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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대전 부침기
1398년 6월 명의 개국황제 주원장이 사망하고 4자인 주체는 북경에서 남경으로 분상하는데 강소회안에 이르자 한통의 성지로 손자 주윤문에 계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신황제는 숙부들의 남경분상을 막고 주체는 1399년 기병하여 3년만에 승리하고 정화의 서양파견 대운하의 소통 북경천도 영락성세를 열고 정통성을 세우려 영락대전을 만든다
1772년 청건륭 37년 정월 정서를 명하고 각지의 서적을 황가장서로 모으는데,10월 17일 헌서실적을 조사하고 안휘학정 주균은 주절을 올려 영락대전의 일서를 정리하길 바라는데 건륭은 인가하고 사고전서를 만들도록 한다
영락대전의 집일부터 명하고 만여권의 책을 수서관으로 옮겨 연독지후 기균은 놀라는데 천하의 일서를 보고 열독한다
기균은 한림원에서 사고전서 총찬관으로 임명되고 영락대전의 규모와 내용의 방대함에 놀라는데 유가 사기전적이 많은 것이 중국의 특징으로 영락대전은 소설 의복서등 너무나 다양하여 놀란 것이다
기서들도 많아 300년전의 편찬에 대한 경외로 놀라고,1399년 정난지역으로 정권을 찬탈후 3대황제로 영락을 연호로 등극하는데 400여대신들이 집단으로 도주하여 불복자를 모두 살해하고 공고한 통치를 위해 내각제를 페지하고 스스로 근정을 한다
그는 스스로 공무처리를 위해 백과전서를 필요로 하여 1403년 대서편찬을 선언하나 지식인들은 거부하여 이들을 농락하기 위해 동기를 만드는데 편찬서였다
주원장은 대학자 해진을 주목하고 진사를 통과한 그를 부자의 정으로 대하고 감사하여 대포서봉사를 쓰는데,주방에서 황제와 만난 사실을 글로 쓴다
만언서로 주원장의 많은 정책을 비평하여 황제에 올리나 화를 내지 않는다
반면에 해진의 재능을 칭찬하는데,집에 돌아가 10년간 독서를 더하도록 명한다
해진은 8년간 독서하는데 주원장은 죽고 해진은 국상에 참가하여 10년을 채우지 못함을 고발당하는데 건문제는 참언을 듣고 서북으로 유배를 보낸다
명성조 주체가 등극후 해진은 주체에 복종하여 주체는 기뻐하고 영락대전의 전신인 문헌대성을 편찬하나 주체는 불만으로 여긴다
이기간에 강남에서 대량의 문헌을 황제에 올리는데,주희를 비평한 책으로 해진은 분소하고 유가외의 서적을 배척한다
주체는 중수를 명하고 언로를 열고 문화작업을 바라는데 주체성공의 원인으로 영락3년 주체는 그의 모사인 승려 요광효를 임명하고 중찬하는데 그는 주체의 의도를 알고 민간의 백가서적을 수집하고 보배로 여긴다
명조는 영락제이전의 7-8천종의 학술서 잡학서적을 모두 민간에서 징집하고 3천여명의 학자들이 징집되어 백가의 서적 불도교서 술수 점술 천문지리 민간의 소설 희곡등 삼라만상의 류서이다
1408년 영락6년 거저가 생기고 주체는 매우 만족해하고 영락대전이라 하여 정장본으로 22937권으로 분장하여 11095책 색인 80책으로 백가의 문헌과 다양한 주제로 정리된다
그는 대통일시대의 사상통일작업으로 평가하여 송원시기의 문헌이 대부분으로 청대에는 20%만이 유통된다
류서인 영락대전은 홍색으로 핵심을 기록하여 찾아보기 쉽게 편찬하여 문헌내용을 모두 기록하여 조사용이다
사고전서는 경 사 자 집으로 전서적을 분류하였고 영락대전은 전고가 광범한 장점이고 독특한 자료가 많다
사고전서는 일서의 집일로 영락대전에서 선용하는데 이후 방기한다
건륭은 초서를 강조하여 많은 서적의 보관하나 산개가 많고 15만책을 분서하는데 개산이 많다
그는 악비의 만강홍중 명구를 삭제하는데 금과 청의 여진족을 비난하는 부분을 모두 삭제한다
또한 호로 흉노등은 삭제하는데 영락대전의 유가외 전적을 비평하고 1783년 8억자의 사고전서가 편찬이 완성되어 최대의 문화공정으로 유가정통사상 위주의 편찬하고 영락대전중 상당부분을 버리는데 주류사상만을 남긴다
기균은 특별한 내용은 그의 저서 열미당초당기에 수록하는데,건륭은 사고전서완성후 영락대전을 방기하여 200년사이에 모두 산실된다
기균이 확보한 영락대전은 사실상 원본이 아닌 두부의 영락대전중 1408년 영락대전 완성후 황궁에 보관중인 원본 어람하는데,모두가 관심을 두지않고 가정제만 영락대전을 열람하는데,도교에 심취한 그가 신선노장지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전상 연단과 풍수의 내용을 본 것이다
1557년 가정 36년 황궁의 대화재로 봉천문등 삼대전이 사라지는데,영락대전의 문루도 화재가 붙자 밖으로 꺼내 수초본으로 다시 초사하게 한다
