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 – 야운 지음
주인공 주인공아
주인공아 나의 말을 들으라. 몇 사람이나 도를 공문 속에서 얻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길이 고취 가운데에 윤회하는고. 네가 무시이래로부터 이 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합하고 어리석은 소견에 떨어져서 항상 갖가지 많은 악을 짓고 사도(지옥, 아귀, 축생)의 고륜에 들어가서 모든 착한 일을 닦지 아니하고 사생의 입해에 침륜함이로다.
강설 –
주인공은 자기 본래의 마음이다. 내 정신의 주인공이요 참다운 나를 뜻한다.
대체로 중생들은 이 몸뚱이를 나로 삼고, 눈. 귀. 코. 혀. 몸 등 감각기관을 마음으로 삼아서 그것이 나인줄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참 나와 참 주인을 일깨우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참 면목을 주인공이라 불러 본 것이다.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생각은 마음에서 나온 피조물일 뿐 생명의 본체일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사상이 자기일 수 없다. 야운스님도 이러한 참 나를 주인공이라 부른 것이다.
마음,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진리다. 육조대사는 그 설법에서 “보리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이 마음만 그대로 쓰면 바로 부처를 이룰 것이다.”하고 또 “근본바탕인 청정한 마음은 항상 뚜렷이 밝아서 두루 비추고 있는데 세상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직 보고 듣고 분별해 아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아서 그것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오롯이 밝은 본체를 보지 못 한다”라고 하셨다.
함허 스님께서는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모양도 없다. 그러나 고금에 통하고 한 티끌 속에 있으면서도 온 우주를 감싼다. 안으로는 여러 가지 묘한 덕을 갖추고 있으며 밖으로는 뭇 생명을 대하며 삼재(하늘. 땅. 사람)의 주인이 되고 만법의 왕이 된다. 넓고 넓어서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높고 높아 누구도 짝할 이 없다 신기하다. 천지 사이에 훤히 밝고 보고 듣는 사이에 은은히 있구나. 깊고 아득하구나. 천지보다도 먼저 생겼지만 그 처음을 알 수 없고 천지보다 뒤에 있지만 끝을 알 수 없다. 비었다고 할까? 있다고 할까? 나는 그 까닭을 모르겠다” 《금강경오가해》고 하였다.
마음은 태초부터 있었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나 사물에 따라 능히 푸른색, 누런색을 나타낸다. 《반야경》에서는 이것을 보리, 열반이라고 부르며 《금강경》에서는 여래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법계, 《금강명경》에서는 여여라 한다.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감이 없으며 항상 참되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어도 흩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본체가 되어 모든 성인과 중생이 귀의하는 곳이다. 또 《정명경》에서는 법신이라 하고, 《기신론》에서는 진여라 하고, 《열반경》에서는 불성이라 하여, 항상 참되고 한결같아 삼신(법. 보. 화)의 본체로 이의 의지처가 되는 까닭이다.
또 《원각경》에서는 총지, 원각이라 하고,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이라 하였는데,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어 갖가지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불성의 종자를 잘 갈무리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올 때부터 지고 온 것이라고 하여 주인옹, 곳에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로 무저발, 좋은 음이 금시 울린다는 뜻으로 몰현금, 미정을 비추어 깨뜨린다고 하여 무진등,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다고 하여 무근수, 근진의 번뇌를 끊는다고 하여 취모검, 가난한 중생을 널리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모니주라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무위국, 무유쇄, 니우, 목마, 심원, 심인, 심경, 심월, 심주 등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라 불러도 꼭 합당한 이름은 될 수 없다. 그것은 깊고 맑고 고요하여 그 모양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우 크다고 하지만 먼지처럼 작은 곳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작으면서도 큰 것을 감싸지 못함이 없다. 있긴 하지만 모습이 없고 텅 비어 없다고 하나 만물이 다 이로부터 나온다.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으므로 그것을 마음이라 불러 보고 주인공이라고 해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 하고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중생이라 부른다.
주인공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동산양개화상으로 그의 어록에 “주인공아 나의 말을 들으라”고 하여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공문이라 함은 불교를 총칭한 말이다. 불교는 공사상으로 최후의 열반문을 삼기 때문에 공문이라 한다. 또 스님들을 공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몇 사람이나 도를 공문 속에서 얻었거늘...’ 이라는 말을 다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꽤 많은 역대 선지식들이 도를 불교에서 얻었다는 뜻이다. 기인은 여러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고취란 고해, 고륜이라고도 하며 고통의 세계를 가리킨다. 우리가 태어나는 세계, 특히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태어나는 세계를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인(인간), 천(하늘), 아수라를 말한다. 그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는 악업의 인연이 두터운 중생이 태어나는 곳이므로 삼악도라고 한다.
