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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욥34:1]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엘리후가...가로되 -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고 있다. 첫 번째 연설(33장)에서 고난의 의의를 '정화의 수단'으로 제시하면서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 할 인간(욥)의 결함이 교만(33:17)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두 번째 연설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전지하심, 사랑, 그리고 교만한 자를 고통에 처하게 하시는 사실로써 논박한다(N.H.Ridderbos). 결국 엘리후의 두번째 연설의 의도는 욥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원망이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 경: [욥34:2]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지혜있는 자들아...지식있는 자들아 - 여기 언급된 자들에 관해서는 (1)욥이나 세 친구들이 아닌 주위에 몰려있었을 부락민들을 가리킨다는 견해(Habel, Lange), (2)욥은 아니고 단지 세 친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Hahn)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엘리후가 그들을 지혜자와 지식자로 호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욥이나 세 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부적절하다(32:9,12). 그렇다면 이들은 역시 세상의 지혜자들을 두루 통칭한 말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성 경: [욥34:3]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 정상적인 사람들(어쩌면 지혜자들에게만으로 제한된)에게는 진리의 여부를 조사하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판단을 기대하고 있다(Lange). 한편 본절은 일종의 격언적인 표현이며, 욥 또한 이 표현을 사용한바 있다(12:11).
성 경: [욥34:4]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옳은...선한가...알아보자 - 엘리후는 그들에게 고난의 문제와 관련해 욥의 입장과 자신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고(*, 미쉬파트, 보통 '공의'로 번역되는 법정 용어임), 선한(*, 토브, 도덕적인 뉘앙스를 가짐) 것인지를 판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우리끼리'라는 말은 판단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가능하다는 제한을 암암리에 시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엘리후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사람을 내심 의중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욥34:5]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 실제로 욥은 이러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다(27:2). 본장에서는 엘리후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욥의 말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욥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4:6]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 '내 상처'(*, 히치)는 문자적으로 '나의 화살'이다. 이는 욥이 한탄해 마지 않았던 바(6:4), '자신에게 꽂힌 화살' 즉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로서, 하나님이 욥에게 허용하신 재난과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물론 욥은 이것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이며,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무자비한 공격자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Hartley).
성 경: [욥34:7]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 여기서 욥이 훼방했다는 대상이란 하나님의 공의이다(Lange). 이 표현은 아주 회화적인 것으로,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물을 발견하고서는 거침없이 들이키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는 욥의 극심한 난폭 행위를 빗댄 것이다. 하캄(Hakam)은 이 구절을 마치 거친 물살이 소용돌이치듯 욥의 입이 '비난과 욕설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비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훼방하기를'의 '라아그'(*)는 '비웃다', '조롱하다'의 뜻을 가진다. 한편 본문과 같은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익히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인들은 매일 당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던 바, 예컨대 사나운 바람을 만났을 때 '강한 바람을 마셨다'로 흔히 표현하였다고 한다.
성 경: [욥34:8]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함께 다니면서(*, 랄레케트)는 앞절의 행위가 계속되어 이어지는 '웨'(*, and)로 시작되고 있다. 이 단어는 '걷다', '배회하다', '여행하다'의 뜻을 가진 '얄라크'(*)의 파생형이며, 본절에서는 욥이 악한 범죄자들과 동료를 삼아 무리지어 다니면서 같이 악행을 하는 계속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욥34:9]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악행을 공박하는 엘리후]
사람이...무익하다 -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구나'(Lange)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전체 문맥에 합당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후대의 삽입으로 보았다(Budde, Holscher). 그러나 이는 엘리후가 욥을 반박하기 위해의도적으로 과장한 듯하기에 문맥에 적합한 것이다(Hartley). 엘리후는, 욥이 이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으나 죄인의 무리들과 떼지어 다니며 악행하는 것은 곧 이런 말을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욥이 이와 비슷한 투의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9:22-35;21:7-34;24장).
성 경: [욥34:10]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시리는 하나님]
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마친 엘리후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얼마나 의로우시고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함으로써 욥의 행위를 반박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총명한 자들아(*, 아나쉐이 레바브) - '레바브'는 '심장', '마음','이해', '정신' 혹은 '양심'등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을수 있는 능력'이란 뜻으로 쓰였다. 엘리후의 이런 외침은 누구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음의 말을 옳다고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다.
하나님은...아니하시고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은...과는 거리가 멀다'이다. 엘리후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그는 이러한 원칙론적 지식에 입각해서 사람들에게 욥의 불경건한 태도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모순되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4:11]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람의 길에 따라 그로하여금 그 길을 찾게 하신다'(Pope)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생을 통해 걸어온 길에 따라 정확히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각자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보응은 구약성경 중 특히 지혜 문학에(룻 2:12;시 62:12;잠 12:14;19:17) 빈번히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Hartley). 엘리후는 아마도 욥이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원리를 추상화하고 왜곡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성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를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Habel).
성 경: [욥34:12]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
진실로(*, 아프 옴남) - 유사한 의미의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어 뜻을 강조한다. 즉 이는 '이뿐 아니라', '참으로'의 뜻인 '아프'(*)와, '확증하다','지탱하다', '확신하다'의 '아만'(*)에서 파생된 '참으로', '진실로'의 뜻을 가진 '옴남'(*)의 합성어로서, '더구나(정말) 그렇고 말고'라는 의미이다. 이말이 유도하는 다음 구절은 11절에서의 주장을 다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Delitzsch).
성 경: [욥34:13]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
12절에 이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들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있다.
누가...맡겼느냐 -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그분께 이 땅을 돌보라는 임무를 부여했느냐?'로서,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의'의 개념 간의 상호 관련성에 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가장 궁극적인 기반은 당신이 만유의 주(主)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 경: [욥34:14]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
본절은 하나님의 영과 호흡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심을 밝히면서, 그것이 제하여졌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아울러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은 결코 '자기만 생각하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시는 관용과 공의의 창조주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욥34:15]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
본절에서는 14절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혈기 있는 자(*, 바사르)는 '육신'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에서 273회나 사용된 이 '바사르'(*)는 보통 히브리어에서 기본적으로 동물의 근육 조직을 지칭하며,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인간의 몸, 혈연 관계, 인류, 생물 등 피조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뜻하며 후반부의 '사람'과 구분된다.
일체로 망하고 - 사람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본절 후반부), 모든 생명체 또한 멸절하게 된다. 여기서 '망하고'는 추상적인 의미의 존재 가치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을 뜻하는 완전한 소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그 사상이 자주 나타나듯이 모든 생명의 존재는 '하나님의 신과 기운'으로 인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욥34:16]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신분을 초월해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
만일 총명이 있거든 - '총명'은 10절의 그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으니 곧 '이해력'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동사가 단수형이므로, 이어지는 17절의 질문은 욥에게 직접물은 것으로 이해된다(Anderson, Hartley).
성 경: [욥34:17]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신분을 초월해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 수사학적 의문문으로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공의를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주관자가 되신다'이다. 이말은 아마도 욥이 9:24에서 한 말을 반박하기 위한 것인 듯하며, 공의가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가 된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 잘 언급되고 있다(시 96:4-13).
의롭고 전능하신 자 - 문자적으로는 '의로우신 분', '전능하신 분'이다. 이처럼 두개의 형용사를 계속 사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랍어에서 흔히 쓰인다(Delitzsch). 한편 본문의 표현은 '의로우신 전능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호의 하나를 의미한다.
성 경: [욥34:18]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신분을 초월해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
'비루하다'(*, 벧리알)는 '노쇠하다', '낡다'의 뜻인 '발라'(*)의 파생형으로, 본절에서는 '무가치함'(NIV, RSV, worthless)을 뜻한다. 한편 여기에다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불한당', '악당'(scoundrel)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Habel).
