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장. 원전 수출은 정말 국가에 이익을 남기는가
― ‘수주 20조 원’이라는 숫자 뒤에 무엇이 남는가
“원전 수출 20조 원.”
이런 제목의 뉴스가 나오면 엄청난 돈을 벌어온 것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를 20조 원어치 수출하고, 반도체를 20조 원어치 수출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들린다. 국비를 투입한 원전기술 수출은 여기에 국가적 자부심까지 더해진다. 대통령이 직접 정상외교에 나서고, 수십 년간 축적한 원전 기술의 성과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져볼 필요가 있다.
20조 원짜리 원전을 수출하면 대한민국이 20조 원을 버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계약금액과 매출액이 다르고, 매출액과 부가가치가 다르며, 부가가치와 기업의 이익도 다르다. 더구나 기업의 이익과 국가 전체가 얻는 국익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20조 원짜리 발전소를 수주했더라도 현지 기업에 10조 원의 공사를 맡기고, 외국산 기자재를 구입하고, 현지 인력을 고용하고, 금융비용을 부담하고, 공사 지연으로 추가 비용과 지체상금까지 발생한다면 국내에 남는 돈은 처음 발표된 ‘20조 원’과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고 해외 원전 수출의 가치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국내 기업에 일감이 생길 수 있고, 해외 실적을 확보할 수 있으며, 장기간의 운영·정비시장에 진출할 수도 있다. 수출 대상국과 외교·산업 협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원전 수출을 평가할 때 필요한 것은 찬성과 반대가 아니다. 돈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것이다. 과연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이냐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한국의 원전수출이 국익을 빛내는 경우에는 일정한 호감도 있겠지만 국익에 도움이 안되는 경우에 대한 평가는 어쩐 일인지 제대로 평가가 되고 있지 않다.
얼마에 수주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업이 끝난 뒤 대한민국에 얼마가 남았는가이다.
이것이 원전 수출을 국가전략산업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1절. 수주액이 곧 국익은 아니다 ― 원전 수출의 진짜 손익계산서
원전 수출 소식이 나오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숫자는 언제나 ‘수주액’이다.
“20조 원 원전 수출”, “24조 원 규모 초대형 프로젝트”, “수십 년 먹거리 확보.”
숫자가 워낙 크다 보니 원전 한두 기만 수출해도 국가 경제에 엄청난 이익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동차 수십만 대를 수출해야 얻을 수 있는 매출을 원전 몇 기로 한꺼번에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전략산업을 판단할 때 계약서 맨 위에 쓰인 금액만 봐서는 안 된다.
수주액 가운데 실제로 한국 기업이 수행하는 금액은 얼마인지, 기자재와 공사는 얼마나 현지화되는지, 금융은 누가 제공하는지, 공사가 늦어졌을 때 추가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그리고 10여 년의 공사가 끝난 뒤 최종적으로 한국에 얼마의 이익이 남는지를 따져야 한다.
더구나 원전은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배에 실어 보내는 수출상품이 아니다. 설계, 기자재 제작, 토목·건축, 설치, 시운전, 연료, 금융, 보험, 운영과 정비까지 10년 이상 수많은 계약이 얽혀 움직이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수주액이 20조 원이라고 해서 20조 원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20조 원이 한국 경제의 부가가치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수주액과 매출은 다르고, 매출과 부가가치는 다르며, 부가가치와 최종 이익은 또 다르다.
원전 수출의 경제성을 말하려면 바로 이 구분에서 출발해야 한다.
1. 20조 원을 수주하면 20조 원을 버는 것일까
기업이 1조 원짜리 공사를 수주했다고 해서 1조 원을 버는 것은 아니다.
재료비, 인건비, 협력업체 공사비, 금융비, 물류비, 현지조달 비용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이익이다. 공사가 예정대로 끝나지 않으면 이익은 더 줄어든다.
원전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원전은 한번 계약하면 준공까지 10년 가까이 걸린다. 그 사이 원자재 가격이 오를 수도 있고 인건비가 상승할 수도 있다. 환율이 변하고 규제가 강화될 수도 있다. 설계변경이 생길 수도 있고 기자재 품질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인허가나 시운전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계약이 고정가격에 가까울수록 이런 비용상승 가운데 상당 부분은 발주자가 아니라 사업자가 부담할 가능성이 커진다.
2009년 한국이 수주한 UAE 바라카 원전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ENEC가 발표한 계약은 APR1400 네 기의 건설·시운전과 초기 핵연료 등을 포함해 약 200억 달러 규모였다. 특히 ENEC는 계약금액의 높은 비중이 고정가격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계획은 1호기가 2017년 전력공급을 시작하고 나머지 세 기도 2020년까지 순차적으로 완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마지막 4호기의 상업운전은 2024년 9월에야 시작됐다.
물론 공기지연 전체를 한국 측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UAE 최초의 원전이라는 특성 때문에 운전인력 확보와 규제기관의 운영허가 등 발주국 측 요인도 작용했다.
하지만 사업자의 손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인이 누구에게 있었는가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공기가 늘어난 동안 발생한 추가 비용을 결국 누가 부담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가 십수 년 뒤 바라카 원전의 손익계산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2. 화려한 수주액 뒤에 숨어 있는 금융과 현지화
원전 수출을 이야기하면서 자주 빠지는 또 하나의 착시가 금융이다.
대형 원전은 발주국이 수십조 원의 현금을 쌓아놓고 공사를 맡기는 사업이 아니다. 정부대출과 수출금융, 정책금융, 상업은행 대출, 사업자 자기자본 등이 복잡하게 결합한다.
바라카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금융종결 당시 총 프로젝트 금융 규모는 약 244억 달러였다. 이 가운데 약 196억 달러가 직접대출이었고, 약 47억 달러는 자기자본이었다. 한전도 바라카 사업회사 지분 18%를 취득했다.
따라서 원전 수출에서는 단순히 “얼마를 수출했다”뿐 아니라 누가 돈을 빌려주고, 누가 지분을 투자하고, 누가 장기간 위험을 부담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체코 원전은 이 구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2025년 6월 체결된 두코바니 5·6호기 EPC 계약은 두 기를 건설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그러나 체코 정부는 동시에 자국 기업의 참여를 대폭 확대하려 하고 있다.
체코 산업통상부는 계약 체결 당시 약 30%의 자국 기업 참여가 이미 구체화 되어있으며 최종적으로 60%의 체코 산업 참여율을 목표로 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현지 기업이 원전 건설을 통해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향후 체코 원전산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60%라는 숫자를 계약금액의 정확히 60%가 체코 기업에 귀속된다는 의미로 단순 계산해서는 안 된다. 현지화율을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따라 실제 부가가치의 배분은 달라진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체코는 한국에 원전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원전산업을 육성하려 한다.
한국 기업이 모든 것을 만들어 체코로 가져가는 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수십조 원 수주’라는 숫자와 ‘대한민국에 귀속되는 경제적 가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여기에 체코 정부의 막대한 금융지원까지 더해진다.