고와 낙이 반반인 인간 세계, 낙이 많은 천상세계, 고가 많은 아수라는 삼악도보다는 좋은 곳이다.
하지만 이 여섯 가지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선을 얼마나 짓고 악을 얼마나 지었느냐의 차이이지 모두가 아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깨달은 이들은 선과 악에 의해서 교차하지 않는 세계, 영원히 안락한 세계, 즉 도솔천 같은 곳에 태어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
고륜이란 나고 죽는 괴로움의 과보가 마치 바퀴가 구르듯이 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은 육도의 긴 터널을 돌고 돌면서 탐애로 말미암아 잠시도 괴로움이 쉬는 일이 없으므로 고륜이라 한다.
‘무시이래’라 함은 우리의 인생이 윤회를 거듭하여 수없는 생을 받은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무한한 시간, 계산할 수 없는 수치를 무시라 한다. 즉, 도교에서는 이를 태초라고 한다. 마음은 사람의 근본이다, 마음은 현상계와 육체를 초월해 있지만 그 지은 업에 따라 아득한 옛날부터 육도에 윤회하여 끝없이 이어져 왔으므로 그 기원을 따지자면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무시무종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합한다’ 함은 인간이 깨끗한 본래의 마음을 등지고 번뇌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본래의 마음은 참되고 한결같아 일체의 잘못된 생각을 떠나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라고 하는 존재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짜 맞추어 본래의 마 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되었다. 즉, 우리에게 있는 눈. 귀. 코. 혀. 몸(오근)이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지각하고 다시 제육식이 우열. 선악. 미추. 대소 등을 판단하고 또 제칠식이 나와 너,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구분하여 제팔식에 전달된다.
이렇게 전해진 업의 종자는 마음 가운데 끊임없이 유전되며 현행으로 훈습하다가 인연을 만나면 곧 새롭게 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
부처님께서 이 인연에 따라 새로운 탄생을 해가는 단계를 무명, 행. 식. 명색. 육.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열두 가지로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진이란 객관의 세계를 상대로 하여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분별심)을 말한다.
사생이라 함은 모든 동물이 태어날 때는 대개 사람이나 소, 말처럼 태로 낳는 것과, 새나 닭처럼 알로 낳는 것과, 모기나 지렁이처럼 물기에 의지해서 태어나는 것과, 하늘이나 지옥, 귀신처럼 화하여 태어나는 네 가지 형상을 취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업해라 함은 갖가지의 좋지 않은 원인이 바다처럼 많다는 뜻으로 악업의 바다이다. 사생에 의해 태어나는 이 세계, 즉 육도에 운회하는 것을 “사생의 업해에 침륜한다”고 한다. 좀더 쉽게 말하면 육도 중에서도 고통이 가장 심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의 세계에 전전하는 것이다.
《사십이장경》 중에 “죄는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산꼭대기 같은 화를 부르게 되나니 악심을 쉬지 않으면 업이 바다에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
육적은 육진경계이다. 우리 육체에 붙어 있는 눈, 귀, 코, 혀, 몸(촉감), 생각, 이 여섯 가지를 통하여 갖가지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끼고, 분별심을 내어서 결국 깨달음을 방해하는 적이 되기 때문에 육적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우리는 이 육적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여 악추(삼악도)에 떨어져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일승은 일불승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사람이 수행하는 계위를 인천승, 소승, 대승, 일불승 등으로 구분한다.
오계와 십선을 닦아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 뛰어난 행복을 원하는 일들을 인천승이라 하고, 사제와 십이인연의 도리를 닦아 아라한이 되기를 원하는 이를 성문 또는 연각이라 하여 소승이라 한다. 대승은 바라밀을 수행하여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구제를 원하므로 보살승 또는 대승이라 한다. 일불승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그것만 깨달으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니 일체의 차별을 떠난 것이다.
이 일승을 원하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곳에 태어나도 항상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자비를 행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일승을 등지기 때문에 비록 불법을 만나 가르침을 행하더라도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기 전이나 후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몸은 얻었으나 그때는 이미 부처님께서 가신 뒤의 말세라고 과거의 고승들은 깊이 가슴 아파 했던 것이다.
말세라 함은 부처님이 오셨다 가신 지 오래되어 사람이 마음이 어지럽고 죄악이 성행하는 시대이다. 부처님이 가신 뒤 가까운 시대부터 정법, 상법, 말법의 삼시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그에 대한 설은 연대에 조금씩 차이가 보인다. 우리가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다면 지금보다는 정도가 살아 있고 또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법문을 듣는다면 그같은 영광은 다시 없을 것이다.물론 깨달음도 빨리 얻게 될 것이다.
야운스님은 중생이 스스로 배각합진, 조악일선, 신숭육적, 배일승의 넷으로 구분하여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