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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때가 이르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저는 이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표현을 특별히 살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전체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논지는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한다거나 비틀거리고 있다면, 또는 우리가 불행스런 패배감에 빠져들고 있다면, 또는 어떤 면으로든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 또는 우리가 성경에 분명하게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진리 자체로 돌아가게 해 주고 진리에 대해 더 확실한 관점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론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생활 사이에, 또는 믿음과 행위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 분리하는 것보다 더 큰 오류는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에는 무관심한 채로 어떤 일들을 '행하는 것' 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엄청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식의 인식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여기에 펼쳐져 있는 이 구원의 계획을 살펴보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구절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 관한 위대한 교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주님이 이때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모습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구원의 전체가 드러나고 진리의 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바로 그때에 맞추기 위해 앞에서 우리가 숙고했던 그 모든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때'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을 예수님이 완수하시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때'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하셔야 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완성되어야 하는 절정의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살펴왔던 그 장엄한 구원의 역사 전체 속에서 극히 중대한 절정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때'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주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신 몇 가지를 회상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일을 예수님께 고하면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를 돌아다보시면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2:4)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 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라고 간청하는 형제들에게 같은 것을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요 7:6).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원수들이 그분을 잡으러 왔을 때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7:30)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그 뒤로 가면, "아무도 그를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기록도 나옵니다(요 8:20).
먼저 요한복음 12:23 에 나오는 표현을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13장에도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다시 더 뒤에 가서 예수님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런 다음에 여기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가복음 22:53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반대하며 미워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서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이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이 모든 내용을 담아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저는 거기에 상당히 명백하게 지적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때'는 확실히 미리 정해진 시간을 말합니다. '때'에 관한 모든 진술들은 매우 특별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너희 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나 자신에 관한 한 특별한 때가 있다. 너희들은 지금 내가 등장하여 스스로 나 자신을 만민에게 선언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사실 너희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 때를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기다림의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계속 발견됩니다.
이 전체적인 시간의 문제는 특별히 중요하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이 주제야말로 신학 전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간을 어떻게 영원과 무시간성(無時間性)에 관련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는 대단히 큰 혼돈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이 문제는 상당히 심오한 난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비교적 평이하고 분명한 문제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과정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렇게 하신 다음에 그는 어떤 특정한 일이 어떤 특정한 시점에 일어나도록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에 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영역 속에서 일들이 일어나도록 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분초까지 정해 두신 것을 발견합니다.
일례로 노아의 홍수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창 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어떤 정해진 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홍수가 일어나기 120년 전에 노아를 부르셔서 그 홍수를 대비해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의 때가 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 모든 것들을 명백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갈 4:3, 4).
이런 사상은 우리를 이 세상 삶의 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단번에 해방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삶을 살펴보고, 역사를 살펴보고, 세상의 전체 과정을 살펴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간적인 눈만을 가지고 그것들을 살펴본다면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때'의 교훈에 비추어서 그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상세하게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대번에 주님께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 힘겹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열국들의 쇠망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됨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점에는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임하시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다시 부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받는 큰 위로는, 비록 현대의 기독교회가 세상에서는 조롱을 당하고 별볼일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또는 언뜻 보면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쇠퇴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모든 상황에서 명약관화(明若觀)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그 상황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일어나셔서 그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시 2:4) 난쟁이들이 자신의 키가 크다고 뽐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그들을 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계획을 함께 연구해 나가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해 예수님이 결코 깜짝 놀라시거나 당황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위 고등비평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난 후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잘못된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은 이상한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실 계획과 그 나라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오셔서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관점을 심어 주고 그들을 파송하여 이 놀라운 가르침을 선포하도록 한 인간 선생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그 모든 일이 그만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결코 이런 강렬한 배척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선한 의도를 갖고 오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배척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소위 '창백한 갈릴리 사람' (pale Galilean), 이 탁월한 스승, 이 갈릴리의 농부, 자기의 때가 오기도 전에 그 고상한 이상주의를 갖고 태어난 사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그 마음이 그 완벽한 실패로 인해 무너져 내렸고, 그것으로 인해 마침내 낙담한 심정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던 이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입니까! 이런 생각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조소거리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친구 여러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때'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려 두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모든 될 일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고서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지금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도 절대로 인간을 용서하실 수 없다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외치는 바입니다. 