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10강 -3(2010.02.01)
50 부처와 조사에게 다 예배하지 않는다 師到達磨塔頭(사도달마탑두)하니 塔主云(탑주운), 長老(장노)야 先禮佛(선예불)가 先禮祖(선예조)아 師云(사운), 佛祖倶不禮(불조구불예)니라 塔主云(탑주운), 佛祖與長老(불조여장노)로 是什麼寃家(시십마원가)오 師便拂袖而出(사변불수이출)하니라 50 번, 부처와 조사에게 다 예배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師到達磨塔頭(사도달마탑두)하니, 임제스님께서 달마스님 탑을 모셔놓은 곳에 이르니. 이게 하남성 우니산 정음사라고 하는 절에 있습니다. 塔主云(탑주운), 탑주가 말하기를, 長老(장노)야 先禮佛(선예불)가 先禮祖(선예조)아, 먼저 부처님께 예배를 하느냐 조사에게 예배를 하는가. 師云(사운), 佛祖倶不禮(불조구불예)니다, 부처고 조사고 함께 다 예배하지 않습니다. 塔主云(탑주운), 탑주가 말하기를, 佛祖與長老(불조여장노)로 是什麼寃家(시십마원가)오, 불조하고 장로하고 무슨 원수냐. 탑주가 그렇게 말하니까. 師便拂袖而出(사변불수이출)이라, 소매를 휘날리면서 나가버렸다. 51 오늘은 낭패를 보았다 師行脚時(사행각시)에 到龍光(도용광)하니 光上堂(광상당)이라 師出問(사출문), 不展鋒鋩(부전봉망)하고 如何得勝(여하득승)고 光據坐(광거좌)한대 師云(사운), 大善知識(대선지식)이 豈無方便(기무방편)고 光瞪目云(광징목운), 嗄(사)하니 師以手指云(사이수지운), 這老漢(자노한)이 今日敗闕也(금일패궐야)로다 오늘은 낭패를 보았다. 行脚時(행각시)에, 임제스님께서 행각시에, 到龍光(도용광), 용광스님이 계신데 이르렀어. 光上堂(광상당), 용광스님의 상당이라. 師出問(사출문), 임제스님이 떠억 나가서 묻기를, 不展鋒鋩(부전봉망)하고, 칼날을 펴지도 않고. 如何得勝(여하득승)고, 어떻게 해서 이기려고 하느냐. 光據坐(광거좌)한대, 용광스님이 자리에 이렇게 의거하고 앉으니까. 師云(사운), 大善知識(대선지식)이 豈無方便(기무방편)고, 어찌 방편이 없는가. 용광이 瞪目云(징목운), 눈을 아주 삭 째려보면서, 瞪目(징목)이란 그런 뜻이여. 嗄(사), 사, 이건 이제 칼을 뽑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사, 라고 칼 뽑을 때 나는 소리를 내니까, 師以手指云(사이수지운), 임제스님이 손으로서 가리키고 말하기를, 這老漢(자노한)이 今日敗闕也(금일패궐야)로다. 이 늙은이가 오늘 패궐이라, 오늘 그만 낭패를 보았다. 죽었다 이 말이지. 벌써 칼이 뽑아졌으니까. 처음에 이제 鋒鋩(봉망)이라고 하는 거, 칼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칼로 이야기가 연결이 되고 금일 패궐이라고 하는 것은 벌써 칼 맞고 졌다 이 말이요. 52-1 앉아서 차나 들게 到三峯(도상봉)하니 平和尚問(평화상문), 什麼處來(십마처래)오 師云(사운), 黄蘗來(황벽래)니라 平云(평운), 黄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오 師云(사운), 金牛昨夜(금우작야)에 遭塗炭(조도탄)하야 直至如今不見蹤(직지여금불견종)이로다 平云(평운), 金風吹玉管(금풍취옥관)하니 那箇是知音(나개지시음)고 師云(사운), 直透萬重關(직투만중관)하야 不住清霄内(부주청소내)로다 平云(평운), 子這一問(자자일문)이 太高生(태고생)이로다 師云(사운), 龍生金鳳子(용생금봉자)하야 衝破碧琉璃(충파벽유리)로다 平云(평운), 且坐喫茶(차좌긱다)하라 그 다음에 이제, 앉아서 차나 들게. 到三峯(도상봉), 상봉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니. 平和尚問(평화상문), 평화상이죠, 평화상이 묻기를, 什麼處來(삼마처래)오, 어디서 오느냐. 師云(사운), 黄蘗來(황벽래)니다. 平(평)이 말하기를, 黄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오 師云(사운), 金牛昨夜(금우작야)에 遭塗炭(조도탄)하야, 금으로 만든 소가 지난 밤에 도탄을 만났다, 용광로를 만났다. 그렇죠, 금으로 만들었든 쇠로 만들었든 여기 '금우' 하면 금이라는 뜻이 아니고 쇠라는 걸로 봅니다. 철이라는 말도 있지마는. 뭐 금이라고 봐도 상관없고 쇠라고 봐도 상관은 없습니다. 지난밤에 용광로에 들어갔다. 直至如今不見蹤(직지여금불견종)이라, 용광로에 들어갔으니 다 녹아버렸을 거 아녀 금이. 지금까지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도다. 황벽이 무슨 말을 하더냐 하고 물었는데 이렇게 표현했어요. 