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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나 찰나삼매와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생겨나는 모습
마음청정
방금 설명한 대로 일 초마다 한 번은 관찰하도록, 또는 한 번보다 적게 관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더라도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에게는 미처 관찰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몸의 동작들이나 마음의 현상들이 여전히 많을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에 대한 설명에서 말한 대로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는 장애 마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사마타 수행과 다른 점은,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잊어버린 마음이나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없고 원래 관조하던 대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대로 관조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그렇게 잊어버린 마음이나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 마음들도 관찰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여 안 뒤에 부풂이나 꺼짐 등 원래 관찰하던 대상으로 돌아와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장애들을 제거하는 모습과 관련하여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이 서로 다른 점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머물고 있도록 사마타 대상만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사마타 대상이 아닌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은 관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망상 등의 장애들이 가끔 생겨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관찰하지 말고 제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위빳사나는 여섯 문에서 드러나는 모든 물질과 정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처 관찰하지 못해 다른 것을 생각하는 마음들이나 바라고 좋아하는 등의 장애들이 생기면 그 마음들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 마음들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 마음들에 대해서 영원하다고, 행복하다고, 자아라고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들이 생겼을 때 사마타 수행 때처럼 그 마음들을 사띠하지 않거나 마음 기울이지 않는 것만으로는 위빳사나 수행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들도 고유특성과 공통특성으로 사실대로 바르게 알도록 관찰해야만 집착을 사라지게 할 수 있어서 위빳사나 수행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관찰하면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산란한 마음이 거의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마음이 달아나도 즉시 알 수 있게 되고, 즉시 그 마음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가끔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도록 일부러 마음을 기울여 보아도 그것을 관찰하여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수행이 무너지지 않은 채 원래 관찰하던 대로 계속해서 관찰하고 알고 있는 것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관찰되는 대상에 착 밀착하여 머물고 있는 삼매가 위빳사나 찰나삼매입니다. 감각욕망 바람 등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에서의 근접삼매와 비슷합니다. 산란하여 달아나는 장애들과 섞이지 않고 관찰하여 아는 마음만 앞과 뒤로 한 마음처럼 깨끗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마음청정[心淸淨]이라고 합니다.
견해청정
마음청정이 생기면 관찰할 때마다 관찰의 대상인 부풂과 꺼짐 등의 물질 무더기를 그것을 아는 정신, 또는 다른 여러 물질들과 서로 뒤섞임 없이 각각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관찰함, 생각하여 앎, 보아 앎 등의 정신 무더기도 물질, 또는 다른 여러 정신들과 서로 뒤섞임 없이 각각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매번 관찰할 때마다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정신'을 따로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아는 것을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이 알게 되었을 때 '이 몸에는 부풂, 꺼짐, 움직임 등의 〔대상을 알지 못하는) 물질과 관찰하여 알거나 보아서 아는 등의 〔대상을 아는) 정신이라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만 있다. 이 물질과 정신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개인이나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라고 알고 이해합니다. 관찰하면서 이렇게 알고 이해하는 것을 견해청정[見淸淨]이라고 합니다.
의심극복청정
계속 이어서 수행하면 관찰할 때마다 원인과 결과가 결합되어 물질과 정신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을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아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굽히려고 하는, 펴려고 하는, 움직이고 바꾸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 움직이고 바꾸는 물질들이 생기는 것, 뜨거움이나 차가움 요소라는 불 요소 때문에 뜨거운 물질, 차가운 물질들이 번갈아 생겨나는 것, 음식 때문에 새로운 물질들이 생겨나는 것들을 직접 경험하여 알고 이해합니다.
그 밖에 눈과 형상, 귀와 소리 등이 있어서 봄, 들음 등이 생기는 것, 부풂과 꺼짐 등 관찰되는 대상이 있어서 관찰하여 아는 것이 생기는 것, 마음 기울임이 있어서 각각의 대상을 향해 마음이 가는 것도 직접 경험하여 알고 이해합니다.
그 밖에 '좋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무명과 좋고 행복해지려는 갈애 때문에 생각하고 노력하고 애쓴다는 것,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것 에 집착하여 새로운 마음이나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관찰하여 아는 이 마음이 마지막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 새로운 생에 다시 태어남이라는 것은 의지하는 물질과 함께 마음이 새로 생기는 것일 뿐이라는 것 등도 알고 이해합니다. 이렇게 여러 조건들까지 함께 알고 보는 것을 조건 파악의 지혜라고 합니다.
