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초가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니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저의 지난 삶을 환하게 비추어 줍니다.
그래서 대림기간 동안 한 해를 성찰해 보건데…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동안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있어 망설이고 외면한 일들이 생각납니다.
또, 수도자로써 기도생활과 복음적 삶을 살아가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또한, 제가 신부랍치고 여러분들에게
거드름을 피며 무례를 범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부덕함으로 얻은 상처가 있다면 예수님의 은총으로
여러분 마음에 거룩한 오상이 되시길 기도드리며,
겸손되이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비로소 대림환에 네 개의 대림초가 다 밝혀졌습니다.
네 개의 초는 성탄이 임박했음을 상징합니다.
대림환은 원으로 만드는데
이는 “다시 돌아오세요” 라는 의미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상징으로 초를 켜둡니다.
이를 합하면,
“내가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돌아오세요!”라는 뜻이 됩니다.
대림초를 하나만 켜는 것이 아니라
한주 한주 지날 때 마다 하나씩 하나씩 불을 더 붙여서
이제 곧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 날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신호등처럼 알려줍니다.
대림초는 가톨릭 전통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아시다시피 삼종기도가 이슬람 모스크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진(Muezzin)의 아잔(Adhan)에서 유래하였듯이
대림초는 루터교에서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략 200년전 독일 함부르크 지방에는
가정이 없는 소년들을 돌보던
루터교 기숙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의 목사님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학생들이 목사님에게
“예수님께서 아직 안 오셨어요?하고 자주 묻곤 하였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평일에는 빨간색 초를 밝히고,
주일마다 흰색 초를 하나씩 더하여
성탄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고 하지요.
독일의 가톨릭 교회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독일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비로소
점차 세계적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대림초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덧 어두워져 있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환하게 밝아짐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전에 복사가 촛불에 불을 당기때마다,
마음 속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마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회개생활을 시작하면서,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우리는 촛불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빛이신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 또 짜증과 실증으로 마음에 어두움이 드리워질때면
초를 켜놓고 기도해 보십시오.
어두워진 마음이 다시 빛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됩니다.
사실,
마음이 쉽게 어두워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놓치면 금새 불안해지듯
하느님을 망각할 때면
어김없이 어두움은 또 다시 마음을 그늘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안 요셉의 마음은
마리아를 받아드리는 것을 두려워 했고
그의 마음은 실망하고 어두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늘 하느님을 찾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그 어두움의 그늘 속에 계속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꿈에 나타나 어두움에 빠져 있던 그를 성령의 빛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제야 비로소 요셉은 마음의 어두움을 털어버리고
과감하게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도 젊은 시절 헛된 것들에 매료되어 살아갔기에
이미 다양한 어두움을 체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빛에 더욱 강렬히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죄인이었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광채였습니다.
하느님은 참되시고 선이시며 아름다움이시기에
하느님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로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완전함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에 자신을 비추어보니,
자신의 신앙이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올바른 신앙을 청했고,
희망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확고한 희망을 청했으며,
자신의 사랑이 부족함을 알기에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폐허가 된 성당 안에서
버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훌륭한 기도를 바칠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이 작은 초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찬란한 빛을 관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