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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지방 탐사(‘24. 11.19) 자료 함안하면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 선생이 먼저 떠오른다. 조려 선생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부인은 흥양 이씨(興陽李氏)이며,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西山) 아래 은거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서산(西山)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함안 백이산 채미정 조려는 평생 벼슬하지 않고 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 처사(漁溪處士)라 하였고,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조동호(趙銅虎)는 군수를 지냈고, 둘째 아들 조금호(趙金虎)는 정3품 무관 첨지(僉知)를 지냈으며, 막내아들은 조야호(趙野虎)이다. 1. 咸安 無盡亭 : 함안군 함안면 괴산4길 25(거리 반월당→무진정 97km, 시간 78분) 함안의 무진정(無盡亭)은 조선시대 문신인 무진(無盡) 조삼(趙參, 1473~?)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7년(명종 22) 후손이 선생의 호를 따서세웠다. 조삼 선생은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의 손자요, 진산공 동호(銅虎)의 셋째아들로 1473년(성종 4)에 출생하였다. 조삼 선생은 성균관 생원 시절에 연산군의 폭정을 주도한 유자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조부 조려의 단종 절의를 이어받아 주위를 더욱 놀라게 하였고, 1489년(성종.20) 17세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1507년(중종.2)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함양(咸陽)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정자 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이 심어진 정자 앞 연못가는 사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며, 연못 주변에 조삼과 그 후손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咸安 無盡亭 선조 때 함안 군수로 부임한 정구(鄭逑) 선생이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매년 음력 4월 8일 함안 무진정 연못에서 낙화놀이를 하였다고 전한다. 함안 낙화놀이는 함안의 고유 민속놀이로 연등과 연등 사이에 참나무 숯가루로 만든 낙화에 불을 붙이는 불꽃놀이로 연못에 떨어지는 불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함안 탐방은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이 제격이다. 함안 무진장 연못 특히 이곳에서는 무진정을 비롯하여 무진정을 들어가는 정문인 동정문(動靜門), 손님을 맞지하고 송별하는 영송루(迎送樓),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 효자담(孝子潭), 괴산재(槐山齋) 등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부자쌍절각은 어계 조려 선생의 5대손이자 무진정 조삼 선생의 증손인 승지공 조준남과 그의 아들 선전공 조계선의 효와 충을 기려 세운 전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승지공의 증조부인 집의공의 묘를 파헤치자 조준남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니 적을 꾸짖자, 왜적은 그를 포로로 잡아가려 하였다. 그는 이에 격분하여 내가 너희들에 끌러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면 손에 칼로 자진하였다. 그의 아들 조계선은 조준남의 큰아들로 1570년(선조 3년) 태어나 1603년(선조 35년) 무과에 급제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선전관으로 평안도 의주부윤 이완(李莞, 이순신의 조카) 장군과 함께 선봉에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1866년(고종 5년) 병조참판에 가증되었다. 부자쌍절각은 이 두 부자를 기려 전각을 세웠다. 부자쌍절각과 충노대갑지비 부자쌍절각 옆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비석에는 "忠奴大甲之碑(충노대갑지비)"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노비를 위해 비석을 세웠을까? 함안 조씨의 기록과 비문을 대조해 보니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정유재란 당시 노비 대갑이 주인 조계선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조계선이 전사하게 되자 함께 죽는 것이 옳다고 여겼으나 공의 죽음을 전할 길이 없어 살기로 결심했다. 의주에서 돌아와 본가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조계선의 부음을 전하며 "혼자 살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 주인을 난에서 구출하지 못하여 집에 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지금의 검암천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의롭구나! 이 노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럼이 없다네. 고금에 드문 일이니 비석에 적노라.」고 적혀 있다. 무진장 연못의 영송루 효자담은 조려의 7대손 조경송(趙景松, 1678~1747)이 아버지마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멀리 외출도 하지 못했고, 그의 외아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도 아버지와 친지들이 상심할까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냇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했다. 하루는 혹독하게 추운 어느 겨울에 냇가 이수지(二樹池)에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며 혼자 슬피 울었다. 마침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가 지나가다 우는 사유를 물었는데 "행인이 알 바가 아니오."라고 하자, 더 이상 물지를 못했고, 지나가는 사람을 통해 선생의 효행과 슬픈 사연을 들었다. 박문수는 하늘이 낸 효자라며 탄복을 한 후 함안을 떠나면서 문서로 함안군수에게 쌀과 어육을 내리게 했고 훗날 경상감사로 부임해서 다시 어물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선생이 작고한 후였다. 이 표지석은 조경송 선생이 물고기를 잡던 냇가인 이수지 옆에 처음 세웠으나, 쌍절각 옆으로 옮겼다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무진정 주련 奚獨田園自樂(해독전원자락)- 어찌 전원에서 홀로 즐기기만 하겠는가? 漢書循吏治績(한서순리치적)- 한서에 말하는 관리의 치적있었다네. 元祐¹完人²行休(원우완인행휴)- 어려운 시기 처세에 지혜로 왔고, 七棣³立揚稱觴(칠체입양칭상)- 일곱 형제 입신양명하여 술잔을 올리네. 칭 六經⁴咀嚼忘食(육경저작만식)- 육경을 공부하다 먹는 것도 잊었으니, 上下雲影天光(상하운영천광)- 위아래 구름 그림자 하늘 빛 띄네. 送迎淸風明月(송영청풍명월)-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보내고 맞으면서 亦當民國先憂(역당민국선우)- 또(오히려)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한다네. 