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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카페 게시글
박희진 시인 프로필 및 근황 스크랩 월간 스토리문학 2005년 6월호 (1주년 기념호)-박희진 시인
이현이 추천 0 조회 83 09.04.29 22: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간 스토리문학 2005년 6월호 (1주년 기념호)-박희진 시인 | 내가 만난 문인 포스트 삭제 2005/06/02 18:17
http://blog.naver.com/ksj5562/13507547
출처카페 : 문학공원 / 개똥참외

메인스토리 


동인지운동과 시낭송운동의 선구자 - 박희진 시인


경기도연천군에서 구석기 축제라는 문화축제가 있어 찾아간 것은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구석기 축제는 문화축제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연천문인협회’와 그리고 ‘그리고 문학회’란 문학단체에서 시화전도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마침 연천문인협회 총무를 보고 있는 김경곤 시인이 취재를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석기축제’를 취재한 후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박희진 시인이 연천군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취재에서 돌아온 후 필자는 박희진 시인 댁에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월간 스토리문학 지난호를 몇 권 등기속달로 보내드렸다. 월간스토리문학에 메인스토리를 취재하는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원로들을 취재하여 그분들이 작고하시기 전에 문단활동을 하며 살아온 뒷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보전한다는 이유와 어렵고 힘든 문인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으며 후배작가들에겐 어떤 귀감을 보여주었나 하는 것을 취재하여 널리 알린다는 사명감도 큰 한 몫 한다.

우편을 보내고 며칠 후 박희진 시인께 전화를 드리니 취재에 응하시겠다는 확답을 주시며 먼저 황금찬 시인댁에 취재하러 왔었으니 집 위치를 잘 알 것이라면서도 우이동 성당과 맡닿아 있는 우이빌라 선생의 자택을 나무에서 꼬부라지는 길의 이정표까지 마치 손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는 듯 자세히 일러주셨다. 메인스토리를 취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원로 문인을 만날 때면 언제나 ‘전철 몇 번 출구로 나와 어떻게 오고 어디서 좌회전을 하고 몇 미터를 와서 유턴을 하라’는 식의 길 안내에 부모와 할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감동하곤 한다. 그것은 박희진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박희진 시인은 영원한 야인으로 문단행사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에 취재에 응하신다는 확답을 주시니 월간 스토리문학 운영진들은 고무적인 기분으로 약속한 5월 16일까지 기다리려니 일이 바빠 시간이 너무 빨리 가던 것과는 상반되게 날짜가 기다려지고 시간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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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박희진 시인은 영원한 야인으로 문단행사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에 취재에 응하신다는 확답을 주시니 월간 스토리문학 운영진들은 고무적인 기분으로 약속한 5월 16일까지 기다리려니 일이 바빠 시간이 너무 빨리 가던 것과는 상반되게 날짜가 기다려지고 시간이 가지 않는다.

평소 취재에 동반하던 월간 스토리문학의 최현근 회장은 개인 일로 이번에는 동행할 수 없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래서 서창원 스토리문인협회 회장께 전화를 넣었더니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서창원 시인은 그간 다리를 다쳐 몇 개월 동안 거동이 불편하였었는데 깁스를 푼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월간 스토리문학의 일이라면 열일을 젖혀두고 참여하는 열성에 감동하면서 월간 스토리문학의 사무장을 맡고 있는 김영은 시인과 함께 취재 길에 올랐다.

길을 물어 박희진 시인 댁의 초인종을 누르니 박희진 시인은 마치 ‘노인과 바다’를 쓴 어네스트 헤밍웨이처럼 수염을 적당히 기른 채 편안한 체크무늬 남방차림으로 우리 반갑게 맞아주셨다.

 댁 안으로 들어가니 김영은 시인은 노시인의 집에서 나는 오래된 책 냄새를 맡느라 좋아가 코를 킁킁거렸고 서창원 시인은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지라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박희진 시인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희진 시인과 전화할 때 ‘집이 누추하고 먼지가 좀 쌓였어도 양해해 달라’는 말씀을 들을 때 알아차리긴 하였지만 그냥 사모님께서 작고하셨거니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박희진 시인은 결혼을 하지 않는 노총각으로 독신주의자였다. 아니 박희진 시인의 말을 빌어 정확히 말하면 ‘시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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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 오늘 이렇게 저희 스토리문학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주심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뵙기가 건강하신 것 같은데 건강은 어떻게 지키기는지요.

