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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국제PEN한국본부경기지역 위원회)
등단 그 함수(函數) *草稿입니다.
이원우
略歷/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 국제PEN경기지역위원회 운영위원 -대한가수협회 회원(콘서트 17회) ‧ 26사단 홍보대사 ‧ 전 초등학교장/ 著書-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 등 2권 ‧ 수필집 <죽어서 개가 될지라도> 등 15권 ‧ 기타 3권 총 20권/ 賞-화쟁포럼 문화대상(문학) ‧ KNN 부산방송문화대상 ‧ 허균문학상 ‧ 한국수필 재정 청향문학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부산북구 문학상 ‧ 부산가톨릭문학상 ‧ 부산수필대상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본상) ‧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아동도서 지원) ‧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등
전금순 (소설가 혹은 수필가)에겐 너무나 소중한 자료가 하나 있다. 지금부터 20년 전 어느 문화재단에서 발행한 <한국문인 인명사전>이란 소책자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남들은 의아해하리라.
하지만 천만에! 전금순 소설가는 그걸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부둥켜안고 있을 정도이니, 그에게 그 값어치를 따져서 뭘 하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그 외관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책장이 닳을 대로 닳아서 한 페이지씩 넘기기가 조심스러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가끔 독백처럼 내뱉는 말이 이렇다.
“이 <한국문인사전>이야말로,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보물!"
그의 <한국문인사전>에 대한 사랑은 이 일화 하나로도 증명된다 하자.
그는 얼마 전 충격 그 자체인 고비를 한 번 넘겼다. 남편을 잃을 뻔한 것이다. 그때, 그이가 떠나기 전 뭐든지 하나씩 일찌감치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택한 것이 ‘장서(藏書) 없애기’였다. 뭐 그리 많지는 않다. 2천권 남짓이니, 그저 장삼이사의 수준이라고 하자. 물론 문학잡지나 기타 동인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제외한, 제법 쓸모 있는 서책들이다. 그것들을 그는 작은 트럭 한 대를 빌려 손자가 복무하는 26사단 7*여단에 보낸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여단 본부와 12* 기보대대, 1*1 기보대대, 5* 전차대대, 사단 직할 공병 중대 및 정비 중대….마침 군악대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는 가수, 저 동방신기의 유노윤호(정윤호) 일병의 팬들이, 엄청난 양의 신간 도서를 12* 기보대대에 들여 놓는 바람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 당시의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우습기도 하지만, 돌이켜보자.
전금순의 손자 박청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ROTC 소위로 임관하여 12* 기보대대 인사과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윽고 중위로 진급하였는데, 제대 말년에 사단 군악대에서 가곡을 가끔 부를 기회가 생겼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일등병인 유노윤호를 만난 것이다. 세계에 이름을 떨치던 그 유노윤호를 말이다. 유노윤호는 입대한 지 몇 개월인 일등병이었다. 유노윤호의 모범 병영 생활 이모저모가, 귀신도 모르게 새어나와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인터넷은 양주시민을 위한 정기 연주회에서의 그의 모습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윽고 그는 병사의 최고 영예인 특급 전사로 뽑히게 되었다더라.
박청 또한 제대 후엔 대학원에 진학,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악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교수로 남아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희망인들 왜 아니 가지랴. 외국 유학의 꿈도 꿨다. 해서 장기 복무의 유혹을 물리치고 전역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나이는 박청 중위가 한두 살 밑이지만, 군은 어디까지나 계급 사회 아닌가? 공과 사를 엄연히 구분하다 보니 둘의 인간관계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또 아름답게 유지되었다.
그런데 유노윤호의 팬들이 본부중대에 신간 도서 '물량 공세'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추정으로 넘겨짚어도 그 정도라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어안이 벙벙하다 한들 누가 이의를 걸랴.
생각해 보면 군악대는 본부 중대 소속이니 팬들의 결정은 맞다. 그 도서관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능사가 아니다. 군의 특수성, 혹은 유노윤호의 명성과 어긋나는 결과를 갖고 올 수 있어서다. 외출 때 팬들을 잠시 만난 유노윤호는 그들을 설득한다.
