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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클러스터링 — 문명을 움직이는 0번째 힘
ㅡ 케빈 켈리의 12가지 너머, 그리고 한국이라는 실험
이원영(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 AI Claude Pro
프롤로그 —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
2016년, 『와이어드』의 창립 편집장 케빈 켈리는 한 권의 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인에비터블(The Inevitable)』, 번역하자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기술이 향하는 12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되어감(Becoming), 인지화(Cognifying), 흐름(Flowing), 스크리닝(Screening), 접근(Accessing), 공유(Sharing), 필터링(Filtering), 리믹싱(Remixing), 상호작용(Interacting), 추적(Tracking), 질문(Questioning), 그리고 시작(Beginning).
이 12가지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탁월한 지도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에 지능을 심고, 소유보다 접근이 중요해지며, 모든 표면이 스크린이 되는 세계. 그 방향성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현실을 짚어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 12가지 힘은 왜 그 방향으로 수렴하는가? 무엇이 이것들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그 답이 클러스터링(Clustering, 군집성 群集性)에 있다고 생각한다.
1. 클러스터링 — 13번째가 아닌 0번째
케빈 켈리의 12가지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무엇이 될까. 실리콘밸리라는 지리적 군집, 경기도 제조업 인큐베이터의 공간적 밀집, BTS 아미의 전 지구적 팬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는 원리가 있다. 바로 클러스터링 — 비슷한 것들이, 혹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끌어당기며 군집하는 힘이다.
그런데 클러스터링은 12가지 트렌드에 병렬로 추가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 '아래에서 작동하는 엔진'에 가깝다.
공유(Sharing)는 군집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혼자서는 공유할 대상이 없다. 필터링(Filtering)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군집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인지화(Cognifying)의 핵심인 머신러닝 자체가 데이터 클러스터링의 산물이다. 흐름(Flowing)은 밀도 차이, 즉 클러스터 간의 농도 차에서 발생한다. 상호작용(Interacting)은 군집된 커뮤니티 안에서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물리학에서 중력이 모든 운동의 배경으로 작동하듯, 클러스터링은 기술과 사회 모두에서 에너지가 모이는 방식의 근본 법칙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케빈 켈리의 13번째가 아닌, 제0번째 필연(The 0th Inevitable)이라 부르고 싶다. 모든 inevitability의 엔진.
2. 밀도뿐 아니라 속도 — 한국 클러스터링의 특이점
클러스터링 자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실리콘밸리가 형성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고, 독일 제조업 클러스터가 세계적 명성을 얻기까지 한 세기가 필요했다. 런던의 금융 클러스터도, 뉴욕의 패션 클러스터도 긴 시간의 퇴적물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 클러스터링의 특이점은 밀도의 크기 뿐 아니라 속도와 동시성에 있다. 군집이 생성되고, 해체되고, 재결합되는 사이클이 극단적으로 짧다. 신곡이 발표되면 수시간 내에 전 세계 팬덤이 클러스터링된다. 드라마 하나가 흥행하면 관련 산업 — 뷰티, 패션, 관광, 음식 — 이 즉각적으로 군집 반응을 일으킨다. 사회적 이슈가 터지면 커뮤니티가 빠르게 분화하고 또 재결집한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네 가지 조건이 맞물려 있다. 지리적 밀집(수도권 집중), 문화적 동질성(빠른 공감대 형성),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 그리고 '빨리빨리'라는 재편의 마찰계수가 낮은 문화. 이 넷이 결합하여 클러스터링의 사이클 타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킨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경쟁력은 클러스터의 크기가 아니라 세포분열의 속도에 있다. 빠를수록 환경 변화에 강하고, 진화의 속도가 빠르다.
3. 서울과 뉴욕 — 두 가지 클러스터링 모델
클러스터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동질적 클러스터링과 이질적 클러스터링.
뉴욕은 후자의 교과서다. 뉴욕의 위대함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한 공간에 압축되며 일어난 화학반응에서 비롯되었다. 재즈는 아프리카 리듬과 유럽 화성과 이민자들의 정서가 충돌하며 탄생했다. 힙합은 흑인·히스패닉 문화와 가난과 도시 인프라의 마찰에서 나왔다. 현대 금융은 유대계 자본과 앵글로색슨 법체계와 전 세계의 야망이 뒤엉킨 결과물이다. 뉴욕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히는 밀도 자체가 혁신의 원천이었다.
