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산격3동 1405-3번지.
바로 우리 산격동의 집이었다.
엄마가 자식들 교육 때문에 아버지에 앞서 대구로 처음 온 곳은 명덕로타리 근처 남신약국 옆 한옥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4모누나만 남기고 모두 옮긴 곳이 산격동 농촌진흥원 건너편이었다.
1405-3번지 집은 아버지가 직접 감독을 하시면서 지은 집으로 집 지을 때는 우리도 자주 가보곤했다.
시멘트벽돌로 담이 차례로 올라갔고 그 안에는 흙이 수북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집은 남향이었으나 대문이 북쪽으로 나 있었다.
본채와 별채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본채는 기와지붕이었고 별채는 옥상으로 되어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별채였는데 세 칸으로 변소-욕실-창고로 되어 있었다.
이 세 칸은 크기가 똑 같아서 창고에 비해 변소가 유난히 커서 일을 볼 때는 바깥의 노크에 음성으로 답을 해야할 정도였다.
욕실은 욕조를 설치할 공간이 있었으나 이사를 나올 때까지 미완성인 채로 있어서 용도에 맞게 사용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욕실에는 당장 쓰지 않는 기물들을 많이 넣어 놓았는데, 집 지을 때 쓰던 도구들이 이사를 나갈 때까지 그곳에 있기도 하였다.
창고는 용도에 맞게 쓰였는데, 이곳에는 각종 물품이 들어 있었지만 곶감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
열 개씩 노끈으로 묶어 화동서 가져온 장에 넣어 놓았는데 엄마 몰래 꺼내먹었던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것은 이미 말라 안에서 벌레를 먹어 쪼개면 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옥상에는 나무사다리를 놓아 오르락내리락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북쪽으로는 우리집이 끝에어서 경치가 괜찮았던 편이었다.
집 바깥이 그쪽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는데,
밤에는 동촌비행장의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내는 불꼬리들이 선명하게 보였고,
멀리 공동묘지도 보였는데 역시 밤에 불이 나니 바람결에 봉분의 윤곽을 드러내는 불꽃이 참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북쪽 약간 아래에는 부흥회 교회가 있었는데 집회를 할 때면 정말 볼 만(?)하였다.
그리고 본채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의 서쪽 어귀에는 무화과 나무를 하나 심어 놓았는데, 매년 정말 쑥쑥 잘 자랐다.
열매를 따서 자르면 흰 진액이 나오고 안은 털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신기했다.
그리고 장독대와 곁채 사이에는 수도가 있었는데, 여름에는 엄마가 이곳에서 세하와 나를 발가벗겨 씻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목욕은 대도시장에 있는 호심탕에 가서 했는데, 아버지가 인솔하여 1년에 세 번 정도 갔을 것이다.
설, 추석, 그리고 학교에 신체검사 있는 날.
따지고보면 약 4년 정도 밖에 안 산 집인데도 굉장히 오래 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꿈많은 국민학교 시절을 마무리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하는 제수씨 때문에 옛 우리집을 밖에서나마 한번 가서 구경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곳을 떠난 후 지금까지 한번도 못 가보고 그냥 그 옛날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보는 것이 고작이다.
첫댓글 무화과 나무는 두그루가 있었다오. 그리고 농촌진흥청 앞에 살 때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도 넘기고 형들은 한밤중에 도둑을 쫓아서 산격국민학교까지 간적도 있었지. 이집에 대한 기억도 만만찮지.
다음엔 대명동편이 올라오겠구만.
우선 시간 나는대로 산격동편을 마무리지어야지... 오늘 광주 갔다와야 하는 일이 있어서 내일 쯤에야 완결편이 올라올 듯.
18년을 산 대명동 시절이 기대되는 구만....
지금 가면 산격동 집 찾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걸, 워낙 미로로 바뀌어 놔서...
산격동 우리집 이전의 산격돋 전세집 시절이 빠졌구먼....이 시절의 주인공은 장풍인데....
중 2땐가...그 전셋집 살 때 겨울방학을 맞아 엄마한테 갔다가 짠오빠, 훠니, 나 셋이서 낮잠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죽다 살았는데...짠오빠는 거의 몸이 굳었던 까닭에 엄마가 혼비백산 울상이 돼서 허둥거리는 걸 가물거리면서 느꼈던 기억...
혼비백산 놀란 엄마 김치국물깨나 퍼먹였겠다. 산격동 농촌진흥원 앞의 전셋집은 거의 반년이나 살았나? 장풍형님에게 기대를 해도 될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