십자가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십자가가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때는 온 인류 역사의 중심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고, 예수님은 바로 그 때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때를 맞이하시면서 깜짝 놀라고 충격에 빠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때는 이미 확고부동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온 세상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번째 요점, 즉 '이 때'가 역사의 중추적 시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가장 획기적인 때였습니다. 그때는 실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가장 크고 의미 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다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절정의 사건이 일어난 때입니다. 모든 일은 그 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때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 예언의 전체는 바로 그 때를 내다보고 있으며, 교회 전체와 교회의 교리와 역사는 바로 그 때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결정짓고 통제하는 중심적인 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이 바로 그 시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다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만일 성자께서 이 특별한 시점에서 실패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 가르침을 이행하려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세 율법보다 더 지키기 불가능한 율법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셈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더 큰 저주 아래 정죄하고 가두어 넣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끝까지 견뎌내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형벌을 끝까지 담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구원 전체와 관련된 모든 일이 바로 그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때때로 이것과 전혀 상관없이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새생명을 주시고, 사람들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맞이하기 전에 과거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결해야 합니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어둔 채 미래의 더 좋은 삶을 영위하겠다고 갑자기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과거의 문제, 즉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바로‘이 때’그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새생명을 얻을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저는 '때의 드라마' 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 어떤 것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에 대한 신비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든지 복음서들을 죽 읽어 나가면서 '때'를 언급하는 구절에 시선을 집중시켜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초지일관(初志一貫)'이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그 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편의 세력들도 바로 이 동일한 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편에서뿐만 아니라 반대편의 세력들도 나름대로 어떤 계획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언급된 "이제는 너희 때요"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주님의 여러 가지 체험에 대한 서술을 읽어가면서 반드시 이 엄청난 싸움을 보게 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행한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경향성과 더불어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싸움보다 훨씬 더 엄청난 우주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은 하나님과 지옥 권세 사이의 엄청난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대하(大河)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성경의 배경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기원, 즉 죄악의 기원과 관련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현재 모든 것을 다 밝혀 주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와는 상관없이 우주적인 타락이 있었다는 정도까지는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천사들 중에서 가장 큰 천사 중 하나가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이름이 마귀요 사탄입니다. 사탄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묘사되고 있는 이 대하드라마에는 하나님의 일을 좌절시키고 하나님을 무찌르려는 사탄의 시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낙원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개입되어 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설득하여 인류와 인간성 전체와 전우주에 반대되는 불의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간다면 성경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마귀가 그들을 부추겨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를 없애려고 발악하였습니다. 마귀는 헤롯 왕을 사로잡아 그를 설득하여 아기로 태어나 신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의를 주목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잔인한 증오심을 잘 살펴보십시오. 마귀는 한때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로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이 예수님과 싸워야 한다는 운명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마귀는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웠습니다. 마귀의 세력 전체가 바로 이 궁극적 대결을 위해 소집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리적 희생 제물로 죽어 있는 동안에도 이 엄청난 때의 대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시각에서 각각 그 때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 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가 볼 때는 오직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합니다. 즉 만일 어두움의 권세가 아니었다면 이 때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때와 이 때가 수반하는 모든 일들이 무엇 때문에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되었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것은 죄와 악의 문제, 사탄과 지옥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 때는 마귀가 등장하여 존재하게 된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귀는 이 때를 조작해 냈습니다. 물론 훨씬 더 고상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사탄은 그것을 조작하지도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그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때'가 필연적으로 오게 한 것은 결국 마귀입니다. 사탄이 죄와 악을 통해서 만들어 낸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역사를 행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그들의 때입니다. 우리가 '이 때'를 통해서 참으로 악과 죄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할 악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런 방식이 아닌 것으로는 취급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마귀는 오직 '이 때'에만 그 문제를 다룰 수 있을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이 때’를 '저희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때'는 성자께서 영화롭게 되시는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때'를 통과하셔야만 실로 영화롭게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를 통과하심으로써 우리 주님은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어느 누구도 사탄을 만나 이겨낼 수 없었으며 사탄이 잡은 사망의 세력을 무찌를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4).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그 일로 인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잠시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이런 방법으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이 때는 우리 주님께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암시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27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다음 예수님은 스스로 대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제 생각에는 이 때가 주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바른 방식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임박하였음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때'에 직면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혼이 민망했지만 아버지 하나님께 이때에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끝까지 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때에 대해서 언제나 알고 있었으며, 이때를 위해서 하늘에서 오셨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여 영광 가운데 하늘로 돌아가실 것을 확실히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사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후에는 반드시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라고 증거하면서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어째서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장래의 영광과 부활의 승리를 어떻게 미리 아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구원을 가능하게 해 줄 이 결정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어떻게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라든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민망해진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을 매우 간단한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육체의 죽음을 심각하게 두려워한 나머지 육체적으로 움츠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심히 고민하셨으며,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지라 그 육신의 죽음의 고통을 생각하며 영혼이 움츠러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당하게 될 육체적 분리의 고통을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매우 큰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이신 우리 주님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참 애석하게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설명은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순교자 정도로도 여기지 