성 경: [욥34:19]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신분을 초월해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
왕족을...취치 아니하시며 - '취하다'(*, 나사)는 '올리다', '운반하다'의뜻이다. 이 단어가 '페네'(*, 얼굴)와 연결될 때는 종종 '누구의 얼굴을 들어주다'가 되어 '그 사람을 높여주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어떤 사람의낯을 봐서 불공평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더 생각하지(*, 니카르)는 '알아보다', '인정하다', '존경하다'라는 뜻인 '나카르'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편애하다', '호의를 갖다'라는 뜻을 지닌다. 왕족과 부자들이 불의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편애를 받을만한 자들일지 모르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결코 그들을 편애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 하반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기때문이다.
성 경: [욥34:20]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신분을 초월해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
'백성'(*, 암)은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건대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 계층을의미한다고 본다(Hartley, Pope).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손이 아닌 힘으로' 이다. 이처럼 손을 대지도 않고 세력있는 자를 제하신다는 표현 속에는 그 배후에 더 강한 힘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Lange).
성 경: [욥34:21]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앞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는 불공평이 없음을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론하였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함을 언급함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 문자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 위에 두었다'이다. 앞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너무도 엄격하게 살피고 징책하신다고 불평조로 말한 바 있다(7:17-20).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공의로운 통치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Habel).
성 경: [욥34:22]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악을 행한 자는...없느니라 - 하나님을 거역한 범죄자들에게는 몸을 숨길 만한 어떤 장소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감찰하시는 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 139:7-12;렘 23:24;암 9:2-4). 이러한 사실은 욥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31:4).
성 경: [욥34:23,24]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그 판단의 즉각성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부분이다.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 '꺾으시고'(*, 야로아)는 '깨뜨리다', '부숴뜨리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라아'(*)의 파생형으로, 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사 24:19;렘 11:16). 본절에서는 사실 여부에 대해 굳이 조사할 것 없이 심판하실 정도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아시며, 그 심판은 공의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성 경: [욥34:25]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밤 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 - 하나님의 심판의 급작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연기하실 수 있다(벧전3:9). 하지만 한번 심판을 작정하시면 마치 한밤중에 도적이 뚫고 들어오듯이 신속하고도 창졸간에 임하신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때는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또한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권력자들을 뒤엎으심으로 그들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그들이 권좌에 복귀할 수 없게 됨을 뜻하는 말이다(Hartley).
성 경: [욥34:26]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사람의 목전에서 -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보는 곳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공개적인 장소에서'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는 의미에 그치지않고, 여기에 공식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공식적으로, 법적인 의의을 가지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공적 징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되는 의미도 갖는다.
성 경: [욥34:27]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그의 모든 길 - 하나님이 정하시고 명하신 법도와 원칙 또는 교훈을 뜻한다.
무관히 여김이라(*, 로 히스킬루) - 직역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관심을 두지 않다'이다. 여기서 '히스킬루'(*)의 원형인 '사칼'(*)은 '현명하다', '이해하다', '번영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주로 이성적인 지식과 관련이 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죄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28절이다.
성 경: [욥34:28]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가난한 자의...들리게 하느니라 - 엘리후는 박해자요 폭군으로서의 저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저들은 권력을 사용해서 도와주고 보살펴야 할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도리어 핍박하므로 그 원성과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게 하였다. 그소리는 곧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신원이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절규와 신음 소리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들으신다(사1:24;3:12-15;암 5:11,12;미 3:1-4;합 1:13).
성 경: [욥34:29]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평강을 주실 때에 - 문자적으로는 '그가 침묵을 지키시다'(KJV, NIV, RSV)이다. 이 침묵은 가난한 자들의 신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시는 '효과적인 침묵'을 뜻한다.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 직역하면 '누가 감히 비난하겠느냐'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야르시아'(*)는 '불의', '악', '죄'라는 뜻의 명사 '레솨'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원형 '라솨'(*)는 '악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범법자로 몰아 붙이는 가증스러운 행동을 뜻한다.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 '하나님의 얼굴'은 법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악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저들에게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길에 버려두시는 것이다.
성 경: [욥34:30]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공의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이유]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 직역하면 '불경건한 사람의 통치로부터'이다. 즉 악한 자들,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무시하고 짓밟는(27절) 사람들의 폭정으로부터 무고한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성 경: [욥34:31]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내가...아니하겠나이다 - 혹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는 의미로 해석한다(Ewald). 즉, 자신들은 무엇을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지 모르겠으니 그것을 설명해달라는 교만한 항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본문을 참회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훨씬 자연스럽다(Delitzsch).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욥에 대한 간접적인 권유로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징계를 받는 자들 중에 뉘우침으로 그의 진노를 돌이킨 자가 없었으나, 욥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으라는 엘리후의 은근한 암시가 담겨 있다(Rawlinson).
성 경: [욥34:32]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내게 가르치소서 - 죄에 대한 고백 뒤에는 간절한 청원이 이어진다. 즉, '제가 행한 범죄 중에 제가 깨닫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이다. 엘리후가 욥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혹시 욥 자신도 모르고 있는 죄악과 범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욥34:33]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네 뜻대로...싫어하느냐 - 본절은 진행되어 온 문맥 중에서 그 뜻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먼저 이 구절은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벌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거부하고 반대를 표현하는 욥에게 하나의 수사학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가 네 뜻대로 되어져야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됨이 자연스럽다(KJV, Should it be according to thy mind?).
내가 할 것이 아니니 - '내가'는 인칭의 변화가 일어난 표현으로 그 지칭은 '하나님'이다. 이런 변경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발견된다(예컨대 시 23편에는 '그'가 '당신'으로 변경됨). 이렇듯 3인칭의 신격을 1인칭으로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변하고 그 주장을 말하고자 함을 강력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 엘리후는 여기서 욥에게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방법에 애매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욥 자신이 알고 있는 보응의 참다운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요구한다. 물론 이는 욥을 공박하는 수사학적인 제안이다.
성 경: [욥34:34]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필연 내게 이르기를 - 만약 욥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을 경우, 청중들(판단할 수있는 능력을 가진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이라는 예상을 유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엘리후는 그들의 판단이 욥을 정죄하는 자신의 그것과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성 경: [욥34:35]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무식하게(*, 로 베다아트) - 근원적이고 체험적인 지식, 앎을 의미하는 '야다'(*)에 부정사 '로'(*)가 연결된 표현이다. 즉, 욥의 제안은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상식)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없다(*, 로 베하스케일) - 전반부와 유사한 연결로, 부정사'로'(*)와 '현명하다', '이해하다'의 뜻을 가진 '사칼'(*)의 파생형으로 이루어졌다. '사칼'(*)은 이성적인 판단, 심사 숙고한 결과, 사려 깊고 신중한 행동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시 14:2;잠 19:14;단 9:22). 또한 이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욥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엘리후 자신만이 아니라 욥의 말을 들은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그 반박에 동의하여 욥의 진술에 올바른 지혜가 없음을 지적할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욥34:36]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오, 욥이 계속 시험을 받았으면'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원문이다(Lange). 한편 원문의 '아비'(*)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상당한 난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나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Wordsworth) 청년 엘리후가 욥을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 바로 욥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부적합한 해석이다(Lange).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견해도 배경이 구약 시대라는 점에서 볼때 어색한 추측이다. 비록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나의 아버지'라는 해석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반면에 듐(Duhm)은 '아아'(alas)하는 감탄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돔(Dhorme)은 70인역(LXX)과 수리아역을 따라 '그러나'(but)로 번역한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의 근원을 '아바'(*)로 보고 그 뜻을 '바라다', '원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Driver, Gordis, Gray, Pope). 이 모든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아비'(*)를 일종의 기원문의 형식을 가지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엘리후의 이러한 강경한 기원 속에서 우리는 욥의 회개를 권고하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31,32절).