“여러분의 정성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무하는 동안에는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고, 12* 기보대대에 보내 주십시오. 어느 선배의 말씀에 의하면, 다른 어떤 대대 단위 부대보다도 병사들이 책을 열심히 읽는 답니다.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국군 용사인데, 맨날 <무협 소설> 따위나 읽어서야 되겠습니까?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그 양식(糧食)을 제대로 비축하면 우리 군의 전투력이 증강되는 거 아닐까요? 여러분은 그 첨병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전금순은 휴가 나온 손자로부터 들었다. 그래 더욱 그는 7*여단에 도서 보내기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도 문단 데뷔 41년이라서 그런지 하루에 한두 권씩 전국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문학도서가 배달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죄다 읽거나 보관하는 건 아니다. 병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고 판단되면, 서른여덟 권 정도를 상자에 넣어 우체국으로 손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다. 그 기준은 앞서 들먹인 <한국문인 인명사전>이다. 거기 수록된 작가가 우선이고말고.
다행히 전금순도 이젠 어느 정도 정상(正常)에 가까운 일상을 보내고 있게 됐다. 하지만 책은 그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러다가도 또 무슨 덜컥 화가 생길지 누가 알랴. 뭐, 그런 뒤 자식들에게 책을 남겨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문도 해 보았지만, 자답은 항상 이렇다.
“아서라! 학술 서적이라면 대학 도서관에라도 기증하겠지. 까짓(?) 이 소설집이나 문집, 시집 따위를 어디에 들고 간다는 말인가? 처분한다고 자식들 고생만 시킬 따름일 걸….그렇다고 해서 고물상을 부를 수도 없고 말이야. 까짓 몇 만원에 어미의 명예를 파는 것도 자식의 가슴에 멍을 들게 하는 짓. 보내자, 손자가 군복을 입고 지내는 7* 여단으로! 아니면 차라리 버리자.”
어쨌거나 그 선별의 기준 중 가장 으뜸가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한국문인 인명사전>이란 뜻이다. 얼마나 그 책자가 비중이 있는 건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으리라.
이제 그 첫 장을 넘겨 보자.
‘문학인과 독자의 마음을 이어주는 촉매가 되길’이라는 소제목이 눈길을 끈다. 6년 전인 1987년에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전제를 깔고, 그걸 거울로 삼아 재도전에 나섰다고 했다. 우리나라 문인이 5,000명을 넘을 시점의 일이었다나? 하여튼 세 차례의 지난(至難)한 과정이 있었으니 아래와 같았단다.
첫째, 기사가 너무 넘쳐 일부 삭제가 불가피했다.
둘째, 작품과 작품집을 차별화하지 않았다.
셋째, 작품집의 성격을 구분하지 못했다.(시집이냐 수필집이냐, 장편소설이냐 단편소설이냐 창작집이냐를 밝히지 못했다는 뜻이란다.)
하여튼 3,000명에 약간 못 미치는 <문학인명사전>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었다. 1993년 8월이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사반세기가 지났으니 이 책을 가진 문인은 누구나 금석지감을 갖게 된다.
본인에겐 대단한 결례지만,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린 문인을 소개해 본다.
가영심/ 생년월일 1952년 5월 18일생/ 장르 시/ 데뷔 <시문학>(1975)/ 작품 숲 ‧ 네온사인(75) 들꽃들의 소리(78) ‧ 순례자의 노래(81) ‧ 모래 산을 허문다(85) ‧ 타는 장작더미 속에서(90)/ 평론 기독교문학비평(안수환) ‧ 한국현대시인연구(채수영)/ 학력 상명여대 ‧ 상명여대대학원/ 경력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현대시인협회 감사 ‧ 한국여성문학인회원 ‧ 한국크리스찬문학인 회원/ 상 상명문학상 시부문 당선(73) ‧ 복사골 문학상(92)/ 현직 유한공전 강사/ 주소 경기도 부천시 중구(이하 생략)
전금순은 열 살이나 아래인 이 시인의 얼굴과 프로필을 볼 때마다 탄사를 쏟는다. 스무세 살에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했고, 작품도 많이 썼다. 얼른 보아 미인이다. 요즘처럼 마구 뿌리던 시절이 아닌데, 문학상도 두 개나 받았으니….