못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우리 주님의 지식과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고 화형대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육체적으로 죽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렇게 했다는 주장은 우리 주님을 신자들이나 순교자들보다도 더 아래로 격하시키는 어불성설(語不盛設)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설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 차원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논리 차원에서 이런 일을 보고 설명하려는 것은 실로 비극이며 무지의 극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과연 무엇 때문에 움츠러드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영혼을 고민에 빠뜨린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때에 일어나게 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쓰셨고 따라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총체적인 진노가 자기의 한 몸과 영혼에 쏟아질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움츠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용기 있는 사람이 가끔 있어서 그들이 육체의 고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성도들이나 순교자들은 더더욱 그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는 그 고통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움츠러든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아버지 하나님의 처절한 버림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간에 계속 되어 왔던 그 사랑과 신뢰와 하나됨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음속에서 심각하게 꺼렸던 단 한 가지 일은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 속에서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가 나타나 자기를 향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때에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은 속죄 제물로 드려질 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가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실 그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가공스럽고추하고 비열한 존재로 보시게 될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자께서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너무나 민망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할까?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인류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는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때를 위해서 세상에 왔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때를 참아내지 못한다면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으시다. 그러니 내가 그 때를 견뎌내리라.” '그때', 이 얼마나 놀라운 순간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즉 그 한순간에 수반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고뇌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고민이 되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자신에게 쏟아졌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로마 병사들이 와서 보고 예수님이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죽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빨리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신속하게 죽으신 이유는 심장 파열 때문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심히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 한 순간도 분리된 적이 없었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자기의 아버지로 바라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의 얼굴을 대면해야 한다는 바로 그 끔찍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적나라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진노가 그 한 몸에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끝까지 견뎌내셨습니다. '그때'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의 여러 가지 결과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2:31에서 예수님은 매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이때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때'는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시작하였지요? 우리는 역사상 여러 차례 중요한 시점들이 있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때'를 생각해 본다면 그 다른 모든 때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 때가 바로 '그때' 였습니다. 죄의 흉악한 몰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때가 바로 '그때' 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전체 상태가 다시 한 번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과연 마땅히 그것을 옳게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가 너무나 악마적이고 비열하기 때문에 그 무서운 때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온 세상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의 운명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즉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을 화해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여러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육체 안에서 심판을 받든지 아니면 여러분 안에서 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고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처럼 고통스러운 때를 당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길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때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믿든지, 아니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에서 저주받고 마침내 심판받을 세상에 속해 있음을 알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인데 그때는 심판을 목적으로 오실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대면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에게 속하든지 속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의 입장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책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책에 속해 있으면 이미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죄받고 멸망하고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십자가에서 선언된 것입니다. 비록 그 '심판'의 실행이 연기되었고 지금도 연기되고 있지만 이미 선포된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채 죽은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세상에 속해 있으며, 세상은 이미 심판을 언도받았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임금이 내쫓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패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미 마귀를 패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지금까지도 공작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자기가 주님을 최종적으로 이겼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탄은 부활의 진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모든 권세와 정사들을 멸하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는 십자가가 일생 일대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으므로 마귀가 승리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예수님의 죽음이 오히려 예수님의 가장 큰 최종적 승리로 판명되었으며,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탄은 결국 멸망당한 것입니다. 마귀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이미 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귀는 이미 내어 쫓긴 바 되어서 아무런 권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즉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패배하였습니다. 불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 때는 얼마나 놀라운 때입니까? 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 때에 속한 것들을 알고 깨닫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시간에 속한 것이고 역사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념이나 사람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홀륭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 일은 문자 그대로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고, 내 죄를 위해서 그때를 통과하셨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 믿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고 믿는 저는 '그때'가 바로 영원한 멸망에서 내가 구원받은 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2:47. 48에서 그 엄숙한 사실을 다시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신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심판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이때에 심판받았고, 세상도 이때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로 하여금 죄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진상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일이 모든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나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이 내 생활, 내 목숨, 내 모든 것을 주장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분은 나의 주님, 나의 상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패의 원인은 '이 때'의 의미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으며, 죄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데 있으며,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 있으며, 그분을 믿지 않은 결과가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놀라운, 의미심장한 절정의 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때에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공할 만한 고뇌와 고난을 참아내심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