3가지만 생각해 보십 시다. 1. 평안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땅에서 평안할찌라”고 하였습니다. 2. 자유로와집니다. 본문 27절 후반에 보면 “내가 그들의 멍에목을 꺽고 그들로 종을 삼은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 져낸 후에”라고 했습니다 자유케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3. 사단의 세력에게 삼켜지 지 않습니다. 28절 후반부터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열심히 기도하셔서 복 된 장마비와 영적 장마비를 함께 맞으십시다. 면목교회목사
성령의 인도하심 롬 8:14-17 강동수
누구의 인도를 받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과 사단의 자식으로 구분됩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 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셋째 위로 성부, 성자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약의 역사에 함께 하시며,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선교,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에 함께 하신 인격자 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은 절대적 능력으로 성도를 믿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도 록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보호하시는 상담자요 안내자이십니다. 모든 성도는 그 분의 인 도와 지도, 능력에 따라 살아야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자 기 스스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순종함으로 살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2.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란 육신에 속하여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입니 다.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산다는 것은 본능에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 를 거절하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 비그리스도인과 다를 바가 없고, 더 나아가 짐승처럼 사는 것이요, 저주의 자식밖에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 중심 의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사 실은 자신의 영광과 명예와 체면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늙은 아이가 되 지 말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3. 신령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 됩시다. 신령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재를 인식하고 확신합니다. 성령의 내재를 인식 하지 못하거나 확신이 없다면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내재하심을 완전히 인식할 때 우리는 자신을 아낌없이 성령께 맡기고, 몸과 마음을 바쳐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 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 도를 위하여 기쁨으로 고난에 참예하면 성령께서 도우사 이 고난도 극복하고 이길 수 있 도록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많은 경우 신앙과 믿음의 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회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훈련의 기회 로 삼으면 성장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 를 맺는 사람입니다. 동신교회목사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행 18:1-11 김삼환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복음을 증거하며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 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좋은 인격을 가지고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며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 만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며 남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쓸모 없고 보잘 것 없으며 영영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 도께서 우리의 이러한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 은 혜를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지 창조’를 작곡한 하이든도 “하나님 의 은혜를 생각하면 영혼 깊은 데서 환희가 솟아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조그 만 것도 못 참고 이해를 못하던 삶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 혀 돌아가신 은혜를 생각할 때 온유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고 이해하게 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 은혜 때문에 범사에 다 평안하고 원수가 없어집니다. 시기 질투할 사람도 없고 말 한 마디에 흥분할 일도 없게 됩니다. 삶의 현 장 어디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면 천국 같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단비 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학교에 대해 불평하고, 선생님 에 대해 불평하고 교회에 나와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요사이 우리 나 라에 우상숭배가 심해지고 점쟁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우상숭배와 미신에 사로잡히면 강 퍅해지고 더러워집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고 음란하고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 더러움에서 돌아서는 길은 성령 충만함이요, 강퍅한 마음에서 돌아서는 길도 성령충만함 입니다. 우상과 사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땅의 것을 찾지만 성령이 거하는 사람은 하 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 각합니다. 명성교회목사
일꾼이 받는 면류관 딤후 2:3-6 김창인
1. 군사 같은 일꾼(3-4) 하나님의 일꾼을 군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군사는 군사로되 좋은 군사가 면류관을 받 습니다. 좋은 군사는 정체성과 소속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잘 훈련된 군사가 좋은 군사입니다. 훈련이 안된 군 사는 오합지졸 일뿐 군대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즉 천하무적입니다. 군대는 엄격한 조직체로서 기강이 확립되어 있을 때 좋은 군사입니다. 기강이 해이해진 군대는 무질 해집니다. 그래서 자기생활에 얽매이 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군사가 좋은 군사입니 다. 즉 승리하는 군사입니다. 이런 군사 같은 일꾼이 면류관을 받습니다. 2. 선수 같은 일꾼(5-) 옛날 로마시대에는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열리는 경기는 유명하였습니다. 그 경기의 맥 을 이어 온 것이 오늘의 올림픽경기입니다. 이 경기에 출전하려면 아무나 하는 것이 아 니라 선수로 뽑힌 자만이 올림픽경기에 임할 수 있습니다. 선수는 하루아침에 되지 아니 합니다. 먼저 열심히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 없이 출전했다면 망신만 당할 뿐입니 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우스 신상 앞에서 최소한 6개월 간의 훈련을 마쳤노라고 선서 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규칙을 잘 지켜야만 합니다. 반칙을 하고 우승을 하면 그것은 우승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기하는 자는 법대로 하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우승이 주어져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3. 농부 같은 일꾼(6-) 농사는 땀을 흘린 만큼 수확을 얻게 됩니다. 게으른 농부는 거둘 것이 없어서 가난해 질 뿐입니다. 부지런하여 열심히 일하는 농부만이 풍성한 소출을 얻게 됩니다. 근면하며 성 실하게 일하는 농부에게만 가을의 결실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끈기 있게 기다리 며 때에 맞는 일을 계속합니다. 끈기 없는 사람은 농사를 짓지 못하는 법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전도를 위해서 땀흘리는 수고와 끈기가 있을 때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 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밭을 갈고 씨뿌리는 수고,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김매는 수 고, 또한 수고를 하면 곡식을 먼저 받게 됩니다. 이처럼 농부 같은 하나님의 일꾼은 면 류관을 먼저 받게 됩니다. 광성교회목사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 행 4:23-31 박금호
성령은 믿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역사 하십니다. 1. 새롭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 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께 무 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가정을 새롭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이 새로워지면 사회 가, 국가가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교회를 새롭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 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다. 교회가 그 빛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세상을 새롭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2. 치유하여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치유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상한 것과 모든 질병과 모든 고통 과 모든 연약함을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치료하여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인격이 병들고 비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도록 치료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육체를 치유하여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 육체의 심한 질 병과 연약함을 치유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치유를 우리의 삶에, 육체 가운데 실제 로 나타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가정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가정이 고 침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희망이 없습니다. 3.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권능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 과 권세를 받지 않고서는 이 악한 세상과, 이 악한 어둠의 영들과, 이 뿌리 깊은 죄의 세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합시다. 성령께서 주실 은혜를 사모합시다. 성령께서 임하실 수 있도록 우리 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합시다. 세상을 사모하고 세상과 벗삼아 놀던 습관과 죄악 을 끊어버립시다. 세상을 사랑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성령님을 보내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고치시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 을 주십니다. 광천교회목사
바벨탑 창 11:1-9, 롬 1:28-32 이성희
노아 홍수 이후에 모든 여건은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동쪽으로 가서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되자 인간의 힘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바벨탑은 연구결과 지구라트와 같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라트란 당시 신전으로 흔히 사용되던 건축물로 피라미드 모양에 높이가 90미터에 달한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극도의 평안을 주면 망 하게 됩니다. 번성하고 평안하게 되자 엄청난 죄를 도모하게 됩니다. 1. 인간의 이름을 남기려는 이기적 동기로 연합했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인간의 이름을 남기려는 의도였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주 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사람 이름 높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데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시 작합니다.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것도 사실은 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높이 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만한 우상을 만들었다는 자기 표현입니다. 2. 흩어짐을 면하게 하려고 했지만 흩어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흩어지게 됩니다. 목자 없이 아무리 뭉쳐도 힘이 없습니다.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브 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은 재물이 많아서 함께 할 수 없고 흩어졌습니다. 첫 그리스도 인들은 핍박으로 흩어졌습니다. 우리사회에도 가난 때문에, 핍박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 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설이 많이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가난해야 복 있고, 져야 이깁니다. 그런데 흩어지지 않으려니 하나님이 억지로 흩어놓으신 것입니 다. 흩어짐을 면해 보려는 인간의 의도를 하나님이 깨신 것입니다. 3. 형체는 하나님을 향하였지만 의도는 인간을 예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하십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하지만 자신을 위함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하 여 자신의 일을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우고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 장사를 합니 다. 요즘의 생명공학도 그렇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복지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양은 하나님을 향하지만 사람을 위한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벨탑 을 쌓는 어리석음을 인간은 벗어나야 합니다. 연동교회목사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 고후 6:1-2 최영환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에는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가 있 는데, 보통 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산소, 물, 햇빛과 같이 거저 주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특별은혜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줌으로 그 피 값으로 구원을 얻게 해주신 은혜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받을 수 있 을까요 ? 첫째, 은혜를 사모하며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여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엘리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 그의 스승 엘리야에게 매달렸 을 때 하나님께서 는 갑절의 영감을 주셨습니다. 이번 부흥성회 3일간 다른 핑계대지 마 시고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해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게 되면 삶의 목 표가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며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누리는 은 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않으면 영이 죽고, 영이 죽으면 나와 내 가족에 게 이유 모를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다. 둘째, 열심히 찬송하며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은 곡 조 있는 기도이며, 신앙 고백 입니다. 사울 왕이 악신이 들어 세상 근심 걱정 다하고 있 을 때, 다윗이 수금을 가지고 가서 찬송을 부르자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해졌습니다. 열 심히 찬송하면 악마 사탄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찬송을 하게되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고, 이렇게 준비된 마음으로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되면 아멘으로 화답하 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장점은 주의 종 바울 사도의 말씀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 으로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성회에 은혜 받으시려면 강사 목사님께서 말 씀 주실 때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악령이 물러가고 교회가 평안하여지 며 기도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의 욕망은 물질에 눈을 어둡게 하고 받은 은혜에 도 감사치 못하게 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자족할 줄 모르면 감사하지 못하게 됩 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듯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은혜를 주십니 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영생을 허락 하셨고 그 소용에 따라 물질도 허락하셨습니다. 중요한 건 자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항상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더 기쁘고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산성교회목사
바른 길로 행하라 사 30 :18∼22 강동수
1. 애굽의 그늘이 너희에게 쉼터가 되겠느냐? “패역한 백성들이 계교를 베풀고 맹약을 맺으나 이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재앙의 원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인간들의 잔 꾀로는 이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 길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 분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실제 로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고서야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 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몰살하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진정한 햇빛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진리의 태양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 도이시기 때문입니다. 2. 구원의 스승을 기다리라 존경받는 스승이 있고, 사랑 받는 제자가 있는 자는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은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나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라고 하셨습니 다. 이스라엘의 스승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 십니다. 가정의 달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가정주 일, 스승의 날, 청년의 날이 5월에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옷과 몸의 관계와 같다고 합니다. 옷 없이는 문명생활이 불가능하고, 몸 없이는 옷의 의미가 없습니다. 명심보감에도 “안으로 훌륭한 부모가 없고, 밖으로 엄한 교사가 없이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조지 엘리어트는 “좋은 교사는 학생을 신뢰하고 학생을 존경 하고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진실한 交感이 오가는 교 육과 존경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3. 이것이 정로니 이리로 행하라 “거친 길, 악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진리의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이 너와 함께 하시고 복을 내리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너희 모든 산업에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 는 하나님이 육축과 토지에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민족과 자연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막대기로 치실 때 그들은 낙담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노래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국가 상황이나, 교회, 가정, 그리고 우리의 교육현장이 위기를 낳고 있습니 다. 신앙인들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정로니 바른 길로 행하라.” 동신교회 목사