근데 등단(데뷔) 20년이 가까웠으면서 시집(詩集)은 왜 한 권도 선보이지 않았을까? 가끔 아쉬움을 전금순은 시인에게 간접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전금순 자신의 것은 너무 초라하여 들여다보기조차 민망하다. 그래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적어 보자.
전금순/생년월일 1945년 7월 6일 /장르 수필 /데뷔 <새교실> ‘지우문예’ (76) ‧ <수필문학>(77) ‧ <한국수필>(83) / 작품 몰운대의 안개 外 /작품집 <바람결에 말하다>(82) ‧ <아버지의 초상화>(90) ‧ <서산에 해는 지고>(92) / 학력 고등학교 졸 /현직 초등 교사 /주소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이하 생략)
다시 밝히지만 전금순은 둘을 비교해 보면서 너무나 한쪽이 기우는 것 같아 자주 얼굴을 붉힌다. 스물세 살과 서른셋이라면 7년의 간극이 있다. 학력(學歷)도 6년 차이라 주눅이 든다. 각기 대학원 졸업과 고등학교 졸업이지 않는가? 상(賞)도 비교되고말고. 현직이야 전문대학 강사와 중등학교 국어 교사라니 움츠릴 필요가 없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명예를 중히 여기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금순인들 어찌 거기서 자유로울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래 전에는 고등학교 과정인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무시험검정으로 교사가 된 경우가 많았다. 대신 그들은 굉장히 수재들이라 특차라 하여 입학시험을 치른 3년 과정을 마치면, 초등학교 교사(2급 정교사)로 발령을 내 준 것이다. 가끔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검정고시를 거쳐 일정 기간 교육 뒤 준교사로 출발하는 교사도 많았다.
전금순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일찍이 일류 여자 고등학교를 거쳤었다. 하지만 교육대학을 마친 교사들이 많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솔직히 말해 자격지심(自激之心)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시골이라도 어디든지 발령을 받아 가면 동료들이 넌지시 물었다.
“전금순 선생님, 어느 교대 나오셨습니까?”
“혹시 사범학교 졸업하셨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까지야 되었으랴만, 솔직히 기가 죽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 부산에서 여자고등학교만 나왔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니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얼버무릴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그 비밀(?)이 끝까지 감추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전금순 교사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스물아홉 살 때였다. 김승우 교수가 발행하는 <隨筆文學>이라는 수필 전문지가 있다는….그는 소스라쳐 놀라면서도 쾌재를 불렀다.
당시만 해도 밀양시(군)에서 소위 문인은, 문화원장 등을 비롯해서 서너 명도 안 되었다. 그나마 그들 중에는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러니까 시집(詩集)이나 수필집 혹은 수기(手記) 비슷한 걸 한두 권씩 발행해 놓고 문인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필문학>의 유혹은 달콤했다. 거기 귀가 솔깃해진 전금순 교사는 부르짖었다. 2회 추천완료(이하 천료)하면 기성문인으로 대우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데, 이 어찌 가슴 벅차지 않을쏘냐.
이미 그는 어느 정도 믿는 터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전문월간지 <새교실> ‘지우문예’ 3회 천료를 했었던 거다. 그건 예비 관문 아니냐고? 물론 맞다. 정식 등단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지우문예’만으로도 수필가 행세를 하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어느 교장이 대표 인사다. 그의 약력을 보면, ‘66년 수필로 등단’이다. 그런 잡지는 당시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해 오랫동안 행세하고 있더라.
어쨌든 <수필문학> 천료도 그리 힘들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문재가 부족하고 가방끈이 짧아도 두서너 해 혼신의 힘을 쏟으면 승부가 나겠지. 마침 그해 전금순 교사는 읍사무소 남직원과 혼담이 오가다가 끝내 한 가정을 이루게도 되었다.