조건과 결과만 계속해서 이어져 생기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전에도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서의 물질과 정신만 있었다. 나중에도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서의 물질과 정신만 있을 것이다'라고 알고 해합니다. 이렇게 알고 이해하는 것을 의심극복청정이라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로서의 물질과 정신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바로 그 물질과 정신을 자아라고, 나라고 생각하여 이전에도 내가 있었을까? 지금에야 내가 있는 것일까? 죽은 뒤에도 내가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의심이 더 이상 생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의심을 극복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도·비도 지견청정
계속 이어서 수행하면 관찰할 때마다 물질과 정신들이 생긴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고 숙고합니다. 이것이 무상 명상의 지혜입니다.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하면서 생멸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만 경험하기 때문에 '좋아할 만 한 점, 의지할 만한 점이 없이 매우 두려워할만한 괴로움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숙고합니다. 이것이 괴로움 명상의 지혜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그 법들의 성품대로만 생멸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자아, 나가 아니다. 무아의 법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숙고합니다. 이것이 무아 명상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숙고하며 만족할 정도가 되면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거나 숙고하지 않고 계속 관찰만 하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관찰하면 관찰되는 대상의 처음 생기는 모습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 대상이 휙 사라져 버리는 모습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여러 가지 빛이나 좋아하고 만족함, 마음의 고요하고 편안함, 부처님이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나 존경, 열심히 노력하고자 함, 행복함, 매우 빠르고 깨끗하게 앎, 관찰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사띠하면서 관찰함, 특별히 애쓰지 않고도 잘 관찰함, 관찰하는 것을 즐기고 좋아함 등의 특별한 성품들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러한 현상들을 보고하지 않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하고 의기양양해합니다. 특별한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생멸의 지혜이며 잘못된 길입니다.
경전에 해박한 사람이나 지도하는 스승으로부터 그러한 광명 등은 아직 특별한 법이 아니라고, '드러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기만 하는 것이 특별한 법을 얻기 위한 위빳사나의 바른 길이다'라고 듣고 믿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아는 것을 도비도 지견청정이라고 합니다.
실천 지견청정
그렇게 안 뒤 계속 이어서 관찰하고 있으면 그 광명이나 좋아함 등이 차츰 줄어들어 갑니다. 관찰하여 아는 것만 분명합니다. 손이나 발을 한 번 굽힐 때나 한 번 펼 때, 다리를 한 번 내딛는 동안에도 한 곳에서 다른 곳에 이르지 못하고 한 동작씩 생멸해 가는 여러 작은 움직임들을 부분부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부수번뇌들로부터 벗어난 성숙한 생멸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의 힘이 좋아지면 아는 것이 더욱 빨라집니다. 그래서 대상의 처음 생김보다 마지막 사라짐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관찰되는 대상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만 드러납니다. 관찰할 때마다 손, 발, 머리, 몸 등의 형체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고 휙휙 계속 사라지는 것만 경험합니다. 관찰하여 알고 있는 마음도 그 대상과 함께 앞뒤 단계로 즉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관찰할 때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모두 쌍을 이루면서 사라져 버림을 아는 것이 소멸의 지혜입니다.
관찰할 때마다, 알 때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즉시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는 것만 경험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두려움의 지혜입니다.'좋지 않다'라고 허물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허물의 지혜입니다.
'좋아하고 즐길 것이 없다. 지겹고 넌더리나는 것이다’라고 보게 됩니다. 이것이 혐오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생멸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이 없으면 좋겠다.'라고 물질과 정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지혜도 생겨납니다. 이것이 벗어나려는 지혜입니다.
그때 벗어나려고 특별히 애를 써서 다시 관찰하여 무상, 괴로움, 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고 봅니다. 특히 괴로움의 성품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재성찰의 지혜입니다.
재성찰의 지혜가 힘을 갖춰 관찰하여 아는 것에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저절로 알아 갑니다. 좋고 나쁜 여러 대상의 성품에 따라가지 않고 단지 알기만 하면서 평온하게 관찰하게 됩니다. 매우 고요하고 미세합니다. 수행의 힘으로 저절로 계속해서 알면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더라도 저리거나 피곤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고 나쁜 대상들을 따라가지도 않고, 특별히 애를 쓰지도 않고, 바른 성품을 단지 알기만 하면서 긴 시간 동안 알아 가는 것이 형성평온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수행의 힘으로 저절로 계속해서 알아 가다가 특별히 매우 빠르고 예리한 앎이 다시 생겨납니다. 그러한 앎은 출현이라고 하는 도 쪽으로 힘껏 향해 올라가기 때문에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 지혜라고 합니다.
