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稗 官 雜 記 (패 관 잡 기)
작가: 이은집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태조 이성계의 소년시절 친구와 또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까지 감동으로 버무린 소설입니다*
『상왕(上王)께오서 금의환향 하옵신단다.』
중구가 지나 벌써 첫 서리가 내린 함흥(咸興)땅에 누구의 입에선지 새어 나온 소문이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에 짜아 성내에 퍼져나갔다.
간밤에 떼 지어 중천을 날아가던 기러기가 전해 온 소식일리도 없으련만
과연 상왕이 어렸을 때 살았던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의 웅장하나
이제는 퇴락한 관저를 수리하는 큰자귀 소리가 만추의 석양속에 메아리쳤다.
한성에서 징발되어 온 목수들은 썩은 기둥을 갈아내고 빠져나간 마룻장을 메꾸었다.
성안사람들은 이 신통하게 들어맞는 소문을 놓고 저마다 더욱 근사한 소문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는 성문밖 용수골-.
한성으로 직통하는 요로(要路)이나 대낮에도 여우 혹은 늑대가 울어대는 음산한 골짜기이다.
오늘도 패관(稗官) 달무(達武)는 성성하게 나부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용바위에 걸터앉아 남쪽의 머나먼 고갯길을 바라본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이 멀어질수록 한 폭의 그림처럼 운치가 있다.
소문대로 금의환향이라면 상왕은 마차의 행렬일 것이니 저런 가파른 고갯길로 넘어 올리가 없겠는데
그러나 달무는 언제까지나 그쪽만 응시했다.
벌써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고 둥지를 찾아드는 새소리와 함께 숲속은 짙은 그늘로 잠겨들고 있다.
『휴우-.』
달무는 가늘게 한숨을 내뿜으며 용바위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바로 용바위 틈에 있는 직경이 한 자나 됨직한 두개의 느름나무 둥치를 멀거니 바라본다.
그런데 벌써 근 오십년전의 일이 어제일처럼 뚜렷이 떠오름은 웬일일까?
물불을 가리지 못하던 젊은 혈기의 달무가 무술을 익히던 곳이 바로 이 용바위였다.
패관으로서 선비임을 자처하던 부친의 눈을 피해 글읽기가 지루하면
달무는 슬며시 이리로 말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지금도 부친의 뜻을 이어 패관으로 늙는 몸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여진족의 침구가 잦았기에 문무를 겸해야 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달무는 활쏘기와 칼쓰기를 노상 익혔을 뿐 아니라 사서삼경보다는 손자병법에 더욱 열중했다.
그날도 달무는 건너 골짜기에 과녁을 걸어놓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순간 난데없이 노루 한 마리가 과녁 근처로 뛰어왔다.
달무는 이제까지 닦은 무술을 시험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어 가슴이 뛰었다.
고구려의 어느 장수는 나르는 기러기의 눈도 꿰었다지 않는가?
달무가 이런 생각이 퍼뜩 떠올라 바로 노루의 머리를 겨냥한 때였다.
어디선지 바람을 끊는 소리와 함께 예기치 않은 화살이 노루의 머리를 정곡으로 꿰뚫는 것이었다.
달무가 어리둥절한 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에서 나무 사이를
말을 탄 채 잽싸게 달려 내려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무와 비슷한 또래였다.
달무는 한편으로 분통이 터졌으나 이 범상치 않은 친구가 바로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자제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허물없이 나무랬던 것이다.
『야! 너는 누구이관대 참 예의도 없구나. 개똥참외도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데….』
『하하! 먼저 보기로 하면 나다. 저 노루를 튀긴 건 이몸이었으니까….』
말하는 품과는 딴판으로 서글서글한 것이 그대로 통성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달무의 고집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뭣이 어째? 이 친구 꽤나 건방지군!』
지나친 줄 알면서도 약간 시빗조로 대어들었다.
『하하! 건방진 건 바로 너다.』
『에잇! 이자식 맛 좀 봐라!』
그것은 전혀 젊은 혈기의 탓일 수 밖에 없었다. 좋은 적수를 만났기에
그들은 한번 겨루고 싶었던 것이다.
