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9)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2009년의 나머지 시기들 - 레드셔츠 유혈항쟁의 예비기간
[총리를 맡은]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와 엘리트 계층은 평범한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방콕(Bangkok)의 서민층과 북부지방 및 북동부지방(=이싼지방)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에 관해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레드셔츠 운동'(UDD)을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가 두는 정치적 게임의 장기판에서 '졸'(卒) 정도로 치부했다.
그렇지만 엘리트 계층의 관점은 약간의 사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 대사관'이 2009년 4월 16일 본국에 보고한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974호)은 탁신의 가장 주요한 대리인 중 한명인 마니다 '미키' 짐머만(Manida “Micky” Zimmerman) 변호사와의 대화내용을 인용하면서, 4월 11~14일 사이의 레드셔츠 시위 기간 중 탁신이 배후 채널을 통해 왕당파 엘리트들과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레드셔츠 운동(UDD)은 <1997년 제정 헌법>으로 복귀를 주창하면서 현 정부를 비민주적 정부로 비난하고 있지만, 본 대사관은 탁신이 자신의 목표를 얻기 위해 레드셔츠들을 이용하려 한다고 보고 있음. 레드셔츠들 중 많은 이들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협소하고도 사적인 관점을 갖고 있음.
탁신의 변호사 중 한명인 마니다 '미키' 짐머만은 4월13일 본 대사관과의 대화에서, 탁신이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실패했다고 밝혔음. 그녀는 탁신의 제안이 20억 달러에 달하는 탁신 가족들의 동결된 자산의 처분 문제도 포함한다고 말함. 마니다는 탁신의 제안이 퇴짜를 맡았음을 시사하면서, [이번에 발생한 레드셔츠 시위 관련] 폭력사태는 "(왕당파 및 정부 진영이 탁신의) 제안을 검토조차 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준 셈이라고 말했음.
이와는 별개로, [아피싯 총리의] 총리실 사무 부총장 이사라 순톤왓(Isra Sunthornvut, อิสรา สุนทรวัฒน: 1970년생)은 4월12일 본 대사관에 말하기를, 레드셔츠 시위 종식을 위해 정부가 협상에 나설 이유가 별로 없다고 밝힘. 그는 그 이유로 탁신의 주요한 요구사항이 자신의 가족 재산의 동결 해제인 만큼, 그러한 일은 법률적으로 난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함.
만일 4월 중순의 폭력사태가 탁신의 협상 지위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면, 본 대사관으로서는 그러한 목적이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본 대사관은 또한 탁신이 최근 사적인 견해를 시사한 바 있다는 것도 지적하고자 함. 즉, 그는 레드셔츠 시위대가 역사적 전환점을 증명해줄 것이며, 자신의 귀국을 앞당겨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음. 탁신은 작년(2008) 8월부터 해외에 체류 중인데, 본 대사관은 탁신이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음. 그가 입수하는 정보 중 많은 부분은 그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제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임.
최근의 시위 정국에서, 군사 쿠데타 가능성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음. 총리실 사무부총장인 이사라 순톤왓도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아피싯 총리가 군부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다는 점은 인정했음. 하지만 그는 군인들([역주] 장교을 말함) 중 90%는 아피싯 총리를 지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나머지 10%만이 탁신이나 판롭 삔마니(Panlop Pinmanee 혹은 Pallop Pinmanee: 1936년생) 예비역 대장의 동맹세력일 것으로 보았음. 군대가 레드셔츠 시위대를 강제진압한 것을 보면, 아피싯 정권에 대한 군부의 전적인 지원이 약화됐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음. |
태국의 기득권 진영이 2008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2009년의 탁신도 아수라장을 만들면서 일부 시위대가 사망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전체 이야기 중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옐로셔츠 운동'(PAD)이든 '레드셔츠 운동'(UDD)이든 그 안의 일반 대중들은 지도부의 말을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장기판의 말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거버넌스(통치행정) 및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요 현안들에 열성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고, 가두시위에 참여할만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피싯과 기득권층은 '레드셔츠 운동' 및 그에 동조하는 엄청난 수의 보통사람들이 지닌 전반적으로 적법한 불만을 무시함으로써, 군주제 및 엘리트 계층이 직면한 당연한 위기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그들 스스로가 만든 위기이기도 했다.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927년생) 국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미폰 국왕은 항시 혼돈이나 무질서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탁신도 미워하고 있었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든 그것이 탁신의 중요성만 부각시켜줄 것이란 점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아픈 척하기 시작했다. 앞서의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미 대사관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최근의 대격동 속에서 푸미폰 국왕의 입장은 곤란한 상태였음. 2008년 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수라끼얏 사티얀타이(Surakiart Sathirathai: 1958년생) 전 외무부장관은 한 영자지 사설란의 기고문을 통해, [옐로셔츠 운동 시위대가] 방콕의 공항들을 점거한 상황 속에서도 국왕이 정치적 대치상황을 끝내기 위한 개입에 나서지 않은 일을 변론했음. 수라끼얏은 그 글에서, 태국 정치에서 국왕의 개입은 인명 손실이 확산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 경우에만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함. 그의 이러한 주장은 공항 점거사태를 가능한 한 길게 끌고가도록 하기 위해, [국왕의 개입을 촉구하고 있던] 국왕에 대한 은연 중의 비판들을 상쇄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음.
가장 최근의 폭력사태(=2009년 4월의 레드셔츠 송끄란 시위)는 수라끼얏이 말했던 국왕의 개입 전제조건에 가장 근접한 표준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어서, 분명히 왕실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들었을 것임. (실제로 4월의 정치위기는 확산됐고, 전직 상원의장인 수촌 찰리끄르어[Suchon Chaleekure, สุชน ชาลีเครือ: 1952년생]는 국왕의 개입을 호소하는 청원운동을 한 적도 있음.)
태국에서 푸미폰 국왕은 대단히 높은 위상을 갖고 있지만, 본 대사관은 최근의 정치적 상황에서 그가 성공적인 개입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고 있음. 1992년, 싸움에서 벗어나 있던 푸미폰 국왕은 대립하는 양 정파를 자신의 어전으로 호출하여 대치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었음. 하지만 많은 이들은 현재 푸미폰 국왕 역시 탁신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권력 및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게임의 참가자에 포함되기 때문에, 국왕이 심판 역할을 맡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음.
2008년, 왕실 측근들과 여타 인사들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푸미폰 국왕이 평정 회복을 위한 시도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급격한 위신 실추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들을 표명했음. 따라서 며칠 전부터 추밀원 위원인 팔라꼰 수완랏(Palakorn Suwanrath)을 진원지로 하는 국왕의 와병설에 관해, 본 대사관은 놀라운 일로 보고 있지 않음. 본 대사관은 그러한 소문들이 국왕이 태국의 안녕을 위한 책임을 방기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회피하면서, 왕실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음. (아피싯 총리가 본 대사에게 국왕이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말한 것 말고도, 호주 외교관 한명 역시 본 대사관에 푸미폰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했음. 해당 호주 외교관은 4월13일에 국왕을 알현했던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전함.) |
미 대사관의 이러한 분석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1992년 및 여타 시기에 푸미폰 국왕이 "싸움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과 "심판" 역할을 했었다는 것은 꾸며낸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푸미폰 국왕은 항상 정치적 모사가였고, 그와 동시에 엘리트 계층의 볼모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외교전문은 2008년 10월에 푸미폰 국왕의 위신이 크게 추락해 실제로도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빼놓고 있다. 당시 ['옐로셔츠 운동'(PAD) 반정부 시위 지도자였던]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은 국왕이 간접적인 개입을 통해 '옐로셔츠 운동' 시위대를 자제시키려 하자, 그것을 조롱하고 저주했었다. 그러나 미 대사관의 핵심적인 가정, 즉 푸미폰 국왕이 심지어는 혼돈이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서조차도 개입하진 않을 것이라 본 것은 개연성이 높은 판단이었다.