 

박희진 시인 : 네, 저는 보시다시피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주의자입니다. 다시 말해 ‘시와 결혼’을 했지요. 제 나이가 올해 일흔 다섯입니다. 전에는 밥을 해먹고 그랬는데 요즘은 밥해먹기가 귀찮아서 아침에는 칼슘두유 한 잔에다 빵 한 쪽을 먹습니다. 두 쪽도 많아서 한 쪽만 먹지요. 그리고 과일을 좋아해서 과일 한 두 개를 먹습니다. 점심때는 노인복지관에 갑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시장가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어요, 청소하기가 싫어서 스토리문학에서 온다고 해서 3일 전에 겨우 했습니다. 담배는 끊었고 술은 좀 마십니다. 저녁은 주로 술 한 잔에 간단한 안주로 해결하지요. 선식을 먹으려는 것이 제 희망인데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아침처럼 먹을 때도 많구요. 근데요. 이상한 것은 그렇게 조금 먹는데도 체중이 75Kg이 넘는 거예요. 우리 나이에 제 키면 68Kg쯤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한 때는 다이어트를 해서 68Kg이 된 적도 있습니다. 살이 찌면 머리가 둔해지고 혈압과 당뇨가 걱정되지요. 작년에 비해 금년이 힘들고 내년엔 더 힘들 거란 생각을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도수체조를 30분정도 합니다. 목운동이나 허리운동, 요가 비슷한 것을 30분정도 하지요. 그리고 저는 하루에 10,000보정도 걸으려 애를 씁니다. 제가 점심을 먹으로 노인복지관에 가려면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의 거리인데 걸어서 갔다 옵니다. 그러면 8,000보정도 되지요. 그리고 나면 솔밭공원을 세 바퀴 정도 돌면 10,000보가 좀 넘을 겁니다. 사람한테는 양파가 그렇게 좋다네요. 매운 양파를 날로 먹지 마시고 요리 속에 양파를 넣어먹는 습관으로 고혈압과 당뇨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김영은 시인 : 선생님! 부모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박희진 시인 : 저의 아버지 함자는 朴濂字夏字(박염하)이시고 저희 어머니 함자는 李君字子字(이군자)이십니다. 모두 작고하셨지요.


서창원 회장 : 선생님! 고향에 대한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박희진 시인 : 저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의 수성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끔 방학을 하면 내려갔던 기억이 있고 그래도 연천군 출신이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프로필에는 꼭 ‘경기도 연천출생’을 넣는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였는데 영평과 연천지역에서 땅을 많이 사셨기 때문에 대 지주였습니다. 그래서 6.25전쟁이 나고나서는 공산진영의 좌익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지요. 할아버지의 호는 夢波였는데 「夢波集」이란 작은 시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다. 외가로는 소설가 이태준 선생이 외6촌 형님뻘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태준의 친척 서울대 교수를 지낸 김명렬, 김경렬 등을 미루어 제자신이 ‘외탁을 했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김영은 시인 :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선생님 이 그림은 좀 어둡게 그려졌어요.

박희진 시인 : 네. 하하하. 저는 이 그림의 제목을 ‘악마의 시달림을 받는 사람’이라고 붙였어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나중에 이 그림도(또 다른 초상화를 가르키며) 그려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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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발행인 : 근데요. 초상화가 약간의 우울함도 보이지만 그래도 멋있습니다. 시인의 고뇌가 들어있는 것 같아서요. 그럼 문학에는 언제부터 뜻을 두셨나요.


박희진 시인 : 제 그림을 잘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수성초등학교로 식민지교육을 도맡아 하던 식민지교육의 총 본산과도 곳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국어시간이면 일본어를 잘 읽어 선생이 일부러 시켜서 책을 읽으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해방 전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장기가 일제시대였으므로 일본어로 된 책을 주로 읽고 자라났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주저 없이 ‘문학가’라고 대답했지요.