도전은 달무가 먼저 하였으나 둘이는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용바위에 뛰어올라 칼싸움을 벌였다. 허지만 예견된 바와 같이 승부는 좀체로 나지 않았다.
서로 노려보는 눈에서도 맞부딪는 칼에서도 불똥을 튀겼으나 누구도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결국 칼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제안한 것이 바로 용바위 틈에 뿌리박은 느름나무의 둥치를 단칼에 베자는 것이었다.
직경이 거의 한 자나 되는 뒤틀린 느름나무는 마침 두 갈래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먼저 달무가 힘을 몽땅 칼날에 모아 후려쳤다.
무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두붓모처럼 싹뚝 나무둥치가 잘려졌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둘이는 서로 손을 맞잡고 환호성을 올렸다.
단지 그것으로 그들은 십년지기나 된듯이 말을 몰아 성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달무가 먼저 집으로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마침 부친이 출타를 했기 때문에 이 뜻밖에 생긴 친구와 좋아하는 머루주라도 마시고 싶었던 것이었다.
달무가 그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때 달무의 모친은 한 눈으로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둘째 자제임을 알았으나
무슨 까닭인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술상을 차리게 해서는
봉쇠어미를 물리치고 달무의 동생 차섬을 시켜 내어보냈다.
차섬은 달무보다 세살 아래로 열네살이었으나 남보다 숙성하여
벌써 허리에 치렁치렁한 머리채하며 처녀티가 골에 박혀 있었다,
차섬은 조금전에 오라버니와 함께 말을 질풍같이 몰아 달려들어오던 그를 보고 담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섬은 고개를 숙인 채 팔모소반의 술상을 받쳐들고 오라버니의 방문앞에 섰다.
달무는 이 의외의 모친의 처사에 좀 의아했으나 곧 그에게 소개했다.
『내 동생일세.』
『아! 그런가?… 폐가 많으오이다.』
그러나 그가 너무도 의젓하게 나오는 바람에 달무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이왕 들어왔으니 술이나 한 잔 따르렴. 오라버니 친구인데 흉이 될라구….』
『차섬이라 하옵니다. 오라버님과 즐거이 노시다 가시어요.』
그런데 차섬은 깜찍하게도 어느새 술따르는 법을 배웠는지 청자를 들어
머루주를 잔에 찰랑히 넘치도록 붓고는 나붓이 머리숙여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휴우-!』
달무는 또 한번 한숨을 내뿜으며 용바위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오십년이 거의 지났건만 바위 위의 느름나무 둥치는 아직도 썩지를 않고
그때의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듯 했다. 그는 양손을 벌려 두개의 둥치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그때의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듯 가슴이 끓어올랐다.
이윽고 달무는 저만큼에 매어둔 말 안장에 올라
고갯길을 다시 한번 바라본 후 천천히 골짜기를 내려 성안을 향했다.
× × ×
봉쇠아낙에게 저녁밥 뜸을 들이도록 시킨 차섬은 구리거울앞에 앉아 새삼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고 있다.
벌써 환갑이 지난지도 일년이 넘었다.
삼단같던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고 분이야 곤지야 찍었던 뺨에조차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그러나 아직 곱살한 자태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다.
허지만 차섬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각하면 박명한 팔자랄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지체가 높은 분이었기에 헤어져야만 했고 끝내는 시집이라고 갔으나
여진족에 의해서 식구가 도륙당하고 결국 친정에 돌아와서 오늘날까지 늙었다.
『마님! 저녁이 다 되었나이다.』
봉쇠아낙의 채근이 아니었던들 차섬은 언제까지나 눈물을 흘리며 거울앞에 앉아 있었을지 몰랐다.
『오! 알았노라.』
그제야 차섬은 당황히 치마꼬리로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왔다.
『상왕께오서 금의환향 하옵신단다.』
이러한 소문이 성안에 퍼졌을 때 누구보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차섬이었다.
