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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남부의 소요 사태 : 무슬림 반군 (상)
South Thailand insurgency
태국 남부에서는 민족적 분리주의 반군이 발생하여, 특히 "말레이 빳따니 지역"(Malay Pattani region)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지역은 태국 최남단 3개 도인 빳따니(Pattani), 나라티왓(Narathiwat), 얄라(Yala) 도로 구성된 곳이다. 또한 폭력사건들이 점차로 주변 도들로도 확산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분리주의자들의 폭력사건들이 지난 수십년 간 산발적으로 발생하긴 했지만, 2004년 이후에 특히 급격하게 고조됐다.(주5)
2005년 7월,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는 반군들을 다루는 데 포괄적인 비상권력을 사용했다. 이후 2006년에는 "왕립 태국육군"(RTA) 사령관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kalin) 장군에게 남부지방 소요사태 진압을 위한 전권을 부여했다.(주6)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2006년 9월 19일,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2006년 태국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탁신 총리를 권좌에서 실각시켰다. 군사정부는 반군에 대해 화해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반군의 활동은 더욱 강화되기만 했다. 2006년 쿠테타 무렵(9월)에 태국 남부 소요사태의 누적 사망자 수는 1,400명 정도였는데, 2007년 9월 중순경에는 2,579명에 달했다.(주7) 폭력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별다른 진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은 남부지방의 안보상황이 개선됐고 2008년에는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선언했다.(주8) 하지만 2008년 3월에 누적 사망자 수가 3천명을 넘고 말았다.(주9)
2008년 12월,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주도 연립정권이 들어선 후,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 외무부장관은 "낙관적 분위기"를 지적하면서, 2010년에는 이 지역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 확신했다.(주10) 하지만 2010년 말까지도 반군들과 관련된 폭력사건들은 증가일로에 있어, 태국 정부의 낙관적 전망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주11) 태국 정부는 결국 2011년 3월에 폭력이 증가하고 있으며, 수개월 안에 해결되기는 힘들다는 점을 인정했다.(주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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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Roadside bomb kills 7 Thai soldiers - Asia-Pacific - MSNBC.com".
(주2) "The Long War Journal".
(주3) "RPT-FEATURE-Brutal insurgency haunts Thai Muslim south", Reuters. 2009-7-3.
(주4) "http://www.nationmultimedia.com/breakingnews/read.php?newsid=30037473".
(주5)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Police say bomb at soccer match in southern Thailand wounds 14 officers". 2007-6-14.
(주6) "Army commander's powers to rise: Thai Deputy PM". China Economic Net.
(주7) Jane's, "Mid-November 2007 update on the insurgency".
(주8) AP, "Thai Military Says Security Improving". 2007-1-4.
(주9) AFP, "Bloodshed part of daily life in Thailand's Muslim south". 2008-3-19.
(주10) AFP, "Thailand can quash insurgency by year-end: minister", 2010-2-3.
(주11) Newsweek, "Thailand Tries to Project Normality". 2011-1-14.
(주12) AFP, "Thailand says southern unrest worsening", 2011-3-8. |
1. 남부 반군 활동의 원인
일부에서는 남부 반군들이 역사적 원인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원인들에는 200년간에 걸친 태국의 '점령', 1960년대 태국 북동부지방 주민들의 남부로의 이주정책,(주13) 그리고 경찰의 무자비함, 범죄활동, 이슬람교에 대한 비존중, 바(술집)와 마약거래 같이 문화적으로 주의깊지 못한 사업들의 출현, 부정부패 등 빳따니 도에 대한 태국의 문화 경제적 제국주의 등이 속한다. 하지만 마약거래가 반군의 주요한 자금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태국의 안보담당 요원들도 마약거래를 통해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고발도 존재한다.)
