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프랑스식 대학평준화의 오해
엘리트는 따로 … 일률적 평준화는 위험한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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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자/상명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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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은 9월 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국의 고질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대학 평준화 방식을 제안하며 “프랑스식으로 과외받지 않아도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일단 대학에 들어간 뒤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은 도태되도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교육제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너무나 피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프랑스의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대학 가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1968년 5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는 전국 대학에 일련번호를 붙여 평준화시키고 선발시험도
없앴다. 거주지나 통학거리 이외에는 아무런 선발기준이 없으므로 학생들은 바칼로레아(우리의 수능시험에
해당) 합격통지서를 받는 즉시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신청하면 되고, 대학은 마치 버스 승객을 태우듯 선착순으로 정원을 채운 후 그 뒤의 신청자를 자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들어갈 때는 선착순이지만 2년 후면
50%가 탈락하는 가혹한 장치가 있기는 하다.
한 교실에 수백명씩 몰리는 시장판 같은 강의실에서
양질의 교육이 이루어질 리 없고, 또 2년 만에 탈락한
학생들이 그 시점에서 직업교육으로 전환할 길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인적 낭비가 생긴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또 경쟁력 있는 직업인이 요구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조건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싸구려
평등주의에 나라의 장래를 팔았다고 대학의 저질 평준화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목소리도 지식인 사회에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기관은 대학(Universite)이 아니라 그랑제콜(Grandes
Ecoles·‘큰 학교’라는 뜻)이라는 점이다. 나폴레옹
시대에 만들어진 국립 토목학교에서부터 2차대전 이후
창설된 국립행정학교(ENA)에 이르기까지 그랑제콜은
200년 넘게 이 나라에 인재를 공급하며 프랑스라는 위대한 나라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교사
양성기관인 고등사범(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과 엔지니어를 키우는 이공대학(에콜 폴리테크닉)이 특히 유명하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이몽 아롱,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등 철학 문학 등 인문학 분야의 인명록은 그대로 에콜 노르말의 동창생 명부이고, 지난 200년간 프랑스를 이끌어온 고급관료, 정치가들의 인명록은 그대로 폴리테크닉의 동창생 명부다. 여기에 최근에는 ENA가 가세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교육제도의 최우선 순위는 대학이 아니라
그랑제콜이다. 2년제인 그랑제콜과 대학의 격차는 조금 과장하여 하늘과 땅만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발시험이 없는 대학과 달리 그랑제콜에는 입학시험이 있다. 정원이 50명 정도인 고등사범이나 폴리테크닉에 가려면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2년간 준비반에 들어가야 한다. 이 준비반 과정은 밥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온통 공부에 바쳐야 하는 가혹한 것이다. 전국의 모든 수재가 모이므로 시험은 엄청나게
어려울 수밖에 없어, 재수 삼수가 보통이다. 유명한 철학자 미셸 푸코도 고등사범 시험에 한 번 낙방한 재수생이었다.
경쟁력 없는 프랑스의 대학제도가 40년 넘게 아무 탈
없이 지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딴곳에서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으므로 대학이
평준화되건 대중화되어 질이 떨어지건 국가경영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로 엘리트 양성기관도 없이 모든 대학을 평준화하겠다는 이정우 실장의 발상은 너무나 위험한 평등주의다. 교육의 기회는
평등해야 하나 학문의 세계에는 평등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발전은 학문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자·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