그 특별한 앎들도 그 순간 여섯 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물질과 정신 대상만을 무상이라고, 또는 괴로움이라고, 또는 무아라고 알고 보면서 생겨납니다. 그중 마지막 앎이 준비-근접 - 수순이라는 세 가지 속행이 포함된 수순의 지혜입니다. 그 이전의 위빳사나 지혜와 그 뒤의 도 지혜에 적합하게 따라서 생겨나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앞서 생멸의 지혜로부터 시작해서 수순의 지혜까지 아홉 가지의 지혜를 실천 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이라고 합니다.
그 지혜의 바로 다음에 물질과 정신이 소멸되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이라는 대상에 아는 마음이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종성의 지혜입니다. 범부의 종성을 끊고 성자의 종성에 들어가 이르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견청정
그 다음 바로 그 열반을 직접 경험하여 알면서 수다원 도의 지혜, 과의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중 도의 지혜를 지견청정(智見淸淨)이라고 합니다.
도와 과가 생겨나는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매우 특별하게 경험하여 알게 된 도와 과, 열반을 돌이켜 봅니다. 이것이 반조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차례대로 반조의 지혜까지 모두 경험하여 본 이는 수다원에 이른 사람입니다.
수다원에게는 ① 有身見과 ② 의심 ③계행의식 집착의 세 가지 족쇄가 사라집니다.
수다원은 그 밖에도 5계를 범하는 일, 5계가 무너지는 일 없이 저절로 항상 깨끗하게 잘 지킵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사악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인간세상, 천상세상에도 아무리 많아야 일곱 생만 태어나 그 일곱 생 안에 아라한이 되어 반열반에 듭니다.
수다원은 자신이 얻은 과에 입정하고자 결의하고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그 과에만 입정하여 5분, 10분, 30분, 1시간 등으로 과 선정증득(phala samāpatti)에 머물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에 능숙하게 되었다면 매우 빨리 입정할 수도 있고 낮 내내, 밤 내내 그 선정증득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수다원이 아직 얻지 못한 과에 이르고자 결의하고 오취온을 같은 방법으로 관찰한다면 생멸의 지혜 등의 위빳사나 지혜들이 마찬가지 차례대로 생겨나 오근이 성숙되었을 때 사다함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열반을 경험하고 보아 사다함에 이르게 됩니다. 사다함에게는 거친 수준의 ④ 감각욕망 애착과 거친 수준의 ⑤분노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사다함은 인간세상, 천상세상에 아무리 많아야 두 번만 다시 태어나고 그 두 생 안에 아라한이 되어 반열반에 듭니다.
사다함이 과에 입정하기를 바라면서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이미 얻은 사다함과에만 이릅니다. 한 단계 위인 아나함 도와 과에 이르고자 결의를 하고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같은 식으로 여러 위빳사나 지혜들이 차례대로 생겨나 아나함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열반을 경험하고 보아 아나함에 이르게 됩니다. 아나함에게는 감각욕망 애착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아나함은 욕계 세상에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색계 세상과 무색계 세상에만 태어나 거기서 아라한이 되어 반열반에 듭니다.
아나함이 과에 입정하기를 바라면서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이미 아나함과에만 이릅니다. 한 단계 위인 아라한 도와 과에 이르고자 결의를 하고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같은 식으로 여러 위빳사나 지혜들이 차례대로 생겨나 아라한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열반을 경험하고 보아 아라한이 됩니다. 아라한에게는 ⑥ 색계 애착과 ⑦ 무색계 애착과 ⑧ 자만과 ⑨ 들뜸 ⑩무명이라고 하는 나머지 다섯 가지 족쇄와 함께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더 이상 어떠한 생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생에서 수명이 다했을 때 반열반에 듭니다.
반열반에 든 다음 새로운 생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 책의 처음에서 “무엇 때문에 수행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열반에 이르러 늙음, 죽음 등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행해야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바로 이렇게 벗어나는 이익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열반에 이르러 늙음, 죽음 등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라는 많은 분들이 이 책에서 설명한 대로 노력해서 모든 고통이사라진 열반에 빠르게 이르시길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참조: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위빳사나 백문백답』, 이솔, 2014, 44~54쪽. 일부용어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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