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대에 집권했던 이인임(李仁任)의 보수 귀족세력은 1388년에 관료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최영·이성계 등의 무장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후 최영과 이성계는 각각 시중(侍中)·수시중(守侍中)에 올라 정치를 주도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한때 철령 이북이 원나라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반환을 요구하여 서로 대립했다. 이에 최영은 명과의 실력대결을 주창하여 우선 전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명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태조 이성계ⓒ Dyddhkd | Public Domain
반면 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전쟁능력·시기·효과 등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4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첫째, 군량미·군사규모 등에서 명과 대결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전쟁시기를 여름철로 잡은 것은 잘못인데, 이 시기에 전쟁을 벌이면 농사를 망칠 뿐만 아니라 농민의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셋째, 거국적으로 대군을 원정시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 넷째, 당시 장마철이므로 전투하기에 불편하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강력한 반론을 내세우며 요동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결국 원정이 단행되어 최고사령관 최영을 8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각각 임명했다. 1388년 5월 원정군이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는 휘하 장병의 절대적인 지지와 조민수의 동의를 얻어 회군을 단행했다. 그해 6월에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처음에는 종실 중에서 국왕을 택하려 했으나 조민수·이색의 주장으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고 공양왕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성계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