영락대전의 본서의 개변을 막으려 6년간 임모하여 사후 완성되는데 1567년 영락정본과 가정부본이 생기고 1664년 이자성의 북경점령으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강희연간 다시 나타나는데 황가당안관의 족보사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영락대전의 가정본으로 정본은 황궁수색에도 한권도 발견되지 못하는데 1773년 기균이 사고전서편찬시 1215책이 사라지고 9881책만 남아 건륭제는 아쉬어 하고 전국적으로 수색하도록 한다
그러나 결과는 없어 사고전서 편찬후 영락대전을 한림원에 보관하도록 하여 문인학사들이 참고하도록 한다
그러나 절도 전쟁등으로 사라지고 퇴근시 한림들이 집으로 가져가는데,1900년 8국연군이 한림원을 소각하여 64책만 남게된다
200년사이에 모두 사라져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영락대전은 영원히 사라진다
국가도서출판사의 영락대전은 방고본으로 원본이 아니다
書映國運
1860년 10월 북경에 영국 프랑스군대가 침입하여 원명원이 불타는데,1900년에도 8국연군이 북경성에 진공하여 내우외환으로 영락대전은 불타는데, 1982년말 산동성 액현문화국의 간부훈련시 손홍기가 영락대전을 설명하자 원본을 가진사람이 있어 놀라는데 책을 보여준다
1403년 주체는 영락대전을 편찬토록하여 11095권의 어람본을 만들어 1557년 궁전의 실화로 삼대전 오문등이 전부 분소되는데 가정제는 6년간 재초본하여 1567년 완성된다
명말혼란으로 영락대전은 사라지는데 황제묘에 순장을 추측하기도 하나 가정본도 사라지는데 청강희제시 궁중의 족보보관 금괘에서 발견된다
사고전서시 영락대전을 참고하는데 9881권으로 1215권이 유실되고 한림원에 보관하여 점차 절도로 사라지는데 함풍제이후의 일로 1860년 영불연군의 침입으로 모든책이 사라진다
이후 중국에서는 외국군인들이 팔기도 하고 외국의 도서관과 박물관에 나타나는데,1875년 광서원년 한림원아문의 중수시 5천책이 남아 보관중에 광서 18년 870여책만 남아 모두 사라진다
산동에서 발견된 영락대전은 어느 여인이 출가시 가져온 혼수로 밝혀지는데 책의 門자는 안진경등 서예가들의 19명의 자체가 들어있었는데,선진에서 원말의 각종문의 종류도 들어 있었다
국가도서관으로 보고하고 조사를 시작하는데 백면지의 책지를 보고 명말 가정시의 종이로 진품으로 밝혀지는데,유일하게 발견된 것이다
조사후 손씨가의 선조는 모두 농부출신인데 유일하게 10대조가 부공생출신으로 19세기말로 경성에서 근무하여 당시 취득한 것으로 보여진다
1894년 청일 갑오전쟁이후 열강들은 중국분할의 광조로 제국주의가 더욱 열광하여 부청멸양의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는데,군중성 봉기가 일어난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당황하여 5월 28일 미 영 독 불등 영사들이 회의를 열고 대사관보호를 빙자하여 연군이 진경한다
6월 10일 8국연군이 북경을 향해 진군하는데 6월 21일 황제와 서태후는 열강에 선전포고하고 각국공사관을 포위하고 동교민항의 영국공사관의 담장이 높아 청군은 한림원을 통해 들어가는데 6월 23일 한림원을 태우고 영국공사관을 위협한다
영국타임스 기자는 심프슨은 목격한 상황을 기록하여 경자사관피위기라는 책을 쓰는데,한림원의 수천만권의 도서를 태우자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움켜쥐고 달아났다고 한다
당시 한림원은 대부분 분소되고 남은 서적들은 영국의 공사관으로 옮기는데,모두 사라지고 영락대전은 소실된다
영국공사관은 무사하고 한림원만 사라지는데 사실상 청은 의견이 나뉘어 영국공사관에 겁만 주려던 것이엇다
8월 16일 밤 8국연합군은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와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주하고 연합군은 의화단을 도살한다
경사대사기에는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는데,목불인견으로 사체가 널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연군은 8일간 공개적으로 약탈하여 28일 천안문에서 열병의식을 하고 참관을 명의로 자금성을 약탈한다
1901년 청정부는 열강과 굴욕적인 신축조약을 체결하는데 중국인 일인당 한냥씩 4억5천만냥을 배상하고 경자배관이라 하고 세계최대의 도서관은 사라진다
1901년 광서 27년 6월 11일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영국은 영락대전 330권을 반환하고 전리품을 돌려보낸다
그러나 330권도 곧 사라지는데,한림들이 서로 나누어 갖는데,관리가 무방비로 한림원의 잔여도서는 또다시 사라진다
이후 조사와 추궁으로 64권이 회수되고 산동에서 나타난 책도 이시기에 사라진 책중하나로 보여진다