김영은 시인 : 영향을 받은 시인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박희진 시인 : 저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본말로 배우고 집에 와서는 왜 조선어로 말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통해 문학하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시나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일본어로 된 탐정소설이나 만화, 세계문학전집, 전기문 등을 일었지요.  그러기에 일본시인의 소위 ‘하이쿠’라 말하는 짧은 시의 대가인 일본인 시인 ‘바시오’의 시 110수를 번영했던 적이 있지요. 일본인 현대시인 중에는 정지용이 좋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키타하라 하쿠슈’를 저인도 좋아했습니다. ‘다까무라 고오따로’나 ‘하기하라 사꾸따로’ 등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 시인으로는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등의 1920~1930년대 대표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었지만 교류는 없었습니다. 40년대의 서정주 유치환 등의 시인은 직접 만났던 시인들이었고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시인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조지훈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특히 정지용 시집을 많이 읽었지요. 저는 소설에도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에 습관이 되어서  이광수의 소설 ‘흙’읽는데  어휘가 어려워 이해하며 읽는데 두 달이나 걸렸습니다. 저는 해방 직후에도 일본어로 시를 썼다가 나중에 한국말로 고쳤습니다. 한국말이 그만큼 서툴렀기 때문이지요. 17~19세 때 쓴 시가 그런 시입니다. 그 때 시 몇 편이 남아서 나중에 「실내악」이라는 첫 시집에 넣었지요.

외국의 시인으로는 독일 시인으로는 라이너 마리아 닐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춘수도 닐케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외국시인의 시집 전집은 유일하게 닐케의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으로는 뽈 발레리, 저는 영문과를 나오긴 했지만 무슨 영문인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습니다. (하하하. 잠시 웃음) 괴테는 또 하나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안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잖아요. 영국시인으로는 T.S 엘리어트, W.B 예이츠, 딜런 토마스라는 젊은 낭만파 시인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브레이크 같은 18세기 말엽의 시인의 시를 많이 읽으며 시심을 키워나갔습니다. 젊어서 야심이 있어서  60매 정도의 단편소설을 써 보았지만 저는 그 이후 소설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느끼고 소설은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소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죽기 전에 태워버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죽고 나서 발표가 되면 우습게 되잖아요. 작품성이 약하니 태워버려야지요.

 

서창원 회장 : 글을 써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박희진 시인 : 어려웠을 때나 득의만만했을 때나 문학하는 데는 다 도움이 됩니다. 6.25전쟁 때라 회고하면서 그 때 20세 약관의 나이였는데 피란을 못가서 숨어서 천정구석에 숨거나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 이후 9.28수복 이후 1.4후퇴 때 젊은 사람들을 개돼지처럼 남쪽으로 몰고 가지 않았습니까? 그 때 옷도 안주고 소금국에 무쪼가리 두 세 개 떠 있으면 기분이 좋은 날입니다. 그 때 진주까지 17일 동안 걸어서 갔지요. 그게 유명한 방위군 사건이지요. 제2국민병 사건이지요. 훈련소에서 정말 많이 죽어나갔습니다. 그 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고생이 심했던 시기입니다.

제가 보성중학교 나왔지만 제가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 땐 서울 대학교 가는 것이 어처구니없이 쉬웠습니다, 근데 전 서울대학교엔 원서를 못 내겠더라구요. 전 이공계통은 영점이었습니다. 수리적인 분야는 정말 몰랐습니다. 선생들이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를 몰랐으니까요. 지금 구구단을 못 외우는 사람은 저 뿐일 겁니다. 일본말을 알기 때문에 깊고 넓은 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어를 싫어하지만 영문과를 들어간 이후는 4년 동안 영어를 전공하면 영문학서적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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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원 회장 : 아이구, 저런이요. 저도 보성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구요. 제가 57학번입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선배님이시네요. 이런인연이 있다니요.

 

박희진 시인 : 정말 그러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학번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50년도에 대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그 이후 영어를 전공하고 동성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요. 고등학교 학생들 가르칠 정도는 되었나 봐요. 제가 잘 가르치기 때문에 25년 동안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던 것 아닐까요. 저는 학교에서도 불루진을 입고 가죽잠바를 입고 출근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있던 학교가 동성중고등학교라고 천주교 학교였거든요. 당시 선생들이 ‘미국바람 되게 세다’고 농담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에 있는 것이 싫어서 교정에 장미에 코를 대고 살았습니다. 저는 장미가 ‘나의 방독마스크다.’라는 말을 했지요.

김영은 시인 : 선생님! 종교는 무엇인가요?