한편, 손티 림텅꾼은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손티는 2006년 9월 19일의 군사 쿠테타 이후,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과 [추밀원 위원이자 과도총리를 맡았던]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1943년생) 장군이 탁신 정권을 쓰러뜨리는 데 기여한 자신의 공적을 인정하거나 보상을 주지 않는 데 격분했었다. 그는 2007년 4월에 숀 크리스핀(Shawn W Crispin)과 대단히 조심성 없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봉건 엘리트들"에게 이용당했다고 불평했다.
이제 그들에게 나는 하나의 위협이다. 그들은 지금 나를 매우 무서워하고 있다.
탁신을 축출한 후, 그들이 나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 국가 전체의 개혁 필요성이 있다는 --- 나의 의견에 동의하기는 커녕, 나를 위협으로 보는 최대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잘라낸 것이다.
나는 나인 것이지, 다른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년 내내 때로는 거의 폭력적일 정도로까지 투쟁했지만,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태국이란 나라를 믿고 싸웠다. 그런데 거의 갑작스럽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사람들이 오더니, 다시금 모든 것을 빨아먹으면서 나를 방출해버린 것이다. |
2007년 8월, 손티는 미국에서 행한 연설을 자신이 소유한 위성채널 ASTV로 방송한 일을 비롯하여 추가적인 폭로들을 해댔다. 이러한 일은 엘리트 계층을 대단히 짜증나게 만들었고, 그의 귀국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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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손티 림텅꾼이 2007년 8월 미국에서 교포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모습. |
2008년,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다시 한번 손티 림텅꾼을 필요로 했고, 이번에는 손티가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의 최측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손티는 아피싯이 총리가 되고 나자 다시 한번 자신이 이용만 당한 후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는 또 다시 부주의한 발언들을 시작했다. 특히 자신과 시리낏 왕후의 관계에 관해 더욱 그러했다. 미국 대사관의 2009년 4월 17일자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000982호)은 다음과 같이 관찰해 보고했다.
본 대사관과 접촉한 이들은 손티가 사적인 대화들에서 시리낏 왕후가 직접 자신의 노력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말했음을 전했음. 또한 손티는 최근 미국방문 비자 신청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신변안전을 우려하면서 본 대사관이 비자발급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음. |
2008년 10월, 시리낏 왕후가 옐로셔츠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 사망한 여성 넝 보우(Nong Bow)의 장례식을 직접 주재한 일 때문에, 태국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왕후의 지지를 받았다고 떠들고 다니는 손티의 입에 총탄을 꽂아두는 일은 이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마지막 일이기도 했다. 언론재벌 손티의 입을 영원히 닫게 만드는 임무는 [국방부장관이었던] 쁘라윗 웡수완(Prawit Wongsuwan: 1945년생)에게 맡겨졌다.
2009년 4월 17일 여명이 밝아올 무렵, 손티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도요타'(Toyota) 승합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주유소에 들렀다. 이때 매복해있던 암살자들이 그의 차량을 공격했다. 2대의 픽업 트럭들에 분승한 총잡이들은 차량의 타이어에 총격을 가해 펑크를 낸 후, 최소 100발 이상의 실탄을 쏟아부었다. 게다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M-79 유탄발사기를 이용해 수류탄 1발도 발사했다. 손티는 이 공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유탄에 이마를 다쳤다. 그의 운전수는 더욱 중상을 입었다. 유탄발사기에서 발사된 수류탄은 목표를 빗나가 근처에 주차된 버스를 타격했다. 암살자들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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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STV) 암살조의 공격을 받은 후 촬영된 손티 림텅꾼과 그의 차량. 이후 손티의 정치적 역할은 매우 제한적으로 변했다. |
예상했던대로, 수사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용의자로 4명의 이름이 거론됐는데, 군인 3명과 경찰 1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방은 발견되지 않았다. 닉 노스티츠(Nick Nostitz)는 자신의 책 <레드 대 옐로>(Red vs. Yellow) 제2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 진실을 은폐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고위 경찰관들이 내게 사적으로 말해준 바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대단한 고위층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공격사건의 배후 인물들을 자신들이 찾아낼 수 있을지에 관해 회의적인 상태였다. |
5월11일, 미국 대사 에릭 존(Eric G. John)은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 및 쁘렘의 최측근인 수라윳 쭐라논 전 과도총리를 오찬에 초대했다. 에릭 존 대사가 진지한 느낌의 감탄사를 사용해 본국에 보고한 내용(제09BANGKOK1166호)을 보면, 쁘렘은 이날 아피싯을 평가하면서 자기 중심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보이고 있다.
쁘렘은 "태국을 위해 적기에 나타난 적임자"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아피싯 현 총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한번 표명했음. 쁘렘은 아피싯 총리가 전임자들에 비해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인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면서도,(참조: 쁘렘은 1980~1988년 사이에 총리를 역임한 바 있고, 수라윳은 2006~2008년 사이에 과도총리를 지냈음. 주석 끝.) 국가통합과 전향적 움직임을 개시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보았음. 게다가 아피싯이 현재 정치적 화해를 위한 노력도 한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있다고 보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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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ornprom Satrabhaya / The Bangkok Post) 2014년 4월 초 '육군회관'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1920년생: 사진 중앙) 장군이 추밀원 위원인 수라윳 쭐라논(1943년생: 사진 좌측) 장군, 쁘라윳 짠오차(1954년생: 사진 우측) 현 육군사령관 등과 함께 앉아 있다. 쁘렘과 수라윳은 아직도 여전히 태국 정치에서 보수 왕당파 진영의 원로 실세들로 군림하고 있다. [크세] |
에릭 존 대사는 며칠 후 반대 진영의 주요 인사 2명과도 만났다. 한사람은 탁신의 자문위원 중 외향적 발언을 잘하는 판삭 윈냐랏(Pansak Vinyaratn, พันศักดิ์ วิญญรัตน์: 1943년생)이었고, 다른 한명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수라퐁 습웡(Surapong Suebwonglee, สุรพงษ์ สืบวงศ์ลี: 1957년생)이었다. 두 사람은 왕실이 형식적 역할에 만족하길 거부하고 정치에 휘말려들어 위신이 실추됐다고 논평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1200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수라퐁은 태국에서 반-군주제 정서는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함. 부분적으로 그러한 이유에는 불특정 소문들들과 더불어, 특히 왕후가 2008년에 옐로셔츠 운동(PAD) 시위를 지지했던 일과 같이 일부 왕족들의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고 보았음. 결과적으로 푸미폰 국왕의 위신은 실추됐음. 수라퐁은 왕족들이 정치적 갈등의 양 진영 중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보았음.
판삭은 군주제의 실패에 관해 상당한 수준에서 보다 직접적인 말을 했음. 그는 "우리(탁신 및 탁신 세력)는 21세기에 왕실이 존속할 수 있도록 대단히 많은 지원을 했다"고 예상치 못한 발언을 함. 그는 이웃국가인 캄보디아에서 1970년대 크메르루즈 (Khmer Rouge) 정권 하에서 발생했던 사회적 격동을 지칭하면서, "우리는 포스트 모던 민주주의에 관해 폴 포트(Pol Pot: 1928~1998)가 가지고 있던 목표 같은 데는 관심이 없다"고 말함.