차섬은 삭방도만호의 옛 관저가 수리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첫번 째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것은 혼자만의 괴로움이었고 기쁨이었다. 차마 오라버니인 달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처음 그에게 술잔을 올린 이후로 둘이가 만났던 것을 달무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달밝은 밤이면 그의 말안장 뒤에 붙앉아 허무러진 성터를 넘어서 바로 용바위로 그들은 달렸다.
이 세상에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차섬은 그와 자신과 달과 별 이외는 결코 없으리라 아직도 단정하고 있다.
차섬은 용수로 머루주를 걸러내며 가슴이 아프도록 즐거웠던 옛날을 회상한다.
『그분께오서 상왕이 되오셔 돌아오신다니….』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듯이 너무나 지체가 더욱 더 높아지셨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허나 잊을 수 없는 그 어른임에야 어찌 하랴. 차섬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머루주를 청자에 담았다.
이 청자! 바로 그날 두손으로 받들어 딸아드린 술병이 아니었던가?
차섬의 주름진 볼에는 또 다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르는 새도 마음대로 꿰뚫던 활솜씨! 아람드리 나무도 단칼에 자르던 칼솜씨,
그리고 산처럼 우람하게 압도하던 넓은 가슴! 차섬은 갑자기 온 몸을 휩싸는 현기증에 눈을 감고 진정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괴롭고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두 사람을 위하여 평온하지 않았다.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더구나 홍건적의 내습은 그가 출정해야 하는 이유가 됨과 동시에
또한 두 사람이 이별을 해야하는 결과도 낳았다.
그 마지막 날 밤-! 청자에 그가 좋아하는 머루주를 가득 담고 도토리묵을 안주로 장만한 차섬은
여느날처럼 그의 말안장 뒤에 붙앉아 용바위로 향했다.
그날에사 말고 요즘처럼 달이 휘영청 밝았고 가을이 깊었다.
풀벌레가 영절스럽게 울어대는 바위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차섬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 옆으로 돌린 채 술잔을 올렸다.
그리고 애끓는 정한을 한가락 소리에 실어 그에게 바쳤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 ᄒᆞ고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잡ᄉᆞ와 두어리마ᄂᆞᄂᆞᆫ
선ᄒᆞ면 아니올세라.
셜온님 보내ᄋᆞᆸ노니 가시ᄂᆞᆫᄃᆞᆺ 도셔 오쇼셔.』
차섬의 애절한 음성은 끊어질듯 이어질듯 솔바람이 반주되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순간 그는 사나이로서 가장 뜨거운 품으로 차섬을 안았고 차섬은
억제할 길 없는 울음을 기어이 터뜨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후 차섬은 그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고 대궐로 들어갔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어 큰 벼슬에 자꾸 오른다는 소식이 간간이 성안에 심심찮게 전해져 왔다.
애초에 훗날을 기약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차섬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어른과 나는 혼인할 수 없는 신분이 아니던가?
관리라고 딱부러지게 내세울 수도 없는 말단 패관의 딸이 아니냐?
차섬은 단지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에도 벅차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차섬은 그로부터 삼년후 부친이 정해준 혼처를 거역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밤도망이라도 쳤더라면….』
차섬은 벌써 몇 십년전의 일이건만 가슴을 두근거리며 상상해 보았다.
허나 너무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저 거울에 비친 얼굴은 이미 할머니가 다 된 노파일 뿐이 아닌가?
『후우-!』
가늘게 새어나오는 한숨을 깨물며 차섬은 다시 솟구치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용수골에서의 이별 장면이 또 머리속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 영절스럽던 풀벌레 소리!
그 휘영청 밝던 달빛!
솔바람을 반주삼아 차섬은 애끓는 귀호곡(歸乎曲)을 불렀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지금도 자신의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마님! 패관 어른님께서 돌아오시나이다.』
봉쇠아낙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들어오며 전갈하는 바람에 차섬은 황급히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어둠이 추녀 끝에 서리었다.