성 경: [욥34:37]
주제1: [엘리후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정죄받아야 할 자가 된 욥]
'손뼉을 치며'(*, 이스포크)는 '살짝 때리다', '손뼉을 치다'라는 뜻의'사파크'(*)의 파생형이다. 26절에서도 쓰인 이 단어는 본절에서는 '조롱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엘리후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욥의 행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편 아람어에서 이 단어는 '의심하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는 그 사역 형태로서 '의심해 보다'는 뜻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Pope, Dhorme)도 있다.
성 경: [욥35:2]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이것을 - 이 지시어가 3절의 '네가 말한 것'(개역 성경은 '이르기를'로 번역함)을 미리 언급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Delitzsch). 그 이유는 본절과 3절이 서로 같은 내용을 단지 표현 방법을 다르게 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지시어를 본절 하반절의 내용인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여기는 생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그것과 유사한 내용의 3절이 다시 부연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합리하게(*, 레미쉬파트) - 문자적으로는 '의롭게', '올바르게'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서 보통 '공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도한 '심판'이라는 표현으로 400여 회나 사용되었음을 볼 때(8:3;신 32:41;시 1:5;사 4:4 등)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의미의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욥35:3]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이르기를(* - , 키 투오마르) - 문자적으로는 '왜냐하면 네가 말하기를' 이며, 2절의 '이것'에 대한 대구이기도 하다.
유익이 무엇인고(*, 마 이스칸 라크) - '마'(*)는 의문사(what)이고, '라크'(*)는 문자적으로 '너(당신)에게'(to you)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7:20 내용에 착안하여 이 2인칭 대명사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즉,'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 상반절을 간접 인용으로, 하반절을 직접 인용으로 보고, '라크'(*)가 '하나님'이 아니라 '욥'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Gordis, Habel). 한편 다른 학자들(Duhm, Budde, Holsher)은 '라크'(*, to you)를 '리'(*, to me)로 수정하여 번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욥 자신의 '유익'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히 하려 했다(NIV, RSV도 'to me' 또는 'I'로 번역함). 그러나 원문을 이처럼 수정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가 미비하다는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라 하겠다.
성 경: [욥35:4]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네 동무들에게 - 문자적으로는 욥과 함께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엘리후가 34장에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논쟁에 끌어들인 반면, 여기서는 아마도 '욥의 입장에 대해 동정과 찬성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Pope). 그러나 엘리후가 입을 열게 된 원래적 의도로 미루어 보건대(32:1-5), 본문의 '동무들'이란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을 지칭한다고 볼 수있다(Rawlinson).
성 경: [욥35:5]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높은 궁창(*, 쉐하킴 가브후) - '먼지'(사 40:15), '구름'(신33:26;사 45:8), '궁창'(37:18) 등을 뜻하는 '솨하크'(*)와 '높아지다', '고양되다'라는 뜻인 '가바흐'(*)의 파생형으로 구성된 말이다. 특히 여기서 '가바흐'(*)는 땅 위에 있는 인간의 낮음과 대조되는 높은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위엄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엘리후가 신성모독적인 욥의 말에 대해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상을 예로 들어 깨닫도록 하는 '교육적인 훈계'라 하겠다(Habel).
성 경: [욥35:6]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범죄한들 - 여기서 '범죄'는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욥이 하나님께 대해 지었다고 엘리후가 단정하고 있는 완료적인 즉 과거의 범죄가 현재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Dhorme). 따라서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이미 범죄했지(해왔지)만'이다.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 '영향'의 '티페알'(*)은 '행하다', '저지르다'는뜻의 '파알'(*)의 파생형이다. 그런데 '파알'(*)이 사람의 행위를 묘사할때는 그 사람의 도덕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의미보다(시 15:2;습 2:3)보통 부정적인 뜻을 나타낸다(34:32, '불법';잠 30:20, '사악함';사 44:15, '우상 숭배'). 따라서 본절은 '네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행할 수나 있겠느냐?'는 말로서,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고 위대한 분이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악행으로도 그분에게 조그만 충격이나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성 경: [욥35:7]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네가...무엇을 받으시겠느냐 - 6절과 동일한 의미를 단지 정반대의 표현으로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무관심하시거나 인간의 죄악에 대해 방관하신다는 이신론(deism)적인 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도 하는 이 사상에 의하면 신은 일단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스스로 진행되도록 법칙(자연 법칙)을 두시고 당신은 일체 피조 세계의 사건이나 역사에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욥의 인간적인 시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의로움을'신적 초월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에 대한 욥의 반발에 대해 엘리후는 그 모든 시도들의 무익함을 말하고 있다.
성 경: [욥35:8]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너와 같은 사람 - 표면상의 뜻은 단순하지만, 본절의 문맥에서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단순히 하나님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연약한 인간에 대한 일반적 총칭으로서 '사람들에게'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엘리후가 특별히 욥을 지칭한 것에 유의하면서 '욥 너와 같이 악하고 부정한 인간에게'로 볼 수 있다. 후자는 그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한 가능한 이해라고 하겠다. 한편 본절은 인간이 그 어떤행위로도 하나님의 영광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하지 못한다는 뜻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엘리후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라고 한다(Delitzsch). 또한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의 불평의 정당성을 제시해보라고 암시적으로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엘리후에 의하면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기에,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났다고 해서 불평하는 일은 더욱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Rawlinson).
성 경: [욥35:9]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때]
엘리후는 다시 주제를 바꿔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에 관한 것이다. 학대(*, 아슈킴)는 '압박을 가하다', '사기를 치다', '폭력을 행하다'라는 뜻의 '아솨크'(*)의 명사형이다. 이 단어는 권세나 권력의 남용 혹은 국가적인 지배의 폭압성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 복수로 사용된 것은 그만큼 폭압의 강도가 큰 것을 의미한다(Hartley). 본절 전체 내용은 억울하게 압박받는 백성들의 고통과 그들을 짓누르는 세력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난 받는 자들이 도움을 부르짖고, 심지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불공정하고 불의한 분이라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욥도 이런 불평을 했다(24:12). 그러나 엘리후의 대답은 다르다. 엘리후는 그 내용을 10,11절에서 말하고 있다.
성 경: [욥35:10,11]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때]
개역 성경은 이 두 절을 구분하지 않고 있으나 원문에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KJV, NIV, RSV도 구분함).
사람으로...노래하게 - '노래하게'의 '제미로트'(*)는 문자적으로 '노래들'을 뜻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단어의 원형 '자마르'(*, 노래하다, 찬양하다)의 명사형 '자마르'(*)가 '폭력', '용기', '능력'을 뜻하는 아람어 '다마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Pope). 그리고 하틀리(Hartley)의 경우는 이 주장을 수용하면서 노래하는 것, 특히 밤에 노래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감성적인 힘'을 복돋아 주는 것이라고 본다. 즉, 본절에서 노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용기라는 것이다. 어쨌든 본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이 사무치는 밤중에 노래를 주심으로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되어 주시는 분으로 설명되고 있다.
교육하시기를...더하게 하시며 - 직역하면 '그는 우리를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가르치신다'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동물보다 더 존귀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존재로 대우하셨다는 의미이다(Lange). 반면에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동물을 통하여 사람을 가르치신다'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Delitzsch). 이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짐승들이 자기들의 고통과 욕구를 부르짖는 것을 통해 인간들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디 계신가...없구나 -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도리어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자연 만물을 통해서 지혜를 깨달아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와 기대하시는 바를 깨닫지 못했다. 엘리후는 바로 이러한 실패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로린슨(Rawlinson) 같은 학자는, 인간의 부르짖음은 동물의 본능적인 그것보다 더 고상한, 즉 믿음과 경건과 겸손을 가진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실패한 것으로 본다.
성 경: [욥35:12]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이유]
교만을 인하여 - '교만'의 '게온'(*)은 '일어서다', '자라다', '승리를 몹시 기뻐하다'란 뜻인 '가아'(*)의 파생형이다. 본절에서는 백성들을 폭압하는자들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만'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솽) - 장소적인 의미로는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자리', '그 현장'을 뜻하나(70인역, 제롬 역본), 오히려 시간적인 의미의 '그 때에', 즉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Delitzsch). 한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13절에서 밝히고 있다.