판삭은 자신이 보기엔,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의 보좌진이 태국 왕실을 북유럽이나 스페인 왕실처럼 간소화시킨다는 핵심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폄하하면서, 그러한 국가들이 태국의 미래에 모델로 차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함. 판삭은 또한 '왕실재산 관리국'(Crown Property Bureau: CPB)의 경영 역량에 관해서도 의문을 표시했음. |
태국 기득권 세력의 일각에서 탁신의 영향력을 상쇄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가운데, 네윈 칫촙(Newin Chidchob: 1958년생)의 부패한 '품짜이 타이 당'(Bhumjai Thai Party: BJT, 태국의 자랑 당)은 자신들의 관할 하에 있는 3개 부처(=교통통신부, 상무부, 내무부)의 자금을 이용해, 북부지방 및 북동부지방에서 홍보활동을 하고 유권자 매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피싯의 연립정권은 탁신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진짜 이유는 극도로 묵살하면서, 탁신이 시골지역의 못배운 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권자 매수를 효과적으로 자행했던 것 뿐이라고 가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네윈으로 하여금 탁신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부르도록 하고, 네윈이 자신의 더러운 전술을 자유롭게 구사하도록 놔두면 문제가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태국 엘리트 계층이 얼마나 보통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보통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하는지에 관한 증거들은 많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유권자들은 기득권층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2009년 6월 21일에 실시된 사콘나콘(Sakon Nakhon) 도의 보궐선거에서, 네윈이 유권자들에게 뇌물수수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친탁신계 정당인]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 소속 후보가 인상적인 승리를 거뒀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1491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상(上)-북동부지방(이싼지방)의 사콘나콘 도에서 6월21일 실시된 국회의원(=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친-탁신계 후보가 연립정권 구성 정당인 '품짜이 타이 당' 소속 후보에게 완승을 거뒀음. 이번 선거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부리람(Buri Ram) 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 네윈 칫촙 사이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선거였다는 것이 중론임. 이번 선거는 최소한 상-북동부지방의 심장부에서만이라도, 탁신이 아직도 태국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재확인시켜준 것으로 보임.
이번 선거에 나섰던 두 후보 및 양 정당은 선거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음. 보도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탁신 전 총리가 선거운동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함. 솜퐁 아몬위왓(Somphong Amornwiwat, สมพงษ์ อมรวิวัฒน์: 1941년생)은 '프어타이 당' 내에서 비공식적이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베테랑 정치인임. 솜퐁은 6월18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부리람 출신 정치인 네윈 칫촙(비공식적이지만 '품짜이 타이 당'의 최고 배후 인물임)이 자당 후보인 피딱(Pitak)을 풀뿌리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해, 하(下)-이싼지방인 부리람에 있던 조직을 상-이싼지방인 사콘나콘으로 옮겨왔고, 사콘나콘 도지사도 하급 공무원들에게 자금을 나눠졌다고 밝혔음. (도지사는 '품짜이 타이 당' 소속인 내무부장관의 관할 하에 있음.) 솜퐁은 사콘나콘 도민들이 '품짜이 타이 당'이 살포한 돈은 받았지만 투표는 '프어타이 당' 후보에게 하기로 막음먹었었다면서, 그 이유가 탁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말함. |
미국 외교관 3명은 나중에 부리람 도를 방문했다. 부리람 도는 네윈의 고향이며 정치적 근거지였다. 미국 외교관들의 부리람 방문은 네윈이 현지에서 얼마나 지지를 받고 있는지, 그리고 '품짜이 타이 당'의 정치적 미래는 어떠할 것인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현지 실사에서, 네윈이 여러 해 동안 뇌물과 협박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지역적 기반을 지배해왔지만, 심지어 이곳에서조차 해외에 망명중인 탁신에게 인기도 면에서 뒤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1729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네윈 칫촙의 권력 기반인 하-이싼지방의 부리람에서, 본 대사관이 접촉한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은, 네윈의 정당인 '품짜이 타이 당'이 일부 정부 부처들에 대한 관할권을 획득하고 이 지역 권력 브로커들의 협조에 힘입어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말했음. 이러한 이점은 '품짜이 타이 당'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주민들의 탁신 전 총리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해서 어려움을 겪는 중이라고 함.
네윈은 2008년 말에 친탁신계 정당을 떠나 [보수정당] '민주당'(Democrat Party)과의 연합세력으로 전향하면서 갑작스레 핵심적인 권력 브로커로 부상했음. 하지만 최소한 현 시점에서 볼 때, 네윈의 향후 권력 확장 전망은 정체를 보일 것으로 보임. 네윈의 고향 지역에 있는 다양한 범위의 활동자들은, '품짜이 타이 당'이 여전히 탁신에 이끌리고 있는 이 지역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점을 확고하게 인정하고 있었음. 네윈이 이싼지방(=북동부지방)에서 탁신 및 '프어타이 당'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임.
'품짜이 타이 당'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연정의 생존 지속에 결정적인 세력인데, 이 연립정권의 지속이 의미하는 바는 칫촙 가문이 핵심 부처들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계속해서 제공받는 것이란 의미임. |
한편, '레드셔츠 운동'(UDD)이 국왕에게 탁신의 사면을 요청하는 청원서 서명운동을 조직하면서,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더욱 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아피싯과 그의 동료들은 이 청원운동이 비정치적인 국왕을 정치로 끌고들어가려는 시도라면서 맹비난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그들을 더욱 터무니 없는 자들로 보이게 만들었다. 2009년 무렵의 태국인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헛소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레드셔츠들의 청원서는 2009년 8월 17일 제출됐고, 약 500만명이 서명한 청원서 38상자 규모였다. 청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희들과 일반 국민들은 국민들 중 특히 두 집단에 대한 사법처리에서 이중기준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야만적이며 수용 불가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저희들은 사법 정의와 적법성을 요구하는 집회들을 가졌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토록 많은 부당함을 우리에게 적용하지 않았었다면, 우리도 그런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국왕 폐하 밖에는 없다는 점을 아뢰고자 합니다. 폐하께선 언제나 백성들의 안녕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오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바람직한 통치행정) 원칙을 확고히 고수하고 계십니다. 또한 저희들은 폐하께서 우리의 고생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해주실 것이란 믿음도 갖고 있습니다. |
청원서가 제출된지 불과 며칠 후 다시 한번 왕위계승 갈등이 공개적으로 분출되면서, 국왕의 이미지는 퇴색되고 아피싯 연립정권의 안정성도 위험에 빠졌다. 아피싯 총리는 빠팁 딴쁘라섯(Prateep Tunprasert, ปทีป ตันประเสริฐ: 1949년생) 경찰 대장을 새로운 경찰청장에 임명하길 바랬다.
하지만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가 자신의 왕위계승 전망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배후에서 조용하게 핵심 기관들의 장악력을 높이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왕세자는 또 다른 후보인 춤폰 만마이(Chumpol Manmai, จุมพล มั่นหมาย: 1950년생) 경찰 대장을 선호했고, 아누틴 찬위라꾼(Anuthin Charnvirakul: 1966년생)과의 연줄을 통해 '품짜이 타이 당'이 자신의 선택을 뒷받침해주도록 설득했다. 또한 니폰 프롬판(Niphon Promphan)과의 친분을 이용해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을 비롯한 일부 '민주당' 의원들까지 설득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시리낏 왕후에게 왕세자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는 시도를 했다. 왕후와 왕세자 사이의 모자간 권력투쟁은 이제 주요한 정치적 스캔들로 발전했다. 미 대사관은 이 반목에 관해서만 여러 건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125호 등)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경찰청장 자리를 놓고 발생한 금방이라도 끓어오를듯한 반목은 '민주당'과 '품짜이 타이 당' 사이의 증오감을 악화시키고, 아피싯과 수텝 사이의 간극도 노출시켰음. 아피싯 총리는 빠팁 딴쁘라섯 경찰 대장을 경찰 총수로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지만, '품짜이 타이 당'이 그의 노선에 쉽사리 따르지 않을 것이란 징후들이 존재함.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면, 그들 모두는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춤폰 만마이 경찰 대장을 경찰청장에 임명하고자 하는 명백한 바램을 감춰두려 하고 있음. (각주: 탁신 전 총리가 재임 당시 국가 복권운영 수입 중 일부를 왕세자의 사생활 유지를 위한 자금으로 '왕세자 비서실'에 전달했는데, 이때 춤폰을 가방 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믿어지는 내용임. 각주 끝.)