달무가 말고삐를 이끌고 문간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라버님, 늦으시었군요.』
『휴우….』
그러나 달무는 아무 대꾸없이 한숨만 길게 내뿜으며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차섬도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달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봉쇠아낙만 채근하여 저녁식사 준비를 시켰다.
『벌써 다 참겨놓았나이다.』
눈치 빠른 봉쇠아낙은 치마에 바람을 일으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차섬은 청자에 담아놓았던 머루주와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사랑으로 나갔다.
소(孫)을 보지못한 채 살아오던 올케가 십여년전에 죽은 후 이 집은 아주 흉가처럼 적막해졌다.
식구래야 모두 달무와 차섬 그리고 봉쇠 내외뿐이었던 것이다.
봉쇠네나 아이라도 있으면 이리 허전하지 않으련만 그네도 오십줄에 가까워 오도록 종무 소식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팔자소관이거니 돌리고 살아온 그들이었다.
허나 오늘은 웬일로 온 집안이 더욱 쓸쓸하다. 해서 차섬은 머루주를 받쳐들고 오라버니 방을 찾았던 것이다.
『반주로 한잔 드시어요, 오라버님.』
비록 오빠 앞이지만 다소곳이 무릎을 모으고 앉아 딸아올리는 술잔에 달무는 문득 옛날이 생각났다.
그와 처음 만나서 칼싸움과 느름나무 베기를 시합한 후 집에 왔을 때도 차섬은 지금과 같이 술을 바쳤었다.
순간 달무는 목이 메어 받아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차섬도 달무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기에 고개를 숙인 채 더 권하지를 못했다.
『술은 나중에 들것이로니 물리어라.』
상왕이 된 그가 돌아오는 날 함께 마시리라 결정을 내리는 달무의 속을 차섬이 모를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차섬은 달무에게 그것을 깨우치려 술병을 가지고 들어왔는지 몰랐다.
× × ×
늦가을 저녁해가 마지막 햇살을 거두어들이는 석양 무렵이었다.
고개만 넘으면 용수골에 당도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상왕은 호위병사들을 모아놓고 조용히 말했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들이 많았노라. 이제는 물러가도록 하라.』
그러나 병사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몰라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성으로 돌아가란 말이로다.』
『예? 마마…!』
호위대장은 어안이 벙벙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은 나의 고향땅, 소로(小路)길을 알고 있으니 그만 나 혼자 가겠노라.』
상왕은 처음으로 짐(脫)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하오나… 마마!』
병사들은 황공하여 저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너희들의 임무는 끝났으니 이만 나에게서 떠나가란 뜻이니라.』
상왕은 조금 역정섞인 음성으로 분부를 내린 후 말에 채찍을 내렸다.
아직도 당대의 무장답게 목청이 쩌렁쩌렁하고 기운이 정정한 상왕은 나는듯이 고개를 추어 올라갔다.
호위병사들은 넋이 나간듯 멀거니 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다 오르자 상왕은 감회에 싸여 성안을 굽어보았다.
순간 어렸을 때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자제였던 그는 이 시절 호화로운 생활속에 보냈다.
여진족 추장에게서 빼앗은 적준마(赤俊馬)를 타고 사냥을 즐겼다.
호피(虎皮) 조끼에 꿩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질주할 때면 성안의 백성들은 머리를 조아려 우러러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어느날이었던가?. 아마도 저 용수골에 단풍이 빨갛게 불타고 있었으니까 요즈음 같은 가을이었으리라.
사냥을 위하여 대낮에도 온갖 산짐승이 출몰한다는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노루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누군가가 세워놓은 과녁 근처에서 그것을 한 화살로 꿰뚫었다.
달무와는 그일로 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혈기였기에 두 사람은 용바위에서 칼싸움을 벌였고 느름나무 둥치를 베는 시합까지 했었다.
지금도 그 나무둥치가 남아있을까?
벌써 달무와는 만난 지가 육년이 넘었는데 살아있을는지…. 아니 그보다 더욱 궁금한 사람이 있다.