복음을 위하여 행 18:1-4, 롬 16:3-6 김삼환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구원 을 얻고, 입으로 죄사함 받고, 입으로 은혜 받고 입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기독교입니 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 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으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기적 이 일어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씨앗에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복음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을 비집 고 올라오는 씨앗이 능력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간 복음은 죄와 옛사람을 물리 치고 새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이 능력은 복음에만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된 부귀 영화를 꿈 꾸며 살아가고 있고 세상의 연락과 사치와 죄악에 잠들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젊은 세 대들이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이리 보아도 소망이 없고 저리 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세대는 돈이 없어서가 아 닙니다. 모든 국민이 어디로 가야 할지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헤매이 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교회에 나오면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말씀을 들으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시대를 살면서 끝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선교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많은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끊 임없이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전파 하는데 쓰임 받 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선교하는 사도 바울을 열심히 도왔으며 기도 해 주었고 여러 모양으로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하며 나가 있는 선교사를 물질적으로나 여러 모양으로 돕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우리 영혼이 평안하고 우리의 삶이 강건하게 될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 목사
나의 큰 고통을 인하여 사 38: 14-17 김창인 1. 앙망하는 신앙 (14-) 유다왕 여호사밧 때의 일입니다. 모압족속과 암몬족속 그리고 에돔족속이 연합하여 유 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유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랄 뿐입 니다. 여호사밧은 “우리는 대적할 능력이 없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간구하 였습니다. 즉 하나님만 앙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는 브라가의 승리였습니다. 위기 에서 앙망하는 신앙이 승리했다는 교훈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 도록 앙망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이 39살에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하나 님이 주신 병이기에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을 인하여 오직 하나님만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2. 길들여진 생활 (15-) 야고보 감독은 여러 종류의 짐승이나 새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약3:7). 예를 들면 야생 코끼리는 힘이 강하고 사납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길들이므 로 순화됩니다. 주인에게 순종하고 충성을 다 바칩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길들여지기까 지 굉장한 아픔의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굉장한 힘은 그대로 남은 채 부드러워 집니 다. 그러므로 길들여짐이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라고 하였습 니다. 여기서 각근히 행함은 조심해서 걷다 부드러워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길들여졌다 는 말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죽을병을 통해서 하나님께 길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을 통해 길들여 쓰시기 때문입니다. 3. 큰 평안의 축복 (16-17) 베데스다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시므로 즉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평안입니다. 그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난 예수님은 네 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는 죄 때문에 38년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죄 와 함께 병마가 모두 해결되므로 큰 평안을 얻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한 다음에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통을 인 한 회개로 죄사함을 얻었다는 고백입니다. 즉 죽을병의 고통을 인하여 평안함을 얻었습 니다 광성교회 목사
꿈꾸는 자의 하나님 욜 2:28-30 류철랑 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때 꿈을 꾸게 됩니다. “내가 내 신 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 며”(요엘2:28)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 하게 하십니다. 꿈을 꾸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 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 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4-8) 성령을 받아야 세계선교 의 비전을 갖게 되고 그 비전을 이루는 권능을 힘입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약속하 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꿈꾸는 사람되게 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꿈이 있는 자는 꿈을 말합니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꿈을 입으로 말합니 다. 요셉은 꿈을 꾸고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꿈을 말했다가 형제들에 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래도 꿈을 말하게 되고 꿈을 말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꿈을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책임 있는 인생을 만드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누구든지 이산 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 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11:23)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하 나님이 들으십니다. 꿈과 언어는 같이 갑니다. 꿈의 언어를 기도로 연결하세요.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말함으로 말하는 대로 이루시기 바랍니다. 꿈꾸는 자는 꿈을 이룹니다. 꿈이 꿈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댓가를 지불합니다. 꿈이란 시간이 흘러가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향한 한걸음 한걸음 그 자체가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들이 모여져서 꿈이 이루어집니다. 꿈 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꿈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루는 능력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집중하여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한곳에 집중된 레이저 광선이 철판을 뚫는 엄청난 파괴력을 같습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갑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꿈을 꾸고 꿈을 말하고 그 꿈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 니다. 부천동광교회 목사
성령의 능력 행 2:42~47 박은성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 때문에 시작되었다기 보다 예수님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 다. 그러니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기리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부활 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본질을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 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들 가운데 살아계신 그리스도 를 체험하면서 모이게 된 것이 교회였습니다. 1. “배우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은 극히 평범한 일인데도 이 일을 특징으로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인데도 말씀을 열심히 배웠다는 것입 니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보다 겸손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적으로 사도들의 학적 배 경이나 출신배경으로 보면 누가 배우려 하겠습니까. 베드로나 요한은 학력, 학벌이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매일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 우고 기뻐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지식을 배우려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영생 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배우려 모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게 하신 이는 성령이고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게 된 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2. ‘기도하는 교회’라 했습니다. 본문 42절 마지막에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 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성령충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충 만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 령 충만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고, 외부의 어떤 핍박이나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 다. 기도 없는 신앙 생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은 기도 생활로 지속되 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도 기도 생활을 쉬게 되면 은혜의 감격도 잃 게 되고, 마음의 기쁨이 없는 메마른 생활을 하게 됩니다. 말을 하는 것도, 말을 듣는 것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도 기도로 합니다. 모든 일은 기도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 교회가 교회다워 집니다. 성전은 ‘만인의 기도 하는 집’이라 말씀했습니다. 사단은 우리 기도 생활을 교묘히 방해합니다. 성령의 능 력으로 우리의 기도 생활이 회복되며, 초대 교회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오늘 우리 교 회에서도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대중앙교회 목사
성령이 충만한 사람 출 18:19-22, 행 6:3-6 이성희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가심으로 주신 은총입니다. 그리고 인격적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홀로 있기를 통하여 성령의 내재하심,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초대교회의 일꾼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사 람이 필요합니다. 1.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지혜도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만 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안되고 지혜가 충만하지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령과 지혜는 동시적으로 충만해야 하고 충만해집니다. 지혜란 히브리 단어로 ‘살아가는 기 술’이란 뜻입니다. 반면에 어리석다(absurd)란 말에는 귀머거리라는 뜻의 라틴어 단 어 surdus에서 나왔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지혜에 귀가 밝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하 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신을 충만하게 주셔서 지혜로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습니 다. 세례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밧과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으로 요한을 낳았습니다. 2. 성령충만한 사람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과 지혜의 충만은 칭 찬의 조건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칭찬의 대상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그는 첫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삶 은 칭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런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칭찬을 듣는 조건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은 교회의 일꾼입니다. 교회의 일꾼의 자격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 서 돌아오셔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공생애 의 조건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에게 이끌립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령에게 이끌려 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하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성령이 충만할 때에 담대 하게 전도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성령 충만은 필수조건입니다. 연동교회 목사
가정은 작은 천국 시 144:12-15 강동수 1. 현대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전통적 가정관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혈연중심의 결혼관이었다면 이제는 결혼이 당사자들의 행복추구 수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제도 자체가 급격하게 변함 에 따라 멀지 않은 장래에 가정제도의 위기나 붕괴를 예고하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 을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세상에 올 때 가정을 통해서 오고, 가정에서 살다가, 가정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만약 가정이 없어지고 가정제도 자체가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때 인류의 종말이 올 것이요, 사람은 본능에 따라 사는 신종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복을 내리십니다 기독교는 가정을 대단히 중히 여깁니다. 교회 자체가 가정제도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나 님은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아들이시고, 교회는 신부요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형제와 자 매입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요,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섬기며 사랑과 믿음과 소망 중에 서로 격려하며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 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인생의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 복은 바로 예수님이요 천국도 그 핵심은 바로 예수 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가정,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과 가르치심에 따라 사는 가정 이 바로 작은 천국입니다. 3. 가정 천국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가정은 쉼과 안식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노동으로 심신이 피곤할 때 가정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상처를 싸매고 용서와 화해의 새 장을 열어 인생 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사랑을 서로 나누는 공간 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명령으로 지도와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끌어 안고 함께 마음과 마음을 나눌 때 존경심과 효행심, 사랑의 마음이 움트고 자랍니다. 그 러할 때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사랑의 눈물이 있고 사랑의 표현이 있는 것입니 다. 아무쪼록 하나밖에 없는 나의 가정을 지상의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가시는 예술인 성 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신교회목사