8국연군의 침입후 청조는 멸망이 가속화되어 1912년 중화민국 교육부는 64권의 영락대전을 도서관에 보존한다
이후 세계각국에 흩어진 영락대전을 회수하여 93권이 모여지는데 1936년으로, 일본은 갑오전쟁이래 지침까지 마련하고 약탈문물을 적극적으로 일본으로 운반하고 반환을 거부한다
이문물들은 제국도서관에 보관하고 1931년 9 18사변후 문화침략을 더욱 가속한다
1932년 일본은 상해의 상무인서관을 공습하여 중국최대의 문화거점을 철저히 파괴한다
상무인서관의 수많은 장서가 잿더미가 되어 45만권의 서적이 사라지자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으려 국민정부는 1933년 고궁박물원등 문물단위는 국보급 문물을 전부 남으로 옮긴다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문물 대이전이 시작되는데 북평도서관의 60권의 영락대전과 고선본 400여상자도 남으로 옮겨진다
우선 상해로 옮겨져 공공조계의 창고에 보존하고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일본의 전면침공으로 중앙도서관 중앙대학도서관이 참중한 파괴가 이루어져 12월 남경이 논함되자 남경대도살로 중국의 전적 80만권을 일본이 약탈후 사라진다
전쟁국면의 전화로 상해의 공공조계도 불안정하여 영락대전과 3천여종의 고적을 미국으로 멀리 보내는데,미국회도서관이 보관한다
1965년 이선본들이 대만으로 반환되어 대만의 중앙도서관은 이고적들을 전람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으로 1951년 소련정부는 64권의 영락대전을 중국정부에 반환하고 중국의 민중들은 고적과 문물을 국가에 헌납하는 열기가 일어나고 주은래총리는 홍콩의 영락대전등 문물을 구입하여 4권의 영락대전도 그중 하나이다
1965년부터 전국적인 헌납운동으로 중앙도서관의 영락대전은 220권에 달하여 그후 수십년간 영락대전은 산동액현의 발굴외에는 수확이 없었다
고본의 중현
1937년 일본과 전면전쟁으로 일본은 중국의 강역을 점령하고 문화소탕을 시작하여 무수한 문화전적이 사라지고 미국과 일본으로 약탈되어 진다
중국의 문화명인들은 국보의 수난으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문헌보존동지회로 정부에 보존대책을 촉구하고 정부의 지원으로 적이 점령한 지역에 중국고전서적을 수집한다
1909년 9월 4일 북경의 육국반점에서는 독일학자의 초대회에서 돈황등에서 가져온 벽화등을 전시하여 육조 수당 송본서등 진귀한 문물을 보고 중국학술계는 놀라고 감숙돈황의 장경동에서 가져온 것으로 청정부는 급히 돈황유서를 북경으로 옮기도록 한다
그러나 이미 가치있는 유물들이 사라져 다량의 문물이 외국으로 약탈되어 엽공작은 문화보호사업에 투신하여 신중국후 중앙문사관부관장으로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국가에 헌납한다
그가 1920년 영국고찰시 골동점에서 의외의 발견으로 영락대전중 한권을 발견하는데,20년전 1900년 8국연합군의 북경진격시의 약탈물로 구입해온다
그러나 전쟁중 사라지는데 평생을 찾던중 1968년 사망하고 2010년 광주의 중산대학 희곡교수 강보성이 대만에서 영인본을 구하여 대만 가의대학 중문계 교수 왕천성이 2009년 발견했다
저명학자 전남양은 전쟁전 북경대학도서관에서 초록본을 필사하여 희문삼종으로 27권의 희곡본이 영락대전에 삽입되어 있어 연구가치가 높다
그중 남송극인 손협장원은 애정극으로 다시 재편하는데 초기 희곡형태를 알수 있고 당시의 생활을 재생할수 있다
조기 남희로 연출특색을 알 수 있고 제13991권으로 대만도서관에서 찾았는데,명대기록자 여명서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현재 중국에는 영락대전 222권이 남았는데 60권은 미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대북고궁에 있고 나머지는 중앙도서관에 있다
1939년 1월 정진택교수등 문헌학자들은 상해에서 비밀조직을 세우고 정부의 자금 330만원을 받아 선본들을 수집한다
1908-1924년사이 미국은 두차례 경자배관을 반환하여 평화 우호의 방식으로 중국의 발전에 사용토록 하는데 문화 교육에 투자한다
청화대학도 이기간에 건립되는등 각종 교육기구와 문화사업을 위한 관리기구를 세우고 감시한다
영국의 배관으로 상해에서 선본을 대량구입후 중경으로 보내는데 홍콩 풍평산도서관의 장서도 포함된다
총 117상자로 홍콩과 중경이 막혀 미국으로 보내는데 일일이 중앙도서관과 배관기금동사회인장을 찍어 보내 장래 변별이 가능하게 하였다
1941년 11월말로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호로 미국으로 옮겨지고 머무는 두시간동안 실어야 하는데 이배가 필리핀 공해에서 일군에 격침된다