달무에게도 묻지 못했던 차섬의 안부! 서로 헤어진지 거의 오십년이 가까웠으니
그녀야말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을는지도 모른다.
순간 상왕은 쓸데없이 불길한 상상을 한 것을 떨어버리기라도 하려는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 마지막 밤 이별의 괴롭던 일!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ᄒᆞ고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그 애절하게 읊던 가락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잡ᄉᆞ와 두어리마ᄂᆞᄂᆞᆫ 선ᄒᆞ면 아니올셰라. 셜온님 보ᄂᆡᄋᆞᆸ노니 가시ᄂᆞᆫᄃᆞᆺ 도셔 오쇼셔.』
상왕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각인들 지체할 수가 있으랴.
어서 성안으로 들어가 달무 아니 차섬의 소식을 알아보리라.
허나 몇 걸음 내려오지 못해 상왕은 다시 말을 멈추어 세웠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듯이 상왕이 된 몸으로서 사사로운 정에 쏠려 그들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성안의 백성들은 지금 그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록 선양을 했을망정 이 나라의 왕이었기에 무언가 상왕으로 해서
]이 고장에 돌아올 혜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은 틀림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할 것임에 틀림없다.
상왕은 무겁게 짓누르는 압박을 느꼈다. 다음 순간 상왕은 서글픈 심정이 되었다.
돌아보아야 이 산고개엔 혼자 몸이다. 공연히 호위병들을 물리쳤구나 하는 후회조차 들었다.
그는 사람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속에서 지내왔기에 이러한 공허감을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인지 몰랐다.
상왕은 그의 주변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홍건적의 내습을 막기 위하여 사관(仕官)한 후 그는 줄곧 전쟁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
왜구의 침입을 토벌하느라 바다에서도 지냈다. 따라서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은
이미 타계의 사람이 되었거나 자신과 같이 용케 살아남았다면 높은 벼슬에 올랐고 혹은 반대로 숙청되어 귀양을 갔다.
허나 상왕은 차근차근히 세력을 구축하여 야망을 키웠다.
풍수지리설이 아니라도 나라의 돼가는 꼴이 미구에 결단이 날 확신이 들었던 것이었다.
선왕때부터 계속되는 내란과 문무의 알력은 정치의 기강을 크게 어지럽혔고,
설상가상으로 홍건적과 왜구는 국력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더구나 귀족들의 횡포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민심을 이반시켰다.
백성없는 나라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비록 무장일망정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누구도 왕에게 직간하는 신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을 회심의 미소로서 반겼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저(私邸)에 뜻밖에도 함흥땅으로부터 달무가 찾아왔다.
『소인, 문안드리오.』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 달무에게 그는 좌우 시인을 물린 후 나무랬다.
『자네 그 무슨 엉뚱한 짓인가?』
『하하하! 허지만 군보(君普)는 이미 나라의 큰 녹을 받는 몸이 아닌가?』
『무슨 소릴! 달무 역시 그렇찮아?』
『이 몸이야 미관말직도 못되는 패관인데….』
『하하하! 지금 그런 것 따져 무엇하겠나?』
그는 무슨 일로 달무가 송악에까지 찾아왔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혹시 차섬의 일로 온 것이 아닐른지…? 허지만 그것은 달무로서 까마득히 모르는 일일텐데….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해서 그는 술상이 들어온 후 첫 순배가 돌도록 달무의 입만 주시했다.
『군보! 한 가지 청이 있어 왔네.』
이윽고 달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정색을 하고 말을 꺼냈다.
『청이라니…?』
그는 약간 긴장하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마 경직(京職) 벼슬자리를 부탁하러 온 달무는 아니겠기에 그는 더욱 의아스럽기조차 했던 것이다.
『상감마마를 알현할 기회를 좀 만들어 줄 수 없겠나?』
달무는 과연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왜?』
해서 대답을 하기전에 되물어야 했다.