박희진 시인 : 네, 종교는 불교입니다. 종교가 불교라고 해서 제가 절에 다니고 그런 것은 아니고 불교가 좋아서 책으로 읽고 만나고 그런 거지요. 제가 불교시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불교문인의 이름이 거론될 때면 제 이름이 빠지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께서 그간 글을 써오시면서 하셨던 문단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박희진 시인 : 저는 문단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저는 일체 문단모임에는 가지 않습니다. 세미나다, 망년회다 문인협회다 그런 거 일체 안 갔습니다. 펜클럽한국대회가 있을 때도 제가 안 갔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시 낭독 운동과 시동인 운동입니다. 1960년까지 동인운동이 그리 활발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4.19의거 이후 문학단체가 수도 없이 생겨났지요. 저는 종전에 전후문학인협회 간사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5.19 군사 구테타가 일어나고 박정희 정권이 나라를 세웠을 때 저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에는 반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 살았다. 공산화 될 수 있는 길은 면했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도 없이 생겨난 문학단체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통합되었습니다. 그게 한국문인협회지요. 저는 한국문인협회 창립 발기인이지만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행사에 나가본 일도 없고 회비를 내본 적도 없는데 이제 나이가 70이 넘으니까 원로들은 자격을 살려주어서 또다시 한국문인협회 회원 명부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5.16전 전후문학인회에 회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문인협회 발기인이 되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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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시인 : 선생님께서 시동인 활동을 해 오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박희진 시인 : 삼엄한 계엄령을 뚫고 제가 주관하는 「六十年代司華集」이란 동인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계엄령 속에서 ‘살 길이 있구나, 동인을 하면 우리도 발표할 수 있구나’란  그때 문인들의 숨통을 틔워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60년대 이후 최초의 도인지였습니다. 그 이후 수도 없이 많은 동인지가 범람했지요. 저는 저의 역할이 ‘한국 동인지 문학사에서 동인지 운동에 실질적으로 추진한 공로가 크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말합니다. 나중에 비용문제로 회원들이 늘어나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린 “이왕 망할 바에야 종간호라 못을 박고 망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두각을 나타냈던 시인들이 성찬경, 구자운, 박성용, 박재삼 신기선, 이경우, 이종헌, 이창대, 주명영, 이경남, 이성교, 이희철, 인태성, 이제하, 강위석 같은 시인들이지요.


서창원 회장 : 선생님께서는 또 시낭송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해오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가요?

 

박희진 시인 : 제가 동인지 운동으로 문학사적 공헌을 했다면 ‘시낭송운동의 대부’라는 또 다른 타이틀도 있습니다. 저는 「청동시대」란 저의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을 때 저는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고 서울의 신문회관 대강당에서 [박희진 자작시 낭독회]를 열었습니다. 개인이 신문회관 강당에서 300명이 넘는 청중들 앞에서 두 시간이 넘게 자작시를 낭송한다는 것은 큰 이슈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 성찬경 시인과 함께 [박희진 성찬경 2인 시낭독회]를 명동의 한 카페 ‘삐아뜨르’에서 열었습니다. 당시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연극으로 유명한 추송웅이란 걸출한 연극배우가 싸롱드라마를 하고 그랬었던 곳이지요. 그곳의 연출가가 김정옥이란 분이었는데 제가 찾아가서 ‘시낭독’을 하겠다고 하니까 찬성하면서 연출, 효과, 조명의 최고 사람들을 매치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안무가 있었고 발레니나가 나와 무용을 보여주었었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해서 한 달에 네 번 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시낭송’이라며 신문과 잡지들이 보도하기 시작했지요. 당시 MBC와 TBS방송에 출연하여 시낭독을 하였습니다. 그 땐 성찬경 시인이나 저나 모두 직장이 있던 터라 계속하고 싶었지만 힘들더라구요. 누가 바톤을 이어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회로 막을 내렸습니다. 1979년 구상 시인, 성찬경 시인과 함께 [공간시낭독회]를 만들었습니다. 1년동안 계속했지요. 지금도  동국대 앞에 있는 동서문학관(전숙희 대표)에서 20여명이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전에는 공간사랑에서 입장료를 500원, 1000원씩 받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탕골예술관에서 하다가 바탕골예술관이 양평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동서문학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모두 장소를 무료로 빌려주었는데 바탕골예술관에서는  프로그램도 만들어주고 그랬었지요. 1979년부터 지금까지 26년간 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우이시낭송회라는 곳도 있습니다. 우이시낭송회는 정말 대단합니다. 잡지 형태의 책자를 매달 1000권씩 찍어 약 800부 정도를 시인과 문인단체 등에 보냅니다. 그리고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일곱 시엔 인사동에 위치한 보리수카페에서 이생진 시인과 둘이서 [인사동 시낭송회]를 합니다. 이생진 시인은 인터넷을 잘 하십니다. 그분이 못한다면 저는 자동소멸이나 마찬가지지요. 하하하. 저는 한 달에 세 번 시낭송회에 갑니다. 그러니 이 나이에 힘이 들지요. 그래도 힘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작정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시낭송운동의 대부’라 말합니다. 보통 땐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는데도 마이크 앞에 나가서 시낭송만 하게 되면 힘이 나고 두 시간 세 시간 떠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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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쯤에서 박수를 쳐도 좋을 것 같습니다.(잠시  박수) 선생님! 이제 글을 쓰려나오는 작가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면 해 주세요.