이듬해 시오리쯤 떨어진 분교장(分敎場)에 자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본교보다 시간 여유가 많으니, 원고지와의 씨름에 전부를 투입할 각오였다. 그만큼 전금순 교사는 수필가로서 세상에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고 싶어서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남편은 자전거로 통근을 하였다.
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를 하려니 지금도 웃음보가 터진다. 전금순 교사가 부임해 본즉 이런 세계가 있을까 싶도록 별천지였다. 그때까지 동네의 선각자로 이름나 있던 김고봉 씨의 서당이 교실이었던 거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공간 두 개에서 복식 수업을 했다. 김고봉 씨는 다행히 젠체하지 않고, 협조를 잘해 주었다. 한데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운 일 하나. 태극기보다 김고봉 씨의 초상화가 더 높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 사택이라고 하나 내 주는 것도 김고봉 씨의 사랑방과 조그만 별실 하나가 전부였다. 물론 취사 시설은 되어 있었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곧 양수(揚水) 발전소가 들어설 계획이라, 낙동강 물을 끌어 올릴 저수지를 만든다고 했다. 마을 일부가 매몰될 직전이란다. 2년만 버티면 되는데 새로 교사(校舍)를 짓기도 무엇하여 예산 절감 차원에서 부득이하게 엉거주춤하게 지낼 따름이라고 했다.
수필 등단이 목적인 전금순 교사에게는 그런저런 정황이 딱 안성맞춤이었다. 어린이들을 다 합해 봐야 6명이었다. 2학년 3명, 6학년 3명. 복식 수업을 했다. 가르치는 일만 끝나면 별도로 매달려야 할 잡무도 적었으니까. 비로소 ‘창작’이니, ‘수필작가’니 하는 약간은 고급스러운 용어에도 전금순은익숙해졌고말고.
그는 밤낮으로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가르칠 때도 쉬는 시간에 대비해서 원고지를 책상 위에 얹어 두고 씨름했다. 전기가 끊기는 때가 가끔 있어 호롱불 혹은 촛불을 켜놓고 그 밑에서 힘든 작업에 두서너 시간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노라면 콧구멍이 새까매졌다. 다행히도 남편은 너무나 다행히도 그런 전금순 교사 아니 아내를 잘 이해해 주었다.
다만 그에게 견디기 힘든 게 하나 있었다. 30호 가까이 남은 동네에서 주민들이 걸핏하면 개를 잡아먹는 게 아닌가! 게다가 멀리 사는 사람들도 트럭에다 황구(黃狗)며 백구들을 싣고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교실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저수지 가에서 그 불쌍한 녀석들을 두들겨 팼다. 그리고 가마솥을 걸고 장작을 땠다. 어린이들도 가끔 그걸 볼 수밖에. 한 번은 그릇에다가 그 개 고기 수육을 한가득 담아 선생님 대접한다며 들여놓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아니 전금순 교사는 질겁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결심한다. 개는 사람의 먹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걸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려자. 도시에서 혈통이 있는 포메라니언 순종, 생후 일곱 달 된 암캐 한 마리를 비싼 값 치르고 사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을 애지중지 길렀다. 다분히 의도가 곁들여진 그만의 결단이었다. 그는 혈통서를 교실 벽에 태극기 아래에 게시해 놓고,
“얘들아, 너희도 족보가 있지? 우리 집 엘리사벳도 족보가 있어. 아끼고 사랑해 주렴.”
이윽고 그 앙증맞은 게 발정이 왔다. 전금순은 큰마음 먹고 부산에까지 택시로 가서 교배를 시켰다. 그리고 두 달 뒤에, 네 마리의 강아지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전금순이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원고지에다 옮겼는데,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였고말고.
그게 <수필문학>초회 추천을 받은 것이다. 도전장을 내민 지 1년 2개월 만이었다. 김금순 교사는 정말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고졸 뒤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국민학교 준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의 기분에 버금갔다고나 할까? 마흔네 번째의 작품이었다. 물론 연수를 받고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였다. 그리고 방송대 2학년에 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도 했다.