2006년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던 '국가안보위원회'(Council for National Security: CNS)는 반군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똠얌꿍(Tom Yam Kung) 찌게 식당을 운영하면서 자금을 조달한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근거없는 것"이며,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이 지역 주민들 일부는 태국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독립하는 일을 지지하는 반면, 또다른 주민들은 그렇지 않은 상태이다.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이 개정한 <태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당시, 3개 도 모두에서 투표참가자 370만명 중 87%가 찬성하여 주민 다수가 찬성했다.(주14) 반군 단체 일부는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반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협상과 타협을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다시금 법치주의가 회복되고, 양측으로부터의 인권유린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1.1. 반군들의 정체성
빳따니 지역의 게릴라 단체들에 의한 폭력사태가 재발하게 된 것은 2001년부터이다. 그러나 이 갈등을 조장하는 주역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국내외의 여러 전문가들은 이 지역의 전통적인 분리주의 단체들을 지목하고 있다. 여기에는 '빳따니 통일전선 기구'(PULO), '민족혁명전선'(BRN), '빳따니 이슬람 무자히딘 운동'(GMIP), 그리고 특히 BRN에서 분파된 'BRN 코디네이트'(BRN-Coordinate)와 공공연하게 무장투쟁을 부르짖고 있는 '론다 꿈뿔란 께실'(Ronda Kumpulan Kecil: RKK)이 있다.(주15) 또다른 전문가들은 이러한 폭력사태가 '알카에다'(al-Qaeda)나 '제마 이슬라미야'(Jemaah Islamiyah: JI) 같은 외부의 이슬람 단체들의 영향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군부대와 학교들을 공격하는 행동양식을 참조하면, 태국 남부의 무장단체들은 서방세계를 공격한 단체들과는 행동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대부분 전문가들은 관련성이 약하다고 보고 있다.(주16)
일부 보도들은 많은 수의 빳다니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에 있는 '알카에다'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와는 달리 국제적인 성전주의(지하디즘, jihadism)와는 관련이 전혀 없거나 아주 적은 관련만 맺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다른 이들은 태국 남부의 반군들이 필리핀의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MILF) 같은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이나, 인도네시아의 '자유아체운동'(Free Aceh Movement: GAM) 같은 준-세속주의 운동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먼저 태국 정부는 이 지역의 공격사태들을 '도적떼'(bandits)가 일으킨 것이라고 비난했고, 외부의 여러 관찰자들 역시 이 지역의 일부 폭력사태들에서는 지역의 유력 문중이나 상업적 혹은 범죄관련 라이벌 세력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7개월 사이에 14명 정도의 경찰관이 사망한 이후, 탁신 친나왓 총리는 2002년 7월의 발언을 통해 이들 공격들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을 부인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종교가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망한 경찰관 중 일부도 무슬림들이었기 때문이다."(주17) |
뿌라차이 삐옘솜분(Purachai Piemsomboon) 내무부장관은 "경찰이 마약거래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 경찰에 대한 공격의 원인을 마약 문제로 돌렸다.
탁신 총리는 2002년 발언을 통해 "분리주의 운동도 없고, 이념화된 테러리스트들도 없으며, 오직 일반적인 도적떼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04년 무렵부터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이들 반군들에 대한 대처를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의 지역적 전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2004년 1월에는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주18)
2005년에 방콕 출신의 상원의원 소폰 수파퐁(Sophon Supapong, โสภณ สุภาพงศ)은 핫야이(Hat Yai)의 폭탄테러의 배후에 미국의 기획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자 '송클라 왕자 대학'(Prince of Songkhla University: 빳따니 캠퍼스) 교수인 피라욧 라힘물라(Perayot Rahimmula, พีรยศ ราฮิมมูลา)가 이 주장을 반복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주19)
2006년쿠테타 직후, 그 자신이 무슬림이기도 한 왕립 육군사령관 손티 분냐랏낀 장군은 과거 공산주의 반군의 잔당들이 이 지역 소요에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주20) 하지만 과거의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탁신의 집권당이었던 '타이락타이 당'(TRT)에 입당하여 다른 공산주의 운동 출신자들의 목소리까지 반영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낮은 것이었다. 남부지방 도지사들 역시 손티 장군의 주장에 회의감을 표시했지만, 일단은 그 관련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태국 남부 반군 문제의 특징 중 하나는 공격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물들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과 구체적인 요구사항도 없다는 점이다. 2005년 2월에 실시된 태국 총선은 비교적 자유롭게 치뤄졌는데, 남부지방에서 분리주의를 내걸고 의석을 획득한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요구와 야위어(Yawi: [역주] 태국 남부 빳따니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레이어 사투리) 사용권에 대한 주장은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2005년 7월에 '나라티왓 이슬람 위원회'(Narathiwat Islamic Committee) 의장은 "그 공격들은 잘 조직화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세력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쿠테타로 탁신 정권이 실각한 이후, 태국 정부는 반군들에 대한 보다 유화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무력의 과도한 사용을 피하면서 이미 존재가 알려진 분리주의 세력과는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폭력사태는 오히려 고조되었다. 이러한 점은 폭력사태에는 여러 세력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었고, 정부의 전략적 변화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주21)
2011년 6월 3일, 왕립 육군사령관인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장군은, 반군들이 해외로부터 조종받고 있고 마약 및 석유 밀수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말했다.(주22)
(주15) Bangkok Post, News, 2008-8-4. (주16) "참조"
(주17) "Thailand tackles violence in south", BBC News. 2002-7-11.
