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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廣州市)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다.
글 쓴 이 고 학 영
10월22일, 구름사이로 새벽별은 빛나는데...
오후부터는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日氣豫報)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 반가운님들을 두달만에 뵈오니 기쁜마음 한량이 없어라!
처음오신 분들도 여러명 계시니 분위기도 한결 새롭도다.(40명)
저만큼 황금들녘에는 가을걷이로 한창이고, 대지(大地)의 푸르럼은 황엽(黃葉)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으니...
오고 가는 계절속에서 윤회(輪廻)의 섭리(攝理)를 느끼노라!
아포(牙浦)에서 중부내륙고속국도로 접어들어 선산휴게소에서 조반(朝飯)을 드시고는 따뜻한 차 한잔으로 정담(情談)을 나누시니...
생활속의 번뇌(煩惱)들이 일소(一笑)에 사라진다.
이천(利川)을 지나 곤지암(昆池岩) 부근에 이르니, 천주교의 성역공사(聖域工事)가 진행중인 천진암(天眞菴)의 이정표가 보이고, 경안 IC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 이정표를 따라 진입하니...
계곡(溪谷)은 깊어 협곡(峽谷)으로 이어져 천연(天然)의 요새(要塞)임을 느끼겠다. 10여 리의 계곡을 거슬러 드는데, 아직은 녹색(綠色)의 빛이 더 많아 가을정취를 느끼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출발기점인 동문(좌익문)에 도착하니 시계는 10시30분을 가르키고 있다. 성벽(城壁)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로 오르니 숨이 다차다. 40여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걷노라니... 여느단체에서 온 일행보다 단연 압도적이다.
등산로라기 보다는 오솔길에 가까운 산행길을 따라... 우측으로는 성벽너머로 광주시가지의 정겨운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청량산 기슭의 메마른 단풍잎이 사엽(死葉)으로 말라붙어 있다.
가을가뭄이 심해서 인가? 어느 해 보다도 가을 단풍이 곱겠다고 하던 관상대(觀象臺)의 예보(豫報)는 빗나가서... 바닥에는 흙먼지가 일어나고, 나뭇잎은 말라붙어 푸석 푸석하니... 올가을의 단풍(丹楓)은 말잔치로 끝나는 것인가!
30여 분을 걸어 장경사(長慶寺)에 도착하니, 천수경(千手經)의 독경(讀經)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 온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아득히 먼 예부터 제가지은 모든 악업)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痴)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 때문에)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어온 것이므로)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그 모든죄업 내 모두 다 참회 합니다.)
3세(三世:과거,현재,미래)에 모든 나의 죄업이 탐(貪) 진(瞋) 치(痴)로 말미암아 내몸과 입, 마음으로 지은 것이오니... 금일 다 참회 하옵나이다.
대웅전에는 제(祭)를 모시는 중이라 번다(煩多)하고, 뜰아래는 팔각다층석탑(八角多層石塔)이 진좌 하시니...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구층석탑(국보제48호)과 많이 닮아 있으나 고색어린 멋은 없다. 세련된 멋도 없으며 투박하여 예술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겠다.
안내판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을 전후로 하여 이미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淨寺) 외에 국청사, 동림사, 개원사, 천주사, 장경사 등을 추가로 건립하여 모두 9개의 사찰에 승군을 머물게 하면서 훈련과 수도 방위에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일정시대때 다 소실되고 최근에 몇몇 사찰들이 복원되었다함)
남한산성은 이처럼 조선의 선비정신과 불교의 호국정신이 함께 어우러진 유서 깊은 사적이다.(사적제57호)
장경사(長慶寺)는 동향(東向)으로 청룡과 백호가 포근히 감싸주고, 성벽 저너머로 안산(案山)이 겹겹이 싸여있어 길지임을 알겠도다. 경내의 전각들도 단촐하여 사세(寺勢)가 그리 크지 않음을 알겠고, 역사 또한 일천(日淺)하여 부도(浮屠)나 유물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성벽은 내벽의 높이는 가슴높이 정도이나 외벽은 벼랑끝에 자연석으로 쌓아올려 마감은 담장모양으로 평기와를 얹어 놓았다. 그 아래로는 조총이나 활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총통을 뚫어 놓았다.
몇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다시 산마루를 향하여 오른다. 두 번째의 암문(暗門)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락 내리락 나아가니 동장대(東將臺)는 간곳이 없고 빈터만 남아 있으며, 여러개의 주춧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충 짐작이 간다.
산행길이 너무쉽고 여러 갈래의 하산길이 있어 몇몇 회원님들은 이미 하산을 했다는 연락이 있고, 선발대는 상당히 앞서가는 터라 후미에 5~6명이 무리를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행을 계속한다.
고치가리(산구호) 서부장님은 언제 뵈어도 밝고 편안하시다. 간간히 메마른 대지에 가을단비도 방울 방울 떨어지니...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른다”는 옛 속언이 오늘따라 실감이 난다.
