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구출”(사도행전 12:1-5) 2012. 9.30.
오늘은 민속명절인 추석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도 유대인 최대명절인 유월절이 나옵니다만, 당시의 예루살렘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리어 핍박과 수난의 절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추석 역시‘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할 정도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 최대명절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상제사 문제로 많은 어려움에 처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배울때, 추석은 추수감사절과 같은 날이지만, 세상적으로는 조상귀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날이니 귀신 생일날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죽은 조상들이 무슨 음식을 먹을 수가 있겠으며, 자손들의 정성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귀신들만 생일날 만난듯 좋아할 뿐이겠지요. 시편106편에도“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시106:28-29)라고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0장에도“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10:20)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처형이 유대종교 교권자들과 세상정치 지배자들의 합작에 의하여 이뤄졌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처음엔 스데반집사의 순교에서 보듯이 유대종교 교권자들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불가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멀리 이방 땅으로 핍박을 피해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후 사울의 회개를 기점으로 잠시간의 평화와 안정의 기간이 있었으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이번에는 세상정치 지배자인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고 나선 것입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만 헤롯은 일차적으로 사도 야고보를 처단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서는 사도 베드로까지 공개 처단하고자 체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간섭으로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셨으며, 교회를 핍박한 헤롯은 가이사랴의 공개석상에서 치시므로 죽이신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주권적으로 간섭하시고 섭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심판도 행하시고 계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9장의 말씀대로“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셔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최후의 심판이 있지만 말입니다. 누가복음18장의 말씀같이“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7-8상)고 하시므로써, 필요하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도 가차없는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왜 야고보는 복음전파 초기에 비명에 죽게 내버려 두셨고, 베드로는 어찌하여 천사를 동원하여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나하는 점입니다. 더구나 야고보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저도 오래전에 여러 달 아파 누워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만, 어느 때는 우울한 마음이 들어 왜 나만 이렇단 말이냐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아침만 되면 출근들 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낮에는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저녁만 되면 하루 수고를 끝내고 집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입니다. 마치 노산 이은상곡‘가고파, 내 고향 남쪽바다’노래와 같이,‘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의 ‘나는 왜 어이타가’의 심정이 되곤 하였던 것입니다. 요즘도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혹 일찍 죽는 경우에, 죽은 사람 입장으로 바꾸어 이같은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다른 사람들은 여직 재미있게 잘 살고 있는데 어찌 나만 억울하게 일찍 죽어야 한단 말인가?’하는 원망어린 생각을 분명 하였을 것이다 라고요. 일찍 순교한 사도 야고보만 해도 그럴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에 대한 욕구와 야심이 많았던 제자였기에 그렇습니다. 한번은 그가 동생 요한 제자와 더불어 예수님께 구하기를,“선생님이여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라고 하였던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10:38-40)” 여기서‘잔과 세례’는 고난과 죽음을 의미할텐데 그래서 야고보가 일찍 순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라고요. 그러므로 한편 생각하면 야고보는 주님을 위해 먼저 순교의 종이 되었고, 먼저 순교하므로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니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야고보의 순교는 아니더라도, 행여 우리 주변의 누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너무 일찍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단호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우선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분명히 죽는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합니다(히9:27). 또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절대로 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숙지해야 합니다. 로마서14장에“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8-9) 하셨으니 말입니다. 또한 지난주일 성경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너희 믿음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심으로서,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사를 초월하는 차원이었듯이, 우리의 믿음이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지닌 믿음이 바로 죽음을 초월하는 그러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야고보와는 달리 기적적으로 구출받은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베드로는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베드로는 옥에서 구출되는 일련의 과정을 얼마나 놀라와 했으면 베드로 생각하기를“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9절)”하였다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공상 만화영화보다 더 놀랄 일입니다. 두 군사들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자던 중, 천사가 나타나 옆구리를 쳐서 깨니 쇠사슬이 스르륵 벗어집니다. 천사의 말에 따라 후다닥 일어나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마저 입고 따라가니, 파수하는 두 곳의 파수꾼 옆을 버젓이 지나감은 물론 시내로 통하는 마지막 쇠문에 이르자 쇠문까지 스르륵 열렸으며, 베드로는 계속 천사를 따라 한 불록의 시내 거리를 지나자 천사는 떠나고 베드로는 구출받은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다고나 할까요, 공상만화 속의 투명인간과도 같이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철옹성 같은 감옥을 빠져 나온 것입니다. 그후 전개되는 일련의 이야기 즉, 성도들의 놀람과 헤롯과 군사들의 소동은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곳 본문 말고도 많은 곳에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상)”고 하셨고,“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의 말씀을 보니 탈옥한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모든 제자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6-17절입니다.“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12:16-17)” 내용을 보면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베드로가 살아 나온 것을 보고는 놀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베드로가 말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써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건을 통하여 구출받은 베드로에게서‘사명자의 삶 즉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삶’을 생각게 합니다. 로마서 말씀같이“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라는 신앙고백의 삶이 바로 베드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산 자들 역시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듯“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롬1:17,갈3:11,히10:38)”의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분명히 깨닫게 하며 숙지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구출의 영적인 의미는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순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증거하였다고 할때, 베드로는 구출되어 계속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므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주일 밤의 MBC 프로그램‘나는 가수다 시즌2’에서 두 달만에‘최초 최단 최다 1위’라는 기록을 세우고 8월의 가수로 선정되면서, 12월 가수왕전에 진출하게 된 기독교 CCM가수‘소향’씨가 있습니다. 4옥타브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그녀를 처음 대하는 일반 대중은 물론 기존 가수들까지 감동을 넘어‘경악’하며,‘저런 가수가 어디 숨어 있었느냐’며 놀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10여년전부터 포스(헬라어φώσ,빛)라는 그룹에서 국내를 비롯한 세계 50여개국을 다니며 찬양선교로 활동해 왔다고 하며 멤버는 시집식구라고 합니다. 원래 소향씨가 결혼하기 전부터 시아버님은 목사님이셨는데 사모님이 대장암 말기에다 암이 여러군데 전이된 상태에서 병원에서 포기한 것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족 찬양선교단을 시작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때 소향씨가 며느리로 합류하였는데 결혼초기에 소향씨도 뜻하지 않은 자궁암이 발견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받아 치유되는 체험을 하면서 믿음이 더 깊어졌다고 합니다. 당초 시어머님이 임종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릴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중 결국‘찬양’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찬양을 부르던 중,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빛과 음성을 들었으며 치유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후로 소향씨의 포스 찬양그룹은 세상에 구원의 빛을 전하는 사명을 그 목적으로 삼아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구출’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받은 자들이니, 마땅히 죽으나 사나 주님을 섬기는 자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참된 사명이며 기쁨인 줄 다시한번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