元祐¹- 북송의 철종황제의 연호, 신구법당 간의 당쟁으로 나라가 혼미함. 完人²- 북송의 유안제의 호, 학자이며 관리로 첨렴결백함. 七棣³- 뛰어난 일곱 형제를 지칭하는 말. 六經⁴-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악기 등 여섯 가지의 경서. 괴산재(槐山齊)는 어계 조려의 손자인 무진정 조삼을 기리는 함안 조씨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이다. 1670년 창건할 때의 자리보다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899년 준공하였으며, 1992년 현재 위치에 건물을 새로 짓고 괴산재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하였다 2. 함안박물관 : 함안군 가야읍 고분길 153-31(거리 3. 9km, 시간 8분) 함안은 고대 안라국(아라가야)의 고도로서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선인들이 남긴 귀중한 유산이 훼손되거나 그 흔적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러나 함안은 이러한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 후세에까지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기에 국내에 있는 고분군 중 단일 최대 규모이면서 가야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함안 말이산 고분군』 자락에 함안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함안박물관(055-580-3901)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말 갑옷, 수레바퀴 모양 토기, 불꽃무늬 토기, 문양 뚜껑, 미늘쇠』 등의 가야 시기 유물뿐 아니라, 2023년 개관한 제2전시관에서는 총 600여 점의 아라가야 이후 고려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함안에서 출토된 유물을 짜임새 있게 전시하여 옛 선조들의 기백과 독창성이 담긴 문화를 흠뻑 느낄 수 있다. 2023년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한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우리 함안은 세계유산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앞으로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함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전시콘텐츠를 제공하여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함안박물관 제1전시관인 가상전시관은 아라가야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지질, 선사시대에서 아라가야 멸망 이후인 통일신라까지의 유물을 다루고 있어 아라가야의 흥망성쇠를 살펴볼 수 있다. 제2전시관 상설 전시실은 아라가야 이후 함안의 고려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함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분전시관은 아라가야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말이산 고분군을 소개하는 전시관이다. 말이산 고분군의 무덤 변천 과정과 축조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함안박물관 전시관 내부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는 화려한 영상과 음향이 어우러진 미디어아트를 구현하여 아라가야 문화를 더욱 친숙하게 접할 수 있다. 야외전시실은 박물관 앞뜰과 측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야외 전시장에 군북 동촌리 26호 고인돌과 삼기마을의 선돌, 10배 크기로 조형된 수레바퀴 토기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군민들이 기증해 주신 석제 유물과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을 원상으로 복원하여 무덤 속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칠서 대치리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을 이전 복원하고, 보존 처리를 통해 야외 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아라홍련 안내전시실은 전국 최다(最多) 목간 출토지로 유명한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사적 제67호) 유적지 내 연못에서 연씨가 다수 수습되었다. 함안박물관은 2009년 4월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인수받은 씨앗 중 2개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하여 연대를 분석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즉 고려시대 연씨로 밝혀졌다. 이에 함안박물관에서는 농업기술센터와 공동으로 연씨의 싹을 틔우기 위해 씨담그기(浸種)를 실시하여 이 중 3개의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데(發芽) 성공하였다. 이후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은 끝에 2010년 7월 첫 꽃을 피움(開花)으로써, 고려시대의 연꽃은 7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 연꽃을 ‘아라홍련’이라 이름 지은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함안이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과거 융성했던 아라가야의 옛 땅(古都)임을 착안한 것으로, 그 모습은 고려시대 불화나 불상에서 보이는 연꽃대좌를 연상하게 한다. 아라홍련은 한 해 중 7~8월에 꽃을 피우며, 하루 중 오전 6~11시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3. 함안 악양루 : 함안군 대산면 대법로 331-1(거리 10km, 시간 18분) 함안 악양루(咸安岳陽樓)는 악양 마을악양교를 건너 ‘처녀 뱃사공 노래비’를 지나 함안천 하류에 남강과 합류하는 절벽 위에 있는 정자로, 조선 철종 8년(1857)에 세운 것이라 한다. 악양루(岳陽樓)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자 아래로는 남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함안 악양루 이 누각은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였으며, 1963년에 고쳐 지어 순흥안씨가 관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북두칠성에 의지한다는 의미의 '의두헌'(倚斗軒)과 청남 오재봉(菁南 吳齋峯)이 쓴 '악양루'라는 현판이 남아 있으며, 1992년 10월 21일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함안 악양루에서 본 남강 중국 악양시 서북쪽 옛 성벽 위에 우뚝 솟아 서쪽으로 동정호를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루각이 바로 악양루(岳陽樓)다. 중국 강남의 3대 명루 중 하나로 꼽히는 악양루는 그 빼어난 경관 때문에 역대 시인 묵객들이 "동정호는 천하에 유명한 호수요, 악양루는 천하에 유명한 누각이다(洞庭天下水, 岳陽天下樓)"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 현재의 건물은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미터에 삼층 목조 건물로 되어 있고,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악양루와 동정호는 찬사를 받아왔다. 특히 범중엄의 악양루기가 유명하다. 