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禍(화) 사도세자를 죽이다.
1762년 윤(閏) 5월 11일, 윤달이 있었으므로, 이미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궁궐안에는 때아닌 못질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궁궐을 보수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 사형집행자는 사형수의 아버지였다. 바로 영조가 그의 친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는데, 사도세자가 이를 거부하자 뒤주안에 가두고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신하를 시켜 못질을 하는 장면이다.
조선후기 성군이자 현명한 정치가로 평가받았던 21대 왕 영조...그는 단순히 사약을 내리는 형벌이 아니라 아사형 즉 굶겨 죽이는 혹독한 처벌을 아들에게 내렸다.
도데체 사도세자는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을까? 일설에 전해내려오는 부자간의 반목과 오해, 그리고 사도세자의 광기어린 행동 때문이었을까?
도데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비극은 아주 오래전 영조가 아직 왕자였던 연잉군시절까지 올라간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숙종이었고 그 유명한 장희빈(1659~1701)이 사약을 받고나서 겨우 정국이 안정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장희빈이 아들이 세자자리에 있었는데 병약하고 후사를 이을 수 없어 1717년 숙종은 연잉군에게 세자를 대리하여 청정할 것을 명하였다.
여기에 노론측은 연잉군이었던 숙종의 유지라는 이유로 영조를 지지하게 되고 소론은 정통세자라는 이유로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과 논란속에 경종은 1720년 조선의 21대 왕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경종은 어머니었던 장희빈의 사형을 찬동했던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을 대대적으로 축출시켰다.
그러나 병약했고 후사가 없던 경종은 1721년 연잉군에게 대리첨정을 명하게되고, 여기에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세력이 또다시 연잉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찌보면 함정이었다. 경종은 연잉군의 태도와 노론의 반응을 살펴 보기 위해 대리청정을 명한것이지, 그때까지는 왕위를 물려줄 마음을 굳히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연잉군이 당연히 청정을 거절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노론의 지지를 받은 연잉군은 그대로 수락해 버린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경종은 대리청정 명령을 다시 걷어들인 후, 연잉군의 청정을 지지하였던 노론벽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1722년 숙종이 승하할 당시 경종의 왕위계승을 막기위해 노론측이 독살을 시도했다는 고변은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확대시켰다.
그 결과 1723년에는 임인옥사가 일어나 에서 왕세자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의 4대신을 포함해 60여 명이 처형되고 173명이 연좌죄에 연류되어 처벌을 받는다.
이때 연잉군 즉 영조도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노론측과 한배를 탓다는 이유만으로도 소론측의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였다.그러나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연잉군만은 무사할 수 있었으며,결국 1724년 31세의 나이로 조선21대 왕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다. 더구나 친 어머니가 일찍죽은 탓에 맞아들인 새 어머니 정순왕후는 자신보다 열살이나 아래였고, 가문이 미미한 탓에 노론측과 영합을 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사도세자가 동궁에 거처하던 시절, 그를 모시던 내시와 궁녀들은 예전에 경종을 모시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그들에게서 경종의 독살설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전해 들을 수 있었고, 결국 그것이 아버지인 영조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리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쓰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핍박파고 죽음의 위기로 물고간 소론측을 결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정치적 재기를 노리던 소론이 사도세자를 부측이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은 점차 예견된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예견된 비극, 그리고 새로운 도약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인 융릉
영조와 사도세자가 정치적 대립을 보이고 있던 시절,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하게 되니, 영조의 정비가 젊은 나이에 죽은 후 새롭게 맞아들인 정순왕후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15세에 중전에 간택되었고, 자신보다 열살이나 많은 사도세자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정순왕후의 친정쪽이 대체로 노론세력과 영합하고 있어, 사도세자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마찰을 빚게 되었다.
영조는 25세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소론에 대해 복수해 주기를 바랐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소론 영수인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가 경종 때 한 일에 대해 설명하다가 『나는 비록 그들을 처단하지 못했지만 네가 아비의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영조 자신이 관계된 일이라 자신은 직접 소론을 처단하지 못하지만 세자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았던 이들을 처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들인 사도세자는 오히려 노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 오고 있지 않았던가? .
이런 배경에서 사도세자는 여러번 집권당인 노론과 부딪쳤다.
이에 노론 김상로(金尙魯)는 영조를 찾아가 『동궁께서 선왕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불러 꾸짖자 세자는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했다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나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등을 살펴 보면, 그가 조울증 증세를 보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는 이미 15살 때 서정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노론측에서는 영조에게 수시로 사도세자에 대한 모함을 올렸고 그때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크게 책망하였다고 한다.
한참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와 아버지로부터의 질타를 들어야 했던 사도세자는 어린나이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행동은 자연히 돌출적이고 감정적일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노론측의 꾸민 각종 음모와 모함에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 부터 남다른 총기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그런 조숙함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등이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적어 영조에게 일러바치자, 이 의견에 적극 찬동하여 부자간의 갈등의 폭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늙은 영조 역시 사도세자의 광기어린 행동에 다소 실망하고 있던 상태에서 새로 얻은 젊은 왕비 정순왕후가 거들고 나서자, 결국 거짓은 진실로 바뀌게 되었다. 몇마디의 말이 부른 참극이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제대로 된 진상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한 영조의 무정한 처사였다. 사도세자가 궁녀를 살해하고, 비구니등과 어울렸다는 루머등, 사도세자에게 불리한 진술만을 영조는 믿었던 것이다.
다만 왜 영조가 시일이 걸리는 餓死(아사)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누군가는 아들의 구명을 외쳐 줄 것으로 예상하였을 수도 있다. 국왕이 한번 내린 명령을 거두어 들이자면 거기에 걸맞는 명분과 절차가 필요할 테니까....그리고 사도세자역시 누군가는 나서서 구명해 줄 것이라 믿고 사약을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을 선택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뒤주안에 갇혀져 죽음의 문턱으로 한발짝씩 가까워지는 8일동안 아무도 구명할동을 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부축였던 소론일파역시 쥐죽은듯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치열하였던 당파싸움도 오히려 이 기간에는 조용하였다.
더구나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마저도 뒤주에 갇힌 8일동안 사위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세자가 노론을 멀리하고 소론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혜경궁 홍씨 세력역시 노론측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해의 골이 깊은 상태에서 사도세자의 사면을 요구했다가는 자기자신도 죽음에 처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모두에게 철저한 외면을 당한체 1762년 윤5월 4년간의 대리청정이란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28세의 나이로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 그리고 정조는 이 화성으로 가는 길에 수원성을 쌓고 조선의 새로운 새상으로의 비상을 꿈꾸웠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그렇게 화려했지만 불행했던 시대에 쌓여졌던 수원의 화성은 현재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슬프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정자각에서 곡을 하고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렸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 이후 노론 중심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즉위년(1776) 존호가 장헌(莊獻)으로 추존됐다. 그리고 묘 이름도 수은묘(垂恩墓)에서 현륭원(顯隆園·정조 13)을 거쳐 융릉(1899년)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