지혜롭게 삽시다 잠 8:17-18 김갑식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 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8:17-20) 잠언에는 지혜라는 단어를 어떤 성경보다 많이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라는 말을 정 의하거나 설명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지혜를 넷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세째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며, 그리고 네째는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방법과 얻은 결과로서의 유익을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지혜를 얻습니다.(17절)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지혜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 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사모 하는 사람이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어 사랑을 입게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용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복을 받는 풍성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2. 하나님을 찾는 자가 지혜를 만납니다.(17절)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 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얻게 하시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탈무 드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지혜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편입니다. 그 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나 주시고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3. 지혜에는 부귀와 장구한 재물이 있습니다.(18절) 하나님은 지혜라는 방편을 통해 부귀와 장구한 재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 없이 일시 적으로 부귀를 누린다고 해도 장구한 재물은 지혜 없이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하면 부귀와 재물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지혜자 에게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믿음의 일꾼 행 18: 5-11 김창인 1. 사로잡힌 믿음 (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입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 버지가 주님께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그 아들은 악신에 사로 잡혀 자기 의지대로 살 지 못하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악신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물 론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에 사로잡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 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 도라고 확증한 까닭이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꾼은 자기의 믿음대로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일꾼에게는 말씀에 사로잡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 열심 있는 믿음 (6-8) 엘리야 선지자는 열심히 특심하였습니다(왕상19:10).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그로 하여 금 목숨을 걸고 충성하게 하였습니다. 악명 높은 아합왕 치세때에도 굴하지 않고 여호와 가 참신이 되심을 확증하였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여 승리를 하 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열심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뜻을 보면 고린도에 사는 유대인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바울을 대적하고 훼방하였으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하나님 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고린도 전도의 본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열심 있는 믿음으로 일했 기 때문입니다. 3. 환상적인 믿음 (9-11) 바울사도는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고후12:1).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모든 계시가 다 환상일 수는 없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삼층천의 계시를 받고 죽음도 불사하는 믿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 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 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환상은 황홀 한 상태에서 받은 시각적 청각적인 계시를 의미합니다. 이런 환상이 바울로 하여금 환 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하게 하였습니다. 일꾼에게는 환상적인 믿음이 이처럼 귀 합니다. 광성교회목사
모세의 어머니 출 2:1-10 류철랑 어머니는 자녀를 길러 사람답게 만듭니다. 이세상에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교사는 없습 니다. 히브리인의 영도자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 입니다. 요게벳을 통해서 나를 낳아주 신 어머니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어머니는 인간의 출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어머니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체의 자궁에서 아 들과 딸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서운 출산의 고통을 견디면서 한 생명을 출생시킵니다. 고통스러운 아픔을 참고 견디 는 것은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2,25)고 하십니다. 둘째, 어머니는 장점 발견자입니다. 어머니 요게벳에게 태어난 세 번째 아들 모세는 용모가 ‘준수’ 했다고 합니다(2절). 자녀에 대해서 어머니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점도 단점도 가장 잘 아는 이가 어머니입니다.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히11:23)임을 보았다고 했고, “그때에 모 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행7:20)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셔 도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의 장 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셋째, 어머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왕의 악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늘 어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바로는 여아는 살리고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 습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3개월이나 숨겨서 길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용기 있는 행위에 대해서 “믿음으로...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 하였으며”(히11:23)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아들의 생명을 보존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어머니는 덮어줍니다. 어머니처럼 자식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고 감춰주는 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서 나온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버트 까뮈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없었다 면 나는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눈동자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였고, 나에게 만족과 용기를 주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부천동광교회목사
청년아 일어나라 전11:9-12:2, 13-14, 눅7:11-17, 딤전 6:11-16 손인웅 세상에서는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 있고, 죽었어도 영원히 역사 속에 살 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죽은 사람과 같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아니하 고, 뜻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인류 역사 앞에서 너무나도 큰 손실입니 다. 한 시대에 청년들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든지 향락에 빠지든지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그 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또한, 지독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꿈을 상실한 채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고 하면 그들이 살아갈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청년이 왜 일어나야만 하 며, 예수께서는 왜 그를 일으키셨는가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하겠습니다. 첫째는 그 청년의 인생이 너무 원통하기 때문입니다(전11:9). 20대 청년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지도 못한 채 끝낸다는 것이 너무나 아깝기 때문입니다. 할 일 많은 세상에 서 뜻 있게 살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살려주신 것입니다(눅7:13,15). 혼자된 처지에 애지중지 키운 아들에게 많은 기대와 꿈을 걸었던 어머니가 통곡하는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그 불 쌍한 어머니를 위해서 아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효도 한번 못하고 떠나가는 불효한 아들을 살리셔서 어머니의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심으로 가정을 일으키게 하셨습니 다.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눅7:16절). 사람이 세상을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다시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청년들이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어 나라’ 하신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눅7:17절). 이 청 년이 살아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라는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정신 위에 세계를 튼튼히 세우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청년의 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전12:1-2,13-14)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 니다. 또한 청년의 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경건의 훈련을 맹렬히 함으로써 어떠한 경우 에도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덕수교회목사
좋은 길을 가르치자 잠 22:5-6, 엡 6:1-4 이성희
사람은 길을 가는 존재이고, 사람은 누구에게나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성공적 길을 가고 어떤 이는 실패의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가야할 길을 가고 어떤 이는 가지 말아 야 할 길을 갑니다. 성경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비교하여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비 교하며, 바른 길과 굽은 길을 비교합니다. 마이크 머독은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보지 말고 가야할 곳을 똑바로 쳐다 보라”고 합니다. 좋은 길을 쳐다보고 좋은 길을 가면 뒤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1. 좋은 길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로 가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길이 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 외에 갈 길이 없으며, 다른 이 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유일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 을 휘장가운데 열어놓으셨고 새롭고 살 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제일 좋은 길 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은 가장 좋은 길이 된 것입니다. 2. 좋은 길은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성경은 패역한 자의 길과 마땅히 행할 길을 대비합니다. 패역한 자의 길은 가시와 올무 가 있어 영혼을 지키는 자가 멀리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행할 길은 늙어도 떠나 지 아니하는 길입니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는 자연 육아운동이라는 것을 합니다. “태 아 때 교육이 여든까지”라는 목표로 가장 좋은 육아교육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다 거짓되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위(僞)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人)이 바뀌어야 모든 것이 편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편할 편(便)자입니다. 제도나 조직이 아니 라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좋은 길을 가르쳐야 좋은 세상이 됩니다. 3. 좋은 길은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합니다. 좋은 길은 가르쳐야 합니다. 좋은 길은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쁜 길을 가르친 자들을 소개합니다. 발람의 길을 가 르치고, 악의 길을 가르치고, 거짓의 길을 가르칩니다. 잘못 가르치면 모두 함께 멸망합 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텔레비젼 끄기 운동을 합니다. 청소년들을 비만에서 구하자는 운 동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는 책 읽고 그림 그리는 아이가 컴도사 보다 창의력 뛰어나 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길을 가르치고 좋은 길 얻기를 구해야 합니다. 연동교회목사
물가에 심기운 나무 렘 17:5∼8 강동수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다고 신랄하 게 책망하면서 유다가 택해야 할 근본적인 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저주받을 사람과 복받을 사람을 대조해서 말합니다. 먼저 저주받을 사람은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광야에 거하는 자와 같습니다. 반면 복받을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분을 순종하 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습니다. 하지만 물가에 심기운 것 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그 임무와 권리, 사명도 아울러 기억해야 합니다. 1.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영원히 푸른 나무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면서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샘 곁에 심기운 나무는 복 있는 나무입니다. 이 샘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생의 샘물 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 그리고 교회는 인류에게 목마르지 않는 샘물입 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힘과 능력과 위로를 주시는 영원한 샘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 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2.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나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인간 생존에 절대 필요한 산소를 공급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의 은혜의 빛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살맛 나는 삶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는 뜻입니다. 나무는 또한 인간들이 품어낸 모든 나쁜 공기와 오물들을 정화하여 인간 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쏟아내는 모든 거짓과 숨 겨진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3.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이웃을 돕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한 배에 탄 항해사와 선장처럼 진실이라는 핑계로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 하고 못살게 굴지만 나무는 모든 것을 바쳐 인류에게 봉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 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 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며 신뢰하므로 순종하는 자가 복있 는 자입니다. 그들은 마치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심은 뜻과 의지를 따라 영원히 푸르고 변하는 능력으로 주변을 새롭게 하고 이웃에게 유익과 기쁨을 주는 봉사의 삶을 유감없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동신교회목사
길이 참는 자의 복 약 5:7-11 김갑식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 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 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과 본을 삼으라 (약5:7-10) 본문에서 야고보는 “오래 참으라”는 뜻의 문장을 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에 “길이 참으라” 8절에 “길이 참고” 10절에 “오래 참음의 본” 11절에 “인내하는 자” “욥의 인내” 사람이 얼마나 인내하며 사느냐는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기도 합니다. 야고보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는 평안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사회부 조리와 핍박이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라고 했습니다. 1. 자연의 이치가 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농부가 땅에서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에 길이 참고 늦은 비와 이른비를 기다리는 것 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참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참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 니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거둘만한 열매가 있습 니다. 2. 아름다운 것은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10-11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 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인 내는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필수과정입니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인내가 복된 것은 모든 것에는 반드시 결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는 욥의 경우와 같 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반드시 보상의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8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이 말씀에서 주의 강림 은 종말적인 사건을 의미하기 보다는 임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9절에는 “보라 심판자 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언제나 우리 가까 이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상이 멀리 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보상할 때만 보고 계실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주여 평안을 주시옵소서 눅 10:5 김삼환 오늘 우리 사회에 많은 가정이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우리의 가정에 내려오 는 좋은 점들이 최근에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도 반증을 제시할 사 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아도 주님께로 나아오면 주님께서 그 상처를 싸매어 주 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상처받은 가정에서 자라났을지라도 주님께로 인도되면 마음에 평 안이 오고 소망이 생기고 인류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① 모든 축복과 평안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하나님께 서 가정에 베푸시는 축복을 받고 누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시편 25:12-13절 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며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가정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③ 나라가 평안하기를 힘쓰며 살아야겠습니다. 예레미야 29:7절에는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 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바벨론이 적의 국가이며 이방국가이지만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 속에 안과 밖으로부 터 수많은 전쟁과 환난이 있었지만 한번도 남을 해치거나 국경을 넘어서서 남의 나라를 침범한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민족이고 약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선교에 있어서는 장점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아무런 저항없이 복음 으로 국경을 넘어서고, 복음으로 남에게 유익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민족이 되었습니 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직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이제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평화를 잘 유지하 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평안과 국가의 평안이 강같이 흐를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 아서 영혼에 평안을, 가정에 평안을, 그리고 이 민족에 평화를 가져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예수의 소문 눅 7: 11-18 김창인