『군보도 알다시피 오백년 사직이 존망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나? 겹치는 내우외환은 끊일 날이 없고….』
『달무! 그 무슨 무엄한 말인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사석(私席)이라지만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안하이! 그러나 지금 말한 나의 청은 자네가 힘쓴다면 꼭 될 수 있는 일이니 한번 들어 주어야겠네.』
그러나 달무의 부탁은 너무나 간곡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무릎을 탁 친 후 달무의 손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좋네! 내일 함께 어전으로 들어감세!』
이튿날 그는 달무를 안내하여 대궐로 들어갔다.
『마마! 요즘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무엇인지 아시나이까?』
이날 좌우 시녀까지 물리치게 한 달무가 아뢴 말은 이런 엉뚱한 것이었다.
『유언비어라?』
『예-! 마마께오서 천하에 미소년(美少年)을 선입(選入)한 자제위(子弟衛)는 궁중의 풍기를 문란시킨다 하오며,
진평후(眞平侯) 봉작(封爵)까지 내리신 편조대사(遞照大師)가 근래에 와서는 방종과 음탕에 흐른다 하옵나이다.』
『허허! 경이 그걸 어찌 그리 잘 아는고?』
『소신이 봉직하는 패관이란 직은 항간에 떠도는 가담항설(街談巷說)을 수집하는 것이오라 세상을 방랑하며 들었사옵니다.』
『음…!』
상감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달무가 궁중의 일까지 소상히 잘 아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러한 말을 듣고도 전혀 노기를 띠지않는 상감에 대해서 그는 더욱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노국공주의 승하후에 모든 일에 뜻을 잃은 상감으로써 다시 한번 새로운 정사(政事)를 편다면
그에게 있어선 결정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점을 타진해보기 위해서 달무에게 상감을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던가?
『마마! 총명하옵신 성은으로 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옵소서.』
이윽고 달무는 용안을 우러르며 눈물로서 애소하는 것이었다.
상감은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달무가 어전을 물러간 후 궁중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했다.
과연 달무의 말대로 진평후는 상감의 살해음모로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복주(伏誅)되었고,
환자(宦者) 최 만생의 밀고로 자제위의 홍 륜(洪倫)이란 소년이 익비(益妃)를 범한 사건이 밝혀졌다.
익비사건이 터지자 상감은 이를 감추기 위해 홍 륜과 최 만생을 죽임으로써 영원히 미궁속에 묻으려 했다.
허나 오히려 상감은 그들에게 암살을 당함으로써 왕조는 더욱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말았다.
왕조가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들어갔듯이 그의 반생도 파란만장한 그것이었다.
그는 다시 용수골과 성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처럼 꾸불꾸불한 길이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 × ×
『상왕께오서 금의환향 하옵신단다.』
이러한 소문이 성안에 퍼진지도 벌써 보름이 가까웠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 임을 증명하는듯 옛날 상왕이 살았던 삭방도만호의 관저가 수리된 지도 닷새가 지났다.
백성들은 나뭇단을 실은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나도 행여 상왕의 행차가 아닌가 하여 뛰어나오곤 했다.
오늘 당도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쯤에는 틀림없을거야. 저마다 백성들은 자신있게 떠들었다.
허나 달무는 오늘도 용수골에 나가서 머나먼 고갯길을 응시하고 있다.
상왕은 결코 큰 길로 마차를 타고 오지 않을 것이다. 달무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육순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당대의 무장답게 아직 정정한 그가 왕위를 선양(禪讓)하고
귀향 할 적에는 무슨 곡절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 곡절을 달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권세란 그런 것이어늘….
달무는 선조대로부터 수집해온 패관잡기에서 얼마나 많은 얘기들을 읽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세상이 망하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고
반대로 세상이 흥할 때는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고려조의 멸망은 뭐니뭐니해도 정신적 타락이 첫째 요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불어닥치기 시작한 음탕한 풍조는 세상을 휩쓰는 속가(俗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얼음우희 대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얼어주글만덩 이밤 더디 새오시라 이밤 더디 새오시라….』
그중에도 만전춘(滿殿春)은 극단의 남녀상열지사(男女相銳之詞)였다.
동동(動動)이나 쌍화점(雙花店) 등 다른 속가들도 한결같이 이어의 연결이었다.