동질적 클러스터링이 레이저라면, 이질적 클러스터링은 핵융합이다. 단일 파장의 집중된 힘 vs. 이질적 원소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폭발적 에너지.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난다. 뉴욕의 이질적 클러스터링은 사실 영어라는 단일 채널로 수렴시키는 구조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도, 예술가들도, 금융인들도 결국 영어를 통해서만 클러스터에 진입할 수 있다. 영어가 필터이고, 허브이고, 게이트키퍼다. 영어라는 단일 언어 권력이 뉴욕 클러스터링의 반경을 규정한다.
서울은 다르다. 서울은 일본 만화를 일어 원문으로 흡수하고, 독일 클래식을 그 문법 그대로 학습하고, 미국 힙합을 영어 발음채로 받아들이고, 프랑스 미학을 원형 그대로 수용한다. 번역하고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흡수한 뒤 내부에서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이 서울식 이질적 클러스터링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한국인이 다언어에 개방적인 것은 어쩌면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어는 사실 글로벌 소수 언어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언어적 비중심성(non-centrality)이 역설적으로 더 넓은 이질적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개방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영어 패권이 오히려 뉴욕의 클러스터링 반경을 제한하고 있는 반면, 서울은 그 제한이 없다.
4. 감정의 해상도 — 한국어라는 숨겨진 인프라
언어를 감정 전달의 '대역폭(bandwidth)'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영어는 'sad'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슬픔을 표현한다. 한국어는 슬프다, 애잔하다, 처연하다, 구슬프다, 애틋하다, 서럽다, 애수롭다 — 결이 다른 슬픔들을 각각 포착하는 단어들을 갖고 있다. 영어의 'shimmer'에 해당하는 빛의 떨림을, 한국어는 반짝, 빤짝, 번쩍, 반들반들, 영롱하다, 아롱아롱으로 강도와 질감과 리듬까지 나누어 담는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세계는 더욱 풍부하다. 영어가 제한적인 의성어 체계를 갖는 반면, 한국어에는 수천 가지의 의성어·의태어가 존재하며, 각각은 미세하게 다른 감각과 감정의 질감을 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어휘의 다양성이 아니라, 인간 경험을 지도화하는 해상도의 차이다.
이 감정의 해상도가 클러스터링과 연결된다. 감정의 해상도가 높은 언어는 더 많은 인간 경험을 클러스터링할 수 있다. K-드라마가 언어도 다른 전 세계인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 BTS 가사가 번역본만으로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봉준호의 영화가 문화적 맥락 없이도 보편적으로 울리는 것 — 이것은 단순한 스토리의 힘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정밀한 언어에서 출발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대비가 선명해진다.
> 영어는 세계를 정보적으로 연결했다.
> 한국어는 세계를 감정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영어가 인터넷의 프로토콜이라면, 한국어는 인간 감정의 프로토콜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다. 케빈 켈리의 인지화(Cognifying) 트렌드에서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가장 어려운 것이 감정의 미세한 결을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어는 그 감정의 세계를 가장 촘촘하게 지도화한 언어 중 하나다. AI 시대에 한국 콘텐츠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한국어 자체가 '숨겨진 언어적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클러스터링의 엔진은 공감이다
이제 핵심 명제에 이른다.
클러스터링을 일으키는 엔진은 무엇인가? 정보는 지식을 클러스터링하고, 이익은 자본을 클러스터링하지만, 공감은 인간을 클러스터링한다. 그리고 인간의 클러스터링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지속적이다.
뉴욕의 클러스터링은 결국 '영어 + 달러 + 기회'라는 세 가지 필터를 통과한 것만 결합할 수 있는 구조다. 이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면 클러스터에 진입이 불가능하다.
서울의 클러스터링은 단 하나의 조건으로 작동한다. 감동받았는가? 공감되는가? 언어도, 국적도, 소득도 2차적인 조건이다.
그 결과의 차이는 극명하다. 태국의 10대가 BTS에 공감하면 → 한국어를 배우고 → 한국 문화 전체로 클러스터링된다. 미국의 주부가 K-드라마에 공감하면 → 한국 음식을 찾고 → 한국 여행을 꿈꾼다. 브라질 청년이 기생충에 공감하면 → 봉준호를 찾고 → 한국 영화 전체로 클러스터링이 확산된다. 공감 하나가 연쇄적 클러스터링을 일으킨다. 뉴욕식 이익 기반 클러스터링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21세기의 가장 희소하고 강력한 자원이 돈도 기술도 아닌 공감이라면, 서울은 이미 뉴욕이 갖지 못한 근본적인 클러스터링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AI가 정보와 지식의 클러스터링을 자동화할수록, 공감 기반 클러스터링의 희소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6. '우리'의 뿌리 — 두레에서 디지털까지
그렇다면 한국의 공감 인프라는 어디서 왔는가.