금으로 만든 소가 어젯밤 용광로에 들어가니까 금인지 뭔지 도대체 흔적을 볼 수가 없게 돼 버렸다. 어쩌면 알듯 말듯 하죠, 그 뜻이. 무엇이 있겠나. 또 어떤 스님 같으면 이게 다 空이다 無다, 이렇게 표현하겠지마는 그렇게 단순하게 공이다 무다, 이렇게 볼 일은 아닙니다. 언뜻 보기에 그렇게 보이죠. 平云(평운), 金風吹玉管(금풍취옥관)하니 那箇是知音(나개지시음)고, 金風(금풍), 가을바람입니다, 가을바람이 옥관에 불어오니 어느 것이, 누가, ‘나개’하면 누가 그 소리를 알겠는가? 아주 멋진 소리인데 그 멋진 소리를 누가 알겠는가? 전부 이제 법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師云(사운), 直透萬重關(직투만중관)하야, 바로 만겹의 관문을 뚫어서 不住清霄内(부주청소내)로다, 清霄(청소), 저 푸른 하늘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푸른 하늘 저 밖에까지 다 지나갔다. 平云(평운), 子這一問(자자일문)이 太高生(태고생)이로다, 자네의 이 한 질문이 아주 매우 뛰어났다. 태고생, 매우 뛰어났다, 그런 말입니다. 師云(사운), 龍生金鳳子(용생금봉자)하야 衝破碧琉璃(충파벽유리)로다, 용이 금봉자를 낳으니, 금으로 된 봉황새 새끼를 놓으니 그 봉황새 새끼가 저 푸른 유리를 뚫고 지나갔도다. 平云(평운), 평이 말하기를, 이제 우리 詩로서 법거량 하는 건 그쯤하고 且坐喫茶(차좌긱다)하라, 앉아서 우리 차나 마십시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표현이 처음부터 아주, 金牛昨夜(금우작야)에 遭塗炭(조도탄), 直至如今不見蹤(직지여금불견종), 여기서부터 아주 심상치 않은 어떤 싯구로, 의미심장한 그런 싯구로서 오고 갔습니다. 52-2 요즘 어떠하신가 又問(우문), 近離甚處(근리삼처)오 師云(사운), 龍光(용광)이니라 平云(평운), 龍光近日如何(용광근일여하)오 師便出去(사변출거)하니라 그 다음, 요즘 어떠하신가. 又問(우문), 近離甚處(근리삼처)오, 요즘 어디서 왔느냐. 師云(사운), 龍光(용광)이니라, 용광스님한테서 왔습니다. 平(평)이 云(운), 龍光近日如何(용광근일여하)오, 저 앞에도 바로 앞에 용광스님 만났다고 했죠. 용광스님 요즘 어떻던가? 師便出去(사변출거)하다, 어떻던가 하고 물었는데 곧 나가버렸다. 그렇습니다, 뭐 이런 스님들은 이런 나가버리는 그런 행동 하나도 전부 당신의 법을 보이는 그런 동작이죠. 53 三山(삼산)이 만 겹의 關門(관문)을 가두어 버렸다 到大慈(도대자)하니 慈在方丈内坐(자재방장내좌)어늘 師問(사문), 端居丈室時如何(단거장실시여하)오 慈云(자운), 寒松一色千年別(한송일색천년별)이요 野老拈花萬國春(야노염화만국춘)이로다 師云(사운), 今古永超圓智體(금고영초원지체)여 三山鎖斷萬重關(삼산쇄단만중관)이로다 慈便喝(자변할)한대 師亦喝(사역할)하니 慈云(자운), 作麼(자마)오 師拂袖便出(사불수변거)하니라 三山(삼산)이 만 겹의 關門(관문)을 가두어 버렸다. 到大慈(도대자)하니, 대자스님한테 이르니, 慈在方丈内坐(자재방장내좌), 대자스님이 방장실에 앉아있거늘, 師問(사문), 端居丈室時如何(단거장실시여하)오, 단정하게 방장실에 앉아있을 때 그 소식이 어떻습니까? 慈云(자운), 대자가 말하기를, 寒松一色千年別(한송일색천년별)이로다, 차가운 소나무 그 한결같은 색깔이 천 년을 푸르도다, 別, 특별하다, 이런 말은, 그렇죠 소나무는 천 년을 가도 푸르죠. 늘 다른 어떤 초목들하곤 특별하다 그말이죠, 천 년을 푸르더라. 푸름이요, 野老拈花萬國春(야노염화만국춘)이로다, 들, 시골 늙은이가 꽃을 잡으니, 꽃을 잡아드니 만국에 봄이더라. 이 염화한 사람이 누굽니까? 석가모니죠,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죠. 참 그 詩語들, 글자 하나하나가 아주 시로서 근사한 표현이면서 멋진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임제스님이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죠. 師云(사운), 今古永超圓智體(금고영초원지체)여 三山鎖斷萬重關(삼산쇄단만중관)이로다, 그랬어요. 고금에 영원히 뛰어난 圓智體(원지체)요, 대원경지요, 아주 크게 깨달은 그런 그 자체요, 지혜요. 삼산이 만중관을 막아버렸도다. 쇄단, 막아버렸도다. 이 삼산 하면 신선이 산다는 소위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초월의 경지를 뜻하는 거죠. 말하자면 그 삼산이 만중을 초월한 경지니까 다른 어떤 그 만중의 관문을 갖다가 봉쇄해 버렸다. 그러니까 대자스님이 있다가 慈便喝(자변할)한대 師亦喝(사역할)이라, 慈云(자운), 대자스님이 말하기를, 作麼(자마)오, 뭐냐? 