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春堂(대전시 보물 제 209호)의 설명 중 誤謬가 있습니다.
同春堂은“同春 宋浚吉”선생이, 그의 부친“淸坐窩 宋爾昌(1561-1627)”선생이 지은 것을
建物이 頹落하자, 補修(重建)한 것입니다.[아래에 근거 文獻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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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正되어야 할 同春堂<說明>의 誤謬 [朱書<붉은 글씨>부분]
◈ 문화재청 자료 <우리 지역 문화재>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 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 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 없이 별당 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주택(住宅) 건물(建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樣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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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광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자료
<동춘당>
▶위치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
개요 : “이 건물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의 뒤쪽에는 동춘 선생이 거처하던 고택이 있고, 후손이 사는 송용억 가옥이 있다. [연락처 : 동춘당 관리사무소(042-673-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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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자료
동춘당
분류 : 보물 제209호
지정일 : 1963. 01. 21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 [위치보기]
수량 : 1동
구조 :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
재료 : 목조
연대 : 1643년 (인조21)
“이 건물은 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 <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주택<住宅> 건물<建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樣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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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문화원 홈페이지 자료
회덕 동춘당(懷德 同春堂)
* 분 류 : 보물 제209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
* 수 량 : 1동
* 구 조 :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
* 재 료 : 목조
* 연 대 : 1643년 (인조21)
* 개 요 : 동춘당은 계족산 등줄이 동남으로 흐르다가 또 하나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이 봉우리가 계족산 제2봉 해발 320m의 응봉산(鷹峰山)이다. 응봉산의 한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구릉을 만들어 송촌동의 배산을 형성하게 된다. 응봉산 계곡 뒤에서 발원한 샘은 윗 중리 뒤로 흘러 법동천을 만들고 응봉산 계곡 앞에서 발원한 개천은 중리동(백달촌)을 지나 오정동 양지말에서 버드내와 합수하여 금강으로 빠진다. 송촌 마을에서 보면 계족산은 조산(祖山)이고, 응봉산은 진산(鎭山)이다. 옛날 회덕현에서 보면 계족산이 진산이지만 백달촌에서는 계족산이 조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춘당은 응봉산 자락을 등지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인간이 사는 집은 무엇보다도 환경에 민감하다. 환경요인을 크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으로 나누어 볼 때 동춘당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환경요인이 극명하게 작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뜨겁고 습한 여름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바닥을 들어올려 마루로 만들고 추운 겨울에 대응하기 위해 한쪽은 온돌로 꾸몄다. 이 두 공간은 당시 쟁쟁한 인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 (1561~1627)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3년 (인조21)송준길선 생이 38세 때 중건한 별당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5량 집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주위는 간결하게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동춘당은 뒤쪽에 저만치 물러나 앉아 있다. 마치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위를 꾸미지 않았고 다만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다. 기호학풍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춘당은 평면으로 보아 전체 여섯 칸 집으로 우측 4칸은 대청이고 좌측 2칸은 온돌방인데 방 북측 상부에 반침을 내어 붙였다. 대청의 창호는 방 쪽을 제외하고 3면 모두 띠살문으로 하였으며 그중 앞쪽과 우측은 들어열개로 했다. 이 들어열개 창호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독특한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창호 형식이다. 고려 때 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들어 열개의 창호의 특징은 한국 건축 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강한 자연동화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들어 엶으로써 외부의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하나로 되어 내부 공간에 앉아 있지만 결코 내부공간이 아닌 자연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동춘당의 4분합 들어열개를 모두 접어 들 쇠에 걸면 인공공간은 곧 보다 큰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되어 외부의 자연공간과 일체가 되고 곧 자연인으로 동화가 되는 것이다.[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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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 필요한 부분]; 朱書 부분.
[오류]; 설명 중“송준길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云은 동춘 선생의 부친 淸坐窩 宋爾昌(1561-1627)이 1610년대 초 지은 것을 동춘 선생이 1639년에 보수한 것임.
[‘후손이 사는 송용억 가옥이 있다.’는 부분도 수정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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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同春年譜; 癸未(1643년/仁祖 21)
二月立祠堂正寢及同春堂 淸坐公舊居歲久頹圮至是改構于舊基之稍北 浦渚趙相公翼作堂記 <同春堂記 => 稍東>
[2월에 사당, 정침 및 동춘당을 건립하였다. 청좌공의 옛집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가므로 이에 이르러 옛터의 조금 북쪽에 다시 지었다. 조 상공 익이 당기를 지었다.[참고; 堂記에는“조금 동쪽”<稍東>으로 되어 있음.]
<2>. 上浦渚趙先生 翼(癸巳/1653년)
先人構一堂。堗其兩楹。豁其四楹。以宜冬夏之居。丙子以後。頹壞殆甚。至癸未春。小生移建於舊基稍東近溪之地。鷄龍山在西。鳳舞山在南。皆爲堂之面目。名其堂曰同春。蓋取與物同春之義。倘蒙構惠記文。以寓戒誨之意。則謹當揭諸楣間。出入觀省。以替提耳之敎。傳示子孫。永以爲寶。敢此忘猥奉請。
[선인께서 이곳에 당 한 채를 세웠는데 두 칸에는 구들을 놓고 네 칸은 터서 넓은 대청으로 만들어 겨울과 여름으로 거처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몄습니다. 그러나 병자년 이후로 매우 심하게 퇴락하였으므로 계미년 봄에 소생이 본래 있던 곳에서 조금 동쪽으로 떨어진 개울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우니 서쪽에 있는 계룡산과 남쪽에 있는 봉무산이 모두 이 당의 面目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을 同春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체로 만물과 더불어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만약 경계의 뜻을 담아 기문을 지어 주신다면 삼가 楣間에 걸어 두고서 드나들 때 살피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대신으로 삼고 또 자손에게 전하여 영원히 보배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외람됨을 잊고 청해 올립니다.]
[참고자료];
위 청색글씨의“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 (1561~1627)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3년 (인조21)송준길선생이 38세 때 중건한 별당 건물로서”가 (대체로) 바른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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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同春’과 同春堂’의 바른 定義
송준길선생의 호는‘同春’이고, 기거하던 사랑채 이름이‘同春堂’입니다. 대개의 학설이“宋浚吉의 字는 明甫이고, 본관은 恩津이다. 雅號는 同春이고, 堂號는 同春堂이며, 諡號는 文正이다.”라고 定義하고 있습니다.[여러 문헌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