뒤따르는 구슬님은 파란 우의를 걸쳐입고 별말씀이 없으시고, 금민자회원님, 구윤서회원님은 번갈아 사진을 찍으면서 산성의 가을경치를 담느라 열심이다. 나와 보조를 맞춰가던 서부장님은 조여사님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여러차례 걱정이시다. 구슬님에게 여쭈어도 알기 어렵고...
북문(전승문)을 향해 나아가는 두어 곳에 군포지(軍舖址:초소)가 있었던 빈터에 몇 개의 초석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하남시(河南市)의 평화로운 모습이 가을비속의 운무(雲霧)에 가려 어렴풋하고, 산성내는 아람드리 노송(老松)들이 군락을 이루니 역사와 전통을 송림(松林)에서 느끼겠도다.
디카맨 황재덕회원님은 경치좋은 곳을 배경삼아 남산카페에 올릴 사진촬영에 열중이시다. 옛 말에 “늦게배운 오락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요즈음 들어 사진촬영에 하도 열중이라 나의 할 일이 많이 덜어진 것같아 여유롭기도 하고 홀가분하여 문화유산을 답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은 분명 나의 의지대로 계획대로 살고 있는데... 지나고 보면 정해진 운명의 노선(路線)을 따라 몸부림치며 살아온것 같으니... 대체 이게 어찌됀 노릇인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가노라니, 저만큼 북문 근처에서 최연식 산대장님이 남~산~ 남~산~ 구호로 외쳐온다.
조여사님이 그쪽에 계시느냐고 큰소리로 여쭈니... 그렇다 하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필자와 보조를 같이 하시던 서부장님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금새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더 올라 함께 합류 하시니... 선착(先着)한 서부장님께서 조여사님이 보고 싶어었다는 감정을 털어 내시는데...
모두들 왁자지껄... 폭소에 폭소를 더 하시니... 온 산천이 덜썩 덜썩하다. 단체로 간단한 기념촬영을 하시고는 가져온 과일들이며 과자를 나누시니... 산 인심이 따사롭고 정겨워서 가을 단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신다.
서장대(西將臺)에 가서 점심을 들자며 잠시후에 떠나니, 400여 성상(星霜)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람드리 노송에 매달려 있슴을 느끼노라!
북문(전승문)을 지나 40여 분을 더 걸어 서문(우익문)에 이르니, 서문은 보수중에 있고 그 아래 문은 무지개형의 홍예문(虹霓門)이다. 긴 역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인가? 허물어져 보수하고, 허물어져 보수하고를 얼마나 거듭 했을꼬...?
인걸(人傑)은 다 가고 자취가 없으나, 석축(石築)과 누각(樓閣)만이 남아 있어 역사를 말해 줍니다 그려...! 다시 20여 분을 더 걸어 서장대(경기도 기념물제1호)에 도착하니 많은 산행객들이 누각밑에 모여 정담을 나누신다.
박번회원님을 비롯한 윤진석, 이외술, 홍총무 등 은 선발대로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있어... 나머지 회원님들은 두 곳으로 나뉘어 점심을 드신다. 처마끝에 떨어지는 낙수(落水)물을 바라보며, 준비 해 온 밥 반찬으로 시장끼를 채우니... 더는 바랄 것이 없구나!
식후에 주위를 조망하니 수어장대(守禦將臺.서장대)는 1층은 정면5칸에 측면3칸, 2층은 정면3칸에 측면2칸으로된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동서남북에 세운 4개의 장대중에 으뜸가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위치가 산성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日長山.453M) 정상이어서 성내는 물론이고 멀리 양주, 양평, 용인, 고양, 서울의 풍광을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다고 하나 운무(雲霧)에 가려 볼 수 없슴이 아쉽구나!
이곳 청량산(482.6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기점에서 북서 방향으로 갈라져 나온 한남지맥상의 법화산(383M) 부근에서 북방향으로 불곡산(335M), 영장산(414M), 검단산(542M)을 거쳐 이곳 청량산을 지나 성산봉(104M)에 이르러서 한강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검단지맥(黔丹支脈)이라 하네!
남한강과 북한강이 팔당댐 부근에서 합수하여 하남시 일원을 휘감아 흐르니 풍요의 산물이 되고 있으며... 북방으로부터 적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가 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일찍이 ‘백제 온조왕 13년에 토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것이 처음’ 이라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개축하고, 조선조에 인조, 영조, 정조임금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인조5년(1627) 1월13일 3만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온 후금 태조는 조선에게 형제 맹약을 받아내니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하고, 그로부터 9년후인 인조14년(1636) 12월2일, 청나라(후금) 태종(2대)은 10만대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 들어 왔다.
인조임금은 강화도로 피하려 하였지만, 다급한 나머지 이곳 남한산성으로 대신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와 항전 하였으나, 식량과 군병이 부족한 우리 조선군은 겨우 50일 밖에 지탱할 수 없어 인조15년(1637) 1월30일 청 태종에게 항복 하였으니...
임진란(1592년)을 겪은지 겨우 45년만에 또다시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 했으랴!
인조는 삼전도(三田渡)까지 내려가서 항복하고 “천은이 망극 하오이다.” 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 내렸다고 전한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청 태종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고 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재)와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갔다.