師拂袖便出(사불수변거)라,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그저 옷깃을 휘날리면서 곧 가버렸다. 54 훌륭한 禪客(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到襄州華嚴(도양주화엄)하니 嚴倚拄杖(엄의주장)하야 作睡勢(작수세)어늘 師云(사운), 老和尚瞌睡作麼(노화상갑수자마)오 嚴云(엄운), 作家禪客(작가선객)이 宛爾不同(완이부동)이로다 師云(사운), 侍者(시자)야 點茶來(점다래)하야 與和尚喫(여화상긱)하라 嚴乃喚維那(엄내환유나)호되 第三位(제삼위)에 安排這上座(안배자상좌)하라 그 다음에, 훌륭한 禪客(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襄州華嚴(양주화엄)에 이르니 嚴倚拄杖(엄기주장)하야, 화엄스님이 주장자를 떠억 의지하고서, 作睡勢(작수세), 잠자는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거늘. 師云(사운),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老和尚瞌睡作麼(노화상갑수자마)오, 노화상께선 잠만 자면서 뭐하는 것이냐? 嚴云(엄운), 화엄스님이 말하기를, 作家禪客(작가선객)이 宛爾不同(완이부동)이로다, 아주 뛰어난 선객은 정말 완전히 같지 않구나, 특별하구나, 이렇게 칭찬을 해 줬어요. 그러니까 師云(사운), 侍者(시자)야 點茶來(점다래)하야 與和尚喫(여화상긱)하라, 차 한 잔 달여와서 화상에게 마시도록 하라. 화엄스님이 이에 喚維那(환유나)호되, 유나를 부르되, 第三位(제삼위)에 安排這上座(안배자상좌)하라, 이 사람을 저 세번째 자리에 가서 앉혀라. 그러니까 당신하고 유나 그 밑에다 임제스님을 앉혀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남의 선방에 가 가지고 세 번째 자리에 앉는 그런 대접을 받았네요. 55 화살이 西天(서천)을 지나갔다 到翠峯(도취봉)하니 峯問(봉문), 甚處來(심처래)오 師云(사운), 黄蘗來(황벽래)니라 峯云(봉운), 黄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하야 指示於人(지시어인)고 師云(사운), 黄蘗無言句(황벽무언구)니라 峯云(봉운), 爲什麼無(위십마무)오 師云(사운), 設有(설유)라도 亦無擧處(역무거처)니라 峯云(봉운), 但擧看(단거간)하라 師云(사운), 一箭過西天(일전과서천)이로다 화살이 西天(서천)을 지나갔다. 到翠峯(도취봉)하니, 취봉스님한테 이르니. 峯問(봉문), 취봉스님이 묻기를, 甚處來(삼처래)오, 어디서 왔느냐. 師云(사운), 黄蘗스님에게서 옵니다. 峯云(봉운), 취봉스님이 말하기를, 黄蘗有何言句(황벽유하언구), 황벽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指示於人(지시어인), 무슨 말씀을 해서 사람들을 지시하느냐? 師云(사운), 黄蘗無言句(황벽무언구)니라, 황벽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峯云(봉운), 취봉스님이 말하기를 爲什麼無(위십마무)오, 왜 언구가 없느냐? 왜 없느냐? 師云(사운), 設有(설유), 설사 있다 하더라도 亦無擧處(역무거처)니라, 설사 무슨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뭐 들어 보일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 버렸어요. 峯云(봉운), 취봉스님이 말하기를, 但擧看(단거간)하라, 한번 들어봐라 한번 이야기를 해봐라. 師云(사운), 一箭過西天(일전과서천)이로다, 그 화살이 이미 서천을, 인도를 지나가버렸습니다. 벌써 앞에서 황벽스님 아무 말이 없었다 하는 그게 말인데 꾸역꾸역 이제 무슨 말을 했느냐, 한 마디 해 봐라, 라고 하니까 임제스님이, 일전이 과서천이로다, 화살 하나가 이미 서천을 지나가 버렸다. 벌써 지나간지, 대답한지 오래입니다 하는 그런 표현이죠. 취봉스님이 조금 늦었네요. 56 여기서 무슨 밥그릇을 찾는가 到象田(도상전)하야 師問(사문)호되 不凡不聖(불범불성)하니 請師速道(청사속도)하라 田云(전운), 老僧秖與麼(노승지여마)니라 師便喝云(사변할운), 許多禿子(허다독자)야 在這裏覓什麼椀(재자리멱심마완)고 그 다음, 여기서 무슨 밥그릇을 찾는가. 到象田(도상전)하야 師問(사문)호되, 상전에 이르러서 스님이 묻기를, 不凡不聖(불범불성)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니, 請師速道(청사속도)하라, 스님께서는 속히 일러보시요. 