2026년 EU 집행위원회가 공개한 두코바니 국가보조 심층조사 문건을 보면 체코 정부가 계획한 저리 국가대출은 약 230억~300억 유로로 건설비 전체를 충당하도록 설계돼 있다. 최악의 비용초과 시나리오에서 명목상 대출한도는 300억~375억 유로 범위까지 상정돼 있다. 원전 완공 이후에는 발전수입을 안정시키기 위해 40년짜리 양방향 차액계약(CfD)도 제안돼 있다.
이것이 원전 수출의 실제 모습이다.
EPC 계약금액과 원전 하나를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전체 경제적 지원은 전혀 다른 숫자다.
그래서 수주액 하나만을 놓고 국익을 계산할 수 없다.
3. 바라카 원전의 마지막 손익계산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라카 원전은 한국 원전산업사에서 중요한 성과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해외 대형 원전 건설 실적을 만들었고 APR1400이라는 한국형 원전을 해외에서 실제 가동시켰다. 설계·제작·시공기업에도 오랫동안 해외 일감을 제공했다.
이 성과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가전략산업인가를 판단하려면 성과만이 아니라 얼마를 남겼는지도 물어야 한다.
바라카 사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전의 ‘UAE 원전사업 등’ 건설계약 손익을 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2023년 말 약 4,350억 원이던 누적손익은 2024년 말 약 722억 원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025년에는 마침내 적자로 전환됐다. 2025년 한전 별도재무제표를 분석한 보도에 따르면 바라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설계약의 누적손익은 약 1,351억 원 적자였다. 또한 한수원은 한전에 10억달러의 추가비용 지급을 요구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이 회계항목이 오직 바라카 원전 하나만을 떼어놓은 숫자는 아니므로 “바라카에서 정확히 1,351억 원을 손해봤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
하지만 바라카 사업이 대부분인 해외 원전 건설계약이 사업 막바지에 적자로 돌아섰다는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신호다.
게다가 최종 비용정산도 간단하지 않다.
한수원은 바라카 공기연장과 추가 작업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약 10억 달러, 당시 환율로 약 1조4천억 원의 추가 비용을 놓고 한전과 정산 갈등을 벌였다. 한전은 이 비용을 먼저 UAE 발주처와 종합적으로 정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20조 원이 넘는 수출사업의 마지막에 모회사와 자회사가 1조 원이 넘는 추가비용을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이 더 발생할 수 있다.
이 사례는 원전 수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계약금액은 사업을 수주하는 날 발표할 수 있지만 진짜 이익은 십수 년이 지나 공사가 끝날 때까지 알기 어렵다.
원전처럼 공사기간이 긴 산업에서는 공기 자체가 돈이다.
한 해가 늦어지면 현장인력이 더 필요하고, 프로젝트 조직을 더 오래 유지해야 하며, 물가와 금융비용도 달라진다. 설계변경과 추가 작업이 발생하면 발주자와 시공자 가운데 누가 책임질지를 놓고 클레임과 분쟁이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원전의 경쟁력은 단순히 ‘싸게 지을 수 있다’가 아니다.
처음 제시한 가격으로, 약속한 날짜에, 실제로 준공할 수 있어야 싸게 지은 것이다.
4. 더 불편한 질문
― 한국이 만든 원전의 서비스 시장을 왜 프랑스와 미국이 가져가는가
그런데 바라카에서 건설 손익보다 더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다.
원전 사업은 준공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전은 10년 안팎에 걸쳐 건설하지만 그 뒤에는 60년 이상 운전한다. 이 기간 동안 핵연료를 계속 공급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주요기기를 검사하고 정비해야 한다. 부품을 교체하고 설계를 변경하고 성능을 개선해야 한다. 안전해석과 엔지니어링도 계속 필요하다.
따라서 원전산업의 진짜 장기시장은 건설 이후에 열린다. 즉, 건설사업은 들쭉 날쭉 위험한 대규모 사업이지만 가동원전사업은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알짜배기 사업이다.
사업자 관점에서 보면 건설사업 보다는 가동원전시장에 주목하는 이유다.
가동원전 서비스사업은 예측가능하고 지속가능한 그리고 매년 꾸준한 매출이 지속적 있기 때문에 사업적 관점에서 보면 건설사업보다 가동원전 서비스가 사업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건설사업은 대규모 사업에다 자칫 적자보기 쉬운 위험한 사업이지만 설계부터 공급망과 시공을 한 설계·공급·시공한 주계약자에게 가동원전 시장에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건설을 추진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매우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한국이 주계약자가 되어 우리기술로 설계하고 건설한 APR1400인데, 왜 가동 이후 정비·운영지원·엔지니어링·핵연료 시장을 웨스팅하우스나 EDF 등 타기업에게 뺏기는가?
바라카의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해진다.
2018년 프랑스 EDF사는 바라카 운영회사 Nawah와 10년 장기협약을 체결했다. 운영안전, 방사선방호, 연료주기 관리, 환경감시뿐 아니라 엔지니어링 연구와 현장지원, 교육 등이 대상이었다. 아니 우리기술로 설계한 도면을 타기업이 이렇게 쉽게 접근해도 되는가?
2021년에는 프랑스 Framatome이 바라카 네 기에 대한 정비·엔지니어링 서비스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교육, 기술·운영지원과 연료서비스까지 포함됐다.
2025년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ENEC는 Framatome과 바라카 원전용 완성 핵연료집합체와 엔지니어링 서비스 공급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주 Richland에 있는 Framatome 공장에서 바라카용 선도 핵연료집합체 제작이 완료됐다.
물론 이것을 한국 기업이 바라카에서 모두 쫓겨났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엔지니어링, 정비, 운전지원과 연료 분야에 참여하고 있고 한전 역시 바라카 사업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UAE 입장에서는 에너지안보 차원에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것도 자연스러운 전략이다.
그러나 국가전략산업이라는 관점에서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물어야 한다.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싶다고 해서 한국이 설계·건설한 원전의 핵심 서비스를 다른 나라 기업이 실제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여기에 한국 원전산업의 기술적·사업적 취약성이 드러난다.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세계시장에서 그 기술이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한국은 원전을 설계할 수 있다. 건설할 수 있다. 운영할 수 있고 정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높은 기술 수준이다.
하지만 국가전략기술이라면 질문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 기술을 반드시 한국에서 구매해야 하는가?
한국 기업이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 기업이 쉽게 대신하기 어려운 기술인가? 기술적 진입장벽과 지식재산권, 핵심 기자재, 연료, 장기 서비스에서 한국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점적 경쟁우위가 존재하는가?
바라카는 이 질문에 편안한 답을 주지 않는다.