'품짜이 타이 당'의 수파차이 짜이사뭇(Supachai Jaisamut: 1958년생) 의원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내숭을 떨며 말하기를, '품짜이 타이 당'은 "수텝과 니폰이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음. 왕세자는 현재 독일에 체류 중인데, 광범위한 접촉자들 및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왕세자가 춤폰의 경찰청장 임명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정을 관리하는 인물인 동시에 [일종의 반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 의원 겸 아피싯 총리실의 사무총장도 맡고 있는 니폰 프롬판을 최근에 독일로 호출했다고 함. (각주: '품짜이 타이 당'의 [명목상] 의장인 차와랏 찬위라꾼[Chavavat Charnvirakul: 1936년생]의 아들이며, 토건 재벌기업 '시노-타이 건설'(Sino-Thai Engineering & Construction) 대표이기도 한 아누틴 찬위라꾼 역시 왕세자의 "친구"이자 재정관리자로 여겨지고 있음. 각주 끝.)
흥미로운 점은 경찰청장 임명 과정에 관심을 가진 왕실 가족이 왕세자 한명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임. '민주당' 부총재 끄라이삭 춘하완(Kraisak Choonhavan: 1947년생)은 9월5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자신이 왕실 주변의 몇몇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시리낏 왕후가 왕세자의 춤폰 지지를 저지해주도록 부탁했다고 밝혔음. 끄라이삭은 시리낏 왕후가 빠팁을 밀고 있는 아피싯 총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였다고 주장했음. 수파짜이 짜이사뭇은 9월4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시리낏 왕후가 빠팁을 실제로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품짜이 타이 당'도 들었다고 밝힘. 끄라이삭에 따르면, 아피싯 총리는 시리낏 왕후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경찰 위원회'의 다음 번 회의 때 빠팁을 경찰청장으로 밀어부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함. 끄라이삭은 씩씩거리며 말하기를, 니폰이 공공연하게 왕세자의 희망사항을 로비하고 다니는 것은 니폰 자신 및 당(=민주당)에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함. |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에이즈(AIDS) 치료를 위한] 정기적인 수혈 요법을 받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서 보냈다. 미국 대사관이 2009년 11월 23일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제08BANGKOK002967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의 주요 배우자 및 애완견 푸들인 푸푸(Fufu 혹은 Foo Foo)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최대 75% 정도)을 유럽에서 보냈음(주로 독일 뮌헨에서 20km 쯤 떨어진 의료용 스파에 위치한 빌라에서 지냄). 왕세자는 혈액과 관련된 의학적 조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음(다양한 소식통들은 그가 HIV[후천성면역결핍증, 에이즈 보균자]에 감염됐다거나 C형 간염에 걸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휘귀한 '혈액암'과 동반된 것이라고 보고 있고, 일부 치료법은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는 상태로 이끌었다고 보고 있음). 그의 현재 부인(3번째 부인)인 시랏(Srirasmi) 왕자비와 '옹띠'(Ong Ti)란 애칭으로 불리는 그의 4세 아들 티빵꼰 라서미촛(Dipangkorn Rasmijoti, 여기서는 Adityadornkitigun으로 기록)은 방콕에 위치한 왕세자의 '수코타이 궁'(Sukhothai Palace)에서 지내고 있음. 하지만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방콕에 오면, '던므앙 공항'(Don Muang Airport)에 위치한 '제6 전투비행단'의 새롭게 단장한 VIP 라운지에서 2번째 애첩과 함께 지냄. (각주: 2명의 애첩들 모두 '타이 항공'[Thai Airways] 스튜어디스들이었음. 왕세자는 공군의 F5 전투기를 몰다 '타이 항공'의 보잉 기존 및 에어버스 기종 운행으로 활동을 바꾼 바 있음. 각주 끝.) 왕세자는 폭력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기질을 가진 것으로 오랜 기간 유명하여, 그의 측근 인맥집단에 오랜 기간 속해 있는 인물은 거의 없는 상태임.
그 중 예외적인 인물 한사람은 왕세자의 보딩스쿨 동창생인 니폰 프롬판임. 니폰은 왕궁에서 오랜 기간 왕세자의 재정과 회계 부분에 간여했고, 왕세자와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가 경찰청장 인선 문제를 두고 마찰을 빚으면서, 니폰은 아피싯 총리 비서실장 직을 사임한 상태임. 왕세자가 만일 차기 왕위를 계승하고 왕실을 장악할 경우, 니폰이 추밀원 의장을 맡게 될 것이라는 것이 중론임. 상대적으로 최근에 왕세자의 측근이 되면서 재정을 돌보는 사람은 이전 '타이락타이 당'(TRT: 해산당한 탁신의 여당) 출신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당한 아누틴 찬위라꾼임. 아누틴은 내무부장관이자 '품짜이타이 당' 의장인 차와릿 찬위라꾼의 아들이며, 토건 재벌기업인 '시노-타이 건설' 대표이기도 함. 춤폰 만마이 경찰 부청장(위에서 언급)은 여러 해 동안 탁신 총리의 상납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복권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을 왕세자 및 왕세자의 부하들에게 전달했음. 보다 최근에는 탁신의 "선물"인 푸켓(Phuket)에 위치한 900만 달러 상당의 빌라를 왕세자에게 전달한 창구도 춤폰이라는 주장이 나옴. [페르시아계 혈통으로서 태국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분낙 집안의 저명 예술품 수집가] 팟시 분낙(Patsri Bunnag) 및 그녀의 프랑스인 남편 장 미쉘(Jean-Michel Beurdeley)은 종종 왕세자와 동반하여 유럽으로 쇼핑 여행을 떠나기도 함. |
왕세자는 대규모 수행원들을 태운 '보잉 737' 전용기를 타고 유럽의 이 도시 저 도시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시랏 왕자비가 아닌 다른 애첩들과 함께 했다. 그가 호텔에 투숙할 때 한층 전체를 예약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중 방 하나는 왕세자의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른 투숙객들과 부딫히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전용 엘리베이터를 요구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그는 화제가 집중됐던 쇼핑에 나서 막대한 양의 조악한 장신구들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의 애완견 푸들 '푸푸'도 언제나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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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쳐: Andrew MacGregor Marshall) 2009년 9월,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뮌헨 인근의 한 축제 행사장을 방문한 것을 독일의 <보첸블라트>(Wochenblatt) 지가 보도했다. 이 사진에 동행한 여성은 시랏 왕자비가 아닌 왕세자의 애첩들 중 한명이었다. |
아내와 아들이 반목하자, 푸미폰 국왕은 국가의 단결을 회복시키는 일은 커녕 가족 내부의 싸움조차 말릴 수가 없었다. 이에 관해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167호)은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태국 전체에서 푸미폰 국왕이 가장 광범위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하지만 국왕의 지지자든 비판자든, 최근 들어 국왕이 실제의 정치적 사건들이나 행위자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음. 한 통계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은 본인 스스로든 아니면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서든, 2001년 이후 최소 7차례는 정치적 연관성을 지닌 공개적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음. (2001, 2003, 2005, 2007년의 생일 기념연설 및 2006년 4월, 2008년 11월, 그리고 금년[2009] 4월의 발언이 그것임.) 그 중 2006년 4월의 연설만이 사법부 판사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미쳤을 뿐임.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실질적 힘이 헌법적으로 제한받는다는 점을 미묘하게 공감하고 있는 점 외에도, 자신의 수사학적 표현 방식이 지닌 제한적 기능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본 대사관도 지난 수십년간 태국주재 미국 대사들이 사적으로 전해들었던 말들을 통해 이 점을 알고 있음. 본 대사관은 푸미폰 국왕의 영향력으로 알려진 것이, 실은 그가 실제 행사할 수 있는 사태 장악력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음.