시민언론 민들레에 실린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의 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마을 공동체는 가뭄이라는 생존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다. 모내기철에 비가 잠깐 오거나 물을 잠깐 댈 수 있을 때, 동네 사람 모두가 동시에 힘을 모아야 했다. '두레'라 불린 이 수평적·동시적 결집 방식은 아무리 힘없고 모자란 사람도 농번기에는 귀한 손이 되는 구조였다. 함께 굶을지언정 외따로 죽는 사람은 없는 공동체. '우리'라는 의식은 이런 생존의 조건이 수천 년에 걸쳐 키워준 것이다.
일본의 '무라(村)'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일본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수직적 분업 — 촌장의 지휘 아래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 — 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규율과 복종, 역할 이탈 시의 이지메. 이것이 일본식 클러스터링의 DNA다. 정밀하고 효율적이지만 수직적이다.
한국의 두레는 달랐다. 명령이 아니라 공감, 위계가 아니라 동시적 연대. 그리고 이 DNA는 언어에도 새겨졌다.
한국어의 '우리'는 단순한 복수 대명사가 아니다. 한국인은 '내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르고, '나의 어머니'를 '우리 엄마'라 부른다. 영어권에서 'my'로 표현할 것을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우리'로 클러스터링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다. 수천 년의 생존 방식이 언어에 각인된 것이다. 한국인은 말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클러스터링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두레의 조건 — "지금 당장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 은 디지털 시대에 그대로 재현된다. 실시간 트위터 총공, 촛불집회의 자발적 동시 결집, 재난 시 카카오톡 커뮤니티의 즉각적 조직화. 수천 년 전 가뭄이 만들어낸 생존 본능이, 21세기 클러스터링의 가장 강력한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다.
7. 남북, 그리고 클러스터링의 미래
이 논의를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 바로 남북관계다.
기존의 남북관계 분석은 주로 군사적 긴장도, 정치적 협상,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클러스터링 렌즈로 보면 전혀 다른 변수가 보인다. 정보의 밀도와 흐름이 클러스터링의 전조다.
최근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발언들의 주목할 점은 내용보다 구조다. 과거에는 침묵→도발→침묵이라는 단절적 패턴이었다. 최근에는 크고 작은 신호들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대통령의 발언에 북한 김여정부장의 반응이 며칠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정보가 단절 없이 흐른다는 것은 클러스터링 이론에서 결합 직전의 상태와 유사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나는 낙관적이다. 남북은 사실 가장 강력한 클러스터링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 동일한 언어 — 세계 최고의 감정 해상도를 가진 그 언어. 두레와 우리로 이어지는 공동체 DNA. 분단 이전의 클러스터 경험. 이산가족, 같은 노래, 같은 음식이 만드는 감정적 공명.
뉴욕이 이질적 요소를 클러스터링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면, 남북은 동질적 요소가 이미 내재되어 있어 임계점만 넘으면 폭발적으로 빠른 클러스터링이 가능한 구조다.
역사는 하나의 선례를 이미 보여주었다. 베를린 장벽은 정치가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동독 시민들 사이에 축적된 공감의 밀도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정치는 그것을 뒤따라갔을 뿐이다.
북한 내부도 이미 '감정적 클러스터링이 이미 진행 중'일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정치가 클러스터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클러스터링이 먼저 일어나고 정치는 그것을 뒤따라가는 것일 수 있다.
두레가 그랬듯이 — 명령이 아니라 생존의 공감이 사람을 모았듯이. 한반도가 직면한 미·중 패권경쟁의 압박, 기술 패권 경쟁, 경제적 불확실성이라는 현대판 '가뭄'은 어쩌면 새로운 두레를 촉발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에필로그 — 0번째 필연의 시대
케빈 켈리는 옳았다. 12가지 힘은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세계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밀어붙이는 더 근원적인 힘이 있다. 클러스터링 — 비슷한 것들이, 혹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끌어당기며 군집하는 힘. 그리고 그 클러스터링을 작동시키는 엔진이 공감이라면,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감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인프라의 최전선 중 하나가 서울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천 년 전 가뭄과 두레가 만들어낸 '우리'의 DNA가, 디지털 시대의 가장 강력한 클러스터링 엔진으로 부활하고 있다.
클러스터링은 13번째 트렌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트렌드의 어머니다. 그리고 공감은 클러스터링의 어머니다.
문명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모여드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