(주18) "Thai districts impose martial law", BBC News, 2005-11-3.
(주19) Matichon, "ส.ส.ปชป.เชื่อ”ต่างชาติ”มีส่วนแทรกแซง", 2005-4-7.
(주20) The nation, "Governors to look into Sonthi's claim of communist hand in Southern unrest", 2006-8-12.
(주21) Council of Foreign Relations, "The Muslim Insurgency in Southern Thailand", 2007-2-1.
(주22) Bangkok Post, "Prayuth sees foreign hands plotting separatist violence", 201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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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얄라 도는 남부 접경 지방들 중에서도 특히 무슬림 무장반군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이 동영상은 2010년 5월 27일에 CCTV에 포착된 폭탄테러 장면이다. 얄라 도는 태국 내에서도 관광객에게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영국 정부는 자국민들에 대해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방문 자체를 자제토록 권고한다. [크세] |
1.2. 정치적 요소
태국 남부의 반군활동은 무슬림 인구에 대한 정치적 대변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후반에 얄라 출신의 말레이계 무슬림인 완 무함마드 노르 마타(Wan Muhammad Nor Matha)는 1996~2001년 사이에 국회의장을 맡아 전례없는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이후 탁신의 제1기 내각(2001~2005)에서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탁신의 제1기 내각 시절엔 무슬림 출신 국회의원이 14명이나 되었고, 몇몇 상원의원들도 있었다. 국경지역의 지방 의회에서는 무슬림들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남부의 몇몇 도에서는 무슬림들이 도지사와 시장을 맡기도 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애로점을 보다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었으며, 종교적 자유의 강도도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탁신 정권은 남부지방의 행정기구를 약화시키면서 부정부패로 악명높은 경찰력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곧이어 광범위한 단속이 실시됐고,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관례도 붕괴했다. 이러한 유린행위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2004~2005년 사이에 폭력사태가 증가했다.
무슬림 출신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은 탄압의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정치적 적법성과 지지를 잠식해버렸다. 그들은 이에 대해 끔찍한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2005년의 총선에서 14명에 이르던 현직 무슬림 국회의원들 중에 1명을 제외한 모두가 낙선한 것이다.(주23)
(주23) Wattana Sugunnasil, "Islam, radicalism, and violence in Southern Thailand: Berjihad di Patani and the 28 April 2004 attacks", Critical Asian Studies, 38:1 (2006), pp.119-144. |
1.3. 인권유린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HRW)는 양측 모두에서 일으킨 인권유린 사례들을 수집했다.(주24)
반군들은 탁발중이던 불교의 승려들을 공격했다. 또한 교사들과 교장, 그리고 학생들이 살해됐으며, 학교도 불태웠다. 아마도 반군들이 학교를 태국 정부의 대변자라고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무원들은 암살 대상이 되었다. 고무농장 등과 같이 일상적인 생계활동을 하던 불교도 주민들도 살해당했다. '태국 언론인연합회'(Thai Journalists Association)에 따르면, 2008년에 반군들이 활동하던 남부 4개 도에서는 500차례의 공격이 있었고,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주25)
한편 경찰의 심문과 구금 도중에 무슬림들이 구타나 살해를 당했으며, "실종"되기도 했다. HRW는 최소 20건 이상의 행방불명 사례들을 문서로 기록했다.(주26) 군과 경찰은 반군 용의자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부수적 피해를 유발하면서 무차별적인 행동을 취했다.
