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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8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마6:13a>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눈물로 얼룩진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은 자고이래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말이다. 성경에 동일한 말은 없지만 곳곳에 스며져있는 성경의 사상이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고난과 역경을 모르는 인생을 어찌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천지 풍파와 만고풍상을 겪은 자에게서는 은연중 삶의 내공과 풍겨 나오는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고 당부한다.
주님이야말로 고난과 고초의 삶을 사신 분의 대명사다.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육신으로 오셔서, 그러한 길을 가신 것은 전적으로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는 구원의 근원이 되시려 했다고 말씀하신다(히5:8~9). 온전케 됨의 표본이 되시기 위해 앞서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고난은 온전케 되는 일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이다.
고난에는 단계에 따른 난이도가 있다. 이러한 고난을 시험이라고도 한다. 학교는 학문에 대해 교육하고 그 성과를 높이기 위해 언제나 시험을 친다. 이 과정에서 우열이 가려지고 차등이 생겨난다. 그래서 인격의 세계에서는 각종 실력과 능력의 차등으로 서열이 존재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이나 각 분야의 엔지니어, 혹은 전문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각광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시험의 좁은 문을 통과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낳은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는 전 세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약관의 나이에 부와 명예와 영광을 거머쥔 불세출의 상징이다. 이런 걸출한 인물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피나는 시절을 보내야만 했음이 자명한 일이리라. 발의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양말을 신지 않고 연습했다는 고강도 훈련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경쟁자를 이기고 세계 정상의 연기력을 보이는 이면에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시험을 통과한 과정이 숨어 있었다.
시험이 없이는 성장도 없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시험을 하신다. 시험을 통해 성장하도록 사람의 특성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 시험이야말로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상의 도시 시날 땅 바벨론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 우여곡절 끝에 할례를 받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새이름으로 세워지기까지는 온갖 시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옛사람은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고 눌러 앉고 싶어 한다. 아직 할례 받기 전의 아브람이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과의 안일한 삶에서 희희 낙낙할 때에, 참다못해 십년 만에 득달같이 나타나신 하나님은 엄중히 일갈 하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도 내 앞에서 완전 하라’(창17:1).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구십 구세다. 곧 이어서 완전함의 상징인 할례를 받고 그 증거로서 이삭을 낳게 된다.
비단 아브라함뿐이랴? 이 과정의 이수는 믿는 자 모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완전함과 거룩함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셨다(레19:2). 나는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쿵쿵거리는지 감격이 넘친다. 친부의 정감이 밀려오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애완동물로 눈요기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창조하셨음이 알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들은 반드시 명심해야한다. 그 분은 항상 시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 자신도 공공연히 광고하셨다.
<신8: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하다. 척박한 환경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지의 여부를 지켜보시는 패턴이다. 여기서 통과한다고 끝난다면 오직 좋으랴마는 하나님의 목표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아니, 만만한 정도가 아니라 한 단계씩 수준을 높이다가는 결국에는 목숨까지 내놓아야하는 막다른 골목까지 가야한다. 아브라함은 좋은 본보기다. 결국은 이삭을 드려야하는 데까지 이끌고 계신다.
<창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팔십 육세에 낳은 이스마엘을 좇아 내보내고, 백세에 겨우 얻은 독자 이삭 홀로 남아 있는데, 이제 좀 철나서 말벗하며 노년에 친구처럼 지내며 의지하려던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곧 사망선고가 아닌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새끼를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아무리 백세에 선물로 주셨다지만 너무 심하신 처사가 아닌가? 무너지는 억장 앞에, 한번쯤 따질 수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지혜로웠다. 그는 두말없이 순종한 것이다. 왜냐고요? 많은 과정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알았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시험 보는 목적이다. 하나님을 아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가르치시고 훈련하신다. 이것이 영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영적 세계에 대한 진리지식의 성장이 목표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누구든지 이날을 맞이해야 한다. 하나님의 학교는 점점 더 시험이 어려워지다가 마지막 졸업시험은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 목숨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이다.
<눅9: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시험 통과를 위해 친절한 힌트를 제공 하신다. 구약의 모든 선진들의 걸음걸음이 기출문제가 아닌가? 출애굽한 당신의 백성들은 여지없이 광야 산지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의 한계점을 넘나드는 난코스이기에 대부분은 중도 탈락한다. 이스라엘 백성 60만 대군중에서 단지 2명만 졸업시험에 통과한 사례는 언제나 기를 질리게 만든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다...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보고 코앞에서 엎드러진 무수한 존재들은 시험에 빠진 자들이다. 그들은 현실에 잡히고 현상에 잡혔던 것이다. 잘 알아두시라, 현상과 현실은 실제가 아니라 가상 무대인 것을 말이다. 실제는 영적인 세계요, 하나님 자신만이 참이다. 우리가 육신을 맞대고 사는 물리적인 모든 만상과 만물은 허상이요 그림자인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주님은 수 없이 증명하셨다. 최종적으로는 나사로의 죽음을 사건화해서 부활을 설명하셨다. 언제나 발밑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마리아조차도 부활을 건성으로 알고 있었다(나중 언젠가 무덤에서 시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부활관은 교리이지 실제가 아님). 오빠의 주검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인생을 보시던 주님은 말할 수 없는 통분을 느끼셨다.
부활의 현재성을 아시는가? 믿는 지금 ‘살아서(산 믿음으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진리다. 주님은 지금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말씀하신다.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군상들아! 먹고 입고 마시는 사바세계의 문제로 동분서주 말라. 너는 누구냐? 진정 산 믿음을 가진 자라면 이미 부활한 자다. 너희는 일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느니라. 눈앞의 현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달리다굼! 당장 일어서라!’고 말이다.
연약한 인생들을 깨우쳐서 흑암의 상태에서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최상의 수단이 시험인 것을 창조주가 어찌 모르시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 사도의 입을 빌려 당부, 또 당부하신다. 불 시험을 만나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왜냐하면 시련을 통해 연단을 얻어 금보다 귀한 주님의 형상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의 종결이다. 혼의 구원이라고도 한다(벧전1:9).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옛사람의 특성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은 거기서 나서 자랐기 때문이다. 세상은 첫 사람의 고향이다. 혈통과 사람의 육정으로 난 천연적 자아는 세상의 누림을 항상 소원 목적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허영을 생명으로 삼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단절을 말한다.
만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시험은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시험은 치열한 영적 경쟁에서의 지뢰요 위기다. 고난과 역경에 처했을 때에 부활 생명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시험을 넘어설 것이지만, 불안한 나머지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세상의 도움을 기대한다면 낙오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와 같은 시험에서 능히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 도적은 밤에 경각간에 올 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서있다고 자만하면 이미 넘어진 자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한 시도 살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자각하고, 그 은혜를 갈구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할 것을 주문하고 계신다.
은혜가 왕노릇 하는 자에게는 마귀의 어떠한 공격도 허사가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의탁하는 자에게만 주가 방패요 요새요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펼쳐지는 삶 속에서 마귀의 미혹은 계속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귀를 등용시킨 하나님의 시험이다. 욥의 경우처럼 말이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식 문제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몰려들어 마음의 평강을 깨드린다. 이 때 십자가로 달려가야 한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주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를 털어 버려야 한다. 나는 죽어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게 하는 삶, 이것이 은혜로 왕노릇함의 실제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