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대의 큰 그릇 이시발(李時發)
1569년(선조 2) - 1626년(인조 4) / 향년 57세
이시발은 원경(元京)에서 충선왕(忠宣王)과 만권당(萬卷堂)을 열고 성리학 연구정진을 계기로 이 나라 도학(道學)의 창도자 역할을 한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후손이다. 이시발과 성옹(醒翁: 金德諴의 호)과의 인연의 끈은 동방급제로부터 시작됐다.
이항복이 “‘김덕함(金德諴)'. 장만張晩’ . ‘이시발李時發’ 이 세 사람이야말로 마음 놓고 국사를 맡길 만한 사람들이다.” 라고 했듯이 임진전쟁과 이괄의 난, 정묘전쟁과 병자전쟁이라는 조선조의 명운이 걸린 시기에 북방방비에 공을 세운 유장삼총사(儒將三銃士)들 중의 한사람이 이시발이다.
이시발은 성옹보다 7년 후생으로 6세에 부친을 여의고 일찌감치 20세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자 부족한 중국어 실력을 실감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학으로 터득하고 다시 승문원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내 임진전쟁이 터지자 병조판서 이항복의 추천으로 명군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일본군영을 드나들며 공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전쟁 그리고 정묘전쟁 등 국난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시군사기밀업무를 맡으며 김덕함과 그 궤를 같이 한 둘도 없는 동지요 친구였다.
그는 22세의 말단 관리로 임진전란이 터지자 김덕함처럼 맨 먼저 모친을 고향땅 청주로 피란시켜 놓고, 곧장 그 곳 의병장 박춘무를 도와 청주성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 길로 의주 행궁으로 올라가 김덕함과 병조의 전시행정업무를 같이 관장하기도 했다. 끝내 전란이 정유재전쟁으로 확전하자 이번에도 김덕함과 명나라 원군의 군량보급을 같이 담당한 인연도 있다.
마침내 선조가 56세로 승하하자, 이시발은 장단부사를 그만두고 달려온 김덕함과 급히 궁궐로 들어가 빈전도감殯殿都監의 일을 챙기기도 했다. 이때 김덕함은 46세 이시발은 인생이 한참 무르익어가는 39세였다.
더불어 광해시절의 인연도 만만찮다. 후금이 북방에서 발호하는 시기에 김덕함은 안으로는 병조산하 군기시에서 포와 병기개발에 힘을 쏟았고 밖으로는 안주에서 포좌와 성곽을 보수해 북방에 만전을 다하였고, 이시발 역시 평안도 도백(道伯)으로 포루와 보루를 수축하는 등 두 사람이 북방방어에 쌍벽을 이루자 병판(兵判) 이항복이 크게 만족해했다. 이윽고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시발은 반대에 나섰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고 서울 광진에 우거하는 등 김덕함과 강상의 뜻을 나눈 연고도 있다.
그래서 일까 인조2년 참찬관 김덕함은 인조와 야대(夜對)한 경연자리에서 이시발의 북방방어활약상을 일일이 들어가며 아뢰기를 “과거 광해시절 찬획사 이시발이 평안도에 도착해서 평안도의 민폐를 개혁하고, 공물과 조세를 감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도원수는 장정은 변방에 방수(防戍)시키고 노약자에게는 베를 거두었는데, 추수 뒤에 다시 베를 거두는 짓을 하여 한 가구에서 1년에 세 번이나 거두는 폐해를 일으켰습니다.”라면서 이시발의 지적이 있었음에도 시정되지 않고 있음을 누누이 진달하는 등, 성옹은 벽오(碧梧: 이시발의 호)와 북방방어와 민심안정에 인식을 같이하기도 했다.
▲이시발이 1601년(선조 34) 경상관찰사로 있으면서 작성된 간찰. 순천대박물관 소장.
그뿐이 아니다. 이괄의 난 때 이괄 군이 순식간에 궁궐을 접수하자 철산에서 명나라사신을 기다리고 있던 김덕함은 가도에 주둔 중인 명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한 반면, 평안도 부체찰사 이시발은 도원수 장만(張晩,1566-1629)과 군병을 이끌고 내려와 길마재[안령(鞍嶺)]전투에서 이괄 군을 진압하고 도성을 수복해냈다.
성옹은 이 전투에서 역전(力戰)하다 전사한 선천부사 김경운(金慶雲,2등공신으로 책록)의 제문을 응제(應製: 왕명으로 제문을 씀)하기도 했다. 이항복의 말대로 김덕함, 이시발, 장만이 이룩한 유장삼총사들의 빛나는 공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시발을 삼남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로 남한산성을 수축하는 역사 감독을 마치고, 형조판서가 되어 옥사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된 나머지 하옥돼 심문을 받다가 병을 얻어 청주 집으로 돌아 갔다. 그 후 인조4년 성치 않은 몸으로 엄동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황제의 인조 책봉의식에 참여 차 상경했다가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니 5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에 대사성 김덕함이 만사를 들고 먼 길을 떠나는 한시대의 큰 그릇 이시발을 찾았다.
