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세월 - 최초의 동력자원부 프로젝트 (1977)
나는 오늘도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1,000원을 타 가지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취급하는 상품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그 상품에 대하여 시장조사를 하고 하는 이러한 일들을 지난 한 달 동안 계속해 왔다. 동생들이나 기타 내 주변 사람들과는 단절 한지가 오래다.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1,000원을 타서 나오면 왕복 버스비하고 담배1갑 사면 누구하고 약속을 하여도 차 값이 없어 다방에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다방 앞에서 기다리다 사람이 오면 그 때서야 같이 들어간다. 점심 먹는 건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난생 처음 궁한 걸 느끼면서 바닥을 기고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의정부에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고 그녀도 집에 두 번이나 왔었다고 한다. 또, 신촌의 그녀도 거의 매일 밤늦게 나한테 전화를 한다. 항상 만나자고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이 그 누구와도 만날 여유가 되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력자원부라는 새로운 정부 조직이 생기면서 동력자원부에서 최초의 사업이 전기공사업체의 내실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기공사 업체에 기본 필수 장비를 갖추도록 하여 언제 까지 동력자원부에서 지정한 장비가 없는 업체는 전기공사 면허를 취소 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나는 청계천 공구 상가를 돌면서 동력자원부가 공고한 장비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시중에는 그 장비는 거의 없었다. 해당 장비는 철판천공기, 단자압착기 등 5종류로 대부분이 유압공구류였는데 시중에는 미8군에서 쓰다 나온 고물에 가까운 중고 장비 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동력자원부 공고 이후 부르는 게 값이었다.
나는 우선 공구 오퍼상을 하는 친구를 찾아가 그 공구에 대하여 수입 선을 찾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세율표 등 관련 책자를 찾았다. 헌데 수입관세 목록 책자에 유압공구가 한글로 된 것에는 수입 금지 품목으로 되어 있고, 영어로 된 것에는 수입 허용 품목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좋다. 바로 이거다” 라고 생각하고,
오퍼 하는 친구를 찾아가니 일본의 “이즈미” 사의 오퍼를 받았는데 가격도 좋았다. 헌데 그 친구도 수입 금지 품목이라고 난감해 했다. 그래서 일단 2세트 만 샘플용으로 하여 에어플레이트로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물건이 도착하여 통관을 하려 하는데 수입 금지품목이라고 통관을 안 시켜주려 하는 것을 영문으로 된 책자를 보여주면서 “보십시오, 여기 수입 허용품목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무역을 하는데 한글로 쓰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영어로 사용하고 영어 책자를 보면서 무역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영어로 만든 책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만든 책자입니다. 만일 통관을 안 시켜 주면 문제를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관 담당자도 그것을 확인 하고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담당자에게 넉넉하게 인사를 하고 공구를 통관 시킬 수가 있었다.
“자 이제는 됐다. 지금부터 승부다.” 라고 생각한 나는 오퍼상 친구에게 카타록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당시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는 한국전기공사협회를 찾아가 회장님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 동력자원부에서 공고한 것 때문에 물건을 확보하지 못해 공사업체들이 난리들인데 내가 수입을 하여 공급하겠다, 하니, 그것은 수입금지 품목 인데 어떻게 수입 하느냐, 하여, 지난번 통관 서류를 보여주면서, 나는 이 장비를 수입하였다 하니 통관서류를 자세히 보시더니 그제야 믿고, 그럼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냐고 하여 작성한 가격표와 안내문을 주면서 공문에 이 안내서를 첨부시켜 각 지부에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자세한 것은 제가 각 지부를 돌면서 설명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문액수에 5%를 협회 기금으로 드리겠다고 하였다,
회장은 우리 임원들과 의논을 하여 보겠다고 하여 그럼, 제가 자리를 한번 만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협회를 나왔다.
우선 협회회장이나 임원들이 나를 믿어야 지부에 공식 문서를 보내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금을 모아야 한다. 협회를 나온 나는 신촌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는 아주 반가워하면서 나왔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니 좀 더 여인스럽게 성숙하고 예뻐진 것 같았다.