프랑스 기업이 한국형 APR1400의 운영·정비와 엔지니어링을 지원하고, 미국에서 제작한 프랑스 기업의 연료집합체가 한국형 원자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것은 한국의 원전기술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은 ‘사업적으로 한국 원전기술은 대체가 가능한 기술이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항공기 엔진이나 첨단 반도체 장비처럼 특정 기업을 대체하기 극도로 어려운 산업에서는 제품을 판매한 뒤에도 부품과 유지보수, 소프트웨어와 업그레이드에서 강력한 시장지배력이 발생한다.
반면 공급자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는 산업에서는 최초 수주를 했다고 해도 장기적인 고부가가치 시장을 자동 점유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럼 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턴키 수출을 시도하는가? 턴키 수출은 전술한 바와 같이 수출 이후 상당기간 가동원전 서비스에서 지속적인 사업이 가능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라카가 바로 그 사례를 보여준다.
2009년 수주 당시에는 한국 원전을 턴키 수출하면 원전 건설뿐 아니라 장기간 운영·정비·핵연료 공급으로 사업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실제 바라카 생애주기 시장에는 Westinghouse, EDF와 Framatome 등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한국이 건설한 원전의 후속시장조차 한국 기업의 독보 시장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원전 수출을 국가전략산업으로 평가할 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결국 사업 위험도가 큰 건설 사업을 끝내고 남은 노른자위 가동원전사업은 남에게 바치는 꼴이 되는 형국이다.
국가전략기술의 힘은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힘은 ‘다른 나라가 우리를 대체 불가능하게 함’에 있다.
바라카는 이 두 문장이 얼마나 다른 이야기인지 보여준다.
5. 체코의 승부수, ‘On Time, Within Budget’
이제 체코 두코바니 원전을 보자.
한국이 체코 원전 수주전에서 강조한 가장 강력한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On Time, Within Budget’, 즉 약속한 시간과 예산 안에서 원전을 완성할 수 있다는 능력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다.
미국의 Vogtle, 프랑스 Flamanville, 핀란드 Olkiluoto 등 서구권의 신규 대형원전이 잇따라 공기지연과 비용초과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원전은 정말 예정된 공기 안에 계속 건설돼 왔을까?
최근 한국형 APR1400의 실제 건설기록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 호기 | 건설예정공기 | 실제 공기 | 공기지연 량 |
| 두코바니5호기 | ‘29~’36 (89개월) | - | - |
| 바라카1호기 | ‘12.7~’17.8(61개월) | ‘12.7~’21.4(105개월) | 44개월(72%) |
| 신한울1호기 | ‘12.7~’17.4 (57개월) | ‘12.7~’22.12(125개월) | 68개월(119%) |
| 신고리5호기 | ‘25.5~’32. (78개월) | ’16.6~’26.2(116개월) | 68개월(49%) |
신고리 3·4호기는 안전등급 케이블 문제와 부품 문제, 인허가 등이 영향을 미쳤고 신한울 1·2호기는 안전성 심사와 설비 보완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신한울의 당초 일정과 실제 운전 시점은 국제 원전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 표를 보고 “한국은 원전을 제때 지을 능력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지나치다.
하지만 반대편 주장, 즉 “한국 원전은 항상 On Time으로 건설된다”는 주장 역시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원전의 공기는 시공능력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콘크리트와 철골을 빨리 시공한다고 원전이 예정대로 상업운전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설계가 제때 끝나야 하고 기자재가 적기에 납품돼야 한다. 기자재에서 중대한 품질문제가 발생해서도 안 된다. 규제기관의 심사가 끝나야 하고 시운전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없어야 한다. 운전인력도 준비돼야 한다.
수천만 개 부품 가운데 중요한 부품 하나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전체 일정이 흔들릴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원전이라는 시스템의 특징이다.
따라서 ‘On Time’은 단순한 토목공사의 약속이 아니다.
설계·제작·시공·품질·규제·시운전·공급망이 10년에 걸쳐 모두 예정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래서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다.
6. 체코에서는 지연이 곧 한국의 비용이 될 수도 있다
체코 사업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2026년 EU 집행위원회가 공개한 국가보조 심층조사 문건을 보면 두코바니 5·6호기의 시운전개시 목표는 각각 2036년과 2037년이다. 원자력시설 건설허가와 건축허가를 거쳐 두 기의 본격적인 공사를 각각 2029년과 2030년에 시작한다는 구체적인 일정도 제시돼 있다.
불과 7년의 건설기간으로 지금부터 체코원전이 반드시 지연될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과거 경험을 보면서 지연 위험이 거의 없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
더구나 EU 집행위 문건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체코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EPC 사업자인 한수원은 원칙적으로 사업을 정해진 시간, 예산, 품질에 맞추어 공급할 주된 책임을 부담한다. 계약금액의 상당 부분에는 고정가격 방식이 적용된다.
물론 모든 위험을 한수원이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인허가 절차, 정책이나 규제의 변경, 불가항력처럼 한수원이 통제하기 어려운 위험은 체코 사업자 EDU II와 체코 정부가 분담하고, 이에 따른 비용은 국가대출을 통해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체코정부는 이 때문에 EU 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
문제는 그 경계다.
어떤 지연이 누구의 책임인가.
설계변경은 누가 요구했는가.
기자재 납품지연과 품질문제는 누구 책임인가.
현지업체가 수행한 공사의 문제가 전체 공기에 영향을 주면 누가 책임지는가.
그 외에 규제기관의 추가 요구가 원설계의 미비 때문인지 새로운 규제 때문인지도 경우에 따라 논쟁거리가 된다.
대형 프로젝트에서 클레임과 분쟁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라카의 경험은 이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그리고 체코는 또 하나의 변수를 안고 있다.
현지 기업 참여율을 60%까지 높이면서 동시에 On Time과 Within Budget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화는 체코 경제에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수원의 프로젝트 관리 측면에서는 관리해야 할 공급자가 늘어나고 한국에서 이미 구축된 공급망과 다른 새로운 공급망을 품질보증 체계 안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체코 사업은 서로 상충할 수도 있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높은 현지화, 빠른 공기, 낮은 가격이다.
셋 가운데 하나를 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세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다.
특히 APR1400 계열의 최근 국내외 건설사업이 실제로 수년씩 늦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체코에서 ‘On Time, Within Budget’은 광고문구가 아니라 앞으로 10년 동안 검증받아야 할 약속이다.
EU 집행위원회 자료는 이 위험을 더욱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체코 정부가 상정한 두 기의 overnight cost는 약 200억~250억 유로이고, 건설비 전액을 충당하기 위한 국가대출은 약 230억~300억 유로다. 심지어 비용초과의 최악 시나리오를 고려한 명목 대출한도는 이보다 훨씬 높게 설정돼 있다.
이는 체코 정부 자신도 대형 원전에서 비용초과 가능성을 현실적인 재정위험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약 4,070억 코루나짜리 원전을 수출했다”는 뉴스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질문을 봐야 한다.
구체적인 계약조건은 아직 공개된 적은 없지만 촉박한 일정으로 인한 시공지연 문제가 있다.