성 경: [욥35:13]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이유]
헛된 부르짖음(*, 솨우) - 문자적으로는 '공허', '허무', '허위'라는 뜻이다. 십계명 중 제 3계명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의 '망령되이'가 바로 이 단어의 부사구로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는(12절) 이유가 이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공의에 의혹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엘리후가 욥의 부르짖음 일체를 단순히 헛된 것으로 단정했다면 그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입술로써만 중언 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는 지적은 명확한 것이다(Delitzsch).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 직역하면 '관심을 두지 않다'이며(NIV, pays noattention to it),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난하다(Lange). 본절에서 엘리후의 논점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압박받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직 자기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하며 기다리는 욥의 태도가 위선이라고 공박하는 것이다(Habel).
성 경: [욥35:14]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일의 시비는...기다릴 뿐이라 - '일의 시비'(*, 딘)는 '심판하다', '동의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딘'(*)의 명사형이다. 이 단어의 어원에대해 드라이버(Driver)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왔다고 주장하여, '딘'(*)이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라고(고대의 역본들에는 대개 동사로되어 있음) 보고, 이 구절을 '너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키고 그를 기다리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욥기에 빈번히 등장하는 법정적 용어로서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Habel, Pope).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자기의 송사 문제를 제출해 놓고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신의 무죄와 결백이 선언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엘리후는 바로 이러한 욥의 당당함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위선적인 호소'를 발견하였다. 엘리후의 눈에는 욥의 이런 태도가 '헛된 부르짖음'의 극치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5:15]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진노하심으로(*, 아포) -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진노'로 번역하고 있지만, 문자적으로는 '그의 진노'이므로 누구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16절과 연결시켜 두 가지의 해석이 일단 가능하다. 첫째, 지금 그(하나님)의 분노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는 해석이다(Hartley, Lange). 둘째, 지금 그(하나님)가 그(욥)의 분노에 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는 해석이다(Habel). 어쨌든 본절은 하나님께서 욥의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죄에 대해 징벌을 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신 것 때문에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경: [욥35:16]
주제1: [엘리후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헛되이(*, 헤벧) - 문자적으로는 명사형으로 '공허'(emptiness), '덧없음'을뜻한다. 이 명사형 '헤벧'(*)은 보통 이스라엘이 섬기던 헛된 '신'들을 묘사할때 사용되어 종종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신 32:21;왕상 16:13,26;렘 2:5). 또한 '생명이 짧은'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시 39:5,6;94:11;144:4;사 49:4).
지식 없는 -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그것이 엘리후에게는 헛되고 어리석은 말로 여겨졌음)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엘리후는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지한 자의 소행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으셨으며, 엘리후가 예상하기로는 하나님의 징벌 외에 남은 것이 없음에도 막상 그것이 욥에게 내려지지 않음으로 인해, 욥은 더욱더 하나님을 공격하는 어리석고 헛된 말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이 끝이 맺고 있다.
성 경: [욥36:1]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엘리후가...가로되 -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인 본장에서 그는 두 가지 중심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나는 33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고난이 닥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총돌되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의 교만을 꺾기 위한 '정화의 수단'이라는 주장이다(1-25절). 이 고난관은 33장 보다 이곳에서 '더욱 강하고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N.H.Ridderbos).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이다(26절-37:24). 자연의 이치를 천박한 소견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정죄하거나 그 의(義)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등장을 유도하고 있으며,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38:1)을 미리 은연중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연설과 하나님의 판결을 연결짓고 있다.
성 경: [욥36:2]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위하여(*, 레엘로아흐) - '...을 위하여', '...의 편에서'를의미하는 전치사 '레'(*)와 '하나님'(*, 엘)이 합쳐진 말이다(KJV, NIV, RSV, NASB;on (in) God's behalf). 70인역(LXX)은 이 부분을 '엔 모이'(*, 내게)로 읽어 엘리후의 무모함을 완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위해 나서겠다'고 하는 대신 '아직도 내(안에) 말이 남아 있다'로 옮겼지만 굳이 이렇게 소극적인 번역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의 명예를 위해 말하겠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6:3]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먼 데서'(*, 레메라호크)는 전치사 '레'(*, to)와 '메'(*) 혹은 '미'(*, from)가 이중으로 사용되었고, 여기에 '멀다', '멀리 있다'의 뜻을 가진 '라하크'(*)가 결합된 단어이다. 직역하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이다. 이를 단순히 '역사와 자연의 넓은 영역 중에서'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Delitzsch), 엘리후 자신의 연설이 '땅의 끝에서부터'(Dhorme),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Anderson, 시138:6;139:2;렘 23:23). 이로써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교훈이 될 만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6:4]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지식이 구비한 자 - 바로 엘리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밈 데오트'(*)는 '완전한', '순전한'의 뜻인 '테밈'과 '알다', '경험하다'의 뜻인 '야다'(*)에서 파생된 '데아'(*, 지식, 견해)의 복수형 '데오트'(*)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지식'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충만한 지식'(full knowledge)을 뜻하며(Hartley), 여기에 '테밈'(*)이 추가되어 사리를 분별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지고한 지식, 지혜를 의미한다.
성 경: [욥36:5]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 개역 성경의 '아무도'는 원문에는 언급이 없는 단어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 문장이 된다. 델리취(Delitzsch)는 의역하여 '그분은 당신의 창조하신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게라도 결코 불의하게 취급하지 아니하신다'고 이해한다. 결국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자신을멸시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신다고 불평했던(16:9;30:21) 욥의 태도를 넌지시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6:6]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악인을...않으시며 - 엘리후는 욥이 21:7;24:22에서 했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욥의 불평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다.
성 경: [욥36:7]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 눈을...돌이키지 아니하시고 - '그 눈'에 해당하는 '에나이우'(*)는, 70인역(LXX)에 의하면 '그의 정의'(his right)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관용어구로 '하나님의 얼굴'과 유사하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공의' 등을 뜻하므로 굳이 본문을 수정하지 않아도 그 뜻이 분명해진다. 즉,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의인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지키신다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6절과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Delitzsch), 그 내용은 아마도 지혜 문학의 전통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겠다(Hartley).
성 경: [욥36:8]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누설'(*, 지킴)은 '제크'(*)의 복수형으로서 '족쇄', '쇠고랑'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포로나 죄인들을 속박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사 45:14), 본문에서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으나 다음 구절의 '환난의 줄'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환난의 줄 - 의인의 인생에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상반절의 '쇠사슬'과 함께 이 '줄'은 의인의 삶을 제한하고 어거(馭車)하는 시험을 가리킨다. 또한 이것들은 그들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즉,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의인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도)를 9,10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욥36:9,10]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비록 의인이라 할지라도 부지중에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의인에게 닥친 고난은 단순한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연단과 성숙을 위한 것임을 거듭 밝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엘리후의 사상은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였던 세 친구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보이사(*, 야게드) - '말하다', '알리다', '선언하다'를 뜻하는 '나가드'(*)의 파생형이다. 이 어근은 원래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높이 두어 눈에 잘 띄게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의인들의 잘못된 죄악들을 밝혀 보인다는 뜻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보다 '위엄있고 강한 선고'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RSV, declares).
돌아오게 - 이에 해당하는 '슈브'(*)는 '돌이키다', '돌아오다'란 뜻이며,본절에서는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NIV, repent;Hartley)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회개는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단이 된다(Habel).
성 경: [욥36:11]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만일...섬기면 - '임'(*, if)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이런 구성은 12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은 모두 앞의 8-10절에서 언급한 주제들과 관련된다.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의 축복에 관한 언급이다.
