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가 2001년 2월 1일자로 발족하여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나 목적 달성을 이루지 한 해를 넘기게 되었다. 전택부 선생을 위원장으로 모시고 20여분의 부회장단과 함께 활동을 해왔다. 이 일에는 강영훈 전총리, 김수환 추기경, 유창순 전 총리, 서영훈 한적 총재 등 200여분의 고문과 각계 몇 천명의 자문 위원, 지도 위원, 추진위원 그리고 수만명의 서명 참여자와 함께 추진해왔다. 이 일에는 신기남 의원 등이 원내에서 견인차 구실을 해 온 것이 큰 힘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일을 하는 동안에 가장 큰 걸림돌은 행정자치부 관계자들의 완고한 국경일 개념에 대한 아집이었다. 그리하여 장관, 차관 등이 국회의 행정자치 위원회의 법안 심사 소위원회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그 소위원회의 6명 소속 위원 중 행정 관료 출신 의원 3명(한나라당 소속)의 협조를 얻어 한글날 국경일 문제를 다루는 소위원회 때마다 제동을 걸게 했다. 마침내 지난 6월 23일 소위원회에서는 8월 중에 공청회를 열어 신중히 결정한다는 명목으로 법안 심의를 연기시키고 말았다.
그뒤 주5일 근무제 추진이 불거져 나오자 그것과 함께 다룬다는 명목으로 예정된 공청회도 미루어진 채 오늘에 이르렀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며, 이 나라 정치인들이 문화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너무도 소홀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의 간절한 호소와 열의는 대통령에게도 전달이 되어 비서실을 통하여 지원을 하도록 한 바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국회의원들의 무성의로 오늘날까지 이 문제가 미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뜻있는 우리 민족이라면 한글의 위대성을 모르는 이가 없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모든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가 없다. 또 한글은 국내외의 7천만 민족을 한데 이어주는 “고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없다. 그런데도 한글은 창제된 이후 한자에 억눌려 제대로 펴나지 못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말살의 위기까지 몰렸었다. 광복 이후에 한글은 되살아났으나 최근 경제 논리에 짓눌리어 한글날이 일반 국경일에서조차 빠지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현재 한글날이 국가적으로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공식적인 기념일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국경일, (2) 법적 공휴일, (3) 일반 기념일이 그것이다.
(1) 국경일은 법률 제 53호(1949,10.1)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 우리나라 기념일 중 으뜸가는 것이다. 이 법 제1조에는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경일을 정한다”라 했고, 제2조에는 “국경일은 좌와 같다. 31절 3월 1일/ 제헌절 7월 17일/ 광복절 8월 15일/ 개천절 10월 3일”라고 하였다.
(2) 법정 공휴일은 국경일 다음 서열의 기념일로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요일, 식목일. 음력 설 연휴(3일). 추석 연휴(3일) 등 최소한 68일이 들어 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는 한글날도 여기에 들어있었으나 노태우 정권 때(1991년) 빼버리고 말았다.
(3) 일반 법정 기념일은 대통령령에 따라 인정되는 것으로서 기념 행사만 하고 공휴일로는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공의 날, 보건의 날, 바다의 날, 저축의 날, 소비자보호의 날, 등 39일이다. 그 중 한글날의 서열은 25위이다. 세계적 자랑거리인 민족적 보배를 기리는 한글날을 이렇게 천대하는 정부 처사에 대하여 뜻있는 국민들은 분개를 하고 있다.