田云(전운), 상전스님이 말하기를, 老僧秖與麼(노승지여마)니라, 노승은 다만 이러할 뿐이다, 秖與麼(지여마), 다만 이러할 뿐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師便喝云(사변할운), 許多禿子(허다독자)야, 이 허다한 머리깎은 중들이여, 在這裏覓什麼椀(재자리멱심마완)고, 여기에서 무슨 밥그릇을 찾고 있느냐. 밥이나 먹고 사느냐. 이렇게 이제 대중들을 꾸짖는 소리죠. 이 노장 밑에서 무슨 밥이나 먹고 그렇게 지내고 있느냐, 그런 의미로 표현했습니다. 57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到明化(도명화)하니 化問(화문), 來來去去作什麼(내래거거작십마)오 師云(사운), 秖徒 踏破草鞋(지도답파초혜)로다 化云(화운), 畢竟作麼生(필경자마생)고 師云(사운), 老漢話頭也不識(노한화두야불식)이로다 그 다음에,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到明化(도명화)하니, 명화스님한테 이르니, 化問(화문), 명화스님이 묻기를, 來來去去作什麼(내래거거작십마)오, 왔다갔다 하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師云(사운), 秖徒 踏破草鞋(지도답파초혜)로다, 다만 신발을 떨어뜨리려고 왔다갔다 하지요,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아주 근사한 대답이네요. 왔다갔다 하는 옛날 짚신인데 얼마나 잘 닳겠어요? 化云(화운), 명화스님이 말하기를, 畢竟作麼生(필경자마생)고, 그러면 짚신만 다 닳아지고 필경엔 어쩌자는 말이냐? 師云(사운), 老漢話頭也不識(노한화두야불식)이로다, 늙은이가 말귀도 못 알아 듣는군, 이 말입니다. 화두라는 게 말귀에요, 그냥. 여긴 그대로입니다. 딴 화두 아닙니다. 괜히 우리 선입견으로 알고 있는 그런 화두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귀도 못 알아 듣는군. 신 떨어뜨리면서 돌아다닌다 하는 그 말보다 더 근사한 법문이 어디있느냐 이거지. 58-1 老婆(노파)의 擧揚(거량) 往鳳林(왕봉림)타가 路逢一婆(노봉일파)하니 婆問(파문), 甚處去(삼처거)오 師云(사운), 鳳林去(봉림거)니라 婆云(파운), 恰値鳳林不在(흡치봉림부재)로다 師云(사운), 甚處去(삼처거)오 婆便行(파변행)이라 師乃喚婆(사내환파)하니 婆回頭(파회두)어늘 師便打(사변타)라 그 다음 老婆(노파)의 擧揚(거량)이라. 往鳳林(왕봉림)타가, 봉림스님한테 가다가, 路逢一婆(노봉일파)라, 한 노파를 만났다 길에서. 婆問(파문), 노파가 묻기를, 甚處去(삼처거)오, 어디로 가느냐? 師云(사운), 鳳林去(봉림거), 봉림스님한테로 갑니다. 婆云(파운), 노파가 말하기를, 恰値鳳林不在(흡치봉림부재)로다, 지금 마침 봉림스님이 없는데요, 이랬어요. 그러니까 師云(사운), 甚處去(삼처거)오, 어디 갔어요? 그러니까. 婆便行(파변행)이라, 노파가 곧 일어나서 가버렸어. 師乃喚婆(사내환파)하니, 임제스님이 노파를 부르니, 婆回頭(파회두)어늘, 머리를 이렇게 돌리거늘, 師便打(사변타)하다, 임제스님이 한번 후려쳐 버렸다. 옛날 노보살들도 이 정도 법이 있어요, 있는 사람들이 많았나봐요. 저기 덕산스님한테 떡 가지고 거량한 이라든지 또 여기 이 노파라든지, 대단하죠. 그러니까 그 당시 선문답이라고 하는 것은 뭐 보통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면 다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런 데 기록된 걸로 봐서는 뭐 아무나 물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마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문답이 이런 조사어록에 이렇게 등장해 있다고 해서 불교가 꼭 이래야 되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 뭐 얼른 눈치채고 또 이해를 하고 거기에 걸맞는 대답을 이렇게 주고 받을 수 있어야 되느냐? 절대 그건 아니에요. 이거는 한때의 선불교에서 오고 간 법거량일 뿐입니다. 그렇게 아셔야 돼요. 경전에는 결코 이렇지 않거든요. 또 많은 조사스님들도 꼭 이렇게만 표현한 게 아니거든요.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극히, 전체 양으로 봤을 때 아주 극히 적은 숫자입니다, 사실은. 아까도 우리가 이야기했지마는 위산스님의 그 경책, 얼마나 아주 간곡하고 참 절절합니까? 