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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8:25-32(1176) “공평하신 하나님” 2024. 11. 10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출판 규장에서 출간한 책 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조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 책의 저자였던 조엘 소넨버그(Joel Sonnenberg)가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텔레비젼에 출연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둘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지시는 분, 또는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과 고난이 연거푸 밀어 닥칠까하는 의문점으로 생을 어둡게 사시는 분이라면, 필히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저도 이 책을 보고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후 20개월 되던 해에 고속도로에서 40톤 트럭과 충돌해가지고 전신 3도의 중화상을 입게 되는데, 어린아이 온 몸에 불이 붙어서 숯 덩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손과 발, 얼굴이 다 녹아내리고 두개골까지 화상을 입습니다.
이런 중화상을 입은 아이를 두고 다들 죽는다고 했는데, 아이는 부모님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는 50여 차례의 대수술을 통해서 목숨을 부지합니다. 지금 현재 조엘의 모습도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아주 흉측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괴물이 왔다고 수군거리고 애들이 놀리고 하는데도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조엘 목사님은 지금 미국의 갈보리 채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정말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을 그는 실재 그의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라고 할 만큼 치열해지자, 점점 부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좋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나쁘고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병입니다.
달리 정신병이라고 말할 수 없고, 어떤 병명을 끄집어 낼 수 없지만, 매사에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고 대한다면, 이는 이미 심각한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행동 유형을 통해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는 행동심리학자들은 “사람은 보는 대로 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매일 남을 비난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면, 자신 또한 그런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볼 것 못 볼 것을 구별하여 보았습니다. 또한 들어야 할 말과 듣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하여 들었습니다. 이것이 기품 있는 양반의 모습이요, 사대부 집안의 가풍입니다. 하지만 막 자라는 집안의 아이들은 이런 것 구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키워 버립니다. 결국 보고 들은 대로 마구잡이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양반 상놈의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본 받을만한 아름다운 신앙>이라는 것도 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바라보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고 소망을 갖는 게 참된 믿음이요, 아름다운 신앙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100가지 모습과 실패하는 사람들의 100가지 모습”이란 내용의 짧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고 어떤 사람이 실패하느냐 하면, 이 둘을 구별하는 가장 특징적인 구별이 바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내는 생활태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우리들의 마음에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1. 원망을 버려라. - 원망을 버릴 때에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본문 18:2절에 보면 재미있는 이스라엘 속담하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속담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제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속담이 무엇이에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제가 질문 하나를 던져 보고자 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해서 아들의 이빨이 시릴까요? 시리지 않을까요? 절대 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이빨이 아파서 매우 고생을 합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를 못하면서 식사 때마다 고생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빨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이빨 때문에 고생하지만 남편은 이빨이 아프지 않아서 잘 먹습니다. 아내의 이빨 아픈 것이 남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신포도를 먹어도, 아버지 자신의 이빨은 시릴지 모르지만 아들의 이빨은 절대 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백성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항의합니다.
나와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우격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어도 아들의 이가 시리지 않는다고 말해도, 이들은 마구잡이로 에스겔 선지자에게 나아와 불평합니다.
어떤 불평입니까? “주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마구잡이로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은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 하면, 바로 자신들의 범죄 결과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려버리고, 자신은 살짝 빠져나가려고 하는 비겁함을 보여 줍니다.
똑같은 죄를 저질러 놓고도 아버지가 죄를 지었고 그 죄 때문에 자식인 우리가 아무 이유 없이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범죄자들이 함께 범죄를 행하다가 나중에 경찰에 잡히고 나면, 서로 상대방에서 손가락질하면서 “저 넘이 주범이고 난 그저 심부름만 했다”고 둘러대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행>에 대해서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은 피해자이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핑계거리를 둘러댑니다. 내 얼굴이 예쁘지 못한 것은 부모님 잘못 만나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혀 틀린 판단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키가 작으면 자식의 키도 작은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의사 분들에게 병원을 찾아온 성형환자들에게 드러내어 놓고 말하지 않지만, 다들 가슴 깊이 담고 있는 문구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바로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김희선처럼 인형 같이 작은 얼굴을 원하지만, 타고난 체격이 코메디언 이영자 같으면 절대 뜯어고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여러 개 잇습니다. 내가 태어난 환경이 그렇고,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이 그러합니다. 내가 부잣집에 태어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한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눈떠보니까 한국인인 것입니다. 미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누가 아프리카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끄집어 내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절대 변화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왜 변하지 않은 것 가지고 원망합니까? 환경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뜻하신 바가 있으니까 주신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면서 불평하는 어두운 생활을 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라고 말을 던지기 이전에 “나에게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마음껏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죄에서 떠나라 - 죄에서 떠날 때에 공평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30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고 있는 징계와 심판은, 불공평하게 집행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해 주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리는 심판과 징계를 벗어 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간단하게도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죄를 떠나 의로우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권고입니다.