한글날이야말로 (1)의 서열에 드는 국경일로 승격시켜야 한다.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을 나날이 부리고 있는 우리 국민은 너나없이 이 일에 공감하고 참여하여 국회와 정부에 대고 외치고 있다. 그 이유야 자명한 것이지만 여기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첫째, 한글날은 우리 온 국민에게 가장 경사스런 날이므로 마땅히 국경일이 되어야 한다. 위에 말한 법률 제53호에는 국경일은 국민의 경사스러운 날이라 했는데, 한글날만큼 우리에게 경사스러운 날이 어디 또 있겠는가?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어려운 한자나 서양 로마자 또는 일본 가나 문자를 빌려 쓰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은 우리를 이런 문화적 질곡에서 해방시킨 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한글날을 국경일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둘째, 한글날은 우리 문화를 창조, 계승, 발전시키는 연모로서 우리 모든 문화 발전의 기본이 된다. 우리의 학문, 과학,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기반이 한글이다. 따라서 문화의 세기를 맞아 한글날을 문화의 국경일로 제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1948년에 “문화의 날”이라는 것을 정하여 국민의 축제날로 삼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로만 문화 민족이라 외치고 세계적인 보배인 한글마저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으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셋째, 한글날은 온 세계에서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특전이다. 창제자와 창제 날짜가 정확히 밝혀진 글자는 세계 문자 역사에서 한글밖에 없다. 이런 특전을 지닌 슬기로운 민족임을 자손만대가 깊이 아로새기고 세계에 과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글날이 온 국민의 축제날인 국경일이 되어야 한다.
넷째, 한글날은 세계 석학들이 찬탄하는 인류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세계적 대언어학자 막콜리 교수(시카고대학, 최근 작고)는 20여년 동안이나 한글날을 손수 기념하고 축하하였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한글날이야 말로 세계 언어학자나 세계 문화 애호가가 다 같이 공휴일이나 축제일로 기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20여년 동안 해마다 우리 모두의 한글날을 축하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명한 문자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영국의 G, Sampson 교수(Sussex 대학 인지 컴퓨터 학부)는 한글의 전무후무한 과학성에 대하여 증언한다. “한글이 과학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글은 일정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글은 발성 기관의 소리 내는 모습을 따라 체계적으로 창제된 과학적인 문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자 자체가 소리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의 T와 N이라는 글자는 소리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발성 기관의 모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글의 N에 해당하는 ‘ㄴ’은 혀가 잇몸에 닿는 모습을 본따 만들었고 또 T에 해당하는 ‘ㄷ’은 ‘ㄴ’에 한 획을 더하여 같은 자리에서 소리내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글의 각 글자는 이런 방식으로 발성 기관의 모양을 따서 만들게 된 것입니다. 세계의 다른 문자에서는 그런 과학적 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한글은 500여년 전에 그런 언어학적 원리에 따라 창조되어 실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아는 서구의 많은 학자나 지식인들은 이런 특이한 한글의 창조 원리를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미국의 J. Diamond 교수(UCLA 의과대학의 생리학자)는 영어의 불규칙한 철자 방식을 비판하고 한글이야 말로 그런 불규칙성이 없는 뛰어난 이상적인 글자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자로서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문자의 진화 과정을 살피다가 우연히 한글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문자적 우수성에 감탄한 나머지, 미국의 저명한 과학잡지 Discover(1994년 6월호)에 한글의 우수성을 찬탄하고 있다. (이 글은 <말글생활>(1994/6)에 이광호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국내 각 신문에 보도된 바가 있다.) 아울러, Diamond 교수는 한글 영화, <세계로 한글로>(국어정보학회 제작)에 출연하여 한글의 뛰어난 특성을 증언 바가 있다. Diamond 교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글은 한 글자가 한 음소를 표시하는 음소 문자라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로마 알파벳과 크게 다른 점이다. 가령, 모음 ㅏ, ㅣ, ㅗ 등은 어느 자리에서나 똑 같은 소리로 발음된다. 이는 영어의 모음 a가 나는 자리에 따라 7,8가지로 발음되는 것과 대조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곧 apple, father, about, chalk, able, fall, weak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a의 그 소리값이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자음의 경우에도 한글의 ㄱ, ㄴ, ㄷ 등은 거의 동일한 기본음가를 드러낸다. 