날을 보내며 - 직역하면 '자신들의 날을 끝내다(마치다)'이다. 즉, 하나님의 경고를 청종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고치면 남은 생애를 형통하게 지내고 마치게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 생애는 매우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성 경: [욥36:12]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칼에 망하며 -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의 불행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칼에'(*, 베쉘라흐)의 '베'(*)는 어떤 일의 원인이나 이유(cause)를 뜻하는 전치사로 사용되었다(Hartley). 그리고 '쉘라흐'(*)는 '보내다', '던지다'는 뜻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무기'를 뜻한다. 따라서 굳이 칼뿐만 아니라 원래는 던지는 무기를 의미한 듯하다(느 4:17,23에서는 '병기', '기계'로 번역됨). 혹자는 '쉘라흐'를 '죽음의 강물, 협곡'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Hartley, Habel).
성 경: [욥36:13]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11,12절에서 언급한 사상을 다른 표현으로 계속 언급한 것이나 그 순서는 뒤바뀌어 있다. 즉 본절과 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인들의 저주에 관한 언급(12절의 내용)이고, 15절은 11절과 유사한 것으로 순종한자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이다(Lange).
분노를 쌓으며 - 본문을 '분노를 품는다'로 옮겨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Lange).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즉 불경건한 자들은 목전의 현실에서 징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계속 불의를 행하게 되지만, 이는 진노의 날에 필경 임하게 될 진노를 자기 머리에 쌓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Hartley, Rswlinson, 롬 2:5).
성 경: [욥36:14]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남창(男娼)과 함께(*, 바케데쉼) - 여기서 '케데쉼'(*)은 '구별됨', '거룩함', '성스러움'을 뜻하는 명사 '코데쉬'(*)에서 유래한 단어로'남자 창기'를 가리킨다. 개역 성경은 신 23:17;왕하 23:7에서 이를 '미동'(美童)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거룩한 자'를 뜻하는 '코데쉬'가 남창을 가리키게 된 것은 이교 사원의 종교적 풍습에서 기인했다. 저들의 제사 의식 가운데는 성적인 행위가 포함되어 있어서 사제들이 신전에서 사람들과 음행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특히 수리아인과 가나안인의 신전에서 흔히 행해졌는데, 여기서 그 수종을 드는 남녀 사제들은 창기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런 남창들과 함께 거하게 되면 저희의 기력이 쇠해질 수밖에 없었다(Lange). 한편 하틀리(Hartley)는 이 부분을 '남창'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좇아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 속에'라고 번역하여, 젊어서 죽게 되는 수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난외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남창'으로 번역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동일하다.
성 경: [욥36:15]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 오히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하나의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심을 뜻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Hartley, Lange, Rawlinson). 이런 점에서 RSV는 이 부분을 '하나님은 고난받는 자를 그의 고난으로 구원하신다'(Hedelivers the afflicted by their affliction)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받는 자의 구원 여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6:16]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인간을 벌하시는 목적]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 '곤고함'(*, 피 차르)은 직역하면 '고난의 턱(입)'을 뜻한다(NIV, NASB, jaws (mouth) of distress). 그리고 '이끌어 내다'의 '하시테크'(*)는 '꾀다', '부추기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수트'(*)에서 파생된 말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절에서는 '인도하다', '이끌다', '적을 물리쳐 돌아서게 하다'(대하 18:31) 등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는 자를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이 계획은 바로 욥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의 다음 말은(17절)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욥이거절하여 스스로 더 불행한 길을 자초했음을 보여준다.
네 상에...되었으리라 - 기름진 음식으로 잘 차려진 상은 인생의 가치와 승리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의미한다(시 23:5). 풍족한 식탁은 상반절의 '넓은 공간'과 병행구를 이룬다. 한편 텔리취(Delitzsch)는 이를 '재산이 풍성해지는 상태'로 이해한다(시 22:26;107:9;잠 9:2).
성 경: [욥36:17]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이제는 - 앞에서 말한 축복스러운 상황과 정반대의 현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리고 심판과 공의는 중언적(重言的)인 표현으로 '정의로운 심판'을 뜻하는 말이다(Hartley). 따라서 본절은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욥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Lange). 즉, 욥은 그의 완고한 고집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Rawlinson).
성 경: [욥36:18]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분격함을 인하여...말라 - 이 구절은 엘리후가 욥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말이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움을 공박하고 의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분격함'의 '사페크'(*)는 '살짝 때리다', '손뼉을 치다'는 뜻 외에 '풍부한', '선물' 등의 뜻을 지니는 '사파크'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의 의미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아마도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속전(贖錢)의 값이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Hartley). 그 말이 다음 구절의 '대속함을...말지니라'에도 나타나 있다. 즉, 한번 죄악에 빠져 파멸되면 보상을 받을 길이 없듯이,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욥 자신을 구원할자가 하나님 외에는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엘리후는 욥이 거부(巨富)임을 염두에 두고 이말을 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최후의 판결은 그 어떤 재물로도 굽게 할 수 없다. 특히 욥의 경우에는 그의 재산이 속전의 대가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악임을 뜻하는 것이다(Habel).
성 경: [욥36:19]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너의 세력이...유익하게 하겠느냐 - 직역하면 '너의 금(재산)이 너의 고통을 감소시켜 주겠느냐'이다. 욥이 당하는 환난 중에서는 그의 헛된 불평조의 부르짖음이나 부요함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후는 인간적인 그 어떤 방편도 욥을 그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내거나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성 경: [욥36:20]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제함을 받는 - 직역하면 '파산하다'이다. 시 102:24에서 이 말은 '살아가는 도중에 사람이 절명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Pope). 여기서 엘리후는 이전에 욥이 간절히 원했던 '인생의 종말'(3장)인 밤도 자신의 고난이 끝나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욥36:21]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네가...택하였느니라 - 이것은 욥이 택한 '악'을 수식하는 말이다(RSV, for thisyou have chosen rather than affliction). 엘리후는 욥이 시험을 당해 인내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던 죄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6:22]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엘리후는 하나님의 존귀하신 주권과(시 148:13;사 2:11,17) 탁월하신 훈계 능력을(시 25:8 - 14;94:12) 상기시키고자 한다.
큰 일을 행하시나니 - 히브리어 '야스깁'(*)은 '매우 높은'을 뜻하는 '사가브'(*)의 파생형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매우 높은 곳에 앉으시다', '높이 들림을 받으시다'이다. 이는 하나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인해 가장 높이 송축 받으실 분임을 뜻한다.
누가...베풀겠느냐 -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나타내시는 교훈의 깊은 지혜는 인간이 감히 따를 수도,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 사상은 엘리후의 전체 연설의 중심이 된다(Rawlinson).
성 경: [욥36:23]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축복을 지연시키는 욥의 죄]
길을 정하였느냐 - '정하다'의 '파카드'(*)는 '계산하다', '판단하다', '감시하다'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면밀히 감찰하여 그 걸음걸음을 감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의심을 지적하는 하반절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발이다. 그러나 전 우주를 통틀어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의 지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감히 그 누구도,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억울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며 하나님을 고소하고 있는 욥조차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 의심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 경: [욥36:24]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찬송하기를(*, 타스기아)은 원래 '증가하다', '성장하다', '확대하다'의 뜻을 가진 '사가'(*)의 파생형이나 '사가'(*)가 상징적으로는 '찬양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임에 유의해야 하겠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드높여 찬양하고 광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래하였느니라(*, 쇼레루) - '노래'를 뜻하는 명사 '쉬르'(*)에서유래된 파생형이다.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시 13:6;101:1;106:12 등) 이 단어는 '찬송하다', '노래하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동사가 '보다', '깨닫다'는 뜻의 '슈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Ezra, Larcher, Tur-Sinai). 이 경우에 본절은 '너는...찬송하기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성 경: [욥36:25]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먼 데서도 보느니라 - 상반절의 '그 일'은 24절의 '하나님의 하신 일'을 가리킨다.이것을 '욥이 당한 고난'으로 보고 이 구절을 사람들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욥의 고난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먼 데 있는 자들로부터'도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으나(Rawlinson) 그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본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의 역사를 경외와 찬탄으로 바라보며, 또한 경외심 때문에 감히 그 행사에 근접할 수없어 '그것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보지 못한다'(Lange)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울러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압도당할 만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위대한 것임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이해 가능하다(Hartley).
