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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17/ by. 얼음빙수/
여름방학이 오기도 전에 정신머리가 흐트러진 고3들을 보고
잔소리하지 않는 선생님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문제로 학생들을 닦달했던 교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 지상렬.
“얘들아, 우린 이미 특정 대화방식과 서술방식에 익숙해져 있단다. 살아생전에 다채로운 문장들로 혀를 물들이면 그게 미식가지. 미식가 별거 없다. 다들 무지개를 음미해 봐.
지호야, 네 어휘력은 맥주사탕이야. 술맛도 안 나는데 중독성 있다고. 아, 이거 또 한 번 핥든가 해야지. 안 되겠네.
다들 혓바닥을 그림판 페인트로 칠해버렸니? 어쩌면 그렇게 명암 하나 없이 고르고 획일화된 거야. 우리 한글을 배워버린 김에 세종대왕님 뿌듯하시라고 열심히 좀 말해보자. 왜 표현에 맞고 틀리고를 정해. 태형이를 봐.
야, 태형아. 너 엊그저께 나한테 뭐라고 했지? 너 선생님 된다고 해서 내가 사범대 갈 거냐고 물었더니, 종이접기 선생님 된다고. 나한테 꽃게 접어준댔지? 내가 털게 같지만 나를 리스펙한다면서. 이거 봐! 선생님 그 말 듣고 집에 가서 잠 못 잤어. 마음이 뭉클해서 우심방 침수됐다. 나 지상렬은 이제 꼼짝없는 수재민이야.”
‘역시 문학샘. 나의 설리번 선생님.’
“이 반에 대단한 친구가 또 한 분 계시지. 도경수. 경수야, 너는 책을 많이 읽니? 아주 독특하고 고집 있는 화법의 소유자던데. 선생님은 네 서술형 답안지 읽는 재미에 시험문제 낸다.”
“책 잘 안 읽습니다. 자꾸만 같은 줄을 또 읽게 되더라고요. 너무 많은 글자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미쳤구나, 경수야. 네가 졸업하고 나면 선생님은 어쩌지? 부탁인데 1년만 유급해줄 수 있겠니?”
“유급해서 열아홉에 머물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요. 이과 1등 수타인도 시간을 멈추진 못하니까요.”
“역시 초월해있어. 그런데 경수야. 너 요번 기말고사 서술형 2번, 시점 찾는 문제 틀렸더라? <보기>의 (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어. 언뜻 보면 서술자와 주인공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놀랍게도 서술자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모두 꿰뚫어보고 있었지.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이 많아서 헷갈렸나 보다. 아니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익숙해서 눈치 못챈 걸수도 있어. 경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익숙하니?”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익숙해서 눈치 못챈 걸수도 있어.
경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익숙하니?
전지적 작가 시점이 익숙하다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익숙하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남이 써놓은 내 일기를 보는 것 같애.’
/식물인간/ 17/ by. 얼음빙수/
수능이 끝난 고3의 뇌는 위험하다.
질주를 멈추었대도 이미 달궈진 뇌는 저온 화상을 입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머리에 무리가 온 상태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리 선생님이 문과인 도경수 학급에 들어와서 ‘인터스텔라’를 틀어주었다.
“잘 자.”
학생들이 아기천사처럼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도경수는 영화에 빠져들었다.
도경수는 온통 검고 반짝이는 영상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우지호는 의외로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우지호는 파도로만 이루어진 행성을 보고 영감을 받았는지 보물 2호를 꺼내 무언갈 적었다.
도경수도 다 써가는 공책을 펼쳐 별을 잔뜩 그렸다.
도경수는 별을 그린 장을 찢어 김태형에게 건넸다.
“왘 고마워! 나는 줄 게 없는데.”
‘쓰레기를 줘도 웃어주는 친구라니.’
“뭐야. 나도 줘.”
‘별을 달라고 말하는 박성광이라니.’
도경수는 자신의 우주가 영화에서 본 것만큼이나 넓고 신비하다고 생각했다.
/식물인간/ 17/ by. 얼음빙수/
김준호는 고민했다.
김준호는 수능이 끝난 후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생명력(♥)을 모아 바다를 꾸며가는 힐링 게임이었다.
게임이 1주년을 맞아서 바다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웰시 코기 캐릭터를 출시했다.
웰시 코기 캐릭터는 억만금의 생명력을 모아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오직 현금 만천 원으로 구매해야 했다.
김준호는 바다와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귀여운 웰시 코기 캐릭터가 갖고 싶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김준호의 표정이 범상치 않자 천적인 우지호조차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김준호는 차마 웰시 코기 캐릭터를 살지 말지 고민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걱정스런 마음에 김준호 곁으로 모여들었다.
“대학 때문에 그래?”
김준호는 당황했다.