1. 찾아오시는 예수 (11-12)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찾아가셔서 숨어있는 그들 부부를 기어이 찾아 내 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셨 고 가죽옷은 예수님의 의를 뜻합니다. 여하간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문제 의 실마리는 찾아오심에서 풀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인성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과부의 독자의 장례행렬과 마 주쳤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불행 당한 과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 히 여기셨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불행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입니다. 2. 바꿔 주시는 예수 (13-15)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아버지일지라도 생선을 달라 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지 않습니다. 알을 달라 하는 자식에게 전갈을 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 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더 좋은 것에 대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신 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알을 구하고 생선을 구하는 성도에게 성령으로 바꿔주신다는 뜻입니다(눅 11:13).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관 뚜껑을 여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즉 죽음을 생명 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공동묘지로 가 던 것을 집으로 방향을 바꿔주었습니다. 즉 초상집을 잔치 집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예수 님은 이처럼 성도들의 불행을 바꿔주십니다. 3. 챙겨 주시는 예수 (16-18)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일곱 제자 가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 했습니다. 피곤한 제자들을 위해서 떡을 준비하시고 생선을 구웠습니다. 시장한 제자들을 불러서 실컷 먹게 하셨습니다. 즉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챙겨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과부의 독자를 살려 주신 일을 목도한 후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 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야 합니다. 그들은 이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셨다고 하였습니다. 돌아보 셨다는 말씀은 챙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과부의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아시고 챙겨주셨습니다. 광성교회목사
마음을 자녀에게로 말 4:6 류철랑
이세상에서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더 신실하고 지속적이며 애틋한 사랑은 없습 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 주신 독생자만큼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주는 것이 최고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 라 정신입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정복해야 합니다. 부모들이 때로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마음이 너무 조급한 것을 봅니다. 어린 자녀 들의 현재만 보고 조바심을 합니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수학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수를 받았습니 다. 실망한 담임선생님은 가정통신란에 이렇게 적어서 보냈습니다. “이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공부로는 희망이 없으니 아예 다 른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기 때 문에 틀림없이 비범한 인물이 될거야”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은 아인슈타인은 자신 이 좋아하는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세 기의 과학 연구 이론으로 평가되는 상대성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오늘,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기를 주는 격려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격려 한마디는 자녀에게 다른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조바심으로 속단하지 맙시다. 꿈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것이지 하룻밤 사이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에 대한 이해심을 가지고 지켜봅시다. 마음을 준다는 것은 이 해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자녀들의 깊 은 내면까지 잘 아는 선한 목자 같은 부모,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문제를 풀어주고 꿈 과 용기를 불어넣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의 마음이 부모에게로 돌아 올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교류하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을 믿는 마음을 자녀에게 줍시다. 예수를 주면 최고의 유산을 준 것입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좋은 청년이 되는 길 시 119:9-12, 딤후 2:22-23 이성희
청년은 사회의 희망이자 교회의 미래입니다. 청년은 가장 힘이 있는 시기입니다. 청년 은 가장 유혹이 있는 시기입니다. 청년은 가장 복된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님은 이 땅에 청년기에 일하셨으며 청년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청년 은 살려야 할 시기입니다. 청년은 대신 죽어야 할 시기입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살 고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좋은 청년이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변하는 청년이 되어 야 합니다. 1. 행실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잠언 25장 4절에는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 요”라고 합니다. 금이나 은도 돌에서 불순물을 제거해야 비싸고 아름다운 보물이 됩니 다. 우리도 찌끼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혼합물을 깨끗하게 하는 노력이 있 어야 합니다. 몰리노스는 “고난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깨끗 하게 하는 고난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세상 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깨끗하게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깨끗이 합니다. 2.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은 창조 때부터 짝이 되어 일했다고 켄 가이어는 말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는 삼가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힘은 있 고 이성적 판단과 절제가 부족하면 혼란에 빠집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친 과음과 과식으 로 건강과 생활을 망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생활은 파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예 악인의 죄와 멀리 살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이 좋습니다. 시편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합니 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고 삼가게 하는 것입니다. 3.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는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 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합니다. 성경은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 라고 여러 번 권합니다. 동물 조련사는 동물에게 반복적인 훈련을 통하여 반사적으로 행 동하게 합니다. 훈련이 우리를 말씀에 대한 반사적 행동을 하게 하며 바르게 살게 합니 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으로 과시만 할 것이 아니라 세 상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힘을 세상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청년이 좋은 청년입니 다. 연동교회목사
귀히 쓰임받는 청년 딤후 2:22-23 김갑식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 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줄 앎이라 (딤후2:22-23)
한 나라의 장래가 청년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청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 나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깨끗한 그릇과 같이 준비되어 하나님 뜻에 합당 하며 귀히 쓰임 받기 위하여 주의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합니다.
1.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의 특성은 피가 끓고 의욕이 넘치며 무엇이든지 하고자하는 열정이 강합니다. 그러 나 이열정이 통제를 받지 아니하고 이기적인 욕망이나 세속적인 욕망에 빠지게 되면 국 가의 기조가 흔들리고 교회의 장래는 세속화로 치닫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은 육신의 정과 욕심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요셉과 같이 깨끗하게 사는 신앙이라야 합니다. 2.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22 절)는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 는 자들과 함께 사귀는 것이 전제되어야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을 수가 있습니 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웃에게 영향받기가 쉽습니다. 그래 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바른 신앙을 소유한 자와 함께 어울리면서 바 른 신앙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23절) 비생산적인 언어 생활은 다툼을 만드는 것외에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끼 치는데 소용되는 말을 해야합니다.(엡4:29) 언어 생활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도 우리는 비생산적이거나 유익이 없는 모임이나 오락은 삼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툼을 일으키는 모든 행동은 반드시 제한되어야 합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예수님의 사람을 보라 막 10:13-16 김삼환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잘 자라도록 힘써야 하며 믿음의 자녀로 양 육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아이를 잘 기르는 길은 하나님을 잘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나올 때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올 때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품 은 사랑의 품입니다. 능력의 품이며 은혜의 품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품에 안길 때 구원 의 은혜와 신령한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또 어린아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주 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축복’이란 말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복은 여기저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 로몬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반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허랑방탕하고 어두 운 삶을 살았지만, 예수를 잘 믿는 친구를 만남으로써 성경을 읽게 되고, 사업이 잘 되 고, 주지사가 되었으며 끝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적 부흥 운동 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인 록펠러의 어머니는 어린 록펠러에게 믿음 생활에 관하여 다음과 같 은 10가지 수칙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①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②목사님을 하나 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③주일예배를 본 교회에서 드려라 ④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 조 주머니로 하라 ⑤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⑥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⑦ 저녁에 잠자리를 들기 전에 반성하여 기도하라 ⑧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⑨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⑩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 이것은 오늘 우 리 시대의 가정에도 매우 합당한 교훈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할 일은 한나처럼 우리의 자녀들이 오직 하나님을 잘 경 외하고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온갖 복을 주 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녀들과 이웃에게 받은 복을 나누며 격려하며 용기 를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하나님의 선물 전 3:10-13 김창인
1. 사모하는 마음 (10-11)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마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길바닥 같은 완 고한 마음, 돌밭 같은 메마른 마음, 가시덤불 같은 꽉 막힌 마음에는 결실이 없습니다. 옥토 같은 기름지고 순수한 마음에서 말씀의 열매는 백 배를 맺습니다. 마음이 깨끗하 면 생각도 생활도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인생에게 주신 노고는 때를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은 인생의 노고 중에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모든 고난을 이기어 복되게 하 십니다. 이처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생활이 다릅니다. 영원을 위해서 전력투구하기 때문입니다.
2. 선행의 기쁨 (12-)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유대인 들이 송사하려하여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뻐하며 선한 일을 하셨습니 다. 본문을 보면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하였습니다. 즉 솔로몬은 선을 행할 때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선행의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3. 수고의 복락 (13-) 이스라엘백성들을 성전에 올라가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것이 곧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수고한대 로 먹고 누리는 복은 하나님의 선물로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받는 복락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 인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수고한 만큼 먹고 누리는 복락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하게 수고하며 일하는 자에게 복락을 베푸시기 때문 입니다. 광성교회목사
나의 기업이 아름답도다 시16:5-6, 엡1:11-14 김형기
하나님은 그 지으신 뭇 족속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 습니다.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고, 은혜 복을 주셔서 당신의 기업으로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당신의 선하고 의로운 뜻을 이루시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의 영광을 만방에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저버리고 불순종하며, 죄악 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 는 패역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진노하셔서 이방족속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시 고 그 애지중지하시던 기업을 폐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이 방 족속들 중에서 예수를 주로 영접한 자들로 교회를 조성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 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기 업이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부어 주셔서 이 교회를 충만케 하고, 부요 케 하며, 권세 있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인이 찬송은 곧 우리의 찬송이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내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켜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 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제 영원토록 살아계신 주님, 전능하시고 부요하시고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 이 되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은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그 가문과 나라도 대대로 화평 과 부요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아들을 통하여 조성하신 교회는 우리의 아 름답고 위대한 기업입니다. 이 기업이 잘되고 흥왕하면 우리 모두가 잘되고 흥왕하게 됩 니다. 나라가 잘되고 민족이 창대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잘 되고, 장차 영원한 나라 까지도 상속 받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아름답고 위대한 기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도 대를 이어 서 이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충성하여 창대함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 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도록 헌신하면서 사랑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경주제일교회목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신6:1-9, 마5:43-48, 요일3:17-18 손인웅
우리가 부모나 교사로서 자녀들이나 학생들에게 무엇을(내용), 어떻게(방법) 실제적으 로 교육해야 할 것인지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편의상 교과 내용과 교육방법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첫째로 사랑으로 사랑을 가르칩시다(신6:4-9).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예배드리는 생활을 통해서 가르칩시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 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을 보입시다. ②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칩시다. 이웃을 사랑하는 교육은 희생적인 봉사활동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요일3:17-18). ③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칩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이 세상(요3:16)과 만물 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생 활을 통해서 생명 사랑의 교육을 해야만 합니다(골1:20).
둘째는 믿음으로 믿음을 가르칩시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사도 신경에 나오는 순서대로입니다. 하나님, 예수 님, 성령님, 교회, 성경, 창조, 죄사함, 부활, 종말, 영생 등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내 용들을 어떻게 자녀들이나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 치는 사람들이 그 모든 내용들을 확실하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실증 해 보여주는 것입니다(약2:21-26).