이제 그의 오랜 재위기간의 땅거미가 깊게 드리워지는 가운데, 그의 백성들 중 압도적 다수는 아직도 국왕을 깊이 숭배하고 있고, 그는 여전히 태국의 정체성에서 중심적인 기둥 역할을 상징적으로 맡고 있음.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상징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각종 증거들은 푸미폰 국왕이 --- 드물게 시도하곤 하던 방식으로 --- 태국의 현 사태에 가진 영향력이 감퇴되는 중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음. |
푸미폰 국왕의 무반응은 이전에 그를 존경했던 수백만명의 태국인들에게 심각한 실망감을 안겨줬다. 태국인들은 군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일부는 왕실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도 표출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180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레드셔츠 운동(UDD)이 다음 번 대규모 시위를 예정하고 있는 모습과 달리, 본 대사관은 레드셔츠 진영 내에 분파주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들을 듣고 있음. [레드셔츠 지도자 중 한명인] 위라 무시까퐁(Vira Musikapong 혹은 Veera Musikapong, วีระกานต์ มุสิกพงศ์: 1948년생)은 8월21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레드셔츠 운동 내의 소위 "6월24일"(June 24: 1932년 입헌혁명 쿠테타를 기념하는 이름임)이라 불리는 분파가 점점 더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음. 그는 이 분파를 "기꺼이 폭력을 사용할 의지를 가진 소규모 다이하드(die hard: 완강한) 공화파"로 묘사했음. 그는 레드셔츠 지도부가 진영 내의 질서 유지 및 표준적 규범 마련을 위해 조만간 회의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힘. 그리하여 레드셔츠 운동이 정한 정책들을 견지하지 않는 이들을 조직에서 방출할 예정이라고 함.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컨설턴트인 수나이 파숙(Sunai Phasuk)도 레드셔츠 진영 내에 분파주의가 증가하고 있다는 위라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었음. 수나이는 8월25일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레드셔츠 진영 내에서 운동의 느린 진척에 인내심을 잃거나 환멸을 느낀다는 목소리가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고 말함. 그는 레드셔츠 진영 내에서 대략 10% 정도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군주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급진파"일 것으로 추정했음. 그는 온건한 지도부가 이러한 레드셔츠 내의 급진파를 통제하는 데 점점 더 애를 먹고 있다고 경고했음. |
2009년 9월 15일, 푸미폰 국왕은 일상적인 건강검진을 위해 '시리랏 병원'(Siriraj Hospital)을 방문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는 추가적인 치료를 위해 이 병원에 입원했다. 흥미로운 점은 국왕의 질환이 심각하지 않다며 의미를 평가절하한 이들이 바로 시리낏 왕후와 가까운 군 수뇌부들이었다는 점이다. '궁내청'(Royal Household Bureau, RHB: 왕실청) 역시 국왕의 입원 날짜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488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공공부문 및 민간부문 어느 구누의 말을 들어봐도, 올해 81세인 푸미폰 국왕을 9월16일 입원하도록 만든 지병이 특별히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함. 내부 인사들 중에 푸미폰 국왕의 상태가 2008년 12월과 비교해서 걱정할만큼 정말로 위험한 상태로 보는 이들은 없는 상태임.
'궁내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은 토요일인 9월19일에 입원했음. '궁내청'은 일요일인 9월20일부터 매일 속보를 발표하고 있음. 이날부터 문병객 방명록이 설치됐고, 아피싯 총리와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1949년생) 육군사령관이 가장 먼저 방명록에 서명했음. 9월21일에 방문했던 본 대사는 가장 먼저 방명록에 서명한 외교사절이었음.
병원에 대기하는 궁정 관리들은 완전히 릴렉스된 상태여서, 국왕의 건강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음.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 및 육군본부 참모장인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은 9월22일 소수의 외교사절들과 만남을 갖는 가운데, 관련된 증거는 전혀 내놓지 않았지만 유사한 상황설명을 했음. 국왕의 상태는 양호하며 입원 이유도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음. |
하지만 며칠이 지나 푸미폰 국왕의 육체적 건강이 호전된 것처럼 보이자, 계속 입원해 있는 것이 국왕의 자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푸미폰 국왕은 이후 거의 4년간 '시리랏 병원'에 머물게 된다.
푸미폰 국왕이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하지만 기존의 정보를 토대로 몇 가지 추정은 해볼 수 있다. 첫째, 푸미폰 국왕이 생애 전체에 걸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1946년 자신의 형인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국왕을 우발적 사고로 살해하고 난 후부터의 일이다. 미국 대사관이 접촉한 몇몇 인사들은 푸미폰 국왕의 우울증 증세가 다시금 깊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606호)은 다음과 같이 관찰해 보고했다.
푸미폰 국왕의 정신 상태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분명함. 또한 정치적 전개과정이 국왕의 정신적 스트레스나 육체적 질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임. 하지만 1955년부터 태국에 발을 딛고 오랜 기간 이 나라를 관찰해온 한 외국인은 작년(2008)에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여러 차례 확언하기를, 푸미폰 국왕이 우울증의 전통적 증상들을 보이고 있다고 말함. 그리고 "자신의 생애가 끝날 무렵, 재위 62년이 지나 자신의 왕국이 종말에 이른 것을 보면, 국왕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음. 그리고 이 외국인은 그러한 정신적 괴로움이 국왕의 육체적 상태에 영향을 미쳐 건강을 해쳤다고 주장했음. |
이 외교전문을 보면, 안보담당 부총리였던 수텝 트억수반도 같은 점을 말하고 있다.
수텝 트억수반은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국왕의 육체적 건강 상태는 괜찮지만, 말년에 자신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기소침하고 있어서. 국왕의 정신적 상태에 관해서는 [참으로] 걱정된다고 주장했음. |
둘째, 푸미폰 국왕의 입원에는 태국인들끼리는 누가 봐도 명백하지만 결코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국왕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극도로 불길한 징조라는 것이다. 태국인들은 군주가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왕의 입원은 국가가 혼란하고 병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미폰 국왕 역시 이러한 상징주의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푸미폰 국왕은 2006년 6월에 맞이한 성대한 즉위 60주년 기념행사 이후, 줄곧 굴욕감을 맛보고 주변화되면서 무시당했다. 그의 아내 시리낏 왕후는 기존에 정해진 왕위계승 절차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적극적으로 꾸몄고, 남편이 사망하면 자신이 섭정이 되려는 계획도 세웠다. 푸미폰 국왕은 병원에서 퇴원하길 거부함으로써, 틀림없이 태국의 엘리트들, 그리고 실로 자신의 모든 백성들(=국민)에게 메세지를 보내려 했을 것이다. 그는 21세기 태국에서 발생한 일들을 극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셋째, 푸미폰 국왕의 판단이 옳든 그르든 자신이 살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의 재위기간에는 언제나 어떤 피해망상의 감각이 존재했다. 그리고 2009년 무렵엔 심지어 그의 아내를 포함하여 태국의 엘리트 계층 중 일부가 실제로 국왕의 사망을 바랬을만한 그럴법한 이유들도 존재했다. 다음 총선은 2011년에 반드시 치뤄져야만 했고, 그럴 경우 다시 한번 탁신이 의회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를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만일 엘리트 계층이 왕위계승 과정을 최대한 관리하면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즉위를 막고자 한다면, 푸미폰 국왕이 차기 총선 이전에 사망해준다면 매우 편리할 것이었다.