그런 뒤 일이다. 그는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저 ‘오수의 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현지 한 번 방문 길에 나선다. 남편과 함께 일박이일 계획으로. 마침맞은 연휴가 있어 그리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린이들한테 좋은 교훈이 될 것 같기도 해서였다. 집을 비우려니 엘리사벳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케이지(Cage) 안에서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을 무렵이어서 눈 질끈 한 번 감기로 했다. 당시 처음으로 선을 보이기 시작한 개 사료를 넣어 주고는, 어린이들에게 번갈아 봐 달라며 부탁을 했다.
과연 오수의 개 의견비가 서 있었다. 비문에는 그 유래를 적어 놓았더라. 교과서를 통해 가르치거나 남들의 전언에 의해 퍼진 소문 따윈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전율을 그 자리에서 둘은 느꼈고말고.
그런데 시장기가 있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눈에 들어오는 신장개업 식당이 하나 있다. 신*집….전금순은 남편과 함께 부리나케 그 집 문을 밀쳤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우뚝 서고 말았으니 세상에 식단 안내판에 분명히 적혀 있는 게 이거였다. 영양탕(보신탕), 삼계탕….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더 이상 서 있을 엄두조차 나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의견비와 신*집은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어쨌거나 수필 전문지에서의 초회 추천!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건 극성 중의 극성이 가져 온 열매였다. 잠시 되돌아가 보자. 당시 <수필문학>은 추천 응모작 평(評) 란을 별도로 두고 있었는데, 전국에서 한 달에 수십 명씩 초회 관문이라도 뚫으려고 열정을 쏟아 붓고 있었다. 전부를 평할 수 없어서 대개 여남은 작품을 골라 이런저런 잘잘못을 친절히 일러 주었던 것이다. 편집부에선 항상 전금순의 이름을 맨 먼저 올려 주었다. 호평은 아니었다. 다만 전국에서 ‘가장’ 열심히 쓰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는 단서를 달아 주었으니 당사자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한편으론 애가 탈 노릇이었고말고.
그로부터 그는 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멈출 수 없지 않은가? 참 추천을 한 차주환 교수는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분 격려 편지를 보내 준 적이 있었다. 너무 신변잡기에 머무르는 영향이 있으니 과감히 탈피해 보라는 충고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집에서의 충격이 너무나 컸다. 그날 이후엔 더 극성스럽게 ‘개’와 ‘개를 소재로 한 수필 창작’에 매달릴밖에. 여전히 한 달에 두어 편씩 써서 <수필문학>에 보냈다. 특히 보신탕을 혐오하는 투로 초지일관하다 보니, 급기야는 밉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추천 응모작 월평에 여전히 전금순 이름 석 자를 올리면서도 평자(評者)들은 그의 수필을 예전보다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그는 신음한다. 그리고 내뱉는다. 평자들 중 일부분이 보신탕을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세월이 흘러 전금순은 본교에 와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는 여전히 원고지며 연필과 더불어 살았다. 개도 키웠다. 4학년을 맡았을 때 클럽 활동 부서로 애견부를 만들었으니, 그의 개에 대한 ‘일편단심’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장학사가 왔는데, 포메라니안을 데리고 와서 교실에서 목욕을 시키는 장면을 전금순이 보여 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아지의 항문을 짜는 법까지 연출했다. 그는 방안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그래야 질병을 예방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가족들이 악취로부터 벗어남은 물론이고. 그날 장학사는 말입에 침이 말랐다.
“이건 유사 이래 처음입니다. 클럽 활동에 애견부라니요? 더구나 어린이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전금순 선생님의 주장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수 사례이고말고요. 홍보해야지요. 우리 교육청 <장학 회보>에도 싣겠습니다.”
그런저런 사연으로 세월은 흘러도 여전히 전금순 교사의 <수필문학> 추천은 요원하였다. 거기 비례해 그 고집 하나 어지간하다는 세평도 돌아다닐 수밖에. 당시 수필문학을 겨냥한 예비 수필작가들에겐 하나의 전설이었다 하자.