그런 아주 감동적으로 우리 상식에 맞는 그런 표현들, 그게 사실은 우리에게 더 이익이죠. 58-2 鳳林(봉림)과의 詩問答(시문답) 到鳳林(도봉림)하니 林問(임문), 有事相借問得麼(유사상차문득마)아 師云(사운), 何得剜肉作瘡(하득완육작창)고 林云(임운), 海月澄無影(해월징무영)이어늘 遊魚獨自迷(유어독자미)로다 師云(사운), 海月既無影(해월기무영)이어늘 遊魚何得迷(유어하득미)오 鳳林云(봉림운), 觀風知浪起(관풍지랑기)하고 翫水野帆飄(완수야범표)로다 師云(사운),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하니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이로다 林云(임운), 任將三寸輝天地(임장삼촌휘천지)나 一句臨機試道看(일구임기시도간)하라 師云(사운), 路逢劍客須呈劍(노봉검객수정검)이요 不是詩人莫獻詩(불시시인막헌시)로다 鳳林便休(봉림변휴)하니 師乃有頌(사내유송)호대 大道絶同(대도절동)하야 任向西東(임향서동)이라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망통)이로다 鳳林(봉림)과의 詩問答(시문답)이라. 到鳳林(도봉림), 봉림에 이르니 林問(임문), 봉림스님이 묻기를, 有事相借問得麼(유사상차문득마)아, 일이 있어서, 相借問得麼(상차문득마), 뭔가 일이 있는데 당신에게 뭘 물어도 되겠느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師云(사운), 何得剜肉作瘡(하득완육작창)고, 왜 멀쩡한 살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느냐? 임제스님이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林云(임운), 봉림이 그때서 이제 말하기를, 海月澄無影(해월징무영)이어늘 遊魚(유어)가 獨自迷(독자미)로다, 바다의 달이 밝고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 물 속에 노는 고기가 혼자 갈 길을 잃어버렸구나. 아주 참 표현이 좋습니다. 아주 선문학, 이런 표현을 해요, 선문학. 선시, 이런 말도 있고. 이런 게 아주 정말 뛰어난 선시죠. 師云(사운), 海月既無影(해월기무영)이어늘, 바다의 달이 이미 그림자가 없거늘, 遊魚何得迷(유어하득미)오, 아 그렇게 밝다면은 왜 고기가 길을 잃을 턱이 있느냐? 그런 말이요. 遊魚(유어)가 何得迷(하득미)오, 왜 갈 길을 잃어 버릴 수가 있느냐? 鳳林(봉림)이 말하기를, 觀風(관풍)에 知浪起(지랑기)하고, 바람을 이렇게 부는 것을 살펴보니 물결이 일어날 것을 알고, 翫水(완수)에 野帆飄(야범표)로다, 물을 또 가만히 살펴보니까 말하자면 돛대를 띄울 만한지 그것을 이제 알겠다 그런 말입니다. 師云(사운),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하니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이로다, 이건 다른 데도 나오는 글이죠. 계속 이제 달이 나오고 그렇습니다. 孤輪(고륜)이 獨照江山靜(독조강산정)하니, 고륜은 달을 말하는 거죠. 외로운 바퀴, 달이 홀로 조용한 강산을 비추고 있으니,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이로다, 거기에 스스로 한소리 크게 웃으니 천지가 놀라도다. 시로써 서로 주고 받습니다. 林云(임운), 봉림이 말하기를, 任將三寸輝天地(임장삼촌휘천지)나, 삼촌 혀를 가지고 천지에 빛내는 것을, 뭐 맡긴다, 마음대로 하라 이 말이여. 삼촌 혀를 갖고서 멋진 시를 읊어서 천지에 빛나도록 하는 것은 알아서 하나, 一句臨機試道看(일구임기시도간)하라, 한 구절을, 그 중에 한 구절을 근기에 임해서 시험삼아 한번 일러 보아라, 그랬습니다. 참 시는 잘 읊는데, 둘 다 시는 잘 읊으니까, 그 삼촌 혀를 가지고 정말 천지를 놀랄 정도로 또 여기 앞에다가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 이렇게 또 했고. 그러니까 그건 뭐 그렇다손치고 한 구절, 그야말로 근기에 맞는 소리 한번 해 보아라 그랬어요. 師云(사운), 路逢劍客須呈劍(노봉검객수정검)이요, 길에서 검객을 만날 것 같으면은 비로소 모름지기 검을 바칠 것이요, 不是詩人莫獻詩(불시시인막헌시)로다, 시인이 아니거든 시를 논하지 마라. 시를 바치지 마라 그랬어요. 참 훌륭한 검객을 만나면은 검을 바치고 시인을 만나면은 그렇게 해서 시를 바치라. 鳳林便休(봉림변휴)하다, 봉림스님이 곧 쉬어버렸다. 師乃有頌(사내유송)호대, 임제스님이 그 때 게송을 하나 두되, 大道絶同(대도절동)하야 任向西東(임향서동)이라, 크게, 큰 도가 끊어져서 모두 하나가 됐다, 同(동). 大道絶同(대도절동) 任向西東(임향서동), 전부 끊어져서 하나가 되서 같아졌으니까 그대들이 어디로 가든지, 서쪽으로 가든지 동쪽으로 가든지 가는데 맡겨두겠다. 