시운전 성능시험 실패가 한국 측의 설계·제작·시공상 결함에서 비롯됐다면 보수와 재시험 비용은 물론 계약상 지체상금과 성능미달 배상금도 한국 측이 부담하게 된다. 그러나 공기 지연으로 늘어난 국가대출과 금융비용, 발전수입 상실까지 모두 한수원이 무제한 배상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위험배분은 지체상금과 총책임의 한도, 간접손해 제외조항에 달려 있다. 이 한도를 넘어서는 손실은 결국 체코 정부의 국가대출과 전기소비자 부담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점은 EU 위원회에서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므로 조사결과에 따라 전체 사업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설계적으로 거대한 신규 설계문제가 있다. 즉, 이중 방벽 격납용기, 노심 캐쳐(Core Catcher), 그리고 거대 냉각탑이다. 이들 설계는 국내에 없다. 최초로 설계하고, 시공 후 성능검증까지 7년여의 공기내 완성해야 한다. 국내 및 해외에서 10여기 원자로 설계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기달성은 복제설계에 익숙한 국내 기술진에게 이는 너무 무리이다. 공기달성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웨스팅하우스가 보글 3,4 원전에서 가장 고생하며 공기지연한 것이 특히 격납용기에서 연계 설계 자료(Interface Design Data)가 시공상 불일치하여 현장 설계변경이 너무 많이 발생한 것이 원인이었다. 결국 공기는 두배로 예산도 두배로 늘어 2015년 웨스팅하우스는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도산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공기업이 담당하여 만일에 있을 빚은 전부 국민이 감당해야 한다. 이익은 산업계가 책임은 국민이 지는 구조인 것이다.
그 금액 안에서 실제로 완성할 수 있는가?
이것이 체코 원전사업의 진짜 경제성 시험이다.
7. 국가전략산업이라면 ‘수주’가 아니라 ‘남는 것’을 계산해야 한다
바라카와 체코를 함께 놓고 보면 원전 수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바라카는 한국 원전산업의 해외 진출 능력을 증명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십수 년 뒤 건설사업의 수익성은 예상보다 악화했고 추가 공사비를 둘러싼 정산문제까지 발생했다.
더 중요한 것은 건설 이후다.
한국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한 원전인데도 장기간의 운영·정비·엔지니어링·연료 시장을 한국 기업이 독점하지 못했다. EDF와 Framatome 같은 세계 원전기업들이 진입했고 핵연료까지 공급하게 됐다.
체코에서는 또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대규모 현지화를 추진하면서 정해진 가격과 일정 안에 원전을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전략산업으로서 원전 수출을 평가하려면 앞으로 정부는 최소한 다섯 가지 숫자를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첫째, 전체 EPC 계약금액 가운데 한국 기업이 실제 수행하는 금액은 얼마인가.
둘째, 그 가운데 국내에서 생산되어 대한민국에 귀속되는 부가가치는 얼마인가.
셋째, 금융지원·보증·지분투자 등으로 한국이 부담하는 자본과 위험은 얼마인가.
넷째, 공기지연과 비용초과 위험을 반영한 뒤 한전·한수원과 국내 공급기업에 남는 최종 이익은 얼마인가.
다섯째, 건설 이후 60년의 정비·엔지니어링·연료·설비개선 시장에서 한국이 실제 확보하는 시장점유율과 이익은 얼마인가.
이 다섯 가지를 보지 않고 계약금액만으로 원전 수출의 국익을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해야 한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원전기술 가운데 세계가 한국에서 반드시 사야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원자로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기술이 세계시장에서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
원전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사업에서 높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다르다.
다른 나라가 비슷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고, 우리가 건설한 원전의 정비·엔지니어링과 연료까지 다른 나라가 대신 공급할 수 있다면 가격경쟁은 심해지고 이익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산업을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도 경쟁하고 자동차도 경쟁한다.
하지만 ‘국가전략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국가의 미래와 막대한 재정을 걸려면 훨씬 높은 기준이 필요하다.
원전 수출의 성공을 수주 건수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주액은 성공의 출발을 보여주는 숫자일 뿐이다.
국익은 사업이 끝난 뒤 대한민국에 무엇이 남았는가로 증명해야 한다.
바라카는 이미 그 시험대에 올랐다.
체코는 이제 시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 원전산업이 정말로 세계시장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국가전략산업인지, 아니면 막대한 국가 지원과 금융·외교를 동원해 계속 새로운 일감을 확보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 산업인지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이제 문제는 더욱 근본적인 곳으로 넘어간다.
수출사업의 이익이 예상보다 줄어들 때 손실과 위험은 과연 누가 부담하는가.
한수원과 한전인가, 협력기업과 정책금융기관인가, 아니면 결국 공기업의 최종 주인인 국민인가.
원전 수출의 진짜 가격은 계약서에 적힌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
2절. 세계 원전시장은 정말 커지고 있는가
― 400GW보다 중요한 미국의 AP1000 원전 패권 전략
세계 원전시장이 다시 열린다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르네상스가 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AI와 데이터센터 때문에 전력이 부족해지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며,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신규 원전을 추진하고 있으니 앞으로 거대한 원전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지 먼저 세계 발전시장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숫자부터 볼 필요가 있다.
2025년 세계에서 새로 증가한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약 800GW였다. 그중 태양광만 600GW를 넘어섰고 풍력도 약 160GW가 추가됐다. 반면 같은 해 새로 가동된 원전은 약 3GW였다. 원전은 폐쇄된 설비도 약 3GW여서 세계 전체 원전 설비용량은 약 420GW에서 사실상 정체했다. 원전의 미래를 가장 낙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시기에도 신규 전력설비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이렇다.
물론 태양광 1GW와 원전 1GW를 똑같이 비교해서는 안 된다. 이용률도 다르고 발전량도 다르다. 원전은 한번 건설하면 장기간 대규모 전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세계의 돈과 제조설비와 건설역량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산업시장의 관점에서는 이 격차를 무시하기 어렵다.
원전은 사라지는 산업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신규 발전시장의 주류 성장산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현재 원전은 에너지시장 자체보다 에너지안보, 국가안보, 공급망, 기술패권이 결합된 전략적 시장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미국의 원전 부흥정책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1. 미국은 정말 원전을 400GW까지 지을 것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5월 미국의 원전 설비용량을 약 100GW에서 2050년 400GW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현재의 네 배다.
이를 단순하게 계산해도 25년 동안 약 300GW를 순증해야 한다. AP1000 한 기를 약 1.1GW급으로 잡는다면 270기 안팎에 해당한다. 매년 신규 11기를 가동해야 한다. 기존 원전 가운데 2050년 이전에 수명 문제를 맞는 원전까지 고려하면 필요한 건설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미국 정부(에너지부)의 에너지 전망을 보면 전혀 다른 미래가 나타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의 「Annual Energy Outlook 2026」에 따르면 원전 설비용량은 현재 약 98GW에서 2050년에도 약 99GW 수준으로 사실상 정체한다. 그런데 원전의 발전비중은 2025년 17%에서 2050년에는 12~15%로 오히려 낮아진다. 미국 원전의 설비용량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전력수요는 늘기 때문이다. EIA는 미국의 신규 발전설비 증가를 주도하는 전원으로 천연가스, 태양광, 풍력을 꼽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400GW는 시장전망(forecast)이 아니라 국가가 달성하고자 내건 정책목표(target)다.