한편, 탁신은 계속해서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표면 상 그의 주된 요구사항은 동결된 자산의 반환 및 자유인으로서 태국에 귀국할 수 있도록 국왕의 사면을 받는 것이었다. 탁신은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조용히 정계은퇴를 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만일 탁신이 귀국해 막대한 자산을 회복할 경우, 그러한 약속을 파기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탁신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라마 10세로 즉위하는 일을 완벽하게 보장할 것이고, 그럴 경우 탁신과 라마 10세 두 사람이 이후 수십년간 태국을 지배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기득권층은 탁신과의 거래를 거부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260호)은 태국 기득권층이 가진 요지부동의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수배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거나 그와 "거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과 관련하여, 추밀원 위원들과 궁정 관리 한명은 9월 2~3일 사이에 공개적 및 사적으로 진화에 나섰음. 태국 언론들은 9월2일, 추밀원 위원인 암폰 세나롱(Ampol Senanarong: 1931년생)이 '공무원 위원회'에서 발언한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음. 암폰은 이 자리에서, 탁신이 덕망있는 지도자의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서, 사법부로부터 수배당한 인물이 국왕 사면령을 추구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함.
'국왕 개인비서실'(PPS 혹은 OHMPPS) 부실장인 끌릿 깐짜나꾼촌(Krit Garnjana-Goonchorn)과 추밀원 위원인 피찟 꾼와라닛(Pichit Kullavanijaya 혹은 Pichitr Kullavanijaya: 1932년생)은 9월3일 본 대사의 관저에서 가진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의 생일축하 오찬에 참석했음. 그들은 이 행사에서 나눈 사적 대화를 통해, 탁신이 계속해서 궁정 근무자들에게 촉수를 뻗고 있긴 하지만, 그가 거래를 성사시키거나 자유인으로 귀국할 기회를 포착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음.
부총리를 지낸 바 있고 탁신의 밀접한 동지이기도 한 솜퐁 아몬위왓(Somphong Amornwiwat: 1941년생)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탁신이 "임박한 귀국"에 관해 계속해서 낙관적 전망을 밝히고는 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엔 그런 일을 성사시킬만한 성공적 채널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음.
탁신 자신은 작년(2008) 7월 본 대사와의 [전화통화] 대화에서, 자신이 타협을 성사시켜 국왕의 사면을 받고 거국 내각을 출범시킬 경우, 자신의 바램들과 구상들을 약화시키는 데 소요됐던 시간들의 교량 아래로 많은 것들이 흘러가버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함. 가장 주목할 점은 2008년 10월에 탁신에게 내려진 유죄판결 및 금년(2009) 4월의 레드셔츠 운동 시위 기간 중 탁신이 "혁명"을 촉구했던 것임. 금년 4월 시위 때는 파타야(Pattaya) 및 방콕에서 시위가 폭동으로 비화된 바 있음.
최근 탁신 사면 협상의 타결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소문들이 나도는 것은, 레드셔츠 진영이나 탁신의 동맹세력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 '민주당'과 '프어타이 당' 사이의 연정에 관한 소문은 '품짜이 타이 당'을 순응시키기 위한 목적 말고는 그다지 신뢰성을 부여하기 어려움. 탁신이 국왕사면령에 관한 협상을 타결시키길 바라는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탁신이 공개적으로 혁명을 촉구한지 불과 몇달 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실 주변 인사 중 누군가가 그런 제안을 지지할 이유가 있을지는 불분명함. 추밀원 위원들 및 푸미폰 국왕을 직접 보좌하는 여타 관리들은 탁신을 군주제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임. 군주제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봉사하고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던 제도임. [본 대사가] 탁신이 언젠가는 귀국할 수 있지 않은가 물어보자, [추밀원 위원인] 피찟 꾼와라닛 장군은 빈정거리듯 다음과 같이 말함. --- "결국에는 그렇게 되겠지만, 아마도 관 속에 든 상태일 가능성이 높겠지."
최근 몇년 간, 추밀원 위원 중 3인은 [왕실 주변 인사들이] 정치적 현안에 관해 공개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비교적] 가벼운 금기사항을 깨면서, 탁신 전 총리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음. 추밀원 의장인 쁘렘 장군이 가장 두드러져서, 레드셔츠 운동 시위대를 격분시켰음. 레드셔츠 시위대는 2007년 5월에 쁘렘 장군 자택 앞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금년(2009) 4월에도 다시금 그곳에서 시위를 벌인 바 있음. 피찟 장군은 원래 '미국 육군사관학교'(West Point) 졸업생인데, 탁신이 영국령 케이만 군도(Cayman Islands)에서 대규모 돈세탁을 했다고, 작년에 여러 차례 비난했음.
암폰 세나롱은 추밀원 위원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인물이지만, 오랜 기간 농업부에서 관개시설 전문가로 근무했음. 민주당-프어타이당의 "대연정" 및 탁신 사면설이 부상하자, 암폰은 9월2일 반-탁신 싸움에 가세했음. 암폰은 '공무원 위원회'(Civil Servant Commission)에서 있었던 세미나에 참석하여 도덕성, 윤리, 투명성에 관해 연설하는 가운데, 탁신이 사면을 받을만한 가치나 자격이 있는지에 관해 직설적으로 발언했음. 그는 덕스러운 통치자가 갖춰야 할 10가지 덕목, 즉 '다사위다-라자담마'(dasavidha- rajadhaama)를 거론하면서, 국왕의 덕스러운 행위와 총리로서 탁신이 잘못 통치했던 모습을 대비시켰음. 그는 탁신이 덕스러운 통치자가 갖춰야 할 10가지 덕목 중 어느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주장함. 암폰은 푸미폰 국왕이 가장 최근에 가진 접견행사 2차례에 참석한 바 있음. 그 중 한 행사는 8월21일에 있었는데, 푸미폰 국왕은 이 자리에서 나라가 파멸하지 않도록 단결하라고 촉구한 바 있음. 암폰은 연설에서 탁신은 사면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음. 암폰은 연루된 개인들의 명단이 등재되지 않은 경우, 징역형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자, 국왕이 사면을 거부한 자 등 3가지 사례를 인용했음.
본 대사는 9월3일 대사 공관에서 쁘렘 장군의 생일 축하 오찬을 가졌음. 쁘렘은 8월26일 89세가 되었음. 이 자리에는 추밀원 위원 6인이 참석했음.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 수라윳 쭐라논 장군, 싯티 사웻실라(Siddhi Savetsila: 1919년생) 공군 대장, 피찟 꾼와라닛 장군, 사왓 와타나야꼰(Sawad Wattanayagorn 혹은 Sawat Wathanayakorn: 1934~2012), 아타니띠 디사타암낫(Atthaniti Disatha-amnaj 혹은 Atthaniti Disatha-Amnarj: 1944년생)이 그들임. 여기에 '국왕개인비서실'(PPS) 실장인 아사 사라신 (Arsa Sarasin: 1936년생)과 부실장인 끌릿 깐짜나꾼촌 전 대사가 추가로 참석했음.
끌릿 전 대사는 쁘렘 장군이 1980~1988년 사이에 총리를 지낼 때 국제 연락책임자로 근무했던 인물인데, 미국주재 대사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음. 그는 2008년부터 PPS 부실장을 맡고 있음. 그는 암폰이 9월2일 공개적인 발언을 한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음. 끌릿은 추밀원 의장인 쁘렘 장군이 그런 일을 허용하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미리 알았더라면] 공개적인 논란이 가중되지 않도록 하는 쪽을 선호했을 것이라고 말함. 끌릿은 암폰이 국왕의 가장 최근 접견행사 2차례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암폰의 말을 국왕의 의지로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함. 하지만 끌릿 역시 탁신의 사면 가능성이나 협상 타결 가능성에 관해서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일축했음.
