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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정화 (1570)
엘 그레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비 현실주의적인 화가였고,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 기법으로
자신의 열정적인 가톨릭 신앙을 종교화에 담은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당대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추방하고자 했던
반종교개혁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자기반성과 자기 정화를 명목으로 반 종교개혁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반성보다는 자기방어 차원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반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성전 정화>는 독일 이단자들로 불리던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 의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주제였다.
엘 그레코는 이 주제로 최소한 6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타락한 무리를 향해 분노의 채찍을 휘두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요구를 옹호한 것이다.
엘 그레코의 이러한 선택은 베네치아에 체류할 동안 같은 주제를 그린
야고포 바사노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
성전 정화를 주제로 그린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엘 그레코가 로마로 가기 전인 1570년 이전에 그린 <베네치아판 성전 정화>이다.
이 작품은 현재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서 2장 13-17절의 내용이 그 배경이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엘 그레코는 비둘기를 파는 사람을
그림 왼쪽 아래의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우아한 여인으로 그렸다.
이 여인의 표정과 옷의 주름 처리는 그의 스승 티치아노의 방식이다.
그녀는 왼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고,
오른손으로 희생 제물로 팔을 비둘기 새장을 잡고 있다.
진홍빛 속옷을 입고 푸른색 망토를 걸친 분노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장사꾼의 무리가 일제히 왼편으로 몰리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예수님을 분노케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식 건물과 역동적인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처리되었다.
또 오른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서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 깊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채찍질하고 있는 예수님을 피해 발가벗은 어린이를 데리고
황급히 사라지는 여인과 뒤로 넘어지는 여인은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당시 베네치아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인데,
귀족 남성들이 동성연애에 탐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의회가 매춘부들에게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바닥에 있는 어린양이 나무에 묶여 있고,
환전상들의 궤짝과 엎질러진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지며,
화려한 제단 밑에 누워있는 발가벗은 아이가 보인다.
아이 옆에는 경전이 널브러져 있고, 황급히 성전 밖으로 향하는 두 남자가 보인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닭과 바구니가 매달린 막대기를 들고 있고,
여기저기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있으며,
토끼는 바구니를 엎어놓고 바구니에서 쏟아진 음식을 먹으려 한다.
다소 산만해 보이는 이 작품을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es)는
이렇게 분석한다.
“엘 그레코의 <베네치아판 성전 정화>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과감하게 모방하였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작품의 구도는 미켈란젤로가 선택한 같은 주제의 양식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림의 등장인물들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차용되었고,
의미 전달 형식은 틴토레토와 바사노의 흔적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도는 느슨해 보이며, 공간 처리는 어딘가 혼란스럽고,
드로잉은 정확하지 않으며, 그림에는 너무 많은 자잘한 형상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엘 그레코는 단순히 거장의 작품들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거장들의 장점들을 모두 수용했고,
그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풍부한 몸동작을 이 작품에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래서 1570-75년에 그린 <로마판 성전 정화>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빠른 속도로 습득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베네치아판 성전 정화>를 혹평한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로마판 성전 정화>를 다소 좋게 평가했다.
“엘 그레코의 <로마판 성전 정화>는 보다 안정된 작품 구도와 개선된 공간 처리,
정확한 구조의 재현이다.”
엘 그레코는 현재 미국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는 <로마판>을
<베네치아판>과 달리 등장인물들의 위치를 다소 내려 잡아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림의 내용을 더 자세하고 안전감 있게 볼 수 있게 했다.
작품 속에서 관람자들의 시선이 된 중심선을 낮추게 되면
이런 현상을 유도할 수 있다.
<로마판>은 <베네치아판>과 구도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만,
여전히 현란한 채색의 조화나 명확한 작품의 명암은
작품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력이다.
그의 스승 티치아노는 색채를 우선으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성전 앞에서 장사꾼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역동적이다.
왼편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채찍질에 쓰러지고 있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은 여전히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비둘기가 든 새장을 잡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발가벗은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는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도 같다.
그런데 배경에 나타나는 건축물과 하늘의 묘사가 바뀌었다.
사각기둥과 아폴로 신상이 보였던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아치문 형태의 원형 기둥 건축물로 바뀌었고,
바닥에 난잡하게 있었던 동물들과 새들과 기물들이 많이 사라졌으며,
오른쪽 아래에 네 명의 초상화가 새롭게 첨가되었다.
그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줄리오 클로비오, 라파엘로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으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거장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의도는 무엇일까?
엘 그레코는 자신이 영향받은 화가들의 초상화를 각주처럼 사용했다.
<베네치아판>과 <로마판>을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은 모두 스페인에서 제작되었다.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약 20년 동안 이 주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그는
1597~1603년경에 작은 사이즈(42 x 52 cm)로 <성전 성화>를 다시 그렸고,
이 작품은 현재 뉴욕 프릭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다.
<뉴욕의 성전 정화>는 구도 면에서 진보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베네치아판>에 등장하는 아폴로 신상이 사라지고,
성경을 주제로 한 부조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뒤쪽으로 보이는 아치 모양의 건축물에 새겨진 부조가
의인과 악인의 분리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데,
왼쪽 부조에는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부조에는 <이사악의 희생 제사>가 새겨져 있다.
두 부조에는 모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왼쪽은 추방을,
오른쪽은 구원을 묘사한 것이 재미있다.
이는 하느님께 불순종한 사람이 낙원에서 추방되었듯이,
교회에 불순종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하느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이 축복받았듯이,
교회에 순종한 사람이 구원받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앙에 있는 예수님을 경계로, 오른쪽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이 있는데,
그들은 넉넉한 공간에서 안정되고 평온한 분위기로 있어
그들이 머문 공간이 천국이라는 것을 연상케 하지만,
왼쪽에는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괴로워 몸부림치고 불안한 분위기로 있어
그들이 머문 공간이 지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오른편과 왼편으로 가르듯이
교회를 수호하는 세력은 천국으로 보내고,
교회에 저항하는 세력은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이탈리아 작품에서처럼
가슴을 드러내는 여인들과 발가벗은 아이들이 사라졌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화에 누드를 그리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또 <베네치아판>에서처럼 난잡하게 있었던 동물과 새들과 기물들도 사라졌고,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의 행위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님을 그림의 중심에 그렸고,
문 사이로 보이는 르네상스 건축물과 하늘도 그 비중이 줄어들어
안정되고 편안한 구도로 그림이 묘사되었다.
그림 속 성전은 웅장한 기둥들로 이어진 벽을 이루고,
바닥타일 장식과 아치형 건물 입구 뒤로 깊은 공간이 보인다.
엘 그레코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깊은 공간 속에 배치하고,
건축적인 요소를 배경으로 강조하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엘 그레코는 <뉴욕의 성전 정화>의 구도로
1600년경에 두 개의 대형 작품을 제작했고,
그중 하나가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하나가 현재 마드리드의 바레스 피사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런던의 성전 정화>에서는 그가 다른 작품들에 통상적으로 그린
환전꾼들의 돈과 비둘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단호하게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치시는 예수님의 장면이 강조된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교회를 수호하는 세력과 교회에 저항하는 세력을 갈라놓고 있다.
오른편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이 있고,
왼편에는 회개하지 않는 장사꾼들이 있다.
왼편에 있는 장사꾼들은 하나같이 젊은 모습들이다.
젊은이들이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욕망의 충족을 삶의 성공으로 여기는 미숙한 인간들의 군상이라면
오른편에