HRW가 발표한 <2010년 월드 리포트>(2010 World Report)는 태국에서 발생하는 인권유린의 증가를 강조했다.(주27) 여기에는 남부지방 상황이 전반적으로 개별적 인권에 반하는 정책이라고 보았다. 군, 경의 권한이 가파르게 강해지면서 합리성의 결여가 나타났다.
1.4. 경제적 요인
반군 활동의 원인으로 가난과 경제적 문제들이 지적되기도 한다.(주28)(주29) 하지만 태국 남부 오지의 경제적 상황은 지난 수십년 간에 걸쳐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1983~2003년 사이에 빳따니 도 주민들의 1인당 소득은 9,340바트에서 57,621바트로 증가했다. 얄라 도는 14,987바트에서 52,737바트로 증가했고, 나라티왓 도에서도 10,340바트에서 38,553바트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들 태국 남부 접경 도들의 소득수준은 여전히 남부지방 도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심지어 태국의 전국적인 평균소득도 국제기구들이 동남아시아에 적절하다고 권장하는 최저임금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남부 접경 도들의 1인당 평균소득은 태국에 바람직한 이상적인 최저임금의 20~25% 수준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빳따니 도의 가구당 평균소득은 2002~2004년 사이에 21.99% 증가했고, 얄라 도는 19.27%, 그리고 나라티왓 도는 21.28%가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태국의 전국적인 가구당 평균소득은 9.4% 증가하는 데 그쳤다. 빈곤선 이하에서 거주하는 인구도 2000~2004년 사이에 빳따니 도에서 40%가 감소했고, 나라티왓 도에서 36%, 그리고 얄라 도에서 33%가 감소했다. 2004년에 3개 도에서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31만명 정도로, 이는 2000년의 61만명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감소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3개 도의 빈곤층들이 남부 지방 전체 빈곤층의 45%를 형성하고 있다.(주30)(주31)
국경지역의 무슬림들은 일반적으로 불교도 주민들보다 교육수준이 낮은 편이다. 불교도 주민들 중 초등학교만 마치는 경우는 49.8%인에 반해, 무슬림들은 69.8%에 달한다. 불교도들은 고졸학력 비율이 13.2%이지만, 무슬림들은 이슬람 전통학교를 포함해도 9.2%에 불과하다. 불교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비율은 9.7%이지만, 무슬림들은 1.7%에 불과하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태국어를 사용해서 가르친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하며, 학교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여 심지어는 태국어 사용 학교에서 학생들을 강제로 자퇴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무슬림들은 불교도에 비해 취업률도 떨어진다. 취업연령 인구 중 불교도의 19.2%가 공무원이 된 데 반해, 무슬림은 2.4%만이 공직에서 일한다. 무슬림 학생들은 태국어 및 태국 교육시스템을 완전하게 수용하지 못해서 공공부문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반군들이 경제적 목표물들을 공격하면서 이 지역에서 무슬림은 물론이고 불교도들에게도 취업기회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주28) Dr Srisompob Jitpiromsri and Panyasak Sobhonvasu, "Unpacking Thailand's southern conflict: The poverty of structural explanations", Critical Asian Studies 38:1 (2006), pp.95-117. --- "남부지방 3개 도의 9개 군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지역의 무슬림 공동체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이 확인되었다. 여기에는 빈곤, 실업, 교육의 부재, 불충분한 기반시설, 토지와 자본의 부적절한 공급, 삶의 질의 저급함, 여타 경제적 문제들이 포함된다."
(주29) Ian Storey, "Malaysia's Role in Thailand's Southern Insurgency", Terrorism Monitor, Volume 5, Issue 5 (March 15, 2007)
(주30) Office of the National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Board (NESDB), "ช่องว่างความยากจน ความรุนแรงปัญหาความยากจน เส้นความยากจน สัดส่วนคนจน และจำนวนคนจน(ด้านรายจ่ายหรือการบริโภค) ปี 2533 ~ ปี 2547".
