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복음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 마틴 로이드 존스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복 있는 사람)
2009. 4. 8. 수 밤 11시 39분
20세기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복 있는 사람)를 읽었다. 얇은 두께에 비교적 평이한 문체로 된 글이라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 이동 중에 붙잡고 읽었다. 원제는 “What is an Evangelical?”이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로 번역되었지만, 복음주의자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책을 읽는다면,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어쩌면 매우 평이해 보이는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이 짧은 강연집의 무게는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이 책의 원서는 1992년에 유명한 ‘The Banner of Truth Trust’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어판 번역은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하신 이길상씨를 통해 2004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내가 읽은 책은 2007년에 인쇄된 초판 4쇄본이다. 책은 136쪽으로 편집되어 있고, 소책자 정도의 크기다.
책 겉표지 뒷면에 보면 “진정한 복음주의자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복음주의”라는 제목 아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간략한 배경이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복 있는 사람’ 출판사의 편집부에서 작성한 글인 것 같은데, 로이드 존스를 정말 ‘진정한 복음주의자’로 생각하기에 이 글을 썼는지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구사된 레토릭의 성격이 더 강한지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한국에서 IVF로 소개되어 있는 대학생 선교단체의 국제 연합 기구인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FES)를 오랫동안 지도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1971년 IFES 컨퍼런스에서 세 차례의 강연을 했다. 그 때의 강연을 담은 것이 이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20세기 복음주의는 대체로 영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영국은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의 보고인 청교도주의의 발원지 중 하나며, 현대 복음주의의 핵심 지도자인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 마틴 로이드 존스를 배출한 국가다. 현재 영국은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21세기 복음주의권의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를 통해 그 지도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이 1971년 IFES 컨퍼런스에서의 강연이라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잠깐 설명해 보자. 이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 때문인데, 이안 머레이의 <분열된 복음주의>(부흥과개혁사)를 참조하면 그 의문이 풀린다.
영국에서 ‘복음주의’ 전통은 크게 구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로 구분된다. 구복음주의란 ‘오래된 복음주의’ 또는 ‘옛 복음주의’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국이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있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저교회파(low church)’를 지칭하기도 한다. (참고로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 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고교회파와 복음주의 신학을 따르는 저교회파로 분류된다.) 구복음주의는 20세기 초반까지 영국 성공회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기독교인 집단을 가리켰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종교개혁과 그에 따르는 개신교 정통 신학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따라서 영국에서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마틴 로이드 존스로 대표되는 개신교 정통 신학을 따르는 (잘못하면 근본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구복음주의를 의미했다. 이런 의미의 복음주의자들은 영국 성공회 내부에서 비주류 세력으로 따돌림을 받았고 이해할 수 없는 집단으로 외면 받았다. 이들은 가톨릭 신학이나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세력에 속하는 영국 성공회 주류인 고교회파와 연합하거나 교제하지 않고 따로 모여 교제를 나누며 전통 복음주의 신앙을 고수해 왔다. 로이드 존스는 이 무리의 지도자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는 로이드 존스 보다 뒤에 등장한 복음주의 지도자였다. 신학적 자유주의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의 지도를 받았던 IVF는 당시 구복음주의 신앙을 대학생 그룹에서 유지하고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67년은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에게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 등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1회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 대회’(약칭 키엘 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를 기점으로 구복음주의와 성격을 달리하는 신복음주의가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신복음주의의 결정적 특징은 (내가 보기에) 구복음주의가 믿었던 정통 교리와 믿음을 유지하면서, 비복음주의자들(예를 들면, 성공회 고교회파, 가톨릭주의자 등)과 연합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 신복음주의자 빌리 그레함의 역할로 인해 영국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정치적인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틈타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 등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여 복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자고 주장했고, 마틴 로이드 존스는 비복음주의자들과의 연합과 교제는 복음주의 신앙을 타락시킬 것이라고 경고하며 반대했다. 이와 같은 대립으로 인해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는 이 대회가 있기 전 1966년에 이미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1966년 분열 이후 존 스토트를 따라갔고, 로이드 존스는 광야에 외치는 외로운 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하여 비복음주의자와 연합하려는 흐름에 대해 크게 염려했다.
1971년 IFES 컨퍼런스에서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세 번의 강연은 1967년 키엘 대회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복음주의 전통(비복음주의자와의 분리)을 버리고 신복음주의로 전환된 당시 복음주의의 변화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기존의 ‘복음주의’의 정의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제1강과 제2강에서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배경적 고찰을 시도한다. 그리고 제3강을 통해 그는 복음주의의 본질적 구획선을 그려낸다.