셋째는 소망으로 소망을 가르칩시다(롬8:24-25).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소망에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적인 삶 을 살아가면서 항상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망에 넘치는 삶 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만 소망에 대한 교육이 가능해 집니다. 넷째로 우리의 자녀들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교육을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가치 관과 의로움에 대한 교육도 병행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의롭게 살아감으로 그리스도적 가치관이 형성되고 의로운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딤후3:16- 17). 덕수교회목사
그리스도인 청년의 삶 전11:9-10, 딤후2:20-23 이성희
필립 매신저는 “청년기는 마치 고급 양피지와 같아서 그 위에 무엇이든지 새겨 넣을 수 있다”고 하였다. 청년기는 기회와 가능성의 시간이다. 청년기의 자세는 기회도 가능 성도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청년기는 모든 것이 새로운 시기이다. 그러나 혈기가 절제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 감성이 이성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육체가 영혼을 이기지 못 하게 해야 한다. 우리 청년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결심이 있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미 래의 일꾼들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청년의 때는 삶은 어떤 삶인가? 1. 청년의 때를 즐겨라. 성경은 청년에게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라고 한다. 청년 은 인생의 절정기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놓치지 않게 즐겨야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 자체만을 위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마음에 원 하는 대로 가고 싶은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무절제한 방탕으로 타락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심판을 전제로 자유를 만끽해야 한다. 기독교는 지나 친 방종주의나 극단적 금욕주의를 다 배격한다. 2. 근심을 떠나게 하라.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라고 성경은 권한다. 청년들도 미지의 세계에 대 한 근심이 더 많다. 근심이란 말은 분노, 슬픔을 의미하는데 인생의 낙을 누리는데 방해 되는 슬픔의 요소를 제거하라는 뜻이다. 인간을 파괴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상하며 육적 인 쾌락으로 몸을 병들게 한다. 근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유익하고 생산적인 근심 이 있다. 생산적인 근심을 할 줄 아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쓸모 없는 근심에서 떠나면 생산적인 영적인 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된 다. 3. 악을 물러나게 하라. “악으로 물러나게 하라”는 말씀은 육신의 고통이 떠나게 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악은 육신의 고통이며 육체적으로 따라 사는 삶이 결국 악이고 그 악의 종국은 고통이다. 지 나친 방종과 타락에 처하지 않도록 자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청년 시절에는 이성의 유혹을 조심하고, 장년 시절에는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노년 시절에는 명예의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이지만 본능대로만 살면 동물과 다름이 없 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한다. 청년 문화가 영혼을 죽게 하는 것 이 많이 있다. 청년들이 미래가 있고 즐길 줄 알며 악을 물리치는 청년이 되자. 연동 교회목사
한 어린이를 통한 축복 요 6:5-13 김갑식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 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 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 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 6:9-11) 오천이 넘는 장정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거둔 오병이어의 기적을 모르는 성 도는 없을 것입니다. 기적의 질에서나 양에서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이 기적은 기적의 크기에 비해 기적을 불러온 사람은 이름 없는 “한 아이”였다 는 점이 더욱 대조를 이룹니다. 기적에는 남녀노소가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특히 교 회는 어린이의 믿음도 소중히 여길 때에 기적을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어 린이를 통한 기적의 의미를 살피고자 합니다. 1. 한 어린이와 오천 장정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장정 오천이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소자 한명이 주님 의 은혜로 말미암아 능히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어린이주일이 아니라도 한 어린이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천국이 어린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영적인 것은 결코 육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일은 어른과 어린이를 떠나 믿음의 정도와 헌신의 여부에 따라 맡겨져야 할 것입니다. 2. 적은 헌물과 많은 축복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는 지극히 보잘것 없는 어린이의 혼자 먹을 만한 분량의 음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천명의 장정을 배불리는 음식이되었고, 남아서 열두광주리 나 거두어 드린 분량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결코 양적으로, 눈에 보이는것 만으 로 할 수 있다 없다를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보이는 것외에도 보이지 않 는 믿음의 실체까지를 포함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 한분이 만인과 만물 보다도 귀중합니다. 한 어린이나 다섯마리의 물고기 보리떡 다섯개 이러한 것에는 결코 어떠한 능력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미약한 것이라도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붙들렸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손에서는 아무리 미약하고 미천한 어린아이일찌라도 강하고 귀하게 될 수 있음을 믿어야할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영원히 영원히 오직 여호와 사 26:4 김삼환
이번에 유럽 선교사 대회를 인도하고 오면서 우리나라가 더욱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뜻대 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유럽을 비롯하여 온세계 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은 매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유럽에서는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인간 복제까지 시도되고 있는데 이로 인 해 인간의 존엄성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간들이 감수해야만 하 는 고통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불신앙과 교만과 멸망은 언제나 같이 다닙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에스겔 31장에는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의 키 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빼어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 이 물가에 있는 모든 나무로 키가 높다고 교만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는 교만한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비유입니다. 교만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앗수르, 두로, 애굽 도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우상숭배와 사치와 음란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 으면 영적으로 병듭니다.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을 치료하는 길은 온 민족 이 다시 한번 신앙을 회복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 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 아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각양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구약 잠언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여호와 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셨고, “여호와를 경 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하셨으며, “겸손 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첫째, 물질의 축복이 옵니다. 둘째,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와 삶 의 영광이 따라옵니다. 셋째,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얻는 줄 믿습니 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일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자 녀가 잘 되고, 물질도 복을 받고, 이름도 존귀하게 되고 하늘과 땅의 온갖 축복이 다 찾 아오는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귀감이 되는 믿음의 가정 행 10:1-5 김창인
1. 경건한 가정 (1-2) 예루살렘교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박해로 인하여 사도들 외에는 사마 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들은 스데반의 순교현장 을 지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감히 누구나 나서지 못하는 때에 그들이 용감히 나서 서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일을 해내더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고넬뇨의 가정이 등장하는데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 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경건은 좋은 예배라는 뜻으로 경외와 구제와 기도를 나타냈습니다. 즉 경건은 생활에까지 이어졌습니 다. 고넬뇨의 가정은 경건하여 믿는 가정에 귀감이 됩니다.
2. 열려진 가정 (3-4상) 성도들의 마음이 열린 경우와 닫힌 경우는 천양지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요나는 선지자 이면서도 닫혀진 자입니다. 니느웨 전도를 죽기 보다 싫어 했습니다. 불순종하기도 하였 지만 나중에는 니느웨 백성들의 구원까지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열린 일꾼이었 기에 세계선교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열림과 닫힘의 차이는 밤과 낮만큼 다릅 니다. 본문을 보면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왔습니 다. 고넬뇨는 그 천사와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고넬뇨의 가정은 하늘을 향해 또는 이웃을 향해 열린 가정이었습니다(행10:24) 그 가정을 통해 큰 역사가 일었습니 다. 열린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열납 된 가정 (4하-5) 한번은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은 잘하 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내가 알바 아니라는 듯이 살아갑니다. 동시에 교회에 나와서는 열 심히 봉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봉사를 도무지 모르겠다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기분대로 명예를 위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나타내고 영광을 모두 다 받았기에 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도 열납 되지 못했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불 행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 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고넬뇨의 신앙생활 전부가 열납 되었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뇨의 가정은 하나님께 열납 된 가정의 모델입니다. 광성교회목사
안보고도 믿는 자들 요 20:29 류철랑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 수를 안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하나인 도마입니다. 부활하시던 날 저녁때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예수께서 거기 오셨습니다. 그때 마 침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고 하자 도마 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에,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안겠다고 합니다(요 20:25).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도마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만져보고 믿음 없 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며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 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보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복있는 자입 니다. 보면 더 잘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현실 때문에 예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기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을 꼭 보아야 믿겠다는 것 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보고 또 보아도 못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이 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안보고도 믿습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 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 9) 어떤 사람이 나를 불신하는 것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부터 신뢰를 받는 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때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빛이 있어도 시력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 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어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믿으려 말고 듣고 믿어 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보고 믿은 것이 아 닙니다. 그들은 모두 안보고도 믿었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바라보며 모험하게 합니다. 결단하게 하고 문제를 향해 도전하게 합니다. 믿음은 비전입니다. 비전은 선견이요, 상 상력, 통찰력입니다. 믿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며 삽시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달란트 비유의 교훈 시126:5-6, 마25:14-30, 살전3:11-13 손인웅
1. 달란트의 의미 달란트라는 말은 지금은 ‘재능’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특별히 연예인들 을 ‘탈랜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 비유의 목적 예수께서는 종말과 재림에 대한 교훈을 하시는 중에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시고 그 이후 에는 반드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과 주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다시 오신다 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까? 달란트 비유에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능의 차이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똑같은 것 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하 만민중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으며,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 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찾아 개발해야만 합니다. 둘째는 깨달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깊은 마음과 의도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자신에 대한 깊은 배려를 깨 닫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과 불공평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이 한 달란트라고 해서 적다고 생각했다면 큰 잘못입니다. 주인 의 사랑과 배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인을 사모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주 인의 뜻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두려움과 나태와 불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노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깨닫는대로 올바른 가치관과 적극적인 태도로 최선의 노력을 하면, 갑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열 달란트를 구하시지 않으시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심지도 않고 거두게 된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기 뻐하십니다. 마지막으로는 결과의 차이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심는대로 거둔다(갈 6:7)’,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9:6)’는 원리 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덕수교회목사
좋은자녀가 되는 길 출 20:12, 엡 6:1-3 이성희
외국에 입양된 한국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다시 한국에 와서 뿌리를 찾습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 다. 뿌리를 알면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훈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부모에 대한 구타와 유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주신 부모에 대하여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1.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자세 로 대전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옳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 다. 불순종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옳다라는 헬라어는 디카이오스로서 의롭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꼭맞다는 뜻입니다. 순종하다라는 말은 ‘듣는다’ 는 뜻의 라틴어 아우디레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에서 바친 사건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도 위대하였습니다. 순종은 예수님의 마음 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2.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는 것은 높은 가격을 매긴다는 뜻입니다. 또 소중히 여긴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 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께 높은 위치를 매겨 놓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하나님께 향하는 자세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공경이라는 단어가 31번 나 오는데 부모에 대하여 17번 하나님께 대하여 7번 그리고 나머지가 7번 나옵니다. 공경 은 부모님과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복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3. 부모님의 훈계를 듣는 것입니다. 잠언 4장 1절은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고 합니 다.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꾸지람을 잘 듣지 못합니다. 훈계를 듣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훈계가 없으면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도 내 아버지에 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고 말합니다. 가정의 달 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좋은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연동교회목사
맛보아 알찌어다 시 34:1-8 김갑식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 하리로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 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34:1,7-8)
이 시의 편집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기 록했습니다. 사무엘상 21:10 을 보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가드왕 아기스 에게로 갔으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봄으로 그 신분을 숨기려고 미치광이 시 늉을 하여 겨우 그 위기를 모면한 비참한 광경을 볼 수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은혜의 맛을 보았습니다. 본문의 간증 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찬송의 맛을 알았습니다.(1절)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찬송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항상 찬송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 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찬송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복을 주시며 위기의 상황에서 피 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시 22:3) 누구보다 찬송을 좋아하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 의 사랑을 입게 되었습니다.