石火(석화)가 莫及(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망통)이로다, 석화전광도 미칠 수 없고, 전광도 통할 수 없다. 석화전광이 통할 수가 없다.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망통)이로다, 이렇게 읊었습니다. 58-3 公的(공적)으로는 바늘도 容納(용납)하지 않는다 潙山問仰山(위산문앙산)호되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罔通(전광망통)이어늘 從上諸聖(종상제성)이 將什麼爲人(장십마위인)고 仰山云(앙산운), 和尚意作麼生(화상의자마생)고 潙山云(위산운), 但有言説(단유언설)이요 都無寔義(도무실의)니라 仰山云(앙산운), 不然(불연)이니다 潙山云(위산운), 子又作麼生(자우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니다 그 다음에 公的(공적)으로는 바늘도 容納(용납)하지 않는다,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니다, 란 말이 여기에 나옵니다. 潙山問仰山(위산문앙산), 위산이 앙산에게다 묻기를, 石火莫及(석화막급)이요 電光(전광)도 罔通(망통), 통하지 않는다고 하거늘, 從上諸聖(종상제성)이, 옛날 여러 성인들이, 將什麼爲人(장십마위인)고,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쳤느냐? 仰山(앙산)이 말하기를, 和尚意作麼生(화상의자마생)고,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潙山(위산)이 말하기를, 但有言説(단유언설)이요, 다만 언설이 있을 뿐이요, 都無寔義(도무실의)다, 도대체 실다운 뜻은 없다. 이렇게 이제 위산스님이 말하니까, 仰山(앙산)스님이 말하기를, 不然(불연),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潙山(위산)스님이 말하기를, 子又作麼生(자우자마생)고, 그럼 자네는 뭐라고 할래? 하니까 仰山(앙산)스님이 말하기를,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니다, 官(관), 공적으로는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지마는 사사로운 입장에서는 車馬(거마)도 통합니다. 참 아주 앙산스님 표현이 아주 그럴 듯 합니다. 저 위산스님, 스승은 都無寔義(도무실의)라, 말만 있지 실다운 뜻이 뭐 있습니까, 이렇게 했는데 참 위산스님의 그 경책을 보면은 이런 말 할 만도 해요. 뭐 선어라고 하는 것, 선문답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뭐 그 속에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 있고 활발발한 대기대용의 작용이 있습니다마는 그렇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입장으로서는 좀 그렇지 않는가 하는게 이제 위산스님 입장이에요. 그런데 앙산스님, 제자 앙산스님은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라 이렇게 해 가지고 공적으로는 정말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지마는 사사로이는 거마를 통한다, 거마가 통한다. 그러니까 그 경우 따라서 또는 사람들의 어떤 처지 따라가지고 그것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59-1 오늘은 운수가 나쁘다 到金牛(도금우)하니 牛見師來(우견사래)하고 横按拄杖(횡안주장)하야 當門踞坐(당문거좌)라 師以手(사이수)로 敲拄杖三下(고주장삼하)하고 却歸堂中第一位坐(각귀당중제일위좌)하니라 牛下來見(우하래견)하야 乃問(내문) 夫賓主相見(부빈주상견)은 各具威儀(각구위의)어늘 上座從何而來(상좌종하이래)관대 太無禮生(태무례생)고 師云(사운), 老和尚(노화상)은 道什麼(도십마)오 牛擬開口(우의개구)어늘 師便打(사변타)한대 牛作倒勢(우작도세)라 師又打(사우타)하니 牛云(우운), 今日不著便(금일불착편)이로다 그 다음에 이제 오늘은 운수가 나쁘구나. 到金牛(도금우), 금우스님한테 이르니까 금우스님이 牛見師來(우견사래), 임제스님이 오시는 걸 보고 横按拄杖(횡안주장)이라, 주장자를 옆으로 딱 이렇게 잡고, 當門踞坐(당문거좌)라, 문앞에 딱 이렇게 버티고 앉아 있어요. 마침 사람이 오면 후려칠 것 같이. 師以手(사이수)로 敲拄杖三下(고주장삼하)라, 손으로써 주장자를 옆에 가서 탁 탁 세 번 이렇게 때렸어요. 