(주31) "Thailand Human Development Report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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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llvoices.com) 2011년 5월경 촬영 : 사살된 반군의 시신 곁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무슬림 여성이 오열하고 있다. |
2. 폭력사태의 고조
2001년 이후의 공격은 주로 이 지역의 경찰과 군대의 주둔지, 학교, 여타 태국 정부를 상징하는 장소들을 불태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모든 계급의 경찰관들과 정부의 공무원들이 주로 목표가 되었고, 외관상 무차별적인 암살의 형태를 띠었다. 2001년 말까지 빳따니, 얄라, 나라티왓 도에서 발생한 반군 관련 사건은 총 50건에 경찰만 19명이 사망했다.(주32)
초기의 공격들은 주로 '이동중 총격'(drive-by shooting)의 형태를 띠었다.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 올라탄 '전문 총잡이들'은 순찰중이던 경찰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러한 공격 형태는 신속하게 조직화되면서 무장 그룹이 경찰서와 파출소 등의 시설물을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들은 해당 시설에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한 후 도주했다.
2002년에는 반군 관련 공격이 75건이 발생했고, 군대와 경찰 병력 50명이 사망했다. 2003년에 공식 집계된 사건의 발생건수는 119건이었다. 반군들이 더 자주 더욱 정교한 공격을 행하면서, 결국 정부는 남부지방의 사태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재인식했다.
2004년 1월 4일, 신원미상의 총잡이들이 아침 일찍 나라티왓 도에 위치한 육군의 무기고를 공격했다. 이들은 소총 100정과 탄약들을 탈취하여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시설을 방어하던 고참 군인들 4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곧이어 큰 규모의 폭력사태로 전이됐다. 반군들이 일련의 폭탄공격과 총격을 통해 주로 경찰과 군대를 공격하면서 600명이 살해됐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수의 민간인들도 포함됐다. 일부 폭탄 공격은 비-무슬림 태국인 거주 지역을 겨냥했고, 주민들이 탈출하면서 지역 경제는 피해를 입었고, 태국의 여타 지역들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태국 정부는 태-반군 작전에 대한 훈련 부족,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의 결여, 경찰과 군대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반군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역 경찰 중 많은 수가 지역 내 마약거래나 여타 범죄활동에 연루되어 있었고, 방콕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들은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대우했다.
육군은 반군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무슬림 마을들에 대한 고압적인 기습 단속을 벌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복공격의 악순환이었다. 반군들은 경험이 미숙한 태국 군에게 도발을 가했다. 대국 정부는 과도하게 대응했고, 이러한 태도가 무슬림 주민들 사이에서 [반군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만들었다.
반군들에 대한 추정치도 매우 가파르게 상승했다. 판롭 삔마니(Pallop Pinmanee, พัลลภ ปิ่นมณี) 장군은 2004년 발언을 통해, 무장 반군의 과격파 핵심세력이 500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최대 15,000명에 달할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외국의 이슬람 단체가 이 지역에 개입했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외국의 자금과 무기들이 유입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이 문제가 단순한 지역적 갈등이라는 의견을 가진 이들의 수에 의해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상쇄되고 있다.
반군 세력은 2005년 4월 3일, 송카(Songkhla, 송클라) 도에서 일련의 폭탄 공격들을 감행하며 맹위를 떨쳤다. 7월에는 얄라 도의 도청소재지인 얄라 시에서 주요한 폭탄공격이 있었다. 탁신 총리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스스로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포고령을 발령하고, 시민적 자유 억제와 언론 검열을 실시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태국의 언론 및 야당의 자유주의 정파에서는 저항이 촉발됐다.
2005년에 남부지방에서 131명의 민간인들이 태국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이웃국가인 말레이시아로 탈출했다. 이 그룹에는 심지어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태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들 난민들을 반군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대해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외교적 마찰도 일어났다. 이 난민들은 아직도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다.