 

박희진 시인 : 젊은 시인들이 등단했다고 다 시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10년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은 무턱대고 시류나 사조만 배우고 본뜨려 합니다. 예를 들면 ‘김수영’이나 ‘서정주’란 시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의 시가 좋아서 그 시를 배운다면 그 땐 이미 늦습니다. 제가 만난 시인 중에  ‘나는 평생 특별한 야망이 없다. 다만 서정주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으로 족하다.’라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서정주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누구 휘하에 들어가 공부하고 찾아가고 하는 것은 구시대적 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용없는 짓거리란 말씀입니다. 시를 쓰는 주체가 나니까 성실하고 투철하게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합니다. 시는 언어인데 물질은 아닙니다. 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범근이 공에 미쳤습니다. 시인은 말에 미친 사람입니다. 자다가도 말이 떠오르고, 길을 걷다가도, 수업을 하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말이 떠오릅니다. 말은 정신입니다. 영혼입니다. 신령스러운 것입니다. 신령이 언어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다룰 땐 까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아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이해관계가 있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가지고 장난치고 혹사하고 찢어발기고 뜯고 이 말에 저 말 옮기고 제멋대로 학대해서는 좋은 시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는 정신수양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신집중상태를 지속해서 예술가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지키는 것이 시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단 시인뿐만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화가 모든 음악가가 갖아야 할 덕목입니다. 천재는 집중과 지속의 화신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나의 최대한의 능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내가 죽어도 아파트에서 죽어 썩어나가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내가 좋은 ‘시’ 하나만 생각하고 삽니다.

 

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 오늘 너무나 좋으신 말씀해 주셔서 정말 큰 공부 했습니다. 선생님의 연보를 메인스토리 뒤에 넣고 싶은데 혹시 정리해 놓으신 건 있으신지요.

 

박희진 시인 : 네, 여기 있습니다. 이거 제가 어제 스토리문학에서 온다고 해서 썼어요. (하며 프로필을 건네주신다.)

누추한 집에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월간 스토리문학이 바른 정신으로 지금처럼 노력한다면 좋은 문예지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프로필은 저희가 타이핑해서 인쇄로 빼서 한 백장쯤 만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오래사세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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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시인의 시 세 편을 소개한다.

 

나의 애인 외 2편



박희진


나의 애인은 말이 없습니다.

나의 애인은 공기의 혀와

     안개의 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애인은 이 몸이 아파야

     홀연 바람처럼 나타납니다.

나의 애인의 별빛 눈동자를

     본 이는 세상에 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애인은 껴안을수록

     아주 속절없이 사라져버립니다.

나의 야인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때는

     내가 홀로 이만치 서서

     바라볼 때입니다.

나의 애인의 목소리를 꼭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끼 낀

     돌 틈을 흐르는 물 소리 같았어요.

나의 애인은 때로 한낱

     미미한 향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아들은……



나의 아들은 바람의 根源이다.

나의 아들은 달빛 위에 올라 결가부좌한다.

나의 아들은 縮地法을 쓴다. 발자국을 안 남긴다.

나의 아들은 幽界를 넘나들며

            예사로 老子의 수염을 만진다.

나의 아들의 손바닥엔 은하수가 흐른다.

나의 아들은 산정으로 타오르는 불이다.

나의 아들의 放尿는 그대로 폭포가 된다.

나의 아들이 통곡하면 하늘이 무너진다.