더구나 EIA는 DOE 산하 기관이지만 법적으로 독립적인 통계·분석기관이다. 따라서 400GW라는 행정부의 정책목표와 EIA의 장기시장 분석이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달성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400GW 목표를 미국 정부는 왜 내걸었을까?
2. 400GW보다 중요한 것은 ‘원전산업을 누가 지배하는가’다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원전 관련 행정명령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전력을 많이 생산하겠다는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국내 원전산업 기반을 다시 구축하고, 핵연료 공급망의 해외 의존을 줄이며, 2030년까지 설계가 완성된 대형원전 10기의 건설에 착수하고, 미국 원전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며, 원자력 분야에서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을 회복한다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다. 해외 원전수출을 위해 원자력협정과 정부 금융·외교지원까지 동원하겠다는 내용도 명시돼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 원전정책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전력정책인 동시에 산업정책이고, 산업정책인 동시에 지정학적 전략인 것이다.
그 중심에 다시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이 등장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 후 미국에서 AP1000 10기의 건설을 2030년까지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0기라고 해봐야 대략 11GW 정도다. 400GW 목표에서 보면 작은 숫자다.
하지만 산업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전산업은 원자로 설계도 하나만 가지고 존재하는 산업이 아니다. 대형 단조품과 펌프, 밸브, 배관, 계측제어, 원자로기기, 터빈발전기부터 수많은 품질보증 공급업체와 숙련된 용접공·검사원·엔지니어·건설인력이 하나의 생태계로 움직여야 한다.
20~30년 동안 원전을 거의 짓지 않으면 이 생태계가 무너진다.
반대로 같은 원자로 10기를 연속해서 건설한다면 공급업체는 장기간의 일감을 예상하고 설비와 인력에 투자할 수 있다. 생태계가 완벽히 살아날 수 있다. 첫 번째 원전에서 발생한 시행착오를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 줄이고 동일한 설계와 기자재를 반복 생산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AP1000 10기는 400GW보다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400GW가 거대한 정치적 깃발이라면, AP1000의 반복건설은 미국 원전 공급망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산업전략인 것이다.
3. 중국과 러시아가 장악한 시장을 되찾는다
미국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IEA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세계에서 건설을 시작한 원자로의 94%가 중국 또는 러시아 설계였다.2025년 새로 건설에 들어간 원전 10기도 9기는 중국, 나머지 1기는 러시아였다.
세계 원전시장이 아무리 재생에너지보다 작다고 하더라도 원전 종주국으로서 미국으로서는 이 시장을 중국과 러시아에 그대로 넘겨주기는 어렵다.
원전수출은 단순히 발전소 하나를 파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원자로를 선택하면 핵연료, 정비, 부품, 안전규제, 기술지원과 인력교육까지 수십 년의 관계가 이어진다. 여기에 사용후핵연료와 핵비확산, 농축·재처리 문제까지 연결된다. 원전 한 기의 수출이 수출국과 도입국 사이의 장기적인 전략관계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따라서 미국이 AP1000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단순히 “미국에 전력이 부족해서 원전을 많이 짓는다”는 시각으로만 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하게 된다.
미국 내에서 일정 규모의 반복건설을 통해 공급망을 복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동유럽과 중동, 아시아 등에서 중국의 Hualong One과 러시아의 VVER에 맞설 수 있다면 400GW를 달성하지 못해도 미국에는 세계 원자력 시장의 패권을 확보하는 상당한 전략적 성과가 된다.
AP1000은 이미 미국과 중국에서 실제 운전되고 있고 NRC 설계인증을 받은 대형 경수로다. 완전히 새로운 원자로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보다 출발점이 훨씬 앞서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보는 것도 가능하다.
400GW를 모두 건설해야 미국의 원전전략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공급망 회복으로 AP1000의 연속건설 체제를 복원하고 세계 대형원전 시장에서 미국이 다시 주도권을 쥐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세계 원전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지점에서 한국 원전산업에는 다소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세계 원전시장이 커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 원전의 수출기회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의 AP1000 공급망이 성공적으로 복원되고 미국 정부가 금융·외교·원자력협정까지 동원해 해외수출을 지원한다면, 세계 원전시장의 확대가 오히려 미국 원전산업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도 한국 기업에도 기회는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같은 대형 제작기업이나 각종 원전 기자재 업체, 건설·엔지니어링 기업은 AP1000 세계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다. 미국이 단기간에 공급망을 확대하려면 이미 원전 제작능력을 보유한 한국 기업은 상당히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 그것은 훌륭한 사업기회다.
하지만 국가전략산업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돈을 버는 것과 한국 원전기술이 세계 원전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로와 핵심 지식재산권, 사업개발과 금융구조, 장기 서비스 시장의 주도권을 미국이 쥐고 한국 기업이 경쟁력 있는 제작·시공 공급자로 참여한다면 한국 원전산업은 살아남을 수 있다. 어쩌면 상당한 매출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해온 ‘한국형 원전의 세계시장 진출’과는 전혀 다른 산업구조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세계 신규 전력설비 시장 전체를 보면 태양광·풍력·배터리의 증가속도는 원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따라서 원전을 세계 에너지시장을 지배하게 될 거대한 미래 성장시장으로 전제하고 국가의 산업전략을 짜는 것은 위험하다.
원전은 결국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원전을 필요로 하고 중국과 러시아도 계속 건설할 것이다. 동유럽과 중동을 비롯해 신규 원전을 원하는 국가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 원전시장은 모든 나라가 뛰어들어 함께 커지는 거대한 블루오션이라기보다, 상대적으로 제한된 시장을 놓고 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와 한국이 국가 차원의 금융·외교·공급망을 동원해 경쟁하는 시장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한국은 ‘원전 르네상스’라는 말보다 세 가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세계에서 실제로 건설될 원전은 몇 기인가.
그 가운데 한국이 독자적으로 수주할 수 있는 원전은 몇 기인가.
그리고 그 사업에서 대한민국에 실제로 남는 부가가치는 얼마인가.
국가전략산업은 단순히 시장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 원전시장이 살아남는 것과 한국 원전산업이 세계시장의 주도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400GW라는 거대한 숫자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미국은 어쩌면 400GW를 달성하지 못해도 된다. AP1000을 다시 세계 대형원전의 표준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 자국의 공급망을 복원하며, 중국과 러시아에 넘어간 원전시장의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미국의 산업전략은 상당 부분 성공할 수 있다.