그리곤 却歸堂中第一位坐(각귀당중제일위좌)하니라, 도리어 선방에 들어가가지고 제일좌, 조실이 앉는 자리에 그만 떠억 앉았는거야. 牛下來見(우하래견), 그러니까 금우스님이 쫓아와서 보았어요 그 사실을. 乃問(내문), 그리고는 물어. 대저 夫賓主相見(부빈주상견)은, 손님과 주인이 서로 볼 때는, 만날 때는, 各具威儀(각구위의), 서로 위의를 갖추고 예의를 지켜야 하거늘, 上座從何而來(상좌종하이래)관대, 상좌는 도대체 어디서 왔기에, 太無禮生(태무례생)고, 그렇게도 예의가 없이 구느냐? 師云(사운), 老和尚(노화상)은 道什麼(도십마)오, 노화상께서는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牛擬開口(우의개구)어늘, 금우스님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하는데, 師便打(사변타), 막바로 그만 임제스님이 후려쳐 버렸어. 牛作倒勢(우작도세)라, 금우스님이 넘어지는 그 자세를 취해 보이니까, 師又打(사우타), 또 때렸다 말여. 牛云(우운), 금우는 말하기를, 今日不著便(금일불착편)이로다, 에이 오늘은 재수 없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죠, 말도 꺼내보지도 못하고 제일 높은 자리 빼앗겨 버렸고 또 그 다음 법거량 해도 도대체 맞기만 하고 또 두번째 맞고 그랬으니 뭐 입 뗄 그럴 겨를을 주지 않았죠. 도대체 틈을 주지 않은 거라. 그러니까 今日不著便(금일불착편)이로다, 아이 오늘은 편치가 못하다, 안좋다 이 말이여. 59-2 다 이기고 다 졌다 潙山問仰山(위산문앙산)호되 此二尊宿(차이존숙)이 還有勝負也無(황유승부야무)아 仰山云(앙산운), 勝即總勝(승즉총승)이요 負即總負(부즉총부)니라 그 다음에 이제 다 이기고 다 졌다 潙山問仰山(위산문앙산), 위산이 또한 앙산에게 묻습니다. 此二尊宿(차이존숙)이 還有勝負也無(황유승부야무)아 그랬어요. 금우스님하고 임제스님하고 둘이서 법거량을 했고 금우스님은, 에이 오늘 재수 없다, 이렇게 표현했는데 두 사람이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 仰山(앙산)스님 말하기를, 勝即總勝(승즉총승)이요 負即總負(부즉총부)니라, 이겼다면 둘 다 다 이겼고 졌다면 둘 다 다 진 것 같습니다. 허, 이봐요, 앙산스님 참, 구구절절이 아주 기가 막히죠. 그렇죠, 뭐 그 두 분의 법거량이 금일불착편, 오늘 재수 없다, 이 소리 했다고 금우스님이 진 것도 결코 아니고 꼬리 내린 것도 아니고, 아주 임제스님이 승승장구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그렇게 나갔지마는 그렇다고 그게 꼭 장한 것도 아니고. 아 그 앙산스님 참 대단한 안목이죠. 60 臨濟(임제)스님이 涅槃(열반)할 때 師臨遷化時(사임천화시)에 據坐云(거좌운), 吾滅後(오멸후)에 不得滅却吾正法眼藏(부득멸각오정법안장)이어다 三聖出云(삼성출운), 爭敢滅却和尚正法眼藏(쟁감멸각화상정법안장)이닛고 師云(사운), 已後有人問儞(이후유인문이)하면 向他道什麼(향타도십마)오 三聖便喝(삼성변할)한대 師云(사운), 誰知吾正法眼藏(수지오정법안장)이 向這瞎驢邊滅却(향자할려변멸각)고 言訖(언흘)에 端然示寂(단연시적)하니라 臨濟(임제)스님이 涅槃(열반)할 때. 드디어 열반이 이제 다가왔습니다. 師臨遷化時(사임천화시)에, 임제스님께서 천화에 다다렀을 때 據坐云(거좌운), 자리에 단정히 버티고 앉아서, 吾滅後(오멸후)에, 내가 열반한 뒤에, 不得滅却吾正法眼藏(부득멸각오정법안장)이어다, 나의 정법안장을 소멸하지 말라. 그렇죠, 뭐 세속에서도 가정을 조금 일으키거나 회사를 조금 일으키거나 해도 그 후손들에게 내 하던 일 잘 지키고 번창시켜라, 이게 모든 사람의 마음이죠. 공부한 사람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세상의 사업도 그렇고 공부한 사람은 정말 뒷사람이 공부를 잘해서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오직 그 마음 하나죠. 상좌를 둬도 마찬가지요 제자를 둬도 마찬가지요 자식을 둬도 마찬가지요, 그렇습니다. 여기도 이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정법안장을 없어지지 않도록 잘 지켜라. 三聖(삼성)이 出云(출운), 그랬어요. 이 임제록을 처음에 기록한, 임제스님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기록한 삼성사의 혜연스님이죠. 