흐르는 세월을 감당할 자 아무도 없다. 전금순, 수필과 개를 제외하면 한갓 필부(匹婦)인 그도 어느덧 나이 먹고 슬하에 일남일녀를 둔 중년 여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한 대사건이 터진다. 한창 부산의 초등 교사 부족으로 교육 당국이 갈팡질팡할 때에 이런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부산 시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 중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부산으로 전입시켜 준다는….
전금순 내외는 거기 따르기로 했다. 애들이 자라면 교육 문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의 다음 근무지가 어디로 바뀔지가 염려된다는 게 큰 까닭이었다. 신간 벽지로 떠돌 신세가 될지 모른다. 서둘러 서류를 냈다. 백 퍼센트 보장이라기에 집도 구포 근처에 하나 얻어 놓고 부부가 통근을 했다.
통근 열차 (완행이다)는 모든 게 열악했다. 연착은 예사였고, 의자도 낡을 대로 낡았다. 정말 전금순이 못 견딜 것은 객실 안의 백열등이 너무나 희미하다는 것이다. 그게 뭐 대수냐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전금순으로부터 삿대질을 당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는 여전히 죽자사자 원고지를 무릎 위에 얹어 놓고 수필을 끼적거리며 한 시간 내내 버티기 예사였으니까.
마침내 1년이 흘렀다. 그는 부산 전입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전금순은 여전히 등단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 82년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내몰리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수필문학>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고백을 빌리자면 자신은 사법고시 공부 이상으로 수필 창작에 매달려왔다.
그의 푸념을 거듭 들어 보자. 검사나 판사 혹은 변호사보다 지명도(知名度)를 높이는 데는 문인이 되레 첩경에 서 있다. 문학은 자아실현의 방편이다. 그 명제를 가슴에 부둥켜안고, 초회 추천 후 일고여덟 해 간난과 신고를 거듭하면서도 견뎌 나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리고 지금 밝혀도 될 게 하나 있다. 개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4월쯤 추천 완료를 기대해도 좋다는 언질이 차주환 교수로부터 있었던 것이다. 김태길 교수도 한 몫 거들었고. 전금순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절망의 목소리였다. 두 달만 더 기다리다 폐간을 해도 폐간을 하지! 오호통재라(정말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것만큼의 충격이 있어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수필 문학>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난 뒤 1년간 전금순은 삶의 의욕을 잃었지만, <한국 수필>이란 또 하나의 사랑 대상이 그의 곁에 다가온 것이다. 그는 허리를 졸라맸다.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애견 사랑’을 버리기 쉽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소재를 찾아내 집필에 전념한다. 조경희 회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여태까지의 헌신이 너무나 억울하다고 구구절절 눈물겨운 소릴 보탰다. 그런 뒤 구원의 길을 열어 달라고 하소연을 덧붙였고말고.
그분은 회답했다. 83년 봄 호에 천료의 통보를 해 준 것이다. 드디어 전금순이 문단에 그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는 환호작약했다. 온 세상을 홀로 얻은 기분이었다고나 하자. 그 뒤로부터 그와 조경희 회장은 급격히 사이가 가까워질 수밖에. 그 한 가지 예.
영남과 호남의 등단한 수필 작가들이 힘을 합해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창간호 이름은 <황산벌과 낙동강에 핀 꽃>. 네 명의 편집위원 이름에 전금순 석 자가 들어 있었으니, 정무장관이기도 한 조경희 회장은 좋아하였다. 이듬해 2호 때는 전금순이 주간(主幹)을 맡는다. 2호 출판기념회를 부산에서 열게 되었다. 서면 뉴아시아 호텔에서였다. 전금순이 사회를 맡았다. 재부 호남 향우회장 박 변호사도 그가 애를 써서 모시는 데 성공하였고.