그때 한국 원전산업 앞에 놓이는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미국과 경쟁하여 원전을 파는 독자적인 원전 강국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다시 구축하는 세계 원전 공급망의 보완적인 제작·건설 능력을 가진 공급국으로 자리 잡을 것인가.
세계 원전시장의 크기보다 어쩌면 이 질문이 한국 원전산업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5.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독자 수출’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 한국 원전산업의 위치를 판단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2025년 1월 한전·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체결한 지식재산권 분쟁 종결 합의다.
한국은 오랫동안 APR1400을 ‘한국형 원전’, 나아가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원전이라고 홍보해왔다. UAE 바라카 원전 이후에는 원전 수출을 새로운 국가전략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러나 체코 원전 수출 과정에서 이 전제 자체가 흔들렸다.
웨스팅하우스는 APR1400과 체코 수출노형인 APR1000에 자사의 미국 원천기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원자력법과 10 CFR Part 810에 따른 수출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수원은 한국이 기술자립을 이루었기 때문에 독자 수출이 가능하다고 맞섰다.
결국 미국 에너지부는 2024년 한국형 원자로 설계에 미국 원천기술이 포함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한수원의 국회 보고를 통해 확인됐다. 앞서 한수원이 직접 체코 수출 신고를 하려 했을 때도 미국 정부는 미국인이 신청해야 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체코 원전을 수출하려면 미국 측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25년 1월 분쟁은 합의로 끝났다. 그런데 이후 알려진 합의 조건은 ‘한국 원전의 독자 수출’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한전·한수원은 앞으로 원전 한 기를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와 약 6억5천만 달러 규모의 물품·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별도로 1억7천500만 달러의 기술사용료를 지급한다. 합치면 한 기당 8억2천500만 달러, 현재 환율에 따라 약 1조 원이 넘는 규모다. 기본 합의기간도 50년으로 알려졌다.
더 중요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북미와 상당수 유럽 시장에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경쟁하기 어려워졌다는 보도가 나왔고, 향후 한국이 독자 개발한 SMR을 수출하려 해도 웨스팅하우스 기술로부터 독립됐는지를 검증받도록 한 조건까지 알려졌다. 이견이 생기면 미국 소재 제3기관이 기술적 독립성을 판단하는 절차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정도라면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로열티 부담을 넘어선다.
원자로는 한국이 설계하고 건설하지만, 어디에 수출할 수 있는지 제약을 받고, 수출하면 미국 기업에 기술료와 일감을 제공하며, 미래의 독자 개발 원자로조차 기술적 독립성을 검증받아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를 문자 그대로 “모든 원전 수출에 미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표현하면 지나치다. US 10CFR Part 810의 적용 여부와 허가방식은 대상 국가와 기술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원천기술이 포함된 것으로 미국 정부가 판단하는 한, 미국의 수출통제와 웨스팅하우스의 협조를 벗어나기 어려워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6. ‘원전 수출강국’에서 미국 공급망의 파트너로
이것을 앞에서 살펴본 미국의 AP1000 전략과 연결하면 그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미국은 AP1000을 앞세워 자국 원전 공급망을 재건하고 세계 원전시장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려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과 독립적으로 경쟁하는 원전 수출국이라기보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에 참여하는 파트너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는 이것도 좋은 사업이 될 수 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AP1000 주기기를 제작하고 한국 건설회사가 해외 AP1000 건설에 참여한다면 상당한 매출과 일자리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 원전의 독자적인 세계시장 진출’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특히 이상한 변화가 하나 있다.
과거 정부와 원전업계가 그토록 강조했던 ‘원전 기술자립’, ‘한국형 원전’, ‘독자 수출’이라는 표현이 최근 수출전략에서는 눈에 띄게 들어갔다. 대신 ‘한미 원전동맹’, ‘팀 코러스(Team KORUS)’, ‘웨스팅하우스와의 공동진출’이 앞에 등장했다.
단순한 표현의 변화가 아니다. 산업의 지위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
독자 수출을 주장하던 한국이 50년 동안 미국 기업에 기술료와 일감을 보장하고, 수출시장마저 나누는 구조에 들어갔다면 과연 이를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국가전략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서 이 장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계 원전시장이 앞으로 조금 커지느냐 작아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갖는가다.
미국이 AP1000을 중심으로 세계 원전 공급망을 다시 장악하고, 한국이 그 안에서 뛰어난 제작·건설 파트너가 되는 미래는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 기업에도 그것은 훌륭한 시장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한국 기업이 미국 원전산업의 공급망에서 돈을 버는 것과 대한민국이 독자 원전기술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수출을 위해 국가가 전략적으로 수출을 지원할 이유는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시장이 10배 이상 큰 재생에너지 수출 육성이 효과가 훨씬 크다는 점을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2025년 한전·한수원–웨스팅하우스 합의는 바로 그 현실을 가장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3절 SMR은 원전산업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는가
―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국가의 미래를 먼저 걸어도 되는가
1. 작아진 원자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원전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용량이 계속 커져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원자로 한 기를 건설하려면 격납건물과 제어실, 안전설비, 냉각계통, 터빈과 발전기 등 수많은 설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500MW짜리 원전 두 기를 짓는 것보다 1,000MW짜리 한 기를 짓는 것이 싸고, 1,000MW보다 1,400MW 한 기를 짓는 편이 유리하다. 자동차나 비행기와 달리 원전은 오랫동안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왔다.
한국의 APR1400,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프랑스의 EPR이 모두 이런 흐름에서 탄생한 대형 원전이다. 그런데 대형화에는 대가가 따랐다.
원전 한 기에 들어가는 돈이 너무 커졌고 건설기간도 길어졌다. 공사가 몇 년만 지연돼도 금융비용이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미국 보글 원전이나 유럽의 플라망빌·올킬루오토 원전처럼 공기와 건설비가 크게 늘어난 사례도 나타났다. 민간 기업 입장에서는 수조 원, 경우에 따라 수십조 원이 필요한 발전소 하나에 투자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이 되었다.
그래서 원전산업은 반대 방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 원자로 하나를 현장에서 만드는 대신 작은 원자로를 공장에서 여러 개 만들면 어떨까?’
이것이 오늘날 SMR(Small Modular Reactor), 즉 소형모듈원자로가 주목받게 된 기본 발상이다.
IAEA는 일반적으로 SMR을 모듈당 전기출력 300MW 이하의 원자로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Small’, 즉 작다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핵심은 가운데 있는 ‘Modular’에 있다. 설계를 표준화하고 주요 기기를 공장에서 반복 제작한 뒤 현장으로 운송해 조립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 대형원전이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에 가깝다면, SMR은 원전을 점차 제조업 제품에 가깝게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이렇게 되면 장점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우선 한 번에 투자해야 할 돈이 줄어든다. 전력수요가 많지 않은 지역이라면 처음부터 1,400MW짜리 원전을 건설할 필요 없이 작은 원자로 한두 기를 설치한 뒤 필요할 때 추가할 수도 있다. 거대한 전력망을 갖추지 못한 국가나 지역에도 접근하기 쉬워진다.