2006년 6월 15일,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일'에 잘 조직화된 폭탄공격들이 발생했다. 정부청사 및 공공건물 40군데가 공격당한 것이다. 경찰관 2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했다. 전문가들은 이 공격이 실제적인 타격을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태국 정부에 대한 경고의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폭탄들이 소형 폭발 규모로 설치됐기 때문이다. 만일 보다 큰 폭발력을 가졌더라면, 사상자 수는 어마어마하게 증가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국의 언론들은 영국의 BBC 및 여타 국제 언론들이 이 사건들을 보도하고 나서야 사실 보도를 시작했다.
2006년 11월 22일, 남부지방 분리주의 단체들의 상급 연합체인 '베르사뚜'(Bersatu)의 지도자 완 까디르 체 완(Wan Kadir Che Wan)은 '알자지라'(Al Jazeer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제마 이슬라미야'(JI) 소속 테러리스트 네트워크가 태국 내 지역 반군의 공격을 도와주고 있다고 발언했다.(주33)
3. 분리주의 운동
3.1. 포 스타의 PULO
4개의 별을 상징으로 하는 PULO(빳따니 통일전선 기구)는 언론에의 노출을 꺼리고 조용하게 활동하는 정책을 표방하여, 이 조직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ULO는 빳따니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고 대중적인 분리주의 운동 단체로 여겨지며, 정치적 영향력도 크고 이 지역에서 출현하는 빈도도 높다. 하지만 이 단체는 최근 몇년 간 점차로 자신들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적극적인 분리주의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정파 내에서 조직하고, 국제적으로도 빳따니 지역 주민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받으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현재의 PULO는 '빳따니 이슬람 무자히딘 운동'(GMIP) 및 적극적인 군사적 정파인 '민족혁명전선'(BRN)과 '론다 꿈뿔란 께실'(Ronda Kumpulan Kecil: RKK), 그리고 여타 단체들의 대중적 동의 속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확립하고 있다. PULO는 분리주의자들의 확고한 지지와 충성을 얻으면서, 여러 다른 파벌들을 자신들의 조직 내 직책에 임명하고 있다. 만일 태국 정부가 협상에 나설 경우, PULO야말로 태국 정부와 실행력 있는 합의를 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영향력과 신뢰를 확보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또한 그 경우 다양한 군사조직 및 군벌들에 의한 폭력사태도 종식시킬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 좌측이 PULO의 상징 깃발이고, 우측은 GMIP의 깃발이다.
2009년 7월 6일, PULO의 의장인 아부 야시르 피크리(Abu Yasir Fikri)와 GMIP의 에미르(Emir: 수장)인 메 꾸떼(Me Kuteh)는 통합을 하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이 협정에는 아부 야시르 피크리가 정치적 문제들에서 GMIP를 대신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까지 포함됐다. 또한 양측 군대도 하나로 통합하여 '빠따니 해방군'(Patani Liberation Army)으로 재편하고, PULO의 군사분야 제1부사령관이 지휘토록 하는 조항도 포함됐다.(주34)(주35)
2009년 4월 18일, PULO는 '이슬람회의기구'(Organisation of Islamic Cooperation: OIC, منظمة التعاون الاسلامي)의 '제다의 무슬림 공동체 및 소수자들의 상황을 생각하는 제12차 정부간 전문가 그룹 회의'(Meeting of the Intergovernmental Group of Experts considering the Conditions of Muslim Communities and Minorities in Jeddah)에 참석하여, PULO의 원래 의장인 아부 야시르가 갈등 종식의 해법을 제시하였다.(주36)
3.2. 각 단체의 깃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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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야시르 피크리가 이끌던 때부터 사용되던 PULO의 오리지날 4성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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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붕안 멜라유 빠따니 라야'(Gabungan Melayu Patani Raya: GEMPAR)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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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 빠따니 라야'(Negara Patani Raya: 위대한 빠따니 국)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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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혁명전선'(Barisan Revolusi Nasional Melayu Patani: BRN)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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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N 코디네이터'(Barisan Revolusi Nasional Patani-Melayu-Koordinasi: BRN-Coordinate)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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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 PULO'(Dagger PULO)가 1989-2005년 사이에 사용한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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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PULO가 2005년 이후 현재까지 사용하는 5성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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