“그런 거 아냐.”
“그럼 집에 무슨 일이 있니?”
지나가던 한문 선생님까지 합세하여 김준호를 걱정했다.
김준호는 웰시 코기 캐릭터가 불러온 나비효과에 깊이 탄식했다.
이제 와서 사실대로 밝힌다 한들 김준호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때, 박명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준호 너! 어비스리움 1주년 이벤트팩 <축하해주러 온 웰시 코기> 못 사서 서글픈 거지?”
박명수의 바다 속에는 웰시 코기가 70마리나 떠다니고 있었다.
귀여워서 볼 때마다 사다 보니 물 반, 코기 반이 된 것이다.
김준호는 어이가 없는 척 했다.
박명수가 김준호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제멋대로 웰시 코기 캐릭터를 결제했다.
“뭐하는 짓이야!”
박명수는 김준호의 스쿨뱅킹계좌로 만천 원을 즉시이체했다.
“너, 내 계좌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알면 다쳐. 다치고 싶어?”
박명수는 어둠의 세계를 꽉 잡고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기부천사였다.
한문 선생님은 화가 났다.
“왜 말을 못해.”
옆에 있던 김태형이 당황했다.
“웰시 코기 캐릭터가 갖고 싶다, 웰시 코기 캐릭터 때문에 고민했다, 왜 말을 못하냐고!!!!!!”
한문 선생님은 감정을 홀로 삭이는 김준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김준호의 마음 속에 있던 복합적 응어리가 드디어 터졌다.
김준호는 엉엉 울고 말았다.
/식물인간 / 17/ by. 얼음빙수/
우지호가 자신이 키우는 햄스터를 보여주겠다며 도경수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
김태형은 우지호가 키우는 햄스터를 보겠다며 도경수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
“펭돌아, 우리 집 햄스터 물방울이야.”
“밍크털 열쇠고리 아니니?”
“엄청 귀엽다! 만져볼래!”
“태태, 조심조심 다뤄야 해. 뒤지고 싶지 않다면.”
김태형이 아주 조심스럽게 햄스터의 등을 쓰다듬었다.
“햄스터 이름을 왜 물방울로 지었니.”
“틀렸어. 멍청한 펭돌이새끼야. 물방울이 아니고 ‘물방울이’가 이름이야.”
순식간에 멍청한 펭돌이로 전락한 도경수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펭돌아, 들어와서 라면 먹고 가라고 안 하니?”
도경수는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렀다.
“라면 없어.”
“나에게 있어.”
김태형이 패딩 주머니에서 5개입 참깨라면을 꺼냈다.
김태형과 우지호가 참깨라면을 먹기 위해 도경수의 집으로 들어섰다.
도경수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에 민윤기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우지호 김태형 오랜만!’
‘좋댄다.’
우지호가 물방울이를 도경수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물방울이는 마치 콩송편 같았다.
‘나도 만지고 싶다.’
도경수가 물방울이를 기왓장에 올려주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무작정 내다 버리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지호가 물방울이를 케이지에 넣었다.
“라면 먹는다며.”
“그건 핑계야. 그냥 경수네 집 가고 싶어서.”
도경수는 인간을 대하는 게 서툴다.
“면접 잘 본 것 같더라. 이제 너는 스마트 농부 펭돌이야?”
“입 닥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어?’
“경수야, 우리 스무 살 여름에도 할아버지 집에 가자. 가서 할아버지도 보고, 반딧불이도 보고, 자두나무도 보고, 민석이도 보고, 유진이도 봐야지!”
“그래. 그러자.”
“와, 김태형. 나는 죽어도 안 데려가더니 펭돌이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할아버지 댁에 데려가냐.”
김태형이 아무에게나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니었다.
“경수는 꼭 데려가고 싶었다.”
“펭돌이는 되고, 왜 난 안 되는데!”
“경수는 우리 집 자두 같아서, 데려가서 꼭 익게 해주고 싶었다.”
김태형은 도경수를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굳게 다짐했었다.
텅 빈 소년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겠다고.
“지랄. 그래도 펭돌이는 나랑 더 가까워. 우린 같이 허니수학여행을 보낸 사이고, 펭돌이는 내 보물 2호를 두 번째로 영접한 포켓몬이라고.”
열여덟,
수학여행,
교복,
고마워.
“첫 번째로 본 사람은 누군데?”
‘민윤기’
“에메랄드 대가리”
여름에 더 시린 색이었던 소년
‘우지호 에메랄드 지금 저기 있는데.’
‘.......’
우지호가 자신의 보물 2호를 열어 열띤 자랑을 펼쳤다.
김태형은 멋 몰라도 좋아라 웃었다.
도경수도 슬쩍 같이 웃었다.
민윤기는 행복했다.
열아홉 끝자락은 다행히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