끌릿은 탁신이 작년에 궁정 주변의 다양한 인사들에게 "계속해서 촉수를" 뻗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아사 실장이 알려진 모든 채널들을 닫도록 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함. 끌릿은 탁신이 2009년 4월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나 여타 언론들에 도발적이고 불경한 것으로 여겨질만한 언사를 했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탁신과의 거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란 의견을 밝힘.
피찟 장군 역시 본 대사관에 솔직한 입장을 보였음. 그는 탁신이 군주제를 약화시키려 시도하고 있으며 귀국한 루 "대통령"이 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본 대사가] 탁신이 언젠가는 귀국할 수 있지 않을까를 물어보자, 피찟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결국에는 그렇게 되겠지만", 해외에서 사망한 후 "아마도 관 속에 든 상태일 가능성이 높겠지"라고 말함.
9월3일, 본 대사관은 탁신의 동맹세력이자 부총리를 지낸 솜퐁 아몬위왓과도 별도의 만남을 가졌음. 그는 탁신이 "임박한 귀국"에 관해 계속해서 낙관적 전망을 밝히고 있다고 말함. 솜퐁은 자신이 두바이에서 종종 탁신과 만남을 가진다면서, 수주일 이내에 다시 탁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밝힘. 그는 탁신이 자신과 만난 사람들과 헤어질 때 종종 "조만간 방콕에서 만나자"고 확신에 차서 말하곤 한다고 말함. 탁신의 확신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를 묻자, 솜퐁은 탁신이 조만간 귀국할 수 있도록 해줄 메카니즘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면서, 자신은 탁신의 낙관주의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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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태국 보수 진영의 원로들. 푸미폰 국왕의 자문기구인 "태국 추밀원" 위원들의 단체사진. 앞줄 왼쪽에서 5번째가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예비역 대장이고, 6번째가 2006년 쿠테타 직후 1년간 과도정부 총리를 지낸 수라윳 쭐라논 예비역 대장이다. 대부분이 70~90세인 국가원로들이다. [크세]
(참조용 게시물) 미국 대사관 비밀 외교전문 : 태국 왕실 내부의 인맥집단 분석 (주태 미국대사관 2009-11-23) |
2009년 9월, 손티 림텅꾼은 <타이 포스트>(Thai Post)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국왕 즉위를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정황을 두드러지게 부인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투쟁하는 것은 태국이 군주제 국가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누가 군주가 되든, 나는 그분이 국왕의 덕목을 가진 분이면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왕의 덕목을 가진 분이라면, 태국은 군주제를 유지해야만 한다. |
11월, '옐로셔츠 운동'(PAD)의 또 다른 지도자이자 [당시 PAD가 독자적인 정당화를 목표로 출범시켰던] '새정치당'(New Politics Party: NPP)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수리야사이 까따실라(Suriyasai Katasila, สุริยะใส กตะศิลา: 1972년생)가 손티보다도 더욱 두드러지는 발언을 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855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최소한 군주제에 충성한다는 원칙 하에 창당된 정당으로서, NPP는 개인적 차원에서 왕위계승 문제에 관해 놀랄만한 분열증적 양상을 보이고 있음. 수리야사이는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PAD와 NPP 내부에 분열이 있다고 말했음. 즉, 군주제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세력과 단지 푸미폰 국왕 개인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돼 있다는 것임. 수리야사이 자신은 후자에 속한다면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차기 국왕 즉위를 지지하지 않는 다는 점을 시사했음. 그렇다면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한 열쇠를 예정대로 상속받게 된다면 NPP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았음. 수리야사이 본인은 군주제가 개혁될 필요성을 느낀다면서, 심지어 왕당파 운동 진영의 일부 분파가 "위험"한 세력으로 규정될 정도까지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밝혔음. 그는 아마도 탁신을 후원하는 레드셔츠 운동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함. |
그러나 수리야사이가 '옐로셔츠 운동' 내에 분열이 있다고 말한 것은 솔직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와치라롱꼰의 즉위를 반대하고 있다.
역시 11월, 탁신이 두바이에서 <더 타임스>(The Times)의 리차드 로이드 패리(Richard Lloyd Parry)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태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푸미폰 국왕의 라이벌이었다는 설을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을 가진 사람은 아내도 사랑하고 어머니도 사랑하는 법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국민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이용해 자신들의 생활의 안녕을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국왕 폐하를 신처럼 존경한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것을 같은 종류의 사랑처럼 만드려 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 총체적인 문제이다. |
탁신은 이 인터뷰에서 추밀원 의장인 쁘렘과 시리낏 왕후의 시녀들, 그리고 국왕과 왕후를 사적인 목적을 위해 조종하고 있는 기득권 진영의 여타 인사들을 명시적으로 비난했다.
국왕 폐하는 가장 존경받는 분이다. 태국 국민들은 그 분을 신처럼 느끼고 있다. 태국인들은 서로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 즉 국왕 폐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궁정 세력'(palace circle)이라 부르는 국왕 폐하와 왕후 전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태국의 문제이다. 문제는 국왕 폐하가 아니다. 국왕 폐하는 태국을 위해 좋은 분이다. 태국은 군주를 가질 필요가 있지만, 군주제가 궁정 세력에 의해 유린되거나 좌우되선 안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탁신이 왕세자 및 왕위계승에 관해 상세히 논의한 부분이었다.
[문] 국왕은 결국 교체될 것이다. 그러한 일은 태국 정치와 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답] 태국은 200년 이상 왕국으로서 통치되어 왔다. 왕위계승은 순조롭게 진행되겠지만, 태국은 왕위계승 이전에 먼저 [서로가 가진] 차이들을 화해할 필요가 있다. 왕위계승은 순조로울 것이다.
(사진: AFP) 탁신 친나왓 전 총리.
[문] 언젠가는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국왕이 될 것이다. 차기 국왕의 스타일은 현 국왕과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 보는가?
[답] 어려움도 있겠지만, 태국의 국왕은 입헌 군주이기 때문에 [왕위계승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세자 전하 주변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일 것이고, 새로운 국왕이기 때문에 궁정 세력도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다. 왕세자는 새로운 분이므로 현재의 국왕 폐하만큼 인기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궁정 세력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더 적은 문제만 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통치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 왕세자의 특징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그분은 보다 새로운 세대이고, 현대적이다.
[문] 왕세자의 인격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그분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에 관해선 매우 강력한 결단력을 갖고 있다. 그의 결단력은 강하다.
[문] 왕세자가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답] 그는 아직 국왕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국왕으로 즉위하고나면, 그가 국왕으로서의 빛나는 자질을 발휘할 것이란 점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랜 기간 부왕인 현 국왕 폐하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왕세자 전하는 국왕 폐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분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 심지어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도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면 국가에 새로운 정신이 생겨나게 된다. 태국에는 어떤 것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 기대하는가?
[답] 왕세자 전하는 외국에서 성장했다. 그는 해외 유학을 했고, 젊다고 본다. 또한 그가 현대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헌군주에게 세계는 변화 중이다. 어떤 방식이든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군주제도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문] 태국의 군주제가 차세대에 [새로운 형태로] 발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입헌군주로서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변화를 위해서는 충분한 것이다. |
태국의 기득권 세력은 이 인터뷰에 격노하는 반응을 보였고, <더 타임스>와 리차드 로이드 패리에게 왕실모독죄(lese majeste)를 적용해 입건시키려 했다.