그래서 다시 풍평양도서관으로 옮기는데 다음날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다
12월 25일 홍콩은 일군이 점령하고 일본헌병이 도서관을 장악하는데 1945년 일본투항후 117상자가 사라졌다 일본은 전후 경제의 악화로 일공상성은 중국 조선등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담보로 서방에서 돈과 식량을 얻는데 국민정부는 문물손실위원회를 세우고 1946년 1월 일본과 교섭하는데 종적을 찾지 못한다
이때 일본의 중국판사처에서 우에노공원의 제국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북경대학의 장봉거교수가 일본에 가서 담판대표로 반환한다
장교수는 반환을 명령한다고 주장하여 증거를 제시하자 일본은 순순히 반환하는데 중국의 장개석은 일본에 대해 일체의 배상을 받지 않기로 하여 일본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1947년 2월 남경의 중앙도서관으로 돌아오고 1948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시 대만으로 옮긴다
정본지미
1972년 전중서교수는 제자 난귀명에게 영락대전의 연구를 맡기는데 정본은 한권도 없어 연구중 고민하고,영락대전의 비밀을 찾아 연구한다
1955년 10월 북경부시장 오함은 명 13릉중 장릉의 발굴을 사학자들의 연명으로 제출하고 장릉은 영락제의 능묘로 1398년 6월 주원장의 사망후 주체는 분상을 막는 조카 건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정난지역을 일으켜 황제가 된다
주체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로 하고 영락 7년 북경창평의 천수산일대에 능침인 장릉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명 13릉이 들어서는데,당시 주은래총리는 발굴계획서를 원칙상 승인하여 고고대가 성립하는데 감찰후 입구를 찾지 못하는데 정릉에서 입구를 우연히 발견후 먼저 정릉을 시굴하기로 하여 만력제 주익균의 묘를 발굴하는데 만력제는 48년간 통치한 황제이다
만력은 가정의 손자로서 영락대전의 실락의 열쇠를 찾고자 하나 정릉지궁에는 보물로 가득차고 책은 없었다
2년간의 발굴후 1959년 9월 정릉은 박물관이 되고 개방하는데,난귀명은 중국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영락대전을 연구하는데 전중서교수의 조수로 1972년 문화혁명의 여파로 연구는 중단되고 중서를 관통하는 대학자 전중서는 영락대전을 중시하고 연구를 계속하도록 한다
그는 10년간 영락대전의 색인을 25만장으로 완성하고 1982년 완성후 원본의 소재를 찾는데 명대사서를 찾아 연구후 가정제의 묘에 순장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명실록에서 실마리를 추측한다
영락대전이 최후로 언급된 명실록에는 4월 15일 가정의 아들 융경제는 장례후 영락대전 중록의 학자들을 표창하는데 영릉에 순장가능성을 추측한다
1959년 출판의 영인본 영락대전서문중 곽말약은 명말 전쟁중 사라졌다고 하여 1644년 농민기의군이 북경점령시 42일간 자금성에 이자성이 거주하는데 이때 사라진 것으로 본다
역사상 이자성군이 퇴각시 자금성을 방화한 것으로 보나 청대사료 일하구문기에는 청이 입관후 자금성을 수리만 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영락대전의 화재로 인한 소실은 설득력이 없고 1990년대 중국과학원에서 과학적으로 영릉을 탐색하기로 하여 미중력으로 지하를 조사하는데,명대황릉은 5전구조로 5실3수라 하는데 양변이 책으로 차있는 것으로 측정된다
정릉의 발굴로 사직품 종이등은 쉽게 부화된 것으로 밝혀져 발굴을 포기하는데 고대의 수거표로 중요한 가치는 사라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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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매일경제 MBN 중국 경제문화 연구소장
박기수
[출처] 영락대전 부침기 명대의 백과전서|작성자 박기수
첫댓글 더불어 이분 블러그에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네요^^
우리의 고서들이 왜 서양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이유가 여기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