성 경: [욥36:26]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본절에서부터 37:20까지는 자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엘리후가 즐겨 쓰는 것이고, 사실 이것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시사할 수 잇는 방법도 드물 듯하다.
알 수 없고 - 서두에 감탄사 '보라'(*,헨)가 있다(개역 성경은 번역을 생략함). '알다'의 '야다'(*)는 '동침하다'는 뜻도 가지는 단어로, 대상에 대한 체험적인 깊은 인식과 통찰에서 오는 지식을 뜻한다(호 6:3 강해, '야다의 개념' 참조). 물론 인간은 하나님을 이렇게 알 수는 없다. 그의 지혜와 행사는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것이다. '크시니'로 압축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초월성'을 잘 나타낸다.
연수를 계산할 수 - 단순히 인간과 같은 '연령'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하시기에 우리가 그 영원함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찬양 받으실 분이시지 한정된 인간의 지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나타낸다(Hartley).
성 경: [욥36:27]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물이 증발하여 비가 되어 내리는 과정이 고대 문서답지 않게 정확한 과학적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증발, 응결, 강수 등의 물의 3단계 순환 과정은 A.D. 16,17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 직역하면 '그가 물방울들을 끌어 올리신다'이다. 이는 물이 증발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안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드'(*)는 구약 성경 중 본절과 창 2:6에만나오며, 전통적으로 개역 성경에서처럼 '안개'(mist)로 번역된다(Hartley).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아카드어 '에두' 혹은 수메르어 '이드'와 관련시켜 '지하 세계의 물'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지만(Albright, Pope), 확실한 단서가 없는 견해이다.
성 경: [욥36:28]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사람 위에(*, 알레 아담) - 원문상 '아담'(*)뒤에 오는 히브리어 '랍'(*)은 기본적으로 '풍성한'이란 뜻이며 이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는가에따라 여러 견해로 갈린다. (1)'아담'을 수식하여 '많은 사람들'이란 뜻을 구성한다고보는 견해. (2)'아담'이 '땅'을 뜻하는 '아다마'(*)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보는 견해(Dahood). (3)'랍'이 '소나기'를 뜻하는 '레비빔'(*)의 변형이라고 보는 견해(G.H.B.Wright). (4)'랍'이 '풍부하게'라는 뜻의 부사로서 '이레야푸'(*, 개역 성경의 '쏟아지느니라'에 해당함)를 수식한다고 보는 견해. 그런데 '아담'은 그 단어 자체에 총칭적이고 집단적인 의미의 '인류'를 내포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견해들 중 (3)과 (4)의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성 경: [욥36:29]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구름의 폐임 - 직역하면 '구름이 넓게 펴져 있음'이다. 그리고 장막의 울리는 소리는 천둥 소리를 뜻한다. 여기서 '장막'(*, 수카토)은 컴컴한 구름을 뜻한다(Pope). 즉, 이 구절에서는 신속한 구름의 발생과 집결 또는 펼쳐짐 등 자연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천둥 소리를 '장막의 소리'로 묘사한 것은 그 소리를 하나님의 장막 속에 거하시면서 발하시는 '호통 소리'로 대비시키기 위함인 듯하다(Delitzsch).
성 경: [욥36:30]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 번개 빛이 온 사방에 번쩍거리며 빛을 발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사면'은 온 천지 사방을 가리키는 것이지, 굳이 '하나님의 주위'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 다만 순식간에 번개 빛을 사용하셔서 온 하늘을 밝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Rawlinson). 한편 성경에서 번개는 대체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위엄(계 4:5;11:19), 무서운 심판(슥 9:14;계8:5), 예기치 못할 주의 재림(마 24:27)등을 상징한다.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 본문은 (1)하나님께서 파도로 바다의 심연까지도 가리우신다(시 18:15-50), (2)(하늘은 번쩍거림으로 밝아지는 반면) 바다의 심연은 더욱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리워진다, (3)바다의 뿌리, 바다의 심연까지도 그분은 빛으로 덮으신다 등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중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Delitzsch, Stuhlmann).
성 경: [욥36:31]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구름을 운용하시면서 두가지 대조적인 목적을 이루시고 계심을 보여준다.
만민을 징벌하시며 - '만민'(*, 야밈)은 '암'(*, 백성, 국가)의 복수형으로 백성들에 대한 총칭이거나, 국가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징벌'의 '야딘'(*)은 '다스리다', '심판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딘'(*)의 파생형이다. 즉, 엘리후는 비와 구름으로 인해 작물이 유실되거나 홍수의 피해, 천둥 번개로 인한 재해 등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식물을...주시느니라 - 위에서 언급한 내용의 반대 현상으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려 땅을 기름지게 하여 수확을 풍성케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자유 자재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에서 나타난다.
성 경: [욥36:32]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두 손을 싸시고 - '싸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사'(*)는 '덮다', '감추다', '숨기다'를 뜻한다. 이 말은 번개 빛으로 손 전체를 채우듯 손에 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혹자는 이를 '들어올리다', '휘두르다'라는 뜻을 가진 '니사'(*)의 오독(誤讀)이라고 보기도 하며(Dhorme, Fohrer), '구름과 구름이 마주침으로써 일어나는 번개의 번쩍거림-번개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날뛰는 것을 뜻하는-을 묘사하는' 말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Pope). 어쨌든 본절에서 하나님은 심판자와 통치자로서 폭풍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전사로 묘사되고 있다(Habel).
성 경: [욥36:33]
주제1: [엘리후의 결론적 연설]
주제2: [찬양받아야 할 하나님의 섭리]
그 울리는 소리가...표시하고 - 문자적으로는 '그의 경고하는 외침이 그 자신에 대한 선포가 되게 한다'이다(Lange). 즉, 그 천둥 소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는 증거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의 공의로우심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Habel).
육축에게까지 - 가축들도 그 폭풍우 속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내포되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이는 물론 엘리후의 주장이다. 그러나 본절의 의도는 그만큼 하나님의 행사는 위대하며 모든 만물에 그 뜻이 분명히 나타나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욥37:1]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뇌성과 번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떨며...떠나느니라 - '떨며'의 '에헤라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이나 슬픔 혹은 두려움으로 인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가령 '땅이 흔들린다'는 표현은 마음의 떨림에 대한 시적(時的)인 묘사인 것이다(사10:29;41:5;겔 26:18). 그리고 '떠나느니라'(*, 이타르)는 '뛰어오르다', '펄쩍 뛰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나타르'(*)의 파생형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36장 끝부분에서 천둥과 번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성 경: [욥37:2]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뇌성과 번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들으라 들으라 - '듣다'라는 뜻을 가진 '솨마'(*)가 두 번 반복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항상 듣다'(시 6:9)라는 뜻과 '세심하게 듣다'(13:17)라는 뜻을 아울러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반부의 '하나님의 음성'은 3절의 '그 소리'와 함께 표면적으로는 천둥 소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엘리후가 자연 현상인 천둥 소리를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표현은 천둥 소리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Rawlinson).