아무튼 그로부터 그는 부산 지역 문인들에게 조금씩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다. 63년에 출범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 동인회인 <수필> 동인회에도 무명(無名) 인사로서 처음 가입하기도 한다. 하나의 기록을 그가 쓴 셈이다. 그는 날개를 그렇게 달고 훨훨 날았다. 학력 콤플렉스? 그것도 벗어났으니 방송대 5학년을 거쳐 이윽고 석사 학위까지 얻었으니까. 책을 내면서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라고 날개에 기록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편도 부산으로 전입하여 구청에서 사무관으로 승진하였으며, 애들도 말썽 없이 잘 자랐고 학교 성적 또한 우수하였다.
그동안 수필집도 여러 권 내었다. 부산 문단에서 그 양을 따지자면 전금순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참, 여전히 개를 길렀는데, 요크셔테리어 암컷 우드(나탈리 우드에서 따온 이름)가 새끼를 낳다가 그만 숨을 거둔 것이다. 녀석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그에게는 사돈(개 사돈)인 승혜 씨는 서울에 살았다. 전금순이 자신의 능력으로써는 수필 창작에 한계를 드러냈다는 판단을 한 것이 우드가 죽은 그 무렵이었다. 유해를 통도사 밑 냇물에 흘려보내면서 남편, 아이들과 한없이 울었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날부터 두어 주일 동안 녀석을 보내는 심경을 수필로 그렸다. 눈물샘에서 솟아나는 혈루(血淚)가 뺨을 적시고 원고지를 온통 얼룩덜룩하게 덧씌웠다.
쓰고 또 써도 녀석과의 몇 년 추억을 담기에는 수필이라는 그릇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두드린 문이 소설이었다. <문예시대>라는 문학잡지가 있어, 거기에 얼룩진 ‘내 사랑 우드와의 이별’이라는 제하에 100장을 메꿔 추천 응모작이랍시고 들이밀었다. 처음에는 곧 추천해 주겠다는 반응이더니, 시일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전금순과 사이가 나쁜 어느 대학 교수가 무슨 철천지 원수라도 되는 양 기어이 퇴짜를 놓는 것이다. 교수의 해코지에 전금순은 이를 갈다시피 했다.
그 친구가 있는 한 부산에서 소설가 되기는 틀렸다고 전금순은 진단한다. 순간 섬광이 그의 시야 앞에서 번쩍했다. 서울을 향해 화살을 시위에 걸고 그걸 하늘 높이 쏘아 올리자고 다짐을 한 것이다. <한글문학>이라는 그래도 튼실한 문학잡지가 있었는데 그게 과녁이었다. 무명에다가 맞춤법도 안 맞는 지방 대학의 어느 교수와는 단칼에 모든 연을 끊을 각오도 했고말고.
결과가 좋았다. 서울대학교 구인환 교수가 소설 부문 신인상 수상자로 전금순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참, 다른 한 작품은 ‘어느 싸움개의 불임기(不姙記)’였다. 그는 길길이 뛰었다. 자기 애견을 사돈집에 맡겨 놓고 하루 지나 신방 한 번 더 차리는 걸 보러 갔을 때, 녀석이 반가워하는 모습을 자신이 재현한다 싶어 고소를 날렸다. 둘 다 개를 소재로 한 단편이었으니 녀석들과 전금순은 천생연분 아니고 뭔가.
적어도 문학에서만은 전금순은 후회할 일이 없다. 책도 이래저래 스무 권 가까이 썼고, 상도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문학상도 일고여덟 개다. 서로 뒤죽박죽이 엉겨, 뭐가 비중이 큰 문학상인지 판단 능력이 여느 문학도처럼 금순에게도 없는 게 안타깝다. 문학 외의 상도 더러 있다. 최고 우위를 점하는 정년퇴임 때의 황조근정훈장이다. 글쎄 그걸 준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어 씁쓸하지만.
한데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앞서 언질을 깔았는데, 남편이 지나친 애주에다 과로가 겹쳐 신장이 망가진 것이다. 천만 다행히 아들이 자기 것을 하나 기증해 주어 이식에 성공했지만, 결코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전문의 중의 전문의가 집도했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 가까운 분당에서 대기(?)하는 게 좋을 듯하여, 그리로 이사를 했다.
