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연저수지(玉淵貯水池)
둘레길을 다녀와서!
시사적인 용어로 연합이란 말이 많이 쓰임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국제적으로는 UN과 EU등이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중에 라당연합(羅唐聯合)이 그렇고 기업들의 사명
(社名)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인터넷 카페 아름
다운5060의 서울본부가 대경지회(大慶支會)와 연대(連帶)
하여 대경지회의 주관하(主管下)에 옥연저수지 둘레길을
다녀왔다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연대란
어떤 일을 공동책임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구
경북과 서울에서 참석했던 회원 각 개인과의 이뤄지는
상호관계(相互關係)에 있어서 좋은 관계를 유지 한다는
의미로 끈과 띠라는 뜻의 둘 이상을 서로 연결 또는
결합시키는 유대관계(維帶關係)가 잘 이뤄졌다면 오늘
대구경북지회가 서울본회와 연대하여 옥연저수지 둘
레길을 걸었던 길동무행사는 대성공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賦與)해도 무리는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어느 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회원간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가 생면부지한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단 하루 만큼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서 다음 만남이
있을 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이기 때문입니다..
2016년7월17일 일요일인 오늘은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산행동호회"에서 원정산행지로
정한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에 소재한 옥연저수지
를 가기 위해 새벽 네시 사십분에 기상하여 여장
(旅裝)을 준비하고 종로3가에 가니 여섯시 사십분
국일관 앞 버스정차장에 올라가서 먼저 나온 동행할
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시니 즐거운 하루가 펼쳐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일곱시경에 도착한 아이넷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두 곳의휴게소를 거쳐 목적지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저수지 상류쪽에 버스를 주차한 시간이 오전
열 한시 쯤이었고 미리 와있는 대경지회 회원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80여명이 잘 짜여진 데크위를 밟는 송해공원 둘레
길을 걸으며 대경지회 회원들과 교유(交遊)를 하노라니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유대관계는 깊어가고 3.5 km의 둘레길에서 원점회귀를 하니 오후
두시경이었고 식당에서 뒷풀이를 한 다음에 여흥을 즐기는 시간을 갖는데
난 시간을 할애하여 달성조경사가 있는 주변풍경을 폰카에 담고는 오후
세시반에 귀경 버스에 승차하니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며 보내는 마음과
차 안의 아쉬운 마음들은 재회를 기약하는 마음들이기에 웃으며 떠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사당역에 도착하여 지하철로 집에 오니 밤 아홉시
사십분이었습니다..
옥연지가 있는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북도 고령군과 구분된다. 화원읍·논공읍·유가면
과 이웃한다. 면 소재지는 본리 리에 있다. 구마고속도로가
통과한다. 남동부에 위치하는 비슬산(琵瑟山, 1,083m)이
최고봉을 보인다. 옥연지(玉淵池)는 군 내 최대 저수지이다.
반송리 비슬산에 위치하는 용연사(龍淵寺)는 914년(신라
신덕왕 3) 창건된 신라의 고찰이다. 옥포는 본리로 흐르는
시냇물이 옥같이 맑고 곱다고하여 옥계(玉溪), 옥포(玉浦)
라고 불렀다. 1018년(고려 현종 9) 화원현 소속의 옥포가
수창군에 소속되었다. 1910년 옥포면이라고 칭하고
간경·본리·대방동을 관할했다. 1914
방송인 송해
평소 송해는 오토바이를 사 달라는 외아들의 부탁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결국 송해의 아내가 송해 몰래
외아들에게 오토바이를 사 주었는데 외아들은 제3한강교
(현재 한남대교)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송해는 절대 한남대교로는 지나다니지 않는
다고한다. 송해의 본명은 송복희이나, 여자 이름이라는
이유로 놀림받은 바람에 지금의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6년 11월 8일에 MBC 뉴스데스크의《카메라 출동》
에서 송해가 경로잔치에 출연해 8만원짜리 건강보조식품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28만원에 사도록 부추겼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고, 검찰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몇몇
연예인 들과 함께 소환하여 조사한 후, 같은 해 12월
7일 불구속 기소했다. 한국전쟁 시절에 통신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하여
모든 전선에 전투를 중단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휴전 전보를 직접 알렸다고 밝혔다.
옥연지 주변의 용연사
적멸보궁으로 유명한 용연사는 비슬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912년(신라 신덕왕 1년)에
보양선사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년)에 사명대사가 다시 재건하였다.
그 후 다시 한번 소실되어 현재는 1728년에 세운
극락전과 적멸석궁 석조계단, 안양루
등의 전각이 남아 있다.
용연사로 진입하는 진입로 양쪽에는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고 근처에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옥연지가 시원스럽게 펼쳐져있다. 자운문이라는
용연사의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안양루가 나오는데
안양루의 원래 이름은 보광루라고 하나, 근래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안양루를 지나면 바로
극락전이다. 용연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어 이 극락전을 본당으로 모시고 있다.
극락전 안의 석가 삼존불은 조선후기 영조 4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용연사에는 명부전
, 사명당, 용연사 삼층석탑, 석조계단, 12기의
부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용연사의 역사 및 유래
914년(신라 신덕왕 3) 보양(寶壤)이 창건하였으며
그뒤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
(조선 세종 1) 천일(天日)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1603년(선조 36) 탄옥(坦玉)·경천
(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범종각을 지었으나 1650년(효종 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1655년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
(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1660년(현종1)
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님떠난 대구역(大邱驛)
강정문 작사
강정문 작곡
시민철 노래
경부선 철길위에 흩어지간 기적소리
사나이 철석간장 갈기갈기 찢었구려
일편단심 그사람을 믿고 믿었건만
님 떠난 대구역에 님 떠난 대구역에
영시라 나만 홀로 울어야 하나
만나서 헤어지는 애정만리 운명속에
믿는다 말한마디 내마음을 울렸구려
춘하추동 내 사랑을 변함없으련만
님 떠난 대구역에 님 떠난 대구역에
영시라 나만 홀로 울어야 하나
2016-07-17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