성 경: [욥37:3]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뇌성과 번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천하에 퍼치시며 - '천하'(*, 하솨마임)는 문자적으로는 '하늘들'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하늘 끝에서 하늘 끝으로, 즉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시사한다. 또한 이 단어는 하반절의 '땅끝'과 대구를 이루어 온 천지를 모두 포함하는 능력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퍼치시며'(*, 이쉬레후)는 천둥 소리를 나타내는 지시형 어미 '후'(*)와 '자유롭게 되다', '묶이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솨라'(*)의 파생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천둥 소리가 온 하늘을 뒤덮어 진동시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7:4]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뇌성과 번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 '번개 빛'으로 번역된 말은 원어상 목적격 접미사인 '그들'을 문맥의 뜻에 맞게 '번개 빛'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견해로 나뉜다. (1)여기 사용된 동사 '아카브'(*)의 뜻을 '멈추다','억제하다'로 보고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번개 빛에 놀라서 질겁을 하며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견해(Pope). (2)주어를 '하나님'으로 보고, 목적어를 '징벌을 받아야 할 자들'로 이해함으로써 본문을 '그분께서 그들을 찾지 못하실까?'로 번역하는 견해(Ewald). (3)이 구절의 주어를 '일반적인 사람'으로 이해하고, 동사 '아카브'(*)를 '머무르다', '붙잡고 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함으로써 '그들(번개 빛) 앞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머무를 수 없다'라고 이해하는 견해(Gordis, Hartley). 즉, 천둥과 번개 앞에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개역 성경에서처럼 주어를 '하나님'으로 보고, 목적어를 '번개 빛'으로 분석하여 '하나님께서 번개 빛을 억제하지 않으신다'로 번역하며, 영역본들도 대체로 이렇게 번역되었다. 즉, 천둥에 뒤이어 번개가 치는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로 보는 것이다(Rawlinson, Lange, Delitzsch, KJV, RSV).
성 경: [욥37:5]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뇌성과 번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기이하게(*, 니플라오트)는 '기적', '불가사의한 일', '경이로움'을 뜻하는 명사 '펠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사실이나 현상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반절의 '헤아릴 수 없는'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한다.
성 경: [욥37:6]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명하여(*, 이오마르) - 문자적으로는 '그가 말하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인간의 그것처럼 단지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실제적인 힘을 지닌 창조적인 능력(창 1장)의 표출임을 보여준다. 한편 내리라(*, 헤웨)는 '떨어지다', '내리다'라는 뜻을 가진 '하와'(*)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원래 '입을 크게 벌리다', '하품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 경: [욥37:7]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손을 봉하시나니 - '사람들의 손을 묶어 놓으신다'라는 뜻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손을 놓아 멈추게 하신다는 의미이다(NIV, he stops every man from hislabor). 이런 상태는 6절의 '눈', '비'와 관련되어 있는데, 기후의 변화로 인하여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하반절에 나온다.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쉬면서 그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상기하며 그 능력을 인정하도록 하시기 위해 눈과 비를 땅에 내려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성 경: [욥37:8]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짐승들은 - 자연 현상의 변화(계절의 변화)로 말미암은 결과들은 인간에게(7절)만이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짐승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때문인 것이다. 즉, 모든 생물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능력에 좌우되어 생(生)을 영위해 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 경: [욥37:9]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남방 밀실...이르고 - '밀실'(*, 헤데르)은, 우가릿 신화에는 엘(신)의 비밀스러운 거처로 표현되었다(Pope). 이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폭풍우를 저장해 두는 곳으로 여겨졌다(Rawlinson). 한편 원문상에는 '남쪽'이라는 표현이 없으나 개역 성경은 9:9의 표현과 같은 것으로 보고 '남쪽'의 의미로 이해한 듯하다(KJV, NASB도 이렇게번역함). 결국 이는 남쪽 혹은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우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에서는...이르며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메자림'(*)은 기상학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흩어버리다', '쫓아버리다', '퍼지다'라는 뜻인'자라'(*)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단어는 미친듯이 몰아치는 북풍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욥37:10]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 -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입김'으로서 바람에 대한 시적(時的) 표현이다.
얼음이...줄어지느니라 - 북쪽에서 부는 찬바람으로 인하여 기온이 떨어져 얼음이 얼게 됨을 표현한다. 즉 얼음이 얼어서 물의 면적이 줄어들어 한 덩어리의 얼음으로 변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매우 세심한 과학적 관찰을 보여준다. 결국 여기서 엘리후는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까지도 자신의 수중에 두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7:11]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습기로...실으시고 - 여기서도 역시 고대의 문헌으로서는 매우 과학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짙은 먹구름 위에 습기를 더하신다'는 것으로 비가 오는 원인을 묘사하고 있다.
번개 빛의 구름 - 이는 '번개를 간직하고 있는 구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과학에서 번개는 서로 다른 극성(極性)을 가진 구름끼리의 충돌로써 설명되는데, 여기서도 번개와 구름이 관련되어 있다는 분명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37:12]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구름이...행하나니 - 구름의 움직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비를 내리신다(Rawlinson).
세계 상에 - 문자적으로는 '온 세상의 지표면 위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당신의 뜻대로 운행하시면서 온 지표면 위에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자연 현상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13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성 경: [욥37:13]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눈, 비, 바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은 구름의 조성과 운행 하나만으로도 인생들의 삶을 다양한 측변에서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징벌을 위하여 - 구름으로 인한 징벌은 많은 비를 내려 홍수로 땅 위의 모든 소산물과 토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토지를 위하며 - 땅 위에 적당한 비를 내려 초목과 작물이 잘 자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레헤세드) - 전치사 '레'(*)는 '...을 위하여'의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헤세드'(*)는 보통 '자비', '친절', '사랑' 등으로 번역된다.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포함하는 '경건'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헤세드'(*)는 비참하고 동정받을 만한 처지에 있는 대상에 대한 긍휼을 포함하는 사랑의 뜻으로, 특히 인생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애(仁愛)의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불쌍한 인간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시기 위하여 구름을 사용하심을 가리킨다. 이처럼 폭풍과 구름 등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성 경: [욥37:14]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의 말을 자세히 듣고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오묘하신 통치의 지혜를 깨달으라고 요구한다. 이미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다했고 이제 남은 것은 욥이 그 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깨닫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궁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트보넨'(*)은 '이해하다', '숙고하다', '신중하다'의 뜻을 가진 '빈'(*)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사물이나 사건을 주의깊에 통찰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성 경: [욥37:15]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명령하셔서(*, 베숨) - '놓다', '위치시키다', '지정하다'의 뜻을 가진 '숨'(*)에 전치사 '베'(*)가 결합된 단어이다. 영역본 NIV와 주석가 하틀리(Hartley)는 이 단어를, 자연을 직접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controls'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단지 만물의 창조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운용하시는 주관자이심을 거듭 밝히고 있다.
구름의...하시는지 -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름으로 하여금 번개 빛을 발하게 하다'이다. 구름끼리의 충돌로 번개가 치는 것 또한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종에 의한 것임을 뜻한다.
네가 아느냐 -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를 인간은 감히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인정하라는 권고가 숨어 있다. 엘리후는 욥의 생각을 더욱 자극하여 굴복시키기 위해 이미 자신이 말한 자연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섭리 외에 몇가지를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 덧붙이고 있다.
성 경: [욥37:16]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평평하게 뜬 것(*, 알미플레시) - 의문 부사 '알'(*, how)과 '무게를 달다', '평형을 맞추다'라는 뜻을 가진 '팔라스'(*)의 파생형이 연결된 말이다. 여기서 '팔라스'는 좌우가 균형을 이루며 정리된 상태를 의미하며, 개역 성경은 종종 '평탄케 하다'로 번역하였다(잠 4:26;사 26:7).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늘 위에 구름이 자유로이 펄쳐져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하늘에서 구름이 지주가 없이도 매달려 있는 신기한 모습의 평형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Pope). 그리고 이 구절은 하반절의 '기묘한 일'과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Gordis).
지혜가 온전하신 자 - 이 표현은 엘리후가 하나님을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특히 여기서는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한다.
성 경: [욥37:17]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남풍으로 하여...고요할 때에 - 여기서 '고요할 때'(*, 베하스키트)는 '조용하다', '평온한'의 뜻을 가진 '솨카트'(*)의 파생형이다. 이 동사의 기본 뜻은 전쟁이나 불화가 없는 상태 혹은 걱정이나 불안이 없는 '평온'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앞에서 언급된바, 살을 에이고 온 땅을 얼어붙게 하는 북풍(9,10절)과 대조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 여기서의 '남풍'은 사막의 강한 열풍으로 짐작된다.