2009년 12월 및 2010년 1월, 미국 대사 에릭 존은 신년을 맞이하여 태국의 영향력 있는 국가원로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갔다. 이때 추밀원 의장 쁘렘은 89세였고, 싯티 사웻실라 예비역 공군대장은 막 90세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 전 총리도 78세였지만 정정했다. 이들 3인 모두 왕위계승을 방해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었지만, 존 대사에겐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3인 모두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관해서는 통렬했고, 심지어 싯티는 왕세자가 사망하길 바라기도 했다. 쁘렘의 경우에도, 존 대사가 채근하자 자신은 푸미폰 국왕이 입원한 이후 국왕을 알현한 적이 없다고 인정하여, 자신과 국왕 사이에 일정 정도 간극이 있음을 무심코 드러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제10BANGKOK192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3인 모두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부정적인 논평을 했음. 싯티와 아난은 왕세자가 차기 국왕이 될 것이란 점을 확신하면서도, 다른 방안이 강구될 수 있다면 태국을 위해 더 나을 것이란 의중을 내비췄음. 싯티는 시린톤(Sirindhorn: 1955년생) 공주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표명했음. 아난은 왕위계승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푸미폰 국왕 뿐이란 점을 시사했고, 그 실현 가능성이 낮음을 인정했음.
탁신과 군주제에 관한 문제는 현재 태국에서 가장 어렵고도 민감한 사안들인데, 이에 대해 태국의 엘리트 계층들이 태국사회의 다른 계층들보다도 미래에 관한 확신을 더욱 갖지 못한 것으로 보임. 이 문제들은 태국의 모든 정파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며, 정치적 양극화 해소와 왕위계승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가시권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임.
푸미폰 국왕의 건강과 관련해서, 쁘렘은 국왕이 '시리랏 병원'(Siriraj Hospital)에서 하루 30분씩 고정식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으며, 물리치료사 1명과 함께 의료기구용 공 던지기를 하면서 [건강을] 강화시키고 체중을 회복하는 훈련을 하고 있음을 시사함. 쁘렘은 [2009년 9월] 국왕이 입원한 후부터 자신이 국왕을 만나지 못했음을 인정했음. 하지만 시리낏 왕후와 시린톤 공주는 날마다 국왕을 면회하고 있다고 함. 왕세자는 병문안을 하지 않는가 물었더니, 쁘렘은 왕후와 시린톤 공주가 매일 면회를 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음.
쁘렘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이따금 탁신을 만난다"면서, 왕세자와 탁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가능성을 인정했음. 쁘렘이 두 사람에 대해 호의적 입장이 아님은 분명함. 쁘렘은 탁신이 만일 미래에 왕세자가 자신의 친구나 지지자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음. [왕세자는] 단지 탁신의 현금지원만 바랄 뿐이기 때문이란 것임. 쁘렘은 "그(탁신)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즐길 수 없을 것"이라 말함. 본 대사가 쁘렘에게 왕세자는 현재 태국에 있는가 아니면 유럽에 있는가를 물었더니, 쁘렘은 "당신이 그의 사회생활이 어떤지 알지 않는가"라고 경멸조로 말했음. (참조: 여기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해 당연지사처럼 언급한 것은, 왕세자가 태국에서 부인(시랏,Srirasmi) 및 아들 [티빵꼰 라서미촛, Dipangkorn Rasmijoti: 2005년생)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독일의 뮌헨에서 가장 아끼는 애첩과 시간을 보내길 더 좋아한다는 것을 말함)
싯티 장군과 [쁘렘 의장과] 유사한 풍으로 지적하기를, 왕세자가 태국을 자주 빠져나가며, 왕세자가 거느린 스튜어디스 애첩들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 웹사이트들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고 말했음. 그는 자신의 전직 부하였던 현재의 독일주재 태국대사가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영접하기 위해, 얼마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떠나야만 하는가에 대해 탄식을 했음. 싯티는 작년(2009) 11월에 "탁신이 <더 타임스> 지와 인터뷰한 일"을 떠올리면서, 이는 국왕을 나쁘게 보이려는 시도이며 왕세자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교육받은 통큰 인물로 칭송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함. 싯티는 [탁신이] 왕세자가 일단 국왕으로 등극하면 탁신을 환영해줄 것이란 점을 암시한 것이라고 지적함.
본 대사는 싯티 장군에게 말하기를, 왕세자가 12월 초에 있었던 국왕 탄생일 기념 외국대사들 초청 리셉션에서 더 적극적인 태도로 참여했으며, 각국 대사들과 일일이 악수도 나누고 2008년 리셉션 때보다 더 편안하게 대해줬다고 언급했음. [이에 대해] 싯티 장군은 태국으로서는 왕위계승 시점이 매우 어려운 과도기가 될 것임을 진술함. <왕실전례>에 따라 왕세자가 부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라면서도, 잠시 망설인 뒤에 거의 바라고 있다는듯이, "만일 무슨 일이 벌어져서 왕세자가 사망이라도 하면, 파텝(Prathep: 시린톤 공주)이 계승할 수도 있다"고 말했음.
본 대사는 지난 12월 말에 아난 전 총리에게 왕세자가 보다 확실하게 점잖은 몸가짐을 보였던 것을 언급하면서, 농담조로 왕위계승의 시기가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것에 대한 아난의 상황에 대한 평가를 물어봄. 아난의 답변은 싯티와 유사했지만, 보다 상세했고 퉁명스러웠음. 아난은 법률에 따라 왕세자가 부왕을 승계할 것임을 언제나 믿고 있다고 말함. 하지만 만일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정치적 개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거나 당혹스런 금융거래를 회피할 수 없다고 판명될 경우, 복잡한 요소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함. 아난은 망설임을 보이다가, 이제 57세인 왕세자의 행동을 멈추게 하거나 고치게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많은 태국인들 사이에선 합의된 관점이라고 말함. 아난은 다시 한번 망설임을 보인 후, 누군가 국왕에 관한 문제를 정말로 제기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함. 하지만 그는 그런 미묘한 주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부재함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했음. (참조: 이 말은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대체할 필요가 있음을 함축하는 것임)
싯티 장군은, 왕실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소한 왕족들([역주] 공주들이나 왕자비 등)에 대해서까지 과도하게 차량호송 경호를 펼쳐 교통혼잡을 야기시키는 일은 불필요한 것임에도 없어지지 않는 악습이라고 지적하면서, 태국 왕실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나빠지는 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함. 싯티 장군에 따르면, 아사 사라신(Arsa Sarasin) 비서실장이 이 문제를 이미 8년 전에 푸미폰 국왕에게 진언했다고 함. 이에 푸미폰 국왕도 동의하고, 왕족들과 대화하거나 왕실 측근 자격을 제한하여 교통정체 발생을 줄이는 새로운 규정 마련 작업을 아사 실장에게 전권을 위임해주었다고 함. 하지만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음. 싯티는 자신이 지난주 중국대사를 만나고 돌아오다, 한 왕족의 차량행렬 때문에 자동차 안에서 45분을 기다렸다고 지적함. 싯티는, 왕세자가 자신의 차량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건물들의 2층 창문을 폐쇄토록 새롭게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 역시 대중적 분노를 추가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슬픈 어조로 말함. |
이제 사태는 또 다른 결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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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9편의 번역 작업은
세월호 참사 사건이 겹친 데다
세밀한 수술(=링크 만들기)할 곳이 너무 많아서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이 소모됐습니다..
라마 8세를 푸미폰 국왕이 살해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글이 엄청난 글이지요..
물론 고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형제가 워낙에 사격과 총기를 좋아했었다고 하지요..
지금 잠시 앤드류 마샬의 사이트가 가동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만..
그 부분에 링크된 곳을 따라가면,
그 사건만 전문적으로 다룬 자료들(영국 외교문서 등)이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 일로 엉뚱한 무고한 사람 3명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이 컸을 것입니다.
@울트라-노마드 음미,,, 그렇군요 ,,, 허긴 장난치다가 그럴수도 있겠습니다만,,, 충격의 연속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