先天下之憂而憂(선천허자우이우)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後天下之樂而樂(후천하지낙이낙)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 꿀팁 자료-1 1. 함안 칠서 무산사(武山祠) : 함안군 칠서면 무릉길 75(거리 16km, 시간 22분) 정과 유품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였다. 선생의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남 합천 초계에 우거했으나, 아버지 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 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 문과에 을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 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 병조좌랑· 강원도 도사를 거쳐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1537년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 교리· 예빈 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현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며,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렸다. 소수서원 죽계천 건너편 바위의 글씨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며,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렸다. 소수서원의 敬자를 탁본하여 무산서당에 각한 글씨 특히 소수서원 경렴정에서 내다 보이는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는 주세봉 선생이 쓴 경(敬자와, 이황 선생이 쓴 白雲洞(백운동)이라는 글자가 유명하다. 당초 백운동 서원의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중국에서 책을 사왔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 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11대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 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 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 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재산 문제로 동생과 다툰 한 백성이 있었는데, 주세붕은 그 형으로 하여금 제 아우를 업고 종일 동헌의 뜰을 돌게 하였다. 그가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불러 ‘어릴적 동생을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 하니, 자신의 욕심을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이 주세붕을 비웃었으나, 얼마 후, 그의 솜씨에 감복하였다. 실록의 사관은 '유학을 겨우 알고 있으나, 많은 사람을 교화시켰다.'라고 그를 평했다. 함안 무산사 정문 영주 순흥의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난 뒤 경점정(景廉亭) 건너편의 죽계천(竹溪川)으로 나가면 붉은 글씨로 ‘敬’, 흰 글씨로 ‘白雲洞’이라고 새겨놓은 ‘敬’자바위를 만난다. ‘敬’(경) 자는 유학의 기본 이념(理念)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을 뜻한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쓴 글씨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죽계천은 1456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향중(鄕中) 유림을 이끈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무참히 살육된 순흥부 주민들의 수많은 시신이 수장되었던 곳으로 주세붕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敬’ 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냈다는 순흥 땅의 아픈 역사와 전설이 얽혀 있다. ‘白雲洞’(백운동)은 퇴계 이황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며 유생들이 백운동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밤이면 죽계천 건너 바위 위에 혼령이 나타나 울부짖고 하여 학문을 하는데 두려움이 많아 주세봉 선생이 좋은 일을 잡아 위령제(慰靈祭)를 올리고 편안히 극락왕생을 빌며 혼령을 달린 뒤 그 바위에 ‘敬“자를 새겨서 글자에 붉은 칠을 하였다고 한다. 옛날 순흥은 부사가 부임하는 큰 골로 영주(옛 지명: 영천)나 풍기보다 월등이 켰다고 한다.그러나 금성대군의 사건이 있은 후, 여러 골로 나누어 영주와 풍기, 또 부석으로 편입시켜 골 그 자치를 아예 없앴으며, 그 사건에 연루된 수백명의 순흥 안씨들이 멸문지화를 당하였고 남은 사람들은 순흥을 떠나 전국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무산사 내에 있는 무산서당(武山書堂)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 2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각각 2칸과 1칸의 방을 꾸며 전형적인 서당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광풍각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장판각에는 『무릉잡고』·『수구집』·『귀봉집』 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으며, 1976년 4월 15일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漆西 武山書堂 ▣보조코스 1. 대평늪 :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883-1(함안박물관→ 거리 14km, 시간 18분) 함안 앙양루는 대산면에 있고, '대평늪'은 법수면 대송리에 있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가는 코수라 다소 어색하다. 그러나 '대평늪'은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대평마을 앞쪽에 있습니다. 대평늪에는 천연기념물인 남생이를 비롯하여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 등 다양한 늪지 식물과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봄철이나 여름의 탐방이 제격이다. 주변에 지방 공단이 들어서면서 늪지의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 함안군 법수면의 늪지대는 광주안씨(廣州安氏)가 정착하면서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후손의 번창을 위해 늪지대를 보존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함안군에서 산새들이 둥지를 트는 맞은편에 목도를 놓아 늪을 잘 활용하고 있다. 대평늪의 늪지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1984년 11월 1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하천의 유입이나 강우에 의해 수원이 유지되는 대평늪 지역은 환경부 지정 생태계 변화 관찰 지역이며 남강 유역의 배후 습지로 형성되어 대평마을 앞에 있다. 함안 대평늪 *대구 귀가 : 거리 76km, 시간 62분 |
첫댓글 이번 답사는 어계 조려 선생의 유적지 탐방하지 못한 것이 옥에 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