벽오 이시발에 대한 만사/碧梧 李時發에 대한 輓詞
국가일은 하늘에 달려있는데 크게 떨쳤으니/天爲邦家胡奪速
익제 선생(이제현) 이후 몇 사람이던가./益齋公後有斯人
온전한 문무재능으로 오래도록 명성을 날렸으며/才全文武鳴時久
사려 깊게 정사를 펴 풍속이 속히 돌아왔도다./政布思威回俗頻
두 조정에서 뜻이 잘 맞아 성인 소리를 들어가며/際會兩朝脩攐聖
그 정신이 천리 끝까지 진동하였도다./精神千里圻衝辰
타향에서 영면해 고향집 청주로 돌아갈 조짐이라/西原歸櫬從先兆
오직 한이 되는 것은 별당마님의 곡소리로다./惟恨萱堂哭老親
이시발은 김덕함과 함께 한 시대의 명류로 알려진 신흠· 오윤겸· 정엽 등과 교류했던 사이인데다, 그의 신도비문을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쓰고, 이정영(李正英)이 전서를 남겼으며, 남구만(南九萬)이 시장을 맡은 부분도 눈길을 끈다.
먼 훗날 김덕함의 적성 천장이 있자 이시발이 못다 한 말을 두 아들 이경휘(李慶徽)와 이경억(李慶億)이 천장만사에 담아 적성까지 어려운 걸음을 했다. 성옹이 벽오를 떠나보낸 지 34년 만의 일이다. 이경휘는 겨우 9살, 이경억은 불과 6살 어린 나이로 철이 들기 전에 겪은 일인데도 선대의 인연을 잊지 않고 찾은 것이다.
충정공 김덕함 천장만사-이경휘/金德諴 遷葬輓詞-李慶徽
무쇠 같은 재난이 닥쳐 햇빛을 가리자/禍迫金墉日
공은 항거하는 의로운 신하로/公爲抗義臣
한마디의 말로 사직을 떠받쳤으니/一言扶社稷
먼 훗날 까지 떳떳한 윤리를 심었도다./千古植彝倫
거친 땅 가시울타리에 던져졌다가/栫棘投荒裔
변경에서 고생 끝에 큰 별이 되어/遭逢際盛辰
도를 갖춘 봉황으로 돌아온 증표였으니/鳳來徵有道
홀로 우뚝한 티끌 없는 옥이었도다./玉立逈無塵
한결같은 앎을 어찌 탓하랴/終始知何憾
뜻이 홀로 돌 틈을 흐르는 물 같아/貞孤志不磷
잠시 제사상으로 내려가 절하노니/少從牀下拜
굽어 마음에 둔 사람을 보는 듯 하도다./如見卷中人
흐르는 물처럼 늘 심중이 머물고/逝水長留感
높이 남기신 교화가 어제 아침 같아/遺風尙隔晨
은혜로운 시호로 크게 장려되었나니/易名恩奬大
길을 열어 천장하는 예절이 새롭도다./遷隧葬儀新
백일하에 아름답게 언덕을 열어/白日佳城啓
본디가 맑은 산에 운삽을 늘어세우고/寒山素翣陳
구천 길을 옳게 삼을 만 하니/九原那可作
정중히 만사를 쓰노니 눈물이 옷을 적시도다./題挽重沾巾
[註解]
운삽(雲翣): 발인 할 때에 영구 앞뒤에 세우고가는 구름무늬를 그린 부채 모양의 널판
충정공 김덕함 천장만사 - 이경억/金德諴 遷葬輓詞-李慶億
잘 다듬은 금과 아름다운 옥이요 참 선비로/良玉精金學士眞
당일 한마디의 말로 인륜을 떳떳이 바루었고/一言當日正彝倫
은혜가 남달리 두터운 태평시절 귀한 벼슬에 올랐다가/淸時異渥官銜貴
전란 후 다른 곳에서 봄을 맞는 무덤가의 큰 나무로다./亂後他山宰樹春
새 자리가 길지라고 매우 좋아들 하면서/已喜新岡稱吉地
불현 듯 불가사의 한 양날의 칼을 먼 물가에서 만나/卽看神劒會延津
외로운 고행을 옳게 감당해낸 선배 벗을 위하며/孤生可耐懷先執
애도하는 글을 쓰자니 눈물이 비 오듯 앞을 가리는구나./欲寫哀詞掩淚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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