권신들은 자기의 딸을 상감에게 몇 씩이고 바치기를 서슴치 않았다. 순전히 권세를 유지하려는 방편이었다.
결국 달무가 예상했던 대로 천하는 바뀌어졌다.
허나 그가 그리하리라고는 달무로서도 미쳐 예견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달무는 수많은 고향 사람들이 몰려갔건만 한번도 찾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한성으로부터 특사가 왔다. 그의 부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전으로 나갔다.
과연 국정은 쇄신되어 있었다. 한성으로 천도한 그는
새 왕조의 위엄을 세우고자 온갖 새로운 국도의 시설을 서두르고 있었다.
달무는 종루(鍾樓) 네거리를 지나다가 장행랑(長行廊) 형식의 육의전(六矣廛)을 들르게 되었다.
견직전(絹織廛) 금포전(錦布廛) 면주전(綿細廛) 지전(紙廛) 저포전(苧布廛) 어물전 등이 가장 컸다.
여기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견직전과 금포전에서 사대부의 아낙네들이 옷감을 끊으며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좋아한다는 명주와 비단을 고르기에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 벌써부터 왕가와 권신들의 아낙네들 간에는 사치풍조가 흐르다니….』
달무는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어전으로 들어갔다.
그는 용상에서 내려와 비원(秘園)으로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은 언젠가 지난 날의 일을 똑같이 상기하고 있었다.
『달무! 이제는 나에게 그날의 직언(直言)을 들려주어야겠네.』
달무는 하늘을 나르는 까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군보는 요즘 육의전에서 무슨 옷감이 날개가 돋친 줄 알고 있나?』
그는 의아하여 달무를 바라보았다.
『새 국도의 성곽이 쌓아지기도 전에 신덕왕후를 따르는 사치가 사대부의 아낙네들 간에 유행이네.』
『음―!』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과연 달무다운 말이었다.
허지만 가장 총애하는 신덕왕후의 일이고보니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군보! 고려왕조는 정신적 타락으로 망했네. 군보는 혁명을 했다지만 아직 혁명된 것은 아니네.』
달무는 적어도 그라면 무슨 말을 하던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 역시 등극후에 수많은 사람들을 알현했지만 과연 직언을 하는 신하는 없었다.
모두가 충신이고 심복일망정 그들은 무언가 감추고 있었다.
그것은 더 많은 권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면 이미 얻은 권세를 놓치지 않기 위한 연막전술이었다.
그는 차츰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신의왕후 소생인 방원(芳遠)의 일을 생각하면 불쾌를 넘어 괘씸하기조차 했다.
비록 내 핏줄을 이은 혈육이요 개국의 공이 컸다고는 하지만
부왕인 자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도당을 모아 머지않은 장래에 있을 양위에 대비해서
벌써부터 왕이나 된듯이 행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수를 써 총애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렸다.
『후계자 문제만 해도 그렇네. 이 나라는 군보의 것인 동시에 만백성의 것이기도 하네.
사사로운 정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그런데 달무 역시 자신의 결정을 반대하는 눈치가 아닌가?
신왕은 그 말에는 조금 비위가 거슬렸다.
『만백성을 위해서는 뛰어난 인물을 택해야 하네. 그리고 그 인물을 키워야 하네.』
『뭐라고…?』
그렇다면 달무 너도 방원의 편이 아닌가? 그는 좀더 마음이 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색을 보인다는 것은 어쩐지
죽마고우에 대한 왕으로서의 체통에 어긋 날 것만 같아 가까스로 참았다.
『방원왕자는 큰 인물이네. 선죽교에서 포은(圃隱)을 주살했을 때
이미 내 알았네. 참으로 혁명할 사람은 방원왕자이라고….』
『그건 어째서…?』
그는 당시에 방원을 크게 질책하고 중론을 두려워했던 사실을 상기하고 용안을 찌프렸다.
『시운(時運)을 막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새 역사는 새로이 과감하게 개척해야 하기 때문일세.