“미워요, 왜 이제 전화해요.” 나는 웃으면서, “이거, 일찍 한 거야, 나 지금부터 여기저기 동냥하러 다녀야 돼,”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술먹어야해, 그러니 나한테 10만원이구 20만원이구 좀 빌려줘”
그녀는 생글 거리며, “그럼 술 먹을 돈 빌리려고 저 보자고 하셨네요.” “마음대로 생각해, 허지만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 “그래,” “술을 얼마치 드시려는데 여기저기 다니시려 해요?” “응 100만원 어치!” “네? 술을 100만원씩이나?”
(참고로 이때의 100만원이면 아주 큰돈이었다. 금이 한돈에 불과 몇 천원 이었으며, 다음해인 1978년 둔촌동 주공 아파트의 분양가가 250만 원정도 하였다.)
내가 웃으니, 그녀는, “100만원 제가 드릴 테니 여기저기 다니는 시간 저한테 주세요.”
나는 놀랬다. 그녀에게 이런 큰돈이 있을 줄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지금 회사가 너무 어렵다고 하시면서 현장에 식대를 못 보내 아버지가 걱정하시니, 경리 아가씨가 고맙게도 대신 보내 주었다는 말을,,.
“왜? 같이 살자고 그러지!” “정말, 그래 주실래요?”
나는 그동안의 일을 쭉 얘기했다. 매일 1,000원씩 어머니에게 타 가지고 나와서, 그러면서 생활한 것을,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신은 바보야, 왜 저한테 전화를 안해요?” “왜, 바보야? 그래서 전화 했잖어, 나 지금 여기 차 값도 없어” “허지만 고마워요, 저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 줘서요,”
그날 그녀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다음날, 그녀로부터 돈을 건네받은 나는,
그 다음날부터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0원 짜리 1장으로 비참한 매일을 살던 내가 100만원을 단 3일 만에 날려 보냈다.
그 리고 며칠 후 협회에서는 전국 각 지부로 공문을 발송했다. 나는 또 다른 수입상에 새로운 제조사의 유압공구를 수입케 하여 전기공사 업체들이 선택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협회 회장을 만나고 정확히 보름 만에 나는 전국을 누비고 있었다. 나는 부산에 밀수품을 취급하는 놈들을 만나, 일제 소형 올림퍼스 카메라와 당시 최초로 나오기 시작한 일제 전자 라이터를 가방에 잔뜩 넣고 각 지부 사무실을 갈 때마다 직원들에게 뿌렸다. 각 지부에서는 본부의 공문 하나 믿고 공구 대금을 계약금 또는 전액을 나에게 지불 했다. 전국을 한번 돌 때마다 내 가방 안에는 현금으로 가득 찼다.
나는 서울에 오면 그녀를 만나 얼만지도 모를 현금을 모두 그녀에게 주면, 어디 어디 얼마, 얼마 하면 그녀가 보내주고 꼼꼼히 정리까지 하여 주었다.
처음 내가 가방에 돈을 가득 가져오니 놀라서 이상하게 생각 하더니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서는, 입을 벌리고 말을 못하였다. |
그리고 100만원을 3일 만에 술값으로 날렸다 하니 1,000원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배짱 인지 모르겠다며 놀라고 말았다.
지방으로 다닌 지 1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요즘 집에서는 뭐하고 지내?” “그거 일찍도 물어 보시네요. 그냥, 그냥 지내요,” “그래?” “전에 아버님 말씀이 어머니께서 성당에 다니신다고 하셔서 저도 요즘 교리 배우러 다니고 있어요.”
이 말에 나는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방을 다니기 시작하기 전 의정부 그녀가 밤에 울면서 집에 찾아 왔다.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셨는데 집에는 아무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왔다고 하여 할 수없이 의정부를 가게 되었다. 교통사고는 경미한 사고였다. 나는 병원에 가서 인사를 하니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가 지나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나는 가해자 측과 만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하였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의정부에서 이틀을 보내고 서울로 왔다.
그녀가 성당에 나간다는 말에 나는 의정부에 갔다 온 것이 마치 그녀에게 무슨 죄를 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 얘기를 하면서, “나, 이쁘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정말 예뻣다. “응 이뻐, 그래서 내가 납치 하려고 해, 내일은 부산으로 가는데 나하고 같이 갈까?”
나는 이래야 만 내가 의정부를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정말이예요?” 나는 그냥 고개 만 끄떡였다. “저 오늘밤 정말 잠 못 잘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오늘 집에 들어가지마, 오늘 나하고 같이 있고 내일 아침에 출발 하는 거야,” 그녀는 너무 좋아했다.