교회사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의 정의,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로이드 존스가 볼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변질되는 데 있어서 이단이나 고등비평을 강조하는 명백한 자유주의 신학자의 견해는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복음주의 내부에서 미묘하고 주변적인 변화를 허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1강에서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를 올바로 정의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천명한다. 첫째로, 그 정의는 지나치게 좁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재세례파, 루터파, 칼빈파 등으로 나뉘었던 종교개혁자들이 실수했던 점이기도 하다. 둘째로, 그 정의가 너무 넓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지적이다. 셋째로, 교리를 명백히 부정하지 않지만 교리에 무관한 정의 또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은사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제2강에서 로이드 존스는 역사적 복음주의의 특징을 밝히기 시작한다. 여기서 ‘심중 유보’(mental reservation)라는 말이 상당히 중요한데, 에큐메니컬 운동과 신복음주의의 특징이 전통적인 교리 또는 신조에 공식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마음속에서는
그 동의를 유보해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쩌면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고백하지만, 실제로 개별적인 ‘심중’에서는 그 교리와 신조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한 고백이 유보되어 있다. 이와 같은 로이드 존스의 지적에 나는 크게 공감하는데,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와 신자들은 대체로 ‘명목상 개혁주의자’ 또는 ‘명목상 복음주의자’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사실 잘 모르거나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만약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것처럼 진실하고 진지하게 정통 교리를 이해하고 고백한다면 엄청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복음주의의 특징은, ①‘오직 성경’으로 대표되는 복음에 대한 명확한 강조와 고백 ②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존중과 계승 ②부정적인 것, 즉 반대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태도 ④진리에서 무엇을 빼지도 더하지도 않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게 ‘복음주의자’라는 정체성은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 성공회교인과 같은 것 보다 우선되고 근본적인 것이다. 즉, 복음주의자이기 보다 성공회 교인이 먼저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주의자일 수 없다. 또,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특히 근대 이후 대두한 합리주의(로이드 존스는 ‘이성’과 ‘철학’, ‘학문’이라고 표현한다.)를 명확히 거부하고 성경을 근본적인 판단 기준으로 여겨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중생과 회심을 강조하며, 기도와 거룩한 삶(윤리)을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또, 복음주의자는 부흥에 대해 간절히 기대하며, 설교의 우선권과 복음 전도에 관심을 갖는다.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주권을 인정한다. 여기까지 볼 때, 대체로 로이드 존스는 전통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복음주의를 정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하지만 복음주의 연합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비개혁주의자들을 배제하진 않는다.).
제3강에 이르면, 로이드 존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복음주의의 본질적 구획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 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심중 유보’를 경계하고,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매우 구체적으로 검증되고 확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복음주의의 가장 큰 구획선은 역시 ‘성경의 유일한 권위’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최고권’이라고 말하는데, 로이드 존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며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는 ‘교회의 전통’을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은밀히 부식시키는 철학과 학문을 반대하려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되어야 하는데, 성경의 저자들이 받은 성령의 영감이란, 시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구체적으로 (오류가 없도록) 성령의 통제를 받았다는 의미다. 또한, 이 점은 프란시스 쉐퍼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데, 성경은 분명한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창조와 타락과 더불어 성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초자연적 요소들의 역사성을 포함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명백하게 ‘상징’ 또는 ‘비유’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역사적 기록’을 모두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성경의 권위’의 구체적 의미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은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오류가 있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진리라고 말하는 칼 바르트 이후 현대 신학자들과 리츨(Ritschl) 등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또,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로이드 존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진화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배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쉐퍼와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쉐퍼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복음주의 내부에서 하나의 가능한 해석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질적인 구획선을 그린 후에, 로이드 존스는 비본질적인 항목들을 설명한다. 놀라운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는 로이드 존스지만, 선택과 예정, 세례, 교회 정치 형태, 종말론, 성령 세례와 영적 은사, 성화의 방식에 대한 이견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특히 펠라기우스주의는 단죄하면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 대해서는 복음주의 연합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상보다 로이드 존스가 매우 유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로이드 존스의 시각에서 볼 때, 죽은 정통주의이거나 교리를 부정하지 않지만 교리에 무관심한 은사체험주의자들, 또는 복음주의의 본질을 타협한 열린 복음주의자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로이드 존스는 이 글에서 루터파의 죽은 정통주의로의 변질 이후 나타난 17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와 에드워즈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참된 신앙은 믿는 교리와 신조를 지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말처럼, 물론 참된 감정은 의지와도 연결되며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명목상 개혁주의 교리를 고백하지만, ‘심중 유보’ 또는 감정과 의지가 결여된 ‘죽은 정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한국의 다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여기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지만, 이 정도로 정리하자.).
또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신앙은 은사체험주의 신앙이다. 놀라운 것은 진보적 교회에서도 성령 체험을 열렬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사체험주의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진보와 보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교리는 외면당한다. 은사체험주의를 받아들이는 곳이면, 대체로 내적 치유와 기복주의, 교회성장주의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다.
복음주의 내부의 진보적 흐름을 따르는 ‘신복음주의’는 로이드 존스의 시각에서 볼 때 본질을 너무 많이 양보하고 있다. 복음의 내용도 바뀌고, 성경의 권위나 성경상의 명제적 진리도 실질적으로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 역사서의 역사성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칭의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인기가 없거나 주변화되고 또는 변질된다. 이들은 대체로 명목상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심지어 ‘개혁주의를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복음주의’의 정의를 왜 로이드 존스와 같은 개혁주의자들이 독점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한다.
말 그대로 이와 같은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 한국의 복음주의 지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로이드 존스가 말한 ‘구복음주의’ 신앙이 참된 기독교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디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로이드 존스가 마지막에 말한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 한분만이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한마음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울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적어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참된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고 깊게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받고 조롱받는 이 시대를 참아볼 수 없는 그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 마땅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