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빛을 있게 하시고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 아들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를 인도하소서
순례 계획은 천주교 안동교구 우곡성지를 순례한 후 도산서원을 탐방하였다. 천주교 안동교구 우곡성지는 5월의 온화한 날씨와 함께 고적한 우곡 골짜기의 봄이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밀양에서 순례를 온 이백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야외 합동 미사를 보고 도산서원을 향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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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에 돌아가셨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 인격 도야, 후진 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01년 음력 11월 25일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이씨 가문의 아버지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박씨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명兒名은 서홍이고 정식 이름은 황滉이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 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생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사액賜額하였다. 1970년에 정부에서는 서원을 보수·정화하였고,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전국 서원 중에서 유일하게 선생의 살아 계실 때의 삶과 사후의 삶을 한눈에 새겨 볼 수 있는 곳으로 서원과 서당이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다.
우리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참알기 지도위원의 안내로 가볍게 서원을 돌아보았다. 안동댐 상류에 위치하여 강 한복판에 섬처럼 서 있는 시사단은 퇴계 선생 돌아가신 후 220년 뒤에 정조 임금이 한양에서만 치르던 과거 시험을 이곳에서 치르게 하여 영남의 유생들을 발탁하였다. 다음 행로를 위해 빠른 걸음으로 도산서당, 전교당, 옥진각을 탐방하고 육사문학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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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학교와 수련원에서 인성 교육을 지도하고 있다. 2022년 1월 7일 백만 명 수련생의 시대를 맞았으며 머지않아 이백만 명에 이를 것이다.
하녀 학덕과 제자 배순, 맏며느리에게 베푼 사례에서 퇴계 선생은 이미 오백 년 전부터 인애사상을 실천하였으며 그러한 실천으로 볼 때 일찍이 인류애를 펼치신 분이다. 퇴계종택의 정려문 앞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정계 흐름을 볼 때 역시 제가齊家는 치국治國의 근본임을 크게 깨달아 글을 계속 이어본다.
귀 막아 3년, 눈 막아 3년, 입 막아 3년. 이 말은 친정어머니가 시집보낼 때 내게 한 말이다. 외동 손에 여형제가 많은 집안에 시집을 가니 그 얼마나 딸의 시집살이가 고될까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아셨던지 우리가 신혼여행을 간 새 시아버지가 딸들에게 ‘네 올케한테 쓸데없는 말 한마디라도 하려면 친정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택의 정려문 앞에 서니 다시금 뭉클 생각나는 말이다. 그 말 한마디에도 며느리인 내 마음이 엄동설한에 눈 녹듯 했는데. 대체 퇴계 선생은 어찌하였기에 역사에 그치지 않을 훌륭한 분으로 길이 남고 또 길이 남으실까? 치가治家의 근본 바탕은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제가齊家에 있다고 한다. 퇴계 선생께서는 며느리들에게는 어떻게 하였을까? 대체 얼마나 자상하셨으면 오늘날 선생의 하신 일이 이렇게 더욱더 빛이 날까? 친정어머니가 하신 말씀과 칠거지악七去之惡만 봐도 조선시대 며느리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런 시대에 퇴계 선생은 특히 며느리들에게 어떤 가족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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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었을까? 퇴계가의 며느리들은 왜 옆에서 그분을 밝혀 주고 있을까?
퇴계 선생은 제가齊家가 치국治國의 근본이라고 한다. 퇴계 선생이 나랏일을 만인의 근본이 될 수 있도록 훌륭하게 펴신 그 근본인 제가齊家 모습들을 살펴보니 과연 그러한 일화들이 그저 감동이다. 그 속에서 이미 오백 년 전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실천해 온 퇴계 선생의 인류애를 되새겨 본다.
퇴계 선생은 옛날 가족 간에 당연히 여길 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생일날 며느리가 버선을 기워 보내자 참빗을 사서 답례를 했고 옷을 지어 보내면 감사의 편지와 함께 꼭 진심의 편지까지 보냈다. 맏며느리가 몸이 아플 때 이렇게 되기까지 무얼 했느냐고 하면서 아들을 호되게 꾸짖고 직접 약수탕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하려고 애를 쓰셨다. 퇴계 선생 묘소 바로 밑에 부인도 아들도 아닌 맏며느리의 묘소가 있다. 묘소의 전경은 퇴계 선생과 며느리와의 인간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맏며느리는 살아생전 아버지께 효도를 다 하지 못해 죽어서라도 효도하도록 아버님 묘 바로 아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집안에서는 맏며느리 묘소를 그곳에 쓴 것이다.
맏손주가 단령團領인 관복을 지어 보내니 편지와 함께 바늘을 사서 보냈다. 가족에게도 은혜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하였다. 친지에게도 쓴 여러 통의 편지들을 보면 어른으로서 반드시 할 도리를 게을리하지 않은 본보기이다. 퇴계 선생 맏손자 이안도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때이다. 손자며느리가 맏손자를 낳자 퇴계는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자랑의 편지를 이곳저곳 썼다. 그러나 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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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맏손부는 젖이 부족하여 아들 창양에게 젖을 먹일 수가 없었다. 갓 들어선 아이에게 영양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젖이 나지 않았다. 맏손부는 아들 창양을 기르기에 힘이 들자 할아버지 댁에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녀를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당시 신분사회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퇴계는 증손자인 창양에 관한 일인데도 거절했다. “너는 ‘근사록近思錄’에도 보지 않았느냐. ‘살인자殺人子 이활기자以活己子 심불가甚不可’니라. ‘남을 죽여서 내 자식을 살리는 일은 심히 불가하다’고 배웠지 않았느냐? 배운 대로 그대로 실천해야 선비가 아니겠느냐? 한양에서 유모를 구하거나 암죽을 끓여서 먹이다가 이곳 학덕이의 아이가 어미를 떨어져서도 살 수 있을 때 그때 보내마.”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증손자 창양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손부며느리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이 평소에 제가를 어떻게 했기에 장손이 될 귀하디귀한 아들을 잃은 그 손부며느리가 찌를 듯이 아픈 가슴은 어떻게 하고 이런 엄청난 일을 했을까 그저 탄성만 지를 뿐이다. 맏손부 며느리 안동 권씨는 퇴계 선생 사후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 국토를 유린할 때 봉화 청량산으로 이곳저곳 이리저리로 피난 다니면서 할아버지의 유품을 하나도 버리거나 파손하지 않고 온전하게 잘 보존하여 오늘날 퇴계 선생의 업적을 잘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후에 그 공로가 지극하여 나라에서 정려문이 내려졌다고 한다. 정려문이 내려진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훌륭한 점을 새겨 알게 해준 정려문이 우러러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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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에게는 소원이 있다.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 즉 세상에 도움이 되는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염원하는 소원이다. 정려문 그 앞의 현판에 새겨진 ‘열녀 통덕랑 행사온서 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 지려烈女通德郞行司醞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의 의미를 생각하며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더욱더 많아지고 퇴계 선생의 업적이 누대에까지 뻗어 갈 그 옆 한 언저리에서 더욱더 빛나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 있을 며느리들의 갸륵한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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