따뜻한 까닭을 - 문자적으로는 '뜨겁게 되는 이유'이다. 이 열풍은 강한 열기를 내리쬐는 폭양(暴陽)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의복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질식할 것만 같은 더위를 느끼게 함은 물론이고, 뭇 짐승들을 깊은 그늘 속으로 몰아넣는다(Lange, Pope, Thompson)고 한다.
성 경: [욥37:18]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 - '부은'(*, 무차크)은 '퍼붓다', '녹이다','주조하다'의 뜻을 가진 '야차크'(*)가 변형된 단어 '추크'(*)의 파생형으로 '쏟다', '녹다'라는 뜻이다. 또한 '야차크'(*)는 솔로몬이 만든 금으로 된성전 기물과 청동 주물을 가리키는 데에도 자주 사용되었던 것으로(왕상 7:46) 보아 '주조한 기둥'을 뜻하는 '무차크'(*)가 이 '야차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편 하늘을 뜻하는 이 표현은 하늘을 태고 시대의 두 물을 분리시키는 거대한 반구형 고체로 생각한(창 1:6)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뭄이 들때의 하늘을 신 28:23에서 '청동'으로 비유하기 때문이다(Pope, Hartley).
펼 수 있느냐 - 그런 청동과 같은 하늘을 주조하여 펼쳐 놓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궁창을 마치 밀가루 반죽을 두드려 펼친 것 혹은 휘장이 펼쳐지듯 확장된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시 104:2;사 40:22).
성 경: [욥37:19]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우리가 그에게 할 말 - 엘리후는 여기서 하나님과 변론하려는 시도를 가정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여 이 상황을 '엘리후가 아이러니에 빠지고 있다'라고 이해했으나(Rawlinson) 그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과 변론하려는 태도, 즉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에 도전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하나의 아이러니인지를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할말'이 인간에게는 한마디도 없다. 따라서 욥은 그것에 관해 엘리후 혹은 엘리후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경건한 자들에게 가르칠 말이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워서(*, 호쉐크) -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애굽을 덮은 흑암의 재앙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종종 심판이나 저주를 지시하기도 한다(3:9;18:6;시 105:28;사5:30;겔 30:18). 본절에서는 진리나 지혜를 '어둡게 가리는' 무지한 상태를 의미한다(전 2:13,14). 그러나 본문에는 반어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정작 '이치에 어두운 자'(38:2)는 엘리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욥이라는 지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욥37:20]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말하고 싶은 것을...고할 수 있으랴 - 엘리후 자신에게도 욥이 하나님에게 도전하여 논쟁을 벌였던 것보다 더 많은 변론을 행할 분별력과 지식이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Pope). '고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수파르'(*)는 '세다', '다시 계산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파르'(*)의 기원형이다. 이 단어는 명사 '세페르'(글, 책)나 '세파르'(인구 조사, 수(數)세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엘리후 자신의 머리 속에서 떠오를 수 있는 모든 가상적인 변론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런 행위가 너무도 어리석고 결국은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후반절에 대구로서 언급되어 있다.
삼키우기를 바랄 자 - '삼키우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예불라'(*)는 완전한 멸망을 나타낸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수나 땅으로 하여금 입을 벌려 사람들을 삼키게 한 경우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신 것이고(출15:12), 또 한 번은 고라, 다단, 아비람의 반역에 참가한 모든 무리들에게이다(민16:30,32,34). 이처럼 이 단어는 주로 파괴, 파멸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어리석은 변론이 곧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욥처럼 천박하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단어를 '삼키우다'는 뜻대신에 '혼잡케 되다', '혼동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정신이 혼란케 되는 상태(사 3:12)를 뜻하는 단어로 보는 것이다(Gordis). 그러나 문맥상 전자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욥37:21]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경외(敬畏)]
궁창의 광명 - 문자적으로 '하늘의 태양'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결과 은혜 등을 상징한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감춰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럴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당황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완전히 사라지신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이 볼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 여기서 우리는 태양을 가렸던 구름이 바람에 의해 날려가고 감취었던 태양이 다시 빛을 발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엘리후는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들의 가변적인 태도를 이처럼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태양의 나타남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의 갑작스런 나타나심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불러일으켜 그 앞에 완전히 순복하게 만든다.
성 경: [욥37:22]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경외(敬畏)]
북방에서는 금 빛이 나오나니 - '금 빛'(*, 자하브)은 문자적으로는 '금(정금)'을 가리킨다. 로린슨(Rawlinson)은 이 구절이 실제로 금이 북쪽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태양의 광선을 상징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비록 고대 동양의 문헌에 태양 빛을 금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본절의 표현을 그와 관련한 겔 1:4와 유사한 내용으로 보기 보다는 실제적인 '금'으로 이해한다. 고대인들의 관념 속에 '북쪽은 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금은 북쪽에서 오지만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두려운 위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대구적으로 표현한 구절로 본다. 즉, 그에 따르면 '북쪽'과 '금'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되듯이 '하나님'과 '위엄'을 연결시키려는 것이 엘리후의 의도인 것이다.
성 경: [욥37:23]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경외(敬畏)]
측량할 수 없나니(*, 로 메차누후)는 부정사 '로'(*)와 '발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차'(*)의 파생형이 연결된 말이다. '마차'는 단순히 '발견하다'라는 의미 외에 다른 뉘앙스들을 갖고 있다. 수동태형은 '압도된','파악된'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70인역(LXX)에서는 종종 '붙잡히다'로 번역된다. 또한이 단어는 '도달하다', '획득하다'라는 뜻의 아람어와도 관련되며, '마주치다', '만나다' 등의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앞 구절에 '찾다'라는 의미가 나오면 뒤에 있는 '마차'는 '만나다', '발견하다'는 뜻으로 번역된다(신 4:29;아 5:6;렘 29:13). 본절에서는 '도달하다', '온전히 파악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1:7). 즉,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의 한계 너머에 계시므로(NIV) 우리는 그를 발견할 수 없는것이다(NIV, RSV, NASB).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로 예아네) - 역시 부정사 '로'(*)와 '괴롭히다', '압박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의 파생형이 연결된 말이다. '아나'는 주로 '억지로...을 시키다' 또는 '굴복케 하려고 애쓰다'를 의미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심판, 공의 등의 단어와 관련되어서 하나님은 결코 공의를 저버리고 악을 도모하시는 분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연약한 인간을 압제하시지도 않으시며, 폭력으로 정의를 무너뜨리시지도 않는다. 이 진술을 통해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불공정한 심판자'로 매도한 주장을(9:20-24) 반박한다.
성 경: [욥37:24]
주제1: [계속된 엘리후의 연설]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경외(敬畏)]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 칼 하크메이 렙) - 부사 '칼'은 '모든'(all of)을 뜻하며, 명사 '렙'(*)은 '마음', '심장', '이해'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크메이'(*)는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하캄'(*)의 파생형이다. 엘리후는 이 표현에서 '저 혼자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를 의미하면서 심중에 욥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Pope). 하나님은 자기를 그렇게 여기는 '모든'(개역 성경은 번역하지 않음) 자들을 무시하신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대항할 수 없다.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 '돌아보다'(*, 이레에)는 어떤 대상에 관심을두고 특별히 바라보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 외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에서 '선견자'(*, 로에)가 파생되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라보심'을 뜻하므로 독특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는' 인생은 그 누구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평온하고 안락한 평화를 누릴 수없다. 창조주의 돌보심이 없는 피조물은 이미 그 존재의 의의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라아'(*)가 상반절에서는 '경외하다'(*, 예레우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곧 스스로 마음에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이기'(28:28) 때문이다. 이것이 엘리후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말의 결론인 것이다. 엘리후는 욥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고 지혜롭다고 하는 교만을 계속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엘리후는 자신의 모든 연설을 마치고, 이제 욥이 그렇게도 바랐던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에 의해 미리 그 길이 예비되었던 하나님의 판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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