삼성스님이 나와서 말하기를, 爭敢滅却和尚正法眼藏(쟁감멸각화상정법안장)이닛고, 어찌해서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師云(사운), 已後(이후)에 有人問儞(유인문이)하면, 이 뒤에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물으면, 向他道什麼(향타도십마)오, 그럼 너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래? 三聖(삼성)이 便喝(변할)이라, 삼성스님이 곧 할을 했다. 그게 이제 임제 가풍이니까. 우리가 보기엔 아주 근사하잖아요. 그런데 師云(사운),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誰知吾正法眼藏(수지오정법안장)이 向這瞎驢邊滅却(향자할려변멸각)고, 누가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당나귀에게 가서 없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이제 말은 그렇게 했어요, 말은. 했지마는 이 삼성스님의 공로가 또 임제스님 법을 널리 천하에 알리는 데는 사실 제일 공로자여 또. 왜냐? 임제스님의 법문을 일일히 따라다니면서 다 기록해서 편찬을 했으니까. 저 앞에 주삼성사, 혜연스님이 기록했다 라고 돼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住三聖嗣法小師慧然集(주삼성사법소사혜연집). 그렇게 앞에 붙어 있어요. 言訖(언흘)에 端然示寂(단연시적)하니라, 그 말 한마디, 나의 정법안장을 너한테 가서 없어질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 해 놓고는 그 말 마치고 단정히 앉아서 示寂, 입적을 보였다. 참 아주 깔끔하죠. 정말 이런 선법이 다수 사람들에게는 큰 혜택을 입히거나 요익유정, 많은 유정들을 요익하게 하는 데는 아주 부족하죠. 하지마는 특수한 몇몇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는 데는 또 정말 우리 불법 문중에 또 이런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 이건 참 어느 종교에도 없는 정말 자랑스러운 그런 특별한 법의 내용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잘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음미해 보면은 우리의 어떤 정신 세계가 정말 높이 올라가고 높이 올라가고 끝 닿을 수 없는 곳에까지 올라갔을 때 드러나는 어떤 안목이라고 할까, 그런 입장으로, 그렇다보니까 소수죠. 사실은 여기에 준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극소수죠. 대중을 교화하는 데는 부족하지마는 극소수의 특별한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내는 데는 또 선법이 가장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가르침 내지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첫댓글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사바하 _()()()_
勝即總勝(승즉총승)이요 負即總負(부즉총부)니라. 고맙습니다._()()()_
官不容針 이나 私通車馬이니다.._()()()_
官不容針(관불용침)이나 私通車馬(사통거마)니라.공적으로는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지마는 사사로운 입장에서는 거마(車馬)도 통한다...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海月澄無影이어늘 遊魚何得迷오...바다에 달이 밝고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 물 속에 노는 고기가 혼자 갈 길을 잃어버렸구나...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
官不容針이나 私通車馬니다..._()()()_
감사합니다,
시간나면 언제든지 공부할 수 있는 곳 감사합니다..._()()()_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路逢劍客 須呈劍 不是詩人 莫獻詩
大道絶 同 任向西東 ... _()_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_()()()_
고맙습니다_()__()__()_
_()()()_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