석탄발전소가 폐쇄된 자리에 기존 송전망을 활용해 SMR을 건설하거나, 전기뿐 아니라 산업용 증기와 열을 공급하고, 데이터센터처럼 지속적으로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에 전력을 공급하자는 아이디어도 여기에서 나온다.
안전 측면에서도 작은 원자로가 가진 물리적 장점이 있다.
원자로 출력이 작으면 노심에서 발생하는 열의 절대량이 줄어든다. 정지 이후 제거해야 하는 붕괴열도 그만큼 작아질 수 있다. 자연순환, 중력, 대류와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피동안전계통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기도 쉬워진다. IAEA 역시 많은 SMR 설계가 기존 대형원전보다 피동안전성과 고유안전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평가한다.
즉 전원이 끊어져도 펌프를 계속 돌려야만 안전한 원자로보다는, 자연의 힘으로 일정 시간 열을 제거할 수 있는 원자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조건 하나가 숨어 있다.
작게 만드는 것 자체가 혁신은 아니다.
작은 연구용 원자로와 군사용 원자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오늘날 SMR이 미래 원전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크기를 줄였기 때문이 아니라, 원자로를 작게 만들어 설계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하고, 공장에서 반복 생산함으로써 기존 원전의 높은 비용과 긴 건설기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SMR의 성패를 판단하는 기준도 분명해진다.
공장에서 정말 값싸게 반복 생산할 수 있는가.
건설기간을 실제로 단축할 수 있는가.
여러 기를 반복 생산할수록 가격이 내려가는가.
그리고 새로운 안전개념이 실제 원전에서도 기대한 대로 작동하는가.
이것이 입증되어야 ‘작은 원자로’가 산업의 혁신이 된다.
여기서 SMR에 대한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원자로의 크기를 줄이면 원전이 가지고 있던 비용과 위험도 함께 줄어드는가?
SMR을 평가할 때는 ‘작다’와 ‘싸다’, ‘작다’와 ‘안전하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서 SMR의 가장 어려운 문제가 시작된다.
2. 작으면 정말 싸고 안전한가
SMR을 설명할 때 가장 흔히 따라붙는 말이 ‘더 싸고 더 안전한 원전’이다.
그런데 경제성부터 생각해보면 이상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원전을 1,000MW, 1,400MW급으로 계속 키워온 이유가 규모의 경제였다면, 원자로를 다시 300MW 이하로 줄이는 순간 그 장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된다.
300MW 원자로라고 해서 제어실과 원자로용기, 안전설비, 방사선관리, 보안시설, 운영인력과 정비체계가 모두 1,400MW 원전의 5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1MW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건설비는 작은 원자로가 대형원자로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OECD 산하 원자력기구(NEA)도 이 문제를 명확히 인정한다. SMR은 대형원전의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포기하는 대신, 공장제작과 표준화, 반복생산에 의한 ‘대량·연속생산의 경제(economies of multiples 또는 series)’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즉 SMR 경제성의 승부처는 원자로의 크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자동차가 저렴한 이유도 자동차가 작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설계의 자동차를 공장에서 수십만 대씩 반복 생산하기 때문이다. 항공기도 마찬가지다.
SMR 역시 이런 제조업의 논리를 원전에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SMR 경제성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많이 만들어야 싸지는데, 싸다는 것이 입증돼야 많이 팔 수 있다.
처음 건설하는 FOAK(First-of-a-Kind)는 비쌀 수밖에 없다. 몇 기, 몇십 기를 반복 제작하면서 설계를 개선하고 공급망을 표준화하고 공장의 가동률을 높여야 비로소 NOAK(Nth-of-a-Kind)의 가격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독일 연방 핵폐기물관리안전청(BASE)이 발주한 2021년 연구보고서는 225MW급 웨스팅하우스 SMR과 1,100MW급 AP1000의 건설비를 비교했다. 소형화로 잃어버린 규모의 경제를 반복생산의 학습효과로 상쇄하려면, 평균적인 건설비와 학습률을 적용할 경우 동일 설계의 SMR을 약 3,000기 생산해야 대형원전의 단위출력당 건설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3,000기를 생산하면 곧바로 시장경쟁력이 생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동일한 원자로 3,000기의 주문을 확보하기 어려운 만큼, 공장생산만으로 SMR의 구조적인 비용 열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것이 보고서의 실제 결론이다.
그런데 주문이 충분하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고, 공장을 충분히 돌리지 못하면 가격은 내려가지 않는다.
실제 사례가 미국 NuScale이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승인까지 받아 SMR 상용화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던 NuScale은 미국 서부 공공전력사업자들과 아이다호에 SMR 발전소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사업의 경제성 목표는 흔들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NuScale 자료를 보면 사업의 전력가격 목표는 당초 MWh당 58달러에서 89달러로 올라갔다. 2022년 경제성 평가에서는 계산된 비용이 당시의 58달러 목표를 초과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3년 11월 결국 사업은 취소됐다. NuScale과 유타주 지자체 연합 사업체인 UAMPS는 사업을 지속할 만큼 충분한 참여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례 하나만으로 모든 SMR이 경제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보여준다.
SMR의 경제성이 이미 입증된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높은 단가를 앞으로 이루어질 공장 대량생산과 반복건설의 학습효과가 낮춰줄 것이라는 기대가 SMR 경제성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SMR의 정확한 표현은 ‘싼 원전’이라기보다 ‘충분히 많이 생산할 수 있다면 싸질 가능성이 있는 원전’에 가깝다.
그렇다면 안전성은 어떨까
안전성은 경제성보다 조금 복잡하다.
작은 원자로가 가지는 안전상의 장점은 분명히 일정 부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원자로 한 기의 출력이 작고 노심도 작다면 사고 때 다루어야 할 에너지와 방사성물질 재고량도 한 모듈 기준으로 줄어들 수 있다. 붕괴열 제거도 상대적으로 유리해지고 자연순환과 중력 등을 이용한 피동안전계통을 적극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따라서 잘 설계된 SMR이 대형원전보다 중대사고 발생 가능성과 사고 영향을 낮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곧바로 ‘SMR은 안전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원자로 한 모듈이 작아졌다고 발전소 전체가 반드시 작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0MW짜리 원자로 네 기를 한 부지에 설치하면 총출력은 약 680MW가 된다. 모듈 하나의 노심과 방사성물질 재고량은 작지만 네 모듈을 합친 부지 전체의 위험을 평가하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러 원자로가 전원, 냉각수, 제어설비, 보조계통이나 최종열제거원을 공유한다면 한 사건이 여러 모듈에 동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후쿠시마 사고가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것이다. 사고는 반드시 원자로 한 기씩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가정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원전 반대론자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IAEA의 SMR Regulators’ Forum은 다중모듈 SMR에서 공통원인고장, 모듈 간 상호작용, 공유 안전계통, 내부재해, 인간공학 등을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공유계통이 있다면 여러 모듈에서 동시에 안전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운전인력 문제도 새롭다.