교통표지 신호 중에 <U턴> 신호가 잇습니다. 내가 달리는 도로에 U턴 신호 표시가 있으면 나는 차를 돌려서 중앙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도로 가운데 노란색 두 줄로 그려져 있는 선이 중앙선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운전자는 중앙선을 절대 넘어서는 안 됩니다. 중앙선을 넘는 순간 반대편 차선에 달리던 차와 부딪치게 되면, 이것이 끔찍한 결말로 이어지는 중앙선 침범 대형사고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의 중앙선은 <생명선>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꼭 지켜야 하는 중앙선이라도 U턴 신호가 있으면 마음 놓고 넘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턴 신호는 180도 차를 돌려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법적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더러 “죄에서 떠나고 회개하라”는 말이, 바로 <하나님의 U턴>입니다. 하나님이 이 신호를 내려 그들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U턴>의 신호를 내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맛볼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교회에 부임하고 난 뒤에 설교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늘 고민하였습니다. 설교 말씀으로 성도들을 한 손으로 휘어 잡기를 원하면서 열심히준비하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 모습을 흉내를 내기로 작정합니다. 그 목사님 설교 스타일을 엄청 연습하면서 따라해 봅니다. 그리고는 그 교회 목사님처럼 혀를 꼬아가면서 열광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한결같이 “아, 목사님이 설교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셨구나. 멀쩡하던 분이 왜 저러실까?”라고 했습니다. 반응이 신통치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또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목사님처럼 조용한 설교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교인들이 “오늘은 힘없이 설교하는 것을 보니 은혜가 다 빠졌나보네!”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다음에는 유명한 부흥사처럼, 강단 여기 저기를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큰 동작을 사용하면서 흔히 말하는 방방 뜨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고, 점심시간 교회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의 뒤에서 어린아이 말이 들립니다.
“엄마! 울 목사님이 개그맨 같애!” 엄마를 따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밥을 먹는 아이가 느낀 목사님에 대한 표현이엇습니다.
목사님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결국 유명한 누구를 따라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말씀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고 바라 볼 때에, 가장 힘 있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은혜를 받기 위하여, 어느 누구의 기도 모습을 흉내 내지 마세요. 사람의 모습을 따라가고 누구처럼 하면 된다는 어리석은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도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하나님 뿐이며, 성도의 생활의 기준은 성경말씀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구를 따라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성군이었던 다윗을 따라가라고 말하지 않으며,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 왕을 본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따라갈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돌아갈 곳은 하나님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2024년 1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24년에 남아 있는 시간은 이제 한 달 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로써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맡은 제직으로서 어떻게 이 한 해를 살아 오셨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들입니다. 일꾼으로서 교회의 모든 제반 문제를 내 양어깨에 메고 나가야 하는 직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하게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이왕 믿을 것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이왕 봉사할 것 확실하게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에게 돌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축복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2절을 보세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30절과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문구는 참 신선하고 충격적인 문구입니다. 세상에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약한 여성들만을 골라서 잔인하게 살인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연쇄살인범들. 가난한 서민들의 피땀 어린 돈을 사기 쳐서 홀라당 먹고서 오리발 내미는 사기꾼들. 이리저리 보면 용서할 수 없고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 넘은 죽어도 되! 백 번 죽어도 마땅한 놈이야!”라고 욕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죄질이 너무 무거워서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킨다는 의미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은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 사실로 인하여 사형언도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만큼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죄인을 대하는 성도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전파하는 개혁자 요한 후스(죤 낙스)목사를 종교재판에서 화형선고를 내립니다. 화형 당하기 직전, 화형대로 끌려가서 기둥에 몸이 묶일 때에, 카톨릭 사제들은 요한 후스목사님에게 자신의 주장만 철회하면 살려준다고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요한 후스 목사님은 그냥 화형장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내가 이제까지 말로서 증거한 것을 이제는 피로서 보증하노라”라고 말하면서 결국 불태워 죽임을 당합니다.
요한 후스가 화형 당한 후에 종교개혁을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 결국 로마 카톨릭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교황과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점을 공개 지적하면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놓게 됩니다. 죤 낙스의 순교의 헌신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깨달아 새로워진 마음과 영혼이 이처럼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공평하신 하나님에게 남아 있는 2024년의 시간을 맡기고 11월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