나의 아들은 손가락 끝에서 무지개를 뿜는다.

나의 아들 가슴속엔 여의주가 들어 있다.

나의 아들의 눈빛은 사람을 살고 싶게 한다.

나의 아들의 主食은 이슬과 은행과 호도이다.


나의 아들은 어린이들을 제일로 좋아한다.

            지상의 꽃보다도, 하늘의 별보다도.

나의 아들이 앉았던 바위에선 불노초가 돋는다.

나의 아들은 별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든다.

나의 아들의 술벗은 李太白과 金檀園이다.

나의 아들은 곧잘 풀잎 속에 들어가 숨는다.

나의 아들의 손길이 닿으면 사나운 말도 유순해진다.

나의 아들의 옷은 天衣無縫이다.

나의 아들은 장밋빛 발바닥을 가지고 있다.

            바다 위를 걸어도 젖는 법이 없다.

나의 아들이 악기를 타면 호랑이도 눈물을 흘린다.

나의 아들은 신비의 열쇠인 북두칠성으로

            또 하나 다른 우주를 여닫는다.

나의 아들은 용광로 속에서도 태연히 잠을 잔다.

나의 아들의 손톱은 龜甲이다.

나의 아들은 용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아들은 지상의 여인과는 동침을 안 한다.

나의 아들의 그림자는 은은한 물빛이다.

나의 아들의 둘레엔 언제나 라일락 꽃내음이 감돌고

            있다.

나의 아들은 자면서도 곧잘 미소를 짓는다.

나의 아들은 황금의 목청을 지니고 있다.

나의 아들의 노래를 듣는 이는

            누구나 다 동심으로 돌아간다.

나의 아들은 어떠한 벽도 거뜬히 투과한다.

나의 아들 안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하나로 되어 있다.

나의 아들의 시선은 빛보다도 신속하다.

나의 아들에겐 국경과 인종도 장벽이 못 된다.

나의 아들의 언어는 사랑이다.

나의 아들의 마음은 시공이 끊어진 자리에 있기에

            염증을 모른다.

나의 아들은 구원의 청춘이다.



화랑을 기림


화랑은 신라의 귀족, 진골(眞骨)의 피에서,

       아니, 우리 배달겨레 정통의 피에서

       피어난 꽃임. 풍류도(風流道)의 정화임

화랑은 단순히 겉만 아름다운 미소년이 아님.

       천 ․ 지 ․ 인(天 ․ 地 ․ 人) 삼재(三才)를 하나로 꿰뚫는

       기(氣)의 조화(造化)임

화랑의 아름다움, 거기에 진 ․ 선(眞 ․ 善)이 깃들어 있음.

       게다가 늘 선향(仙香)이 풍김.

하랑은 그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선동(仙童) 같을밖에.

화랑의 화기(和氣) 앞엔

       사나운 말도 무릎을 꿇음.

       도적의 무리는 총칼을 내던지고,

       얼었던 마음은 봄물처럼 녹아내림.

       아둔한 마음은 햇살처럼 밝아짐.

       착한사람은 더욱 더 착해지고

       용맹한 사람은 더욱 더 용맹해짐.

       누구나 진심으로 기꺼이 따르게 됨

화랑은 천지신령(天地神靈)을 믿음.

       뭇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마다 풍년을 들게 하고

       삼재팔난을 여의게 하는

       하늘의 하느님을.

       이 나라 명산엔 산신령이 있고

       바다와 강엔 용왕이 있음을.

       하지만 신령은

       인간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도 있음을 믿음. 

       즉 천지인일기(天地人一氣)를 믿음

화랑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구국일념(救國一念)의 치성을 드리면,

       영험이 나타났음.

       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영웅,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경우가 대표적임.

       그의 몸은 거의 불사신(不死身)이 되었으며,

       그 칼에는 신기(神氣)가 내려

       바위도 잘리우는 신검(神劍)이 되었거니.

화랑의 임전무퇴(臨戰無退),

       귀신도 곡할 용맹의 근원에는

       이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믿음이 있었던 것.

       또한 평소의 부단한 무예 연마,

       도의의 진작이

       필승의 인화단결을 낳았던 것.

화랑은 무엇보다 자연을 사랑함.

       신령이 깃든 산수(山水)일진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순례에 나섬. 호연지기를 기름.

       일심으로 하늘에 치성을 드림.