2. 기도의 맛을 알았습니다.(4.6절) 다윗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 은 죄라고했습니다.(삼상12:23) 다윗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았던 것입니 다. 그래서 맛보아 알라고 했으며(8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절)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외적 증거요, 동시에 신앙인의 특권인 것입니다.
3. 소망의 맛을 알았습니다.(5절) 다윗은 주를 앙망하므로 광채를 입었고 이로 인하여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확신했습니 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것이며, 또 하나님을 앙망하는데 있습니다. 이사야는 “오 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 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라고 했습 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 행 4:19-20 김삼환
최근 광우병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에게만 광우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원치 아니하는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문화를 파괴하고, 인 간의 풍요로움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건강한 정신, 훌륭한 인격에도 이런 바이 러스가 침투하면 순식간에 사람이 잔인해지고 강퍅해지고 음란해집니다. 가정에도 침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막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막아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기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어둠의 세 력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약이며 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도록 개발된 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 어두움의 세력이 많 고, 악한 세력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은 깨어 기도하면 모든 어 두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며 항상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믿음의 생활은 쉽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의 손이 가까이 와 계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내 가까이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축 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위대하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 다. 기도하는 사람 옆에는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입니다. 보고 듣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보 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경 험하지 않는 신앙은 힘이 없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 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날마다 보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좇아낼 수 있습니 다.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소망과 믿음이 넘치는 삶은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우리는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하면 결과가 참 좋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기도하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할 때에 가정에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여 건강 한 가정이 되고, 이 나라가 힘있는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즐거움을 갖고 삽시다 시 21:1-4 김창인
1. 응답의 즐거움 (1-2) 이삭은 결혼 20년이 되었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심각한 문제였고 자녀에 대한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이것은 기도할 문제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아내 리브가가 잉 태하였습니다. 기도응답의 결과였지만 그 이후에는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쌍둥이가 태 중에서 싸우고 있음을 아내 리브가가 기도했더니 작은 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는 응 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도응답의 결과는 즐거움입니다. 기도응답 이전에 소원을 먼 저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2절) ‘그가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 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다윗에게 소원을 주셨고 다윗은 그 소원을 갖 고 간구한 결과 응답을 받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응답의 즐거움입니다. 2. 영접의 즐거움 (3-) 예수님의 탕자비유에서 둘째아들이 실패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사랑으 로 그를 영접하였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을 비난하며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접하여 잔치를 하고 모든 것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접이 탕자에게는 더 없 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영접하사 왕으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부모도 그를 축에 끼워 주지 아니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영접하 사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접의 즐거움입니다. 3. 영생의 즐거움 (4-)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사람은 없습 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 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긴 잠을 자는 것 뿐입니다. 주 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었던 육신이 잠자다가 깨는 것처럼 다시 살아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라고 하였 습니다. 영영한 장수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영생의 즐거움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작은 전도자 왕하 5:1-10 김형기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 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전에 아람사람 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 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 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용사로서 왕의 신임을 받는 존귀한 자였다. 전에 아람인들 이 떼로 이스라엘 땅에 침입하여 한 여자아이를 사로잡아 갔다. 저들은 그 소녀를 나아 만 장군의 집에 보내어 그 아내의 몸종을 삼았다. 소녀가 나아만이 문둥병자인 것을 알고 나아만의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주인이 사마 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소녀로부터 들은 말을 아람 왕에게 고했다. 아람 왕은 많은 예물과 함께 편지 를 써서 이스포로로 잡혀간 한 이스라엘 소녀의 믿음의 말 한 마디, 곧 전도로 이루어 진 하나님의 역사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해 준다. 1. 하나님은 한 작은 여자아이를 통하여 큰 일을 은밀히 계획하고 준비하셨다. 그녀는 원수 나아만을 불쌍히 여겨서 그의 병이 낫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작은 전도자는 분노와 원한을 사랑으로 갚았던 것이다. 2. 소녀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음을 자랑했다. 종노릇하는 여자아이의 믿음의 말 한 마디가 용사 나아만과 아람 왕의 마음을 움직였 다. 주님이 은밀하게 배후에서 역사하신 것이다. 3. 이방인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존 경하고 순종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시고,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 졌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겉모양이 강하고 존귀해도 실상은 약하고 추하다. 하나님 을 믿는 사람은 겉모양이 작고 미천해 보여도 실상은 저보다 강하고 존귀하다. 주님의 손길은 섬세하다. 내가 심히 작을지라도 전도자가 되면 사랑으로 원수를 이기고, 모든 역경과 큰 환란도 능히 이길 수 있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나를 통해서 뜻밖의 큰 일을 이루어 주신다. 성도 여러분, 작은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사랑 과 평화와 생명의 기적을 이루는 주인공들이 되길 바랍니다. <경주제일교회목사>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시16:8-11, 요20:19-29, 고전15:1-11 손인웅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변하였으며, 부활의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놀 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고전15:1-11).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요20:1-18). 참혹하게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절망과 슬픔으로 소망을 잃어버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 님을 만난 후에 기쁨과 소망에 넘치는 사람으로 놀랍게 변하였습니다. 둘째는 베드로를 비롯한 열 제자들의 변화였습니다(요20:19-23).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실패를 경험하고 실의에 빠진 채 좌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안할지어다’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확신에 넘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요20:24-29).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인도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다고 합 니다. 넷째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발걸음을 돌이켜 주셨습니다(눅24:13-35). 주께서 함 께 하심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다시 예수살렘으로 돌아와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전 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방향을 그리스도께 로 바꾸게 됩니다. 다섯째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모이는 부활신앙 공동체로 교회가 탄생하 였습니다.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사 만민의 주가 되게 하셨고, 만국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섯째로, 사울이라는 청년이 유대교에 심취하여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모이는 교회 를 박해하여 뿌리를 뽑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았습니 다. 그래서 박해자 바울이 변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가장 유력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일곱째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안식일 집회를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부활의 날로 정하여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차별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변화를 받아서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주 님을 증거하다가 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피로 물들 여진 순교의 역사가 바로 주님의 부활을 웅변으로 증거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 다. <덕수교회목사>
죽기 전에 구할 두 가지 잠 30:7-9, 약 3:13-18 이성희
만일에 지금 한 가지만 구하려면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입 니다. 잠언서의 현자는 자신의 구할 것으로 현실적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 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가로 내 자신을 평가받습니다. ‘여호와가 누구 냐’라는 질문은 ‘무엇 때문에 여호와가 내게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같은 뜻입니다. 바른 것을 구하여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괴테는 “내가 하나님께 구 할 2대 소원은 청순한 마음과 위대한 사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소서. 현인의 첫째 소원은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해달라는 것입니다. 허탄과 거짓말이란 허무 함과 거짓말, 거짓과 거짓말하는 것, 악함과 거짓말 등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즉 진실 한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 는 사람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해 달라고 합 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허탄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 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가 있답니다. 보통 거짓말과 못 된 거짓말과 그리고 통계 숫자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허탄한 것과 거짓된 것이 너무 많 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어야 합니 다. 2.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소서. 현인의 둘째 소원은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일수 록 일용할 양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 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40년 동안 주신 것은 일용할 양식인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하루의 양식이었고 욕심으로 많이 거둔 자는 벌레가 생겨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어 진 수입으로 적당하게 사용하면서 사는 생활에 만족하겠다는 것이 현인의 생각이었습니 다. 이러한 자세는 신앙생활의 진수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 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여 도적질한 사람들도 많 이 있습니다. 장발장이 그랬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실수를 피하려면 나의 소원은 무엇인 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매일 소원이 몰려 올 때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 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동교회목사>
누가 의롭습니까?