문학은 전금순에게 삶의 지상 목표며 그 과정이다. 해서 그는 서울을 비롯한 그 근교(近郊) 도시의 문학 관련 행사나 모임에 얼굴을 자주 내민다. 동료들과의 대화 중 다른 건 꿀릴(?) 게 없는데, <수필문학>만 생각하면 어 뜨거라 싶은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수필문학> 추천’이라 내세우려니, ‘천료’라 큰소리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초회 추천이라고도 가끔 밝히지만, 그 또한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122편을 무려 5년 동안 우편으로 보냈는데, 그 중 한 편 추천? 남들이 뭐라 할 것인가 말이다. 지독하게도 문재 혹은 인간관계가 부족한 사람이라 폄훼할 것은 명약관화한 노릇.
오죽하면 전금순은 이런 생각까지 할까? 그래 차라리 지금 말이다. 같은 제호(題號)에다 그럴싸한 수준으로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 <수필문학>에다 하소연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김승우의 <수필문학>에서 추천을 받고, 강석호의 <수필문학>에서 2회 천료를 했다! 금순이 만약 고개를 숙이고 그걸 실천에 옮긴다면 그건 한국 수필 문단사에 새로운 기록이리라. 저승에 있는 차주환 교수도 전금순을 보고 혀를 내두리라. 요즘엔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김승우 교수의 부인이 와병 중이라니 찾아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자신이 죽어야 그런저런 모든 인연에서 벗어날 것 같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예사다.
아무튼 추천 완료에는 오묘한 함수가 도사리고 있다 하자. 전금순의 <한국 문인 인명사전>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새삼 강조하건대 앞으로도 모여질 책을 골라 군부대에 보내려면 이게 필요불가결한 잣대이고말고.
마지막 참고로 <한국 문인 인명사전> 중, 전금순을 소설가로 만들어 준 구인환 교수의 프로필을 그대로 옮겨 보자.
구인환 / 생년월일 1929년 9월 16일 /장르 소설/ 데뷔 문예(60) ‧ 현대문학(61) /작품 동국주변 ‧ 판잣집 그늘 ‧ 산정의 신화 ‧ 벽에 갇힌 절규 ‧ 움트는 겨울 ‧ 뒹구는 자화상 ‧ 촛불 결혼식 ‧ 샐비어의 정열로 벽돌을 ‧ 일어서는 산 ‧ 별들의 영가 및 동트는 여명 ‧ 불타는 서울 /학력 서울대 ‧ 서울대 대학원(문학 박사) /경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 한국평론가협회 부이사장 /상 주요섭 문학상 ‧ 한국소설문학상 ‧ 한국문학상 ‧ 서울시 문화상 /현직 서울대 교수 /주소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우성아파트(이하 생략)
1여 년 전, 금순은 20년 전의 이 은인 구인환 교수를 자택으로 찾아가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 생전 처음이다. 아흔 살 가까운 노 교수를 만나 ‘살아 계신 주’를 봉헌하고 돌아 나왔다. 구인환 교수와 전금순은 가톨릭 신자다. 도우미 자매도 개신교 신자라, 이 복음 성가는 익혀 알고 있어 셋이서 소리를 드높였다.
회장님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카페에 콩트를 올렸는데, 아무래도 비중이 떨어지는 것 같아 다시 소설이랍시고 한 편을 다시 창작해 회장님께 보냅니다. 아직 퇴고 단계라 망설여졌습니다만, 내일 다시 여러 번 들여다보고 고치기로 하고 일단 메일에 싣습니다. 아마 80장 안팎이 될 겁니다.
여담입니다.
‘…的’이란 일본식 표현의 찌꺼기라 해서 그걸 피하느라 고충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으로 인하여’ 와 ‘…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더군요. 역시 떨어뜨린다고 애를 썼습니다.
교정(퇴고) 마친 원고 내일 오후엔 회장님의 메일 공간을 채울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진도 보내겠습니다.
이원우 올림
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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