       하여 심신이 하늘처럼 맑아지면,

       도(道)는 스스로 그들 몸에서

       산천초목으로, 금수어충(禽獸魚蟲)으로 퍼져나감.

       우줄우줄 가락으로, 솟구치는 신명으로.

       그들의 입에선 신가(神歌)가 나오고,

       그들의 몸은 신무(神舞)를 추게 됨.

화랑의 도의 정신,

       그 서슬 푸른 충성과 효도와

       신의와 청렴과 의협과 박애의

       사상은 바로

       그들의 뼈와 살

       그리고 피의 명령으로서

       천지시명(天地神明)의 가르침이었던 것.


                   *


화랑은 결코 지나간 역사의 자취가 아님.

       그들은 살아있음.

       백두산 천지(白頭山 천지)가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배달겨레의 정통의 피가

       마르지 않는 한,

       그들은 차라리 우리의 미래임.

       위대한 전범(전범)임.

       그들은 가장 정화된 겨레혼이

       피워낸 꽃이기에,

       시들 수 없는, 구원의 꽃임.

       오오 암울한 위기의 때일수록

       쩡쩡 울리는, 빛 뿜는 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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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喜璡 詩人 年譜



1931. 11. 4 경기도 연천에서 아버지 朴濂夏와 어머니 李君子의 7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55. 보성중학교(6년제)를 거쳐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같은 해 李漢稷 趙芝薰 두 분의 추천으로 「文學藝術」誌를 통해 등단.

1961~1967 시동인지 「六十年代詞華集」(전12권)을 주재.

1965 「朴喜璡 自作詩 朗讀의 밤」개최 -신문회관 강당에서

1968 「朴喜璡 詩美展」개최 - 신문회관 화랑에서

1970 「朴喜璡 ․ 成贊慶 二人 詩朗讀會」개최 - 명동의 <카페 : 떼아뜨르>에서

1975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창작계획> 과정을 수료

1979. 4월에 具常 ․ 成贊慶과 함께 ‘공간시낭독회’를 창립, 이래 오늘날까지 상임시인, 시낭독운동의 선두주자답게 ‘우이시낭송회’와 ‘인사동 시낭송회’ 상임도 겸하고 있음.

월탄문학상과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에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집


1960 「室內樂」(思想世界 출판부)

1965 「靑銅時代」(母音出版社)

1970 「微笑하는 沈黙」(現代文學社)

1976 「빛과 어둠 사이」(朝光出版社)

1979 「서울의 하늘 아래」(文學藝術社)

1982 「四行詩三白十四篇」(三一堂)

1982 「가슴속의 시냇물」(弘盛社)

1985 「아이오와에서 꿈에」(五象社)

1985 「라일락 속의 연인들」(正音사)

1985 「詩人아 너는 先知者 되라」(民族文化사)

1988 「散花歌」(拂日出版社)

1990 「北漢山 진달래」(山房)

1991 「四行詩三白首」(土房)

1993 「연꽃 속의 부처님」(만다라)

1995 「몰운대의 소나무」(시와 시학사)

1997 「一行詩七百首」(예문관)

1997 「문화재 아아 우리 문화재!」(효형출판)

1999 「百寺百景」(불광출판부)

1999 「花郞靈歌」(秀文出版社)

1999 「東江十二景」(秀文出版社)

2000 「하늘 ․ 땅 ․ 사람」(秀文出版社)

2001 「박희진 세계기행시집」(시와 진실)

2002 「사행시 사백수」(시와 진실)

2003 「1행시 960수와 17자시 730수 ․ 기타」(시와 진실)

2004 「꿈꾸는 탐라섬」(시와 진실)


시선집

1986 「꿈꾸는 빛바다」(고려원)

1987 「바다 만세 바다」(문학사상사)

1991 「한 방울의 만남」(미래사)


수상집

1990 「투명한 기쁨」(山房)

1991 「서울의 로빈슨 크루소」(책세상)


시화집

1991 「소나무에 관하여」(다스림)

2004 「내 사랑 소나무」(솔숲)


번역서

1959 타골시집「기탄잘리」(양문사)

2002 타골시집「기탄잘리」(개정판 ․ 현암사)


시전집

2004 「초기시집」(시전집 전10권 중 제1권 ․ 시와 진실)

2005 「중기시집」(근간 ․ 시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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