눅 18:9-14 김갑식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 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 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 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3-14)
본문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하였던 바리새인에게 주님이 들 려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세리보다 의롭게 살려고 했던 바리새인이 훨씬 더 의로운 것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세리를 바 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주님이 의로 여기신 이유와 의의 기준을 본문에 서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은 절대적인 의를 강조하십니다.(11절) 바리새인의 기도에 나타난 그의 의는 상대적인 의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 새인은 자기가 세리보다 의로우면,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 신이 처한 위치와 환경의 관점에 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적인 기준 속에서 의와 불의를 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은 결과 보다 동기를 보십니다.(13절)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말할 때에 십일조를 드린것과 이레에 두번 금식한 것을 강조하였 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행위의 결과 보다 그 동기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보이기 위한 의인가 아니면 마음 속에서 우러난 의인가에 주님의 관심은 있었습니다. 보 기에는 의로와도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3. 주님은 용서받은 의를 강조하십니다.(14절) 우리가 의인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아 죄를 간과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 니다.(롬3:25)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의롭다고 주장할 육체는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롬3:10 롬3:23) 이런 점에서 오히려 자신이 죄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 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있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1:8-10) 우리가 의로운 것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엡2:8) <백운제일교회목사>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가 고전 15:50-58 김삼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신다”는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②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에게 사망과 생명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사망이 왕 노릇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은 패배 하고 마귀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한 왕 이 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에 게로 가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을 넘을 길이 없습니다. 죽음을 극복할 어떤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살아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 그 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③ 주님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 며 한 분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주 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④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저주와 어두움과 불의 에서 떠나서 주님과 함께 빛과 진리와 믿음의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나와 활짝 핀 새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으 로 이 세상을 살 때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의 승리요,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 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기시었습니다. 진리가 이기며 말씀이 이기었습니다. 인간의 어 떤 힘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정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 람들을 핍박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예수 그 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 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부활하시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과 함께 승 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
일평생 여호와 앞에 왕상 15:9-15 김창인
1. 정직한 생활(9-12) 성경은 다윗의 정직한 생활을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 니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5:5). 성경이 말하는 정직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또 는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데 그 정직의 본보기가 다윗입니다. 세상에 정직하다는 사람은 많아도 결코 똑같지는 아니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직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여”라고 기록하였습니 다. 아사왕은 여호와 앞에 정직함 때문에 남색하는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소탕하였습니 다. 그 정직함은 다윗을 본받은 정직이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겠습니 다. 2. 정리의 생활(13-) 예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 세관 앞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 습니다. 마태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차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청하지도 아 니한 바리새인들도 참석했습니다. 마태의 잔치는 그 날로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는 잔치였습니다. 직장을 버리고 친구들과 결별하는 주변정리의 자리였습니다. 우 리는 항상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 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습니다. 아사는 아버지와는 달리 신앙을 정립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였습니다. 주변정리가 우선 입니다. 3. 성별의 생활(14-15)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만드시고 그 한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습니다. 모든 과실은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역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먼저 구별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엿새동안 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완성이 오늘의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 중에서 주일을 성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것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자기의 것이라고 하셨기에 성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사왕은 이처럼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성별의 생활을 하 였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예수 만찬 마 26:26-30 류철랑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알아차 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심각한 시간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있을 가롯유다의 배신 과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몸을 떡으로, 피를 음료로 내 놓아야 하 는 고통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 떡, 예수의 몸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26절)고 하 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요6:48)라고 하십니다. 초대 교회는 떡을 나 누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2:42, 46-47). 교회는 예수님의 몸을 먹고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 은 그의 몸을 먹으며 삽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를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양식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2. 잔, 예수의 피 예수님은 잔을 주시며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 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7,28절).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 원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버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어린양이 피 흘려 죽임을 당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 장자의 죽음이 비켜간 것처럼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 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라고 하셨습니다. 피 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그 잔을 받아 마시는 것입니다. 참 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피의 잔을 마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입니다(계7:14). 예수의 피를 마시는 자만이 구원의 반열 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 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의 떡이요, 피이신 예수 를 먹고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에4:13-17, 요19:28-30, 고전15:50-58 손인웅
성경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나가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싸움의 대상과 방법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싸움의 대상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① 성경은 사탄(악령)을 가장 중요한 대적자(主敵)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창3:1-2. 마 4:1-11. 엡6:12. 계12:9, 20:1-3, 7-10). ②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든지, 사탄의 종노릇하는 사람 이나 집단을 말합니다(마16:23. 눅22:3. 엡6:12). ③ 자기자신입니다. 사람이 싸워야 할 대상 중에 가장 어려운 상대가 자기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각한 갈등 속에서 내적 투쟁을 하였으며(롬7:21-25), 자기자신을 쳐서 그 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을 계속하면서(고전9:27),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고 있 습니다. ④ 사망권세입니다. 다윗왕의 고백대로 죽음의 길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 임에 틀림없습니다(왕상2:1-2. 히9:27. 롬5:14, 21). 둘째로, 어떻게 싸워야만 이길 수 있겠습니까? ① 악령과의 싸움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마4:1-11. 엡 5:18). ②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엡6:17. 시119:165. 히4:12). ③ 쉬지 않고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엡6:18). ④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26:42. 빌 2:5-11). ⑤ 예수께서는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 면 찾으리라(마16:24-25)’ 셋째로, 그리스도의 승리가 인류와 창조세계에 어떤 결과로 나타났습니까? ① 인류의 구원이 가능해 졌습니다. (롬5:8-17). ②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셨습니다. (빌2:8-11. 계7:12). ③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일5:4. 계22:5). <덕수교회목사>
경건한 사람의 네 가지 습관 신 14:22-23, 행 10:1-8 이성희
에베소서 4장15절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영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그리스 도인이 자랍니다.
1.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성경은 기도의 습관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고 했으며, 예수님 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하였으며, 무 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시작이 있지만 끝이 없는 것입니다. 루터는 너무 일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2. 공부하는 습관입니다. 예수님은 배우라고 권합니다. 바울도 모든 사람에게 배우게 하라고 하였고, 배운 바를 행하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유 대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말대로 학습하여야 할 두 가지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말이 있는 교과 서이고 다른 하나는 말이 없는 교과서입니다.
3. 헌금하는 습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 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 며 약속한 대로 미리 준비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환난이 있을 때에 극 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습관 이 되고 정성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연보가 될 수 있습니다.
4. 친교하는 습관입니다.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 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 아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신약 의 교제는 단순한 사귐 이상의 참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가 장 중요한 친교입니다. 이러한 습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입 니다.
부활의 주를 만납시다 눅 24:13-32 김갑식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 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 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 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1:30-32) 오늘은 우리 문화권에서는 아직 미약하지만 세계의 3대 명절인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명 절의 분위기에 적합하게 부활의 주님을 믿는 신앙은 어떠할까요? 서방의 신학에서는 부 활의 주님을 잘 논하지만 잘 믿지는 않습니다. 부활을 아는 것은 쉬워도 믿는 것은 쉽 지 않습니다. 부활이 어떻게 인식되고 믿어지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조명코자 합니다. 1. 육신의 감각으로는 만나지 못합니다. 본문은 엠마오로 가는 글로바와 한사람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처음부터 그들과 동행하였 고(15절), 여인들이 부활의 증거를 제시했고(22절), 제자들이 확인했으며(24절), 미리 주님이 예언하셨을 뿐 아니라(마16:21), 천사들이 증거하기까지 했습니다.(23절) 그러 나 부활은 육신의 감각으로는 알지 못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인식한 것은 주님이 자세히 설명했고(27절), 성경을 해 석하여 주셨을 때에 깨닫게 되었습니다.(32절)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 로 된 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딤후3:15) 또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 기 때문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롬10:17절) 이런 점에서 해석된 말씀인 설교는 중요합니다. 3. 성령의 역사로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본문에서 두 제자들도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돌 아가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교육과 일반교육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하지 않고,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 라고 하셨으며,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한 사람이 주신 선물 롬 5:14-15 김삼환 지난 4월 5일 2001년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이번 개막경기에는 애 덤 킹이라고 하는 9살 난 소년이 시구를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1995년 미국으로 입양되 어 간 아이인데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이 붙어서 손가락을 펼 수 없었고, 다리가 썩 고 뼈가 굳어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부모가 고아원에 버렸는데 로버트 킹이라고 하는 미국의 젊은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 였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손가락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했고 다리도 절단을 하고 더 이상 썩지 않게 하였으며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를 보내었습니 다. 이 아이가 밝게 자라났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의족을 끼고 양아버지에게 코치를 받으 면서 야구를 했습니다.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 서 아무 소망 없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간을 위 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밝고 건강하고 희망이 넘치고 기쁨으로 살 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시편 51편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된 길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거룩한 길, 믿음의 길, 신령한 길 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 셔서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부귀가 아니라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 우리 인간에게 생명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 나라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신이 가득하였고, 무지하였고 말할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살아가던 절망의 땅이었고 저주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 님의 종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아 침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주와 불행이 떠나갔습니다. 지하자원이나 많은 농토를 가지고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선물 받 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 음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샘물처럼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부활의 복음 눅 24:34-35 김창인 1. 구원의 복음(34상-. 요20:1-18)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녀 는 재산이 많았으나 일곱 귀신이 들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했던 여자였습니다. 모든 사 람의 구경거리요 조롱거리였으나 때 마침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예수로 인하여 고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었는데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날 아침에 누구도 안 찾는 무덤을 찾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은 구원의 완성인지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은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이 복음을 온 세상에 가장 먼저 전했습니다. 2. 변화의 복음(34하-) 베드로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동 생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를 만났고 갈릴리바다에서 예수님께 은혜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 다. 그가 주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께 항상 앞장을 섰고 열심히 특심하였으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로 하여금 옛날 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가야바의 궁전 뜰에서 실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절망 중에 저지른 것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사 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본문에서는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입 니다. 부활은 베드로에게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변화의 복음이었습니다. 3. 재기의 복음(35-) 엠마오로 내려 가던 글로바는 12제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글로바는 마리아의 남편인데(요 19:25) 마가복음에는 마리아의 남편이 알패오입니다(막 3:18). 마태복음에 는 그 마리아가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입니다(마 27:56). 그렇다면 글로바와 알패오는 같 은 인물입니다. 결국 온 집안이 함께 예수님을 따르다가 아내와 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데 글로바는 낙심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 타나셔서 성경을 풀어 줄 때에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다가 저녁 식탁에서 기도하신 다음에야 주님의 부활을 깨닫고 본문에 의하면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 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들로 다시 일어나게 하는 재기의 복음이었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충만케 하소서 롬15:13 김형기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 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넘쳐흘러서 그의 몸 된 교회와 주의 모든 종들에게 전이 됩 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일심으로 기도하더니 성령충만, 말씀충만, 은혜충만, 능력충만 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들도 주의 교회에 충성하더니 믿음과 성령과 지혜 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뒤늦게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도 변화된 후에 온갖 신령 한 선물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1. 주여, 나를 충만케 하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첫 번째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옵니다. 내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바라보고, 생각 하고, 사모할 때에 심령과 생활이 정결해지고 새로워지며 충만해 집니다. 내가 주님께 구하면 여러 가지 신령한 은사를 충만히 부어주십니다. 2.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소서. 나 혼자서만 충만해 하는 것으로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온갖 좋은 것 들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다 함께 누려야 할 신령한 보화들입니다. 우리가 다 바울 같 지는 못할지라도 구하고 또 구하면 여러 부분에서, 여러 모양으로 충만히 받아서 함께 더불어 누릴 수 있습니다. 3. 예수 안에서 모든 충만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 사랑 충만, 능력 충만, 평강 충만, 소망 충만, 지혜 충만, 감사 충만, 진리 충만, 정의 충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히 구한 바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 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의 이름이 온 땅에 편만함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치고, 주의 오른손에 는 정의가 충만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눕 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 각 사람의 심령이 정결해 지고 새로와져서, 오직 그리스 도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경주제일교회목사>
너는 나와 상관없다
류철랑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귀신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셨는데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린자 두 사람이 예수님 앞 에 나타났습니다. 귀신들린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8-29) 우리가 예수님을 원치 않으면 예수님이 아무리 우리를 원해도 관계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의 배반자들입니다. 배신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중 한사람으로 3년 동안 예수를 따라 다녔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은30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후 예수께서 정죄 되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 은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라 고 하니 저희가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마27:3-4) 고 했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 선언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는 것은 그분과 영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상관이고 붙어있지 않는 것이 상관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도 교회와 상관없고, 주님과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씻겨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 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씻겨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하시자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 지 못하시리이다”(5,6절)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 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하시니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9절). 예수님은 물로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를 깨끗게 하시는 주이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사람이 속되다 할 수 없습 니다. 깨끗해야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됩니다(딤후2:21). 씻지 않고도 깨끗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쓰임을 받으려면 먼저 씻겨 주심을 받아 야 합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부활의 세 가지 의미 민21:7-9, 롬6:3-5 이성희
부활이란 ‘일어남’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부활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 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합니다. 구약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 시 살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특별히 부활이란 단어는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대부 분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1. 영원히 사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시며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시며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에녹이나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하셨습니다. 죽 지 않는 법도 있지만 죽은 자를 위한 또 다른 법도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살 수 만 있다면 죽는 것도 괜찮습니다. 사람은 다 죽을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또 죽 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부활의 은총을 받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죽음이며 우리는 죽을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죽음이며 우리는 죄의 대가인 죽음 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의 대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죽음입니다. 그 이 상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역사적 증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고 사는 사람들이라”라고 어떤 프랑스의 회의주의자가 말했습니다. 3. 우리가 다시 살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살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 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사셨으므 로 우리도 다시 살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 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몸이 다시 사 는 것이 없고 몸의 부활이 없으면 영원히 사는 것은 없습니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 력에 대한 해답이요 살려주시는 은혜입니다. <연동교회목사>
주님이 타신 나귀 막 11:1-11 김갑식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11:9-11)
주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승리의 함성이 울리어 퍼지고 종려가지를 꺽어 주님을 환영하는 인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 이 오 로지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의 모습에서 종려주일을 맞는 우리의 신앙적 자 세를 조명코자 합니다.
