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 출신 고위직 승려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법계 계위 높인 승려는 사족 출신 지식인이 다수
권근·김수온 등 불교 관련 글 다수 집필하며 친불교적 면모
‘스님 형 있다’ 공통점…중덕 이상 법계 화엄종 승려로 추정
조선 초 ‘실록’에도 신조·조구 등 중앙서 활약한 스님들 등장
조선 초 불교 관련 문헌자료를 살피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이름들이 있다.
권근(權近, 1352~1409), 김수온(金守溫, 1410~1481)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자로서 조정에 입사하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높은 이해와 우호적인 태도로
불교와 관련된 글을 다수 집필하여 그 시대에 이루어졌던
여러 불사(佛事)와 불교문화의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남긴다.
권근은 안동 권씨 출신으로 권문세족 집안의 사람이다.
고려 말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제자로
‘입학도설(入學圖說)’이라는 성리학 입문서를 지었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지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는 이성계를 도와 혁명에 참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새 왕조의 초대 문형(文衡:정2품 대제학의 별칭)이 되어
문필(文筆)에 관한 각종 업무를 관장하였다.
태조의 명에 따라 국가적으로 조성된 각종 불사에 대해 많은 기문(記文)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교와 관련된 여러 편의 산문과 한시를 남기는 등
친불교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다.
권근보다 60여년 늦게 조선 건국 이후에 태어난
김수온은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경적의 인쇄와 교정 등을 맡았던 관서)에서 관직을 시작하였으나
세종의 특명으로 곧바로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임금의 신임을 받으며
왕실불사 및 경전번역 등에 참여해 상당수의 관련 시문들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권근과 김수온에게는
둘 다 스님이 된 손위 형이 있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권근에게는 네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사(二巳)라는 이름의 승려였다.(‘태종실록’ 10권, 5년 12월19일)
이사의 본명과 행적은 자료의 한계로 아직까지 분명치 않다.
다만 권근이 쓴 ‘화엄 중덕 의침에게 드리는 글(贈華嚴中德義砧序)’에는
의침(義砧)이라는 승려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색의 시를 가지고 와서
글을 청하며 자신을 “화엄종 주공(珠公)의 문도로서
그대의 형님 남공(南公)과 동문입니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제목에서 의침이 당시 중덕(中德)의 법계를 지닌 화엄종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중덕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교종 승려의 법계(法階) 중 하나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의 법계를 취득한 이가
그 다음으로 진급할 때 얻게 되는 단계였다.
권근이 1352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380년경 그의 형인 이사는 30대 중반 이상의 나이였을 것이고,
동문인 의침과 마찬가지로 화엄종 승려로서 중덕 혹은
그 이상의 법계에 도달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침은 다수의 이름난 사대부 문인들과 교류하던 인물이었다.
‘화엄 중덕 의침에게 드리는 글’에서
그는 “내가 비록 세속 밖에서 지내지만,
진신선생(搢紳先生:벼슬아치 또는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 중에
포은(圃隱) 정공(鄭公:정몽주), 약재(若齋) 김공(金公:김구용),
도재(陶齋) 이공(李公:이숭인) 같은 분들이 모두
내가 글을 아는 사람이라 하여 (글을 써 달라는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라 하고 있어,
그가 내로라하는 성리학자들과 어울렸음을 알려 준다.
실제로 문인들의 문집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그는 호가 월창(月窓)으로 고려 말 신륵사에서 주석하였고,
조선이 개국한 뒤 도승통(都僧統:고려와 조선초 승관(僧官) 중 하나)으로서
영통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이후 법왕사에서 주석하였다.
또 음률을 잘하고 그림에 능하였으며 바둑과 창술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색, ‘송월창서(送月牕序)’ ; 유방선, ‘관산가(冠山歌)’)
의침 본인의 문장력 또한 뛰어나 ‘동문선’에 ‘영통사 서루에서
옛사람의 시에 차운하며(靈通寺西樓次古人韻)’라는 시가 수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건대 의침은 권근 형제와 마찬가지로
사족 출신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며,
권근의 형인 이사의 행적은 의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사와 의침의 출신 및 행적에서 여말선초의 불교계에서는
사족 출신의 지식인이어야 승과에 급제하여
법계의 단계를 높여나갈 수 있었음을 능히 짐작하게 된다.
여말선초의 이 같은 분위기는 조선 개국 후 1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김수온의 맏형은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속리사(俗離寺 : 현재의 속리산 법주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세종 말년 동생인 김수온과 함께
궁궐 안에 내원당을 짓는 등 왕실의 불사에 조력하였고,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 조선시대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최고의 승직)에 임명하며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존호를 내렸다.
문종의 동생인 세조 또한 왕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전(佛典)의 언해 사업과 훈민정음 유통에 힘썼는데,
김수온의 형은 이 사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세조의 존경과 신임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그가 바로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이다.
김수온의 졸기에는 그가 신미의 아우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불교계에서는 신미대사가 세조의 불전언해 사업을 주관했을 뿐 아니라,
세종의 한글 창제 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권근의 형인 이사와 김수온의 형인 신미는
조선 초 불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며 법계의 계위를 높일 수 있었던
승려들이 대체로 사족 출신의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족 출신의 고위직 승려임이 명백한 또 다른 사례로 설준(雪俊, ?~1489)이 있다.
설준은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대선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법계의 최고 단계)로서
조선시대 교종의 최고 승직인 판교종사(判敎宗師)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일찍이 ‘월인석보’의 편찬과 간경도감의 불전언해 사업에 참여하였고,
세조의 요절한 큰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의 원찰로 세워진
정인사(正因寺:현재의 서울 은평구 수국사)에서 주지를 지냈다.
말년에는 부녀자와의 추문에 연루되어
강제 환속을 당한 끝에 고단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성종 재위기 명실상부 교종의 수장이었으며
남효온(南孝溫, 1454~1492)과 같은 당대의 문인과 교류하던 인물이었다.
(김수온, ‘정인사중창기(正因寺重創記)’ ; 남효온,
‘숙정인사상설준화상(宿正因寺上雪峻和尙’) ‘실록’은
설준이 사족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俊, 士族子, 少爲髡)고 명시하고 있다
(‘성종실록’ 24권, 3년 11월3일).
조선 초의 ‘실록’과 문집에는 이 밖에도 신조(神照), 조구(祖丘),
설오(雪悟), 상총(尙聰), 조생(祖生), 상부(尙孚), 혜진(惠眞), 종안(宗眼), 운오(云悟) 등
중앙에서 활약한 많은 승려의 이름이 등장한다.
다만 그 기록은 산발적이어서 그들의 출신과 행적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많은 과제를 요한다.
그럼에도 높은 법계와 승직을 받고 활동하며 사료에 이름을 남길 정도라면
그 대부분이 사족 출신의 지식인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디 조선 초 인구 3할의 승려가 모두 사족 출신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었겠으랴.
2022년 2월16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