그래, 어차피 의정부 그녀와 정리하려면 하루라도 일찍 내 마음을 정하는 게 좋을 거다. 이 여인은 아버지와도 오랫동안 함께한 여인이고 지영이와도 모든 것이 많이 닮은 여자다.
나는 앰버서더호텔에 전화하여 방 하나를 부탁했다. 그녀는 은행에 들려서 돈을 입금하고 내일 준비를 위해 쇼핑을 했다.
그런 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룸으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가자 그녀는 나에게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저 마음고생 많이 한 거 알아요?"
그날 저녁 나는 모든 걸 그녀에게는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지영이 얘기와 의정부 그녀 이야기까지 모두 다 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그녀는, “지영이 언니, 너무 슬퍼요, 당신 많이 힘 드셨겠어요, 저에게 지영이 언니 이미지가 있어서 당신이 저를 만났어도 전 좋아요, 그래서 당신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저도 영세를 하면 지영언니 위해서 기도 많이 할게요, 허지만 의정부 여자 분은 꼭 정리해 주세요,”
이 여자도 지영이 만큼 착한 여자다, 나는 내가 선택한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부산행 특급열차를 탔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고 그녀와 함께 있으니 나도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이 조금은 씻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나보다 많기에 간간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에게 들려주었다.
이제, 이번이 마지막 지방 투어 다. 각 지부장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주문이고 이제 더 이상 주문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주문해야 겨우 동력자원부에서 지정 한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주문 물량이 가장 많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2일은 부산에서 보내려고 한다. 그녀 이름은 XX숙이다. 고향은 인천인데 부모님은 모두 돌아 가셨다. 딸 만 5명의 막내다. 부모님이 아들을 바라며 50이 넘어서 난 늦둥이 딸이었다. 지금은 결혼한 언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결혼한 언니들이 많아서 그런지 챙겨주고 보살피는 것이 주부들 이상이다. 둘만의 행복한 여행을 끝내고, 협회 부산지부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생각대로 나머지 거의 모든 업체가 주문을 하였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주문계약서와 영수증을 발행하고 바로바로 대장 정리를 하였다. 부산지부의 모든 업무를 끝내고 나는, 지부장과 직원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였다.
부산지부의 일을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여보, 당신은 어쩜 사람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루세요, 지부 사람들 모두 당신을 좋아하는 거 같았어요, 헌데, 나이 좀 든 것 같은 여직원 하나는 계속 나를 못 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당신이 자기보다 예뻐서 그랬겠지” 내가 웃으며 얘기하자,
그녀도 생글거리며, “그게 아닌 것 같았어요, 그 직원 당신하고 무슨 일 있었죠?” “아니, 벌써부터 바가지야? 정말 다른 지부에 갔다간 큰일 나겠다. 당신 서울로 올라가지 않을래?” 하니, 그녀는 깔깔대고 웃느라 정신없다,
이렇게 우리는 행복하게 마지막 지방 투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서 다방에서, 그녀는 시무룩해 있다. “왜 그래?” “나 어떡해요? 집에 들어가면 이제 너무 힘들 거 같아요.” “조금 만 참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 했고 헤어지기 전까지 그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노린 첫 번째 먹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 먹이를 잡기 위하여 위험도 감수했다.
나는 내가 잡은 먹이를 약속대로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첫 번째 승부에서 완벽한 승리를 한 나는, 이제 두 번째 승부를 위한 기반도 함께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전기공사업체에 장비를 납품한 업체는 한국화약 (지금의 한화)이 스위스의 공구전문 기업인 “힐티”와 기술 제휴라는 명분을 엎고 수입한 장비로,
서울지역은, 한국화약이 업체의 60%이상을 공급 하였고,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약 30%, 그리고 내가 10%정도를 공급하였고 지방은 나 혼자 90% 이상을 공급하였다. 이렇게 나는 최초의 도전에서, 수백 명의 직원이 움직인 대기업과 수많은 공구상과 맞서 나 혼자 전국을 누비면서 대승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수입을, 30%는 집을 위해 사용하고, 30%는 그녀 몰래 그녀의 통장에 입금 시켜주고, 나머지는 앞으로의 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지금 지영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모든 것이 끝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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