1. 주님이 타신 나귀는 어린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나귀를 타셨고 또는 겸손하시어 어 린 나귀를 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어린 나귀는 너무나 힘에 겨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주님을 모시기에 힘겨워하는 우리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는 힘에는 겨웠으나 결코 쓰러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때 에 충분히 아시고 능력을 주어 쓰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2. 주님이 타신 나귀는 순결한 나귀입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 즉 사람이 한번도 타지 않았던 나귀를 타신 것은 순결한 나귀이기 때 문입니다. 순결하신 주님은 순결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순결한 사람들이 주님 을 태워 다니기를 원하십니다.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 니다. 비록 주님을 태우고 가는 길은 힘들찌라도, 주님을 태우는 일은 주님이 순결성을 인정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3. 주님이 타신 나귀는 주님의 나귀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의 원전의 뜻은 “그의 주인이 쓰시겠다 하라”입니다. 이 말씀 은 주님의 것을 주님이 쓰신다는 뜻입니다. 이런점에서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나귀가 메어 있던 벳바게는 “익지 않은 무화 과 나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 익지도 않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완전히 익은 자 같 이 쓰심을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사역의 은혜 마 21:12-17 김창인
1. 갱신의 은혜(12-13) 오늘의 본문을 보면 종려 주일에 성전에서 되어진 사건입니다. 즉 성전 안에서 소와 양 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을 전부 내어쫓았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전부 둘 러엎으시고 쏟아버리셨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강도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종교행위를 여지없이 짓밟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성전이 되게 하셨고 예배로 예배가 되게 하는 갱신의 은혜였습니다.
2. 치유의 은혜(14-15상)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 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 다(롬1:16). 사람 차별은 없다는 뜻인데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고쳐야 할 정서적으로 큰 병중의 병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대제 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권주의자 들은 장애인들의 성전 출입을 제한하였습니다. 즉 차별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 은 그들을 고쳐 주셨고 차별병 역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부터 베푸신 내적 외적 치유의 은혜였습니다.
3. 말씀의 은혜(15하-17) 신앙생활에서는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해석을 잘못할 때 문제가 되곤 합니다. 사이 비 이단이 여기서 나오고 교황무오설과 같은 엄청난 오류를 지금까지 범하고 있는 것입 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교리는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 면 허튼 소리를 한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성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찬미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를 나타내며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 가 아니오 찬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경을 가지고 어린애기 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 다. 즉 말씀을 바로 깨우쳐 주시는 말씀의 은혜였습니다. <광성교회목사>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왕상 18:41-46 류철랑
인간의 공통적인 실패 원인은 인내와 끈기의 부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로 성취한 성공을 보여줍니다. 그가 기도하면서 말했던 “일곱 번까지 다 시 가라”는 말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1. 기도의 연상 엘리야의 기도는 상상하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지면에 비를 내려 주 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절). 엘리야는 비가 온다고 하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습니 다. 엘리야가 상상하고 있는 것은 비가 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계 속되고 있습니다. 마를 대로 말라버린 대지 위에 비가 쏟아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름 한 점 없이 쨍쨍 가무는 맑은 날에 무슨 빗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 야의 귀에는 빗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것을 말하게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연상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기도의 끈기 엘리야의 기도는 끈기 있는 기도입니다. 끈기가 목표를 달성하게 하고 vision을 이루게 합니다. 그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 도했습니다(4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겸손 그리고 열렬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는 기도한 후에 사환에게 말합니다.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올라가 보고 온 사환의 대답은 “아무것도 없나이다”라 고 말합니다(43절). 그러나 엘리야는 또 다시 기도합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일곱 번째 또 기도합니다. 지면에 비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 기 때문입니다.
3. 기도의 성공 엘리야의 기도는 성공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일곱 번째 성공했습니다. 여섯 번이나 그토록 애타는 기도를 했지만 응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기도하고 나니까 구름 한 점이 떠올랐습니다. 그 작은 구름이 큰비의 전조였습니다. 성공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포상입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십니 까? 기도하십시오. 곤고함을 견디십시오. <부천동광교회목사>
인생고의 의미 욥38:1-7, 42:1-6, 요9:1-12, 히12:7-11 손인웅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고통’을 인과응보라는 차원에서 일률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인생고에는 많은 유형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욥이 당 한 총체적인 고통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경제적 손실에서 오는 고통이요, 둘째는 자녀들이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요, 셋째 는 자신의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 넷째는 아내의 몰이해로 인한 고통, 다섯째는 친 구들의 비난과 곤경으로 인한 고통, 여섯째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시는가?’하는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죄인의 고통은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쉽게 생각되지만, ‘의인의 고통’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욥의 고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 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 친구와 엘리후와 욥이 토론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들의 그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욥에게 질문하시 고 욥이 응답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들의 근본적인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을 것입 니다(욥38:1-7, 42:1-6).
욥기를 통해서 얻는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며 ②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③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초를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④ 그리고 인간의 고통은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피 조성에 근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고통은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고, 그 고통의 정도 와 종류와 성격이 다를 뿐입니다. 대부분의 고통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의인의 고통은 많은 교육적인 의미가 있고(요9:1-12), 대속적인 효력이 있어서 세상의 모든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의인의 고통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까지도 발휘하게 됩니다(히12:7-11). <덕수교회목사>
여호와의 네가지 벌 겔 14:21-23, 눅 21:10-13 이성희
죄의 결과는 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인 벌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벌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 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당시에 백성들에게 내리시려고 하신 네 가지 벌을 말합니다. 이 벌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벌입니다.
1. 칼의 벌을 내립니다. 칼은 벌의 상징이며, 칼은 고통의 상징이며, 칼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구약에는 칼이란 단어가 381번 나오지만 신약은 10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은 벌을 강조하지만 신약 은 용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칼의 위협 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칼의 고통을 피합니다.
2. 기근의 벌을 내립니다. 기근은 이스라엘에 큰 벌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기근이 많은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에 게 기근의 벌을 내리신 것은 양식을 의뢰하셨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의존하면 기근의 벌 을 내리시고, 돈을 의존하면 가난의 벌을 내리시고, 건강을 의존하면 건강의 벌을 내리 십니다. 세상을 의존하면 세상의 것으로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사나운 짐승의 벌을 내립니다. 사나운 짐승은 하나님의 벌입니다. 구약 성경은 사나운 짐승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 다. 또 사나운 짐승을 제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연 을 훼손할 때에 짐승들이 사나와지고 사람에게 공격적이 됩니다. 칠레작가 루이스 세풀 베다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내용도 아마존의 짐승이 인간을 공격하는 환경소설 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4. 온역의 벌을 내립니다. 구약에는 온역의 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온 몸에 온역이 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 우리 주위에 나타나고 있는 갖가지 병들은 환경 파괴에 대한 하나님의 벌입니 다. O157, 광우병, 구제역 등 모든 병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리시는 벌입니다. 신약에서는 온역이란 말이 한번 나오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 역이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기근때 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실 것입니다. <연동교회목사>
다 받는 기도 마 21:18∼22 장성규
이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의 둘째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 렘성에 입성하신 날이 유월절후 첫날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출 발하셔서 식사를 못해서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혹 요기라도 할까해서 저 멀리 있는 무화 과 나무에 가까이 가 보니까 잎만 무성할 뿐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것도 그런 것이 아 직 열매가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 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 나무는 곧 말라 죽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사건이었지만 놀란 제자들이 “무 화과 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물으니까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 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는 3가지입니다.
1.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일 나무의 생명은 열매입니 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일나무는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천국의 과일나무입 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적(성령의) 열매이든지 외적(전도의) 열 매이든지 열매를 맺어야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고 주님께 붙어있 을 가치가 있습니다.
2.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능력자라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은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로 이렇게 푸르고 싱싱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행하실 수 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다만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어서 죽어 주 시는 것뿐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믿음과 기도의 힘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먼저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다음은 기 도의 힘입니다. 믿음이 믿음되게 하고 힘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힘이라고 하여도 기도 없이는 그 힘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 중에도 “다 받는 기 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순종을 전제로 하는 기도입니 다. 주실 때까지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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