따지고 보면 포은의 속셈이나 군보의 야망은 같은 게 아니었나?』
『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뿜었다.
수많은 고려의 유신들을 도륙 또는 유배시키고 세운 이 나라가
과연 새로운 나라가 되었는지 새삼 의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군보! 말이 지나쳤나보이. 용서하이.』
그리고 달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휴우-!』
달무는 벌써 오늘도 몇번째나 몰아쉬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한번 고갯길을 응시한다.
순간 달무는 깜짝 놀랐다.
저 멀리 고개 중턱을 질풍같이 달려 내려오는 필마는?
그것은 묻지 않아도 상왕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달무가 이곳에서 기다릴것이라고 상왕 역시 생각한 것이었다.
상왕이 고개 너머에서 호위군사를 물리친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던 것이다.
달무는 용바위에서 내려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주 상왕을 향하여 달려나갔다. 상왕은 용바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려 말을 타는 것을 보고 그가 달무인 것을 곧 알아차렸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어도 그리고 수많은 인걸이 그의 곁을 지났건만
달무 만큼은 변함이 없었구나 생각하니 상왕의 두 눈시울은 뜨겁게 충혈되었다.
『마마! 기다렸나이다.』
이윽고 달무가 말에서 내려 읍하고 예를 갖추자 상왕은 당황히 외쳤다.
『달무! 이게 무슨 짓이오! 이몸은 이제 한갓 야인! 그 옛날로 돌아가세.』
허지만 선양을 하자 당장 대하는 눈치가 달라지던 권신들을 생각하면
이처럼 예를 차려주는 달무가 눈물이 핑 돌도록 고마웠다.
『원로에 얼마나 피곤한가?』
달무도 이제는 상왕의 뜻을 받들어 친근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하하! 보다시피 끄떡없네.』
상왕은 참으로 오랫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얼마전 왕자간에 일어났던 골육상쟁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이 늙은이는 이제 갈 때가 다 됐나보이.』
달무는 중풍으로 불편해진 오른 팔을 흔들어 보였다.
『허허! 그 무슨 말인가? 인생칠십고래회라군 하지만 우린 좀더 살아야 하네.』
상왕은 달무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
『글세….』
허나 달무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상왕이 돌아온 이상
이제 패관잡기는 그만 쓰고 죽기전에 권(卷)과 책(册)으로 갈라 정리해 두리라 마음먹었다.
이윽고 두사람은 용바위 앞에 와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직도 썩지않은 채 용바위 틈에 남아있는 느름나무 둥치를 감회깊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똑같이 지나간 수많은 세월들이 스쳐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쉬어감세.』
달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음! 목이 좀 타는 군.』
상왕도 내려 용바위 위로 올라섰다. 벌써 단풍이 거의 떨어졌다.
이때 저만큼 골짜기 아래에 한 노파가 보자기를 덮은 목판을 인 채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똑같이 그곳에 가서 멎었다.
『차섬일세.』
이윽고 달무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알고 있네.』
상왕도 혼자말처럼 대꾸했다.
달무는 그 옛날 이곳에서 상왕과 처음 만나게 되어 집에 그를 초대했을 때 머루주를 마시던 일을 생각했다.
상왕은 그 옛날 이곳에서 차섬과의 마지막 이별을 생각했다.
『…ᄌᆞᆷᄉᆞ와 두어리마ᄂᆞᄂᆞᆫ 선ᄒᆞ면 아니올셰라. 셜온님 보ᄂᆡᄋᆞᆸ노니 가시ᄂᆞᆫᄃᆞᆺ 도셔 오쇼셔.』
상왕은 골짜기를 휘몰아가는 바람소리가 차섬의 귀호곡으로 들렸고,
달무에겐 상왕이 자기의 과녁 근처로 달려온 노루를 쏘아맞히던 화살소리로 들렸다.
이미 용바위까지 거의 당도한 차섬의 목판에 얹힌 청자에서는
머루주 찰랑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첫댓글 태조 이성계의 친구와 또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까지 감동으로 버무린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