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1.
잊힌 기억을 찾아서
길은 끝나고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자동차로 더 이상 갈 수 없다. 산길 입구에는 빛바랜 나무판자 표지판이 방향을 알려준다. 쌍계사 터는 산길로 반 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좁은 길이 보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인적이 없었던 티가 난다. 전호나물 하얀 꽃이 허리 높이까지 자랐다. 키 낮은 풀들이 머금은 이슬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산화와 바지 아랫동을 흥건하게 적신다. 발목이 축축하다. 큼직한 바위나 나무 기둥에도 파란 이끼가 올랐다. 봄의 끝자리에 선 숲에는 녹색 화장을 한 듯 온통 풀빛이다. 순수했던 봄기운을 화려한 여름 색으로 예쁘게 치장하는 중이다.
하얀 꽃잎이 융단처럼 깔렸다. 암술 하나 주변을 수술 10개 정도가 감싸고 있으며 꽃잎이 다섯이다. 때죽나무 꽃길이다. 떨어진 꽃잎은 밟힌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꽃이 지고 첫 손님이다. 좁은 계곡을 따라 거의 평지에 가까운 오솔길을 걷는다. 산길이면서 숲길이고 산책길이다. 새로 돋은 연한 잎사귀를 통과한 아침 햇살에서 샤프란 향이 난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다. 휘파람새 소리와 더해져 생동감이 느껴진다.
너른 터에 벅수 2기가 보인다. 편백 아래 잘생긴 벅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늠름한 모습으로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지금까지 봐온 벅수 중에 크기도 생김새도 보존 상태도 최고다. 첫인상에서 어느 사찰의 금강역사가 스친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에 주먹코는 화난 듯 무서우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굵은 아랫입술을 굳게 다문 당장군은 홍금강역사를 연상하게 하고 8개의 윗니와 긴 수염을 늘어뜨린 주장군은 아금강역사와 겹친다.
벅수는 석장승 또는 돌장승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벅수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전염병이나 재앙 등에서 피하고 싶은 염원이나 풍수설에 의한 방위가 허한 곳에 기를 보강하려는 뜻에서 세우기도 했고 사찰 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높이기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원, 대전, 신안, 영암은 벅수의 고장이다. 특히 남원 실상사, 나주 불회사와 운흥사 입구의 벅수는 그 생김새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찰 벅수다. 남원 운봉 서천리, 인월 유곡리와 주천 등 마을 입구 벅수 또한 투박하면서 해악적이어서 친밀성을 느끼게 한다.
괘불대가 2쌍이 나타났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괘불대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대웅전이나 극락전 같은 당우가 위치할 터가 없어 혹시나 당간지주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왼쪽 바위에 새겨진 명문에 건륭사미(乾隆己未)는 청나라 고종 36년을 의미하며 우리 역사로 따지면 1770년으로 영조 47년이다. 쌍계사는 신라 16대 문성왕(854년) 때에 백운승려가 창건하여 1065년 고려 문종 19년에 호연대사가 중창했다 전해진다. 어느 시기에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770년 이후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곳곳에 석축이 보인다. 그 위에 대나무 숲이 우거졌다. 죽순이 올라오고 있다. 산속의 대나무는 절터가 가깝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물을 지나는 길에는 넓은 판석의 다리가 원시적인 느낌으로 놓여 있다. 머위가 군락을 이룬다는 것은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폐사지라는 것을 알겠다. 천년고찰 영암 쌍계사 터를 앞에 두고 있다. 무성한 대나무를 모두 베지 않고는 들어설 수도 없는 땅이다. 희미한 흔적뿐인 산속에서 오래도록 버려진 기억을 더듬으려 한다.
바지 한 벌을 버린다. 쌍계사 절터까지 함께 걸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생긴 쌍계사지 돌장승을 모델로 남긴 사진에 기록된 바지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선물한 바지이고 떠나신 아버지의 옷장에서 챙겨온 바지이며 5년을 간직한 아버지의 흔적이다. 버려지면 다시 찾을 수 없어 사진에 남기고 영원히 떠나보낸다. 시간은 잊기 위해 흐른다. 기록은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늦게 잊히려는 방편이다.
첫댓글 30분 남짖 걸어가는 길에서 이렇게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는건 눈으로 보는게 다가 아닌거지 오빠의 두눈사이 미간쯤에 또하나의 눈이 있음이다
아버지에서 나로 이어진 바지가 버려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이 아버지의 바지을 사주려고 하니
미간사이의 눈으로 보고 혼자 기억하는 것이다 혼자 아는 흔적이
어디 그것뿐이 겠는가 ??
교체!
자리 바꿈!
사람도 바통을 넘겨주고 사라지지만 물건도 바통을 주고 받으면 혹시나 생명을 얻을까 하여...
가능할까?
나는 모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