이는 영어의 c가 s(cider), k(cocacola) 등으로 발음되고, g도 game, germ, change 등에서 보듯이 그 소리가 나는 자리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한글이 문자학적 기능 면에서 로마 알파벳에 비하여 월등히 우수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곧 한글은 그 음가를 알면 모르는 단어라도 발음만은 할 수가 있는 잇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로마 알파벳의 경우에는 단어를 모르면 정확한 발음을 할 수가 없는 큰 불편이 따른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한 눈에 구분되는 글자라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창성을 보인다. 자음과 모음은 생성 원리가 다를 뿐 아니라 그 형태 면에서 구분이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모음은 수직선이나 수평선 등의 긴선을 이용해 디자인되어 있어 한 눈에 구분이 된다. 이는 로마자 알파벳이나 일본 문자 등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자의 경우 모음 a/A, e/E 등은 자음 b/B, c/C 등과 형태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을 찾을 수가 없다. 이처럼 Diamond 교수는 한글이 로마자 등보다 훌륭한 문자적 특성을 가졌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섯째, 한글날은 한글의 놀라운 정보화 성능 면에서도 국경일로 받들어야 한다. 한글의 과학적 특성에 대하여는 오늘날의 컴퓨터 과학자들도 경탄해 마지 않는다. 변정용 교수(동국대학교 전산학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지금 만능의 기계로 생각하는 컴퓨터는 단 두개의 숫자 “0”과 “1”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되풀이하는 것인데 이 세상을 순식간에 정보화시대로 만들고 있습니다. 음악도 그래요. 서양 음악의 경우 도레미파솔라시도 일곱 개의 음만을 가지고 모짜르트의 고전 음악에서부터 우리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서태지의 랩음악까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 냅니다. 한글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28글자의 유한수의 기호와 몇 가지의 규칙만으로 무한수에 가까운 천지자연의 소리를 만들어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한글의 특성이지요. 그런 점에서 한글은 다른 어떤 글자보다 과학적이며 현대 첨단과학의 산물인 컴퓨터의 원리에 매우 잘 符合하는 문자입니다. 이런 놀라운 한글의 특성을 잘 살려 활용한다면 우리는 일본이나 미국의 정보화를 앞지를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정부 관료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일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국경일의 개념을 위 4가지에만 한정하려는 보수적 경향 때문이다. 국경일은 전통적으로 31절, 광복절 등 독립이나 국권 회복 등과 관련된 것만으로 한정하고 한글날은 그런 부류에 들기 어렵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위의 법에서 말하는 국경일 개념에는 독립 등 정치적인 기념일에만 한정한다는 내용이 없다. 다만, 50년 전의 실정에 따라 2조의 4개 국경일을 지정하였을 뿐이다. 설사 독립 관련 기능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한글은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한글의 수호와 수난사는 독립 운동 자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한글의 위대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어떻든 정부 관료들이 경직된 국경일 개념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나라 발전 특히 문화 발전을 위해서 큰 장애가 된다. 이제 50년 전 당시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문화를 가장 중시하는 것이 세계적 풍조가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낡은 허물을 벗어 버리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국경일 개념을 설정하는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온 세계가 문화의 경쟁력을 높여 문화적 우위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이 때 우리만이 옛날의 정치적 독립 환상만을 되뇌이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국경일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조정을 해야 한다. 그 첫 출발점으로서 한글날을 문화의 국경일을 추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과거 나라를 빼앗겼던 서러움과 국권 회복의 감격만에서 벗어나 이제는 세계 문화에 기여하는 문화 발전의 일대 계기를 마련해야만 한다.
이에 우리 민족은 한글날을 국경일로 드높이고자 다함께 일어서야 한다. 국내에 살든, 국외에 살든,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의 위대성을 바로 아는 우리 민족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우리 모든 민족과 자손 만대에 자랑스런 유산을 남기기 위한 거족적인 일에 참여하여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목적 달성이 실현될 그날까지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