SMR은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모듈을 하나의 주제어실에서 적은 인원(3인)으로 운전하려 한다. 평상시에는 자동화가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모듈에서 동시에 이상상태가 발생한다면 한 명의 운전원이 얼마나 많은 정보와 경보를 처리할 수 있는지, 자동화 시스템의 오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새로운 검증과제가 된다.
미국 NRC 역시 다중모듈 SMR의 인간-시스템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안전 현안으로 검토해왔다. 여기에는 SMR이 가진 묘한 역설이 있다.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통을 단순화하고, 여러 모듈을 함께 운전하며, 인력을 줄여야 한다. 반면 안전성을 높이려면 독립성과 다중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검사와 정비, 사고대응 능력을 갖춰야 한다.
결국 경제성과 안전성은 서로 완전히 독립된 문제가 아니다.
설비를 줄이면 건설비는 낮아질 수 있지만 안전여유가 충분한지 입증해야 하고, 운전인력을 줄이면 운영비는 절감할 수 있지만 다중모듈 사고에 대응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안전설비를 공유하면 가격은 내려갈 수 있지만 공통원인고장의 위험을 따져야 한다.
특히 아직 실제 상업운전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설계라면 컴퓨터 해석과 확률론적안전성평가(PSA)만으로 모든 문제를 확인할 수도 없다. 초기 설계단계에서는 PSA 기법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SMR 안전성에 대해서는 한 문장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더 안전하도록 설계했다’는 것과 ‘실제로 더 안전하다는 것이 입증됐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SMR은 대형원전이 가지고 있던 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기술이다. 동시에 다중모듈 운전, 공통원인고장, 공유계통, 자동화와 인력축소 등 지금까지의 대형원전과는 다른 문제를 확인해야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결국 경제성과 안전성 모두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실제로 만들어서 운전해봐야 한다.
공장에서 반복 제작하면 얼마나 싸지는지, 건설기간이 실제 얼마나 단축되는지, 피동안전계통이 실제 발전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여러 모듈을 소수의 운전원이 충분한 기간동안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증’이다.
그런데 한국의 i-SMR 정책을 들여다보면 여기서 뜻밖의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이 원자로를 충분히 실증한 다음 상용화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성공할 것이라고 먼저 가정한 뒤
국가의 전력계획과 수출전략을 거기에 맞추고 있는 것일까?
이 점을 분간하지 못하면 원자력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닌 국가 존망에 이를수도 있다.
3. SMR은 한국의 새로운 수출상품이 될 수 있는가
― 원자로는 작아져도 수출의 장벽은 작아지지 않는다
대형원전 수출의 한계를 이야기하면 다음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SMR이다. 대형원전보다 작고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할 수 있으니, 한국이 세계시장을 선점하면 새로운 수출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i-SMR 개발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SMR을 자동차나 반도체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자동차는 완성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되지만 원자로 수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자로에는 핵연료가 필요하다. 핵연료의 농축과 제조, 운송이 뒤따르고 운전 중에는 핵물질을 계량하고 감시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가 발생하면 이를 장기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물리적 방호와 국제사회의 안전조치도 필요하다. 원자로가 폐쇄된 뒤에는 해체와 폐기물 관리까지 이어진다.
결국 원자로 한 기를 수출한다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핵연료 공급과 핵비확산, 안전조치, 핵안보, 사용후핵연료 및 폐로라는 긴 책임관계까지 함께 만들어내는 일이다.
SMR이라고 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원자로의 크기는 작아질 수 있지만 국제사회가 수십 년 동안 구축해놓은 핵비확산 체제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SMR이 세계적으로 수백 기 보급된다면 문제는 오히려 복잡해질 수도 있다. 원자로가 설치되는 국가가 늘어날수록 핵연료의 공급과 운송, 사용후핵연료 관리와 핵물질 계량, 물리적 방호와 안전조치의 대상도 늘어난다. 특히 원자력 기반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국가라면 규제기관과 전문인력, 비상대응체계와 핵안보 역량까지 필요하다.
따라서 SMR 수출을 단순히 “공장에서 만들어 세계에 파는 새로운 제조업”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자력산업의 특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더해진다.
한국의 원자력 활동은 한미 원자력협정과 국제 핵비확산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다. 미국 원천기술이나 미국인의 원자력 기술지원이 관련된다면 미국의 수출통제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10 CFR Part 810이다. 해외의 원자력 활동에 대한 특정한 기술지원과 이전은 그 내용과 대상국에 따라 미국 정부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i-SMR을 독자 개발했다고 해서 휴대전화나 자동차처럼 원하는 나라에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대상국의 핵비확산 의무, 원자력협정, 기술의 원산지, 연료 공급체계, 각국의 수출통제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더구나 한국은 대형원전 수출을 둘러싼 웨스팅하우스와의 오랜 지식재산권 분쟁 끝에 2025년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문 전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단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후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원전 수출에서 웨스팅하우스 기술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i-SMR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한국이 개발하는 i-SMR은 웨스팅하우스 기술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한국의 수출상품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가?
i-SMR은 완전히 새로운 물리원리를 이용하는 원자로가 아니다. 한국이 오랫동안 개발하고 건설해온 가압경수로 기술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기존 한국형 원전과 미국 원천기술의 관계가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디에서 단절되는가는 단순한 기술논쟁이 아니다. 실제 해외 수출사업에서는 지식재산권과 기술 독립성, 수출통제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두고 “한국이 SMR을 한 기 수출할 때마다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웨스팅하우스와 한국 기업 사이의 기술·지식재산권 문제와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는 구별해서 봐야 한다.
하지만 국가전략산업의 관점에서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국가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SMR을 개발하고 세계시장 선점을 목표로 한다면, 최소한 그 기술을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되어 있는지는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SMR을 개발하는 것과 SMR 수출강국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시장이 실제로 얼마나 형성될 것인지, 어느 국가가 어떤 원자로를 선택할 것인지, 국제적인 핵연료 공급망을 누가 장악할 것인지, 미국과 다른 원전 공급국들이 어떤 수출전략을 펼칠 것인지도 아직 경쟁 중이다.
여기에 핵비확산과 수출통제, 기술 독립성까지 고려하면 “SMR을 개발하면 거대한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명제는 아직 입증된 사실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깝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SMR을 연구하고 기술을 확보하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대한민국의 차세대 수출 먹거리이자 국가전략산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판단이다.
원자로는 작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수출을 둘러싼 국제정치와 핵비확산, 기술통제의 장벽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SMR 수출강국’을 선언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몇 기를 팔 수 있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과연 이 원자로를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세계시장은 실제로 그것을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면 SMR은 아직 ‘수출산업의 성과’가 아니라 가능성을 검증해야 할 기술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장의 질문이 시작된다.
SMR은 수출할 수 있느냐에 앞서, 과연 안전성과 경제성, 실증이라는 기술의 문턱을 충분히 넘어섰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