심양으로 끌려간 삼학사는 갖은 고통과 회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고 참형되었으며, 그 곳에서 8년간이나 갖은 고난을 당하며 지냈던 소현세자는 귀국하자 마자 부왕(인조)이나 대신들의 눈총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지 4일만인 1645년 4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운의 왕자다.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봉림대군이 뒤를이어 조선 제17대 효종임금(1649~1659)이 되어 북벌계획을 세웠으나 무위로 끝났으니... 이것 이 조선의 운명이 었던가?
영조, 정조임금은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효종릉)에 참배하고 남한산성 이궁(離宮.行宮)에서 하룻밤을 묵곤 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효종임금의 고통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전면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 쓰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 하였다고 하신다.
삼학사의 분루(憤淚)와 인조와 효종의 슬픔이, 당시 백성들의 원성이 모여 가을비로 내리는 것인가? 발 끝에서부터 뻗쳐오르는 자괴감(自愧感)과 분루와 슬픔이 이몸을 감싸고 흐르니... 한 없이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소매깃으로 눈시울을 닦으며 주위를 살피니, 님들은 다 가시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북향(北向)으로 삼배(三拜)의 예(禮)를 드리고 물러나니, 빗줄기는 한층더 굵어져 있다.
다시 우의(雨衣)를 꺼내 몸단장을 하고, 통나무 계단을 따라 나려가니, 단장(斷腸)의 슬픔이 상긔도 남아 있어 내표정이 많이 굳어 있슴을 느낀다.
바지런히 걸어 남문 근처에서 합류하니, 남문(지화문.至和門)도 보수중이라 누각에 오를 수는 없다. 몇 몇 회원님들이 여기서 하산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계속 걷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계획대로 동문 출발기점으로 향한다.
앞서가는 구슬님은 파란 우의에 몸을 숨기고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 하신가? 님 생각을 하시나, 캔버스에 담을 소재라도 구상 하시는가? 최대장도 내가 앞지르기로 저만큼 앞서 나아가니... 같이 가자며 힘차게 소리쳐 온다.
일렬로 늘어서서 비속을 거니는 님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다정(多情)하고 다감(多感)하다. 수리중인 남장대(南將臺)를 지나 마지막 8번째의 암문(巖門)을 지나니 내리막 길이다.
동문 주차장에 도착하니 14시 30분이라! 시간도 넉넉하여 산성내의 여러 문화유산을 답사할 요량으로 차로 이동하여 지수당(池水堂) 주차장에서 내려, 남한산성 역사관을 관람한 후에 차도를 따라 연변(沿邊)에 포진(布陣)된 한옥건물들을 보노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17세기 중엽에 와있는 느낌이 다 든다.
도로 우측에는 남한산성교회가 보이고 교회도 기와지붕으로 단장되어 한옥의 운치를 보여주며, 조금 떨어진 우측 언덕배기에는 연무관(演武館:훈련장)이 올려다 보이니... 옛 병사들의 함성이 귀에 쟁쟁 하구나!
10여 분을 더 걸어 고즈넉한 언덕배기 아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선생의 기념관에 이르니, 입장료가 있어 모두 싫다 하시니 어쩔 수 없이 혼자들어 만해도록(卍海圖錄) 한권을 구매하여 물러나오다.
만해는 민족의 시인이요,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승려다.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를 초안하여 낭독 하시고, 백용성(白龍性)스님과 함께 33인 중의 유일한 불교계의 거목이시다.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 가면 님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고, 산성내에 님의 기념관은 너무나 적절하고 당연한 것이라!
“님의 침묵(沈黙)”에서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었습니다.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제곡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黙)을 휩싸고 돕니다.
<이하 생략>
애절한 님(조국)의 슬픔을 노래한 님의 자취를 따라, 오늘 이몸은 가을 단비를 맞으며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허허(虛虛)로운 마음으로 물러나니, 남산님들은 다들 가시고 김광남씨만 홀로 기다리고 계신다. 걸어 나오면서 건축의 칠(漆) 전문가(專門家)이신 그분의 고견(高見)을 들으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이 외에도, 백제 온조왕과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장군의 위폐를 모신 숭열전(崇烈殿), 삼학사와 김상헌, 정온의 위폐를 모신 현절사(顯節祠),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회(李晦)장군, 벽암대사, 이회장군의부인 초상화가 모셔진 청량당(淸凉堂) 등은 오늘의 일정상 답사할 수가 없어 아쉽고 아쉬운 마음 금할길이 없습니다.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는 하염없이 나리는데...
어쩔 수 없었던 조국의 운명을 되새기며
임진란, 병자호란으로 가신 넋들이여...
일제치하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선조님들이여...
님들께서 흘린 피의 값이 헛되지 않도록
칠천만 겨레는 분연히 일어 나시어
뭉치고 화합하여 조국을 빛냅시다!
단기 4339년(서기2006년) 10월 22일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다.
첫댓글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었습니다....가을비가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었습니다...^^* 그리고......조여사님은 좋~~~~겠다......호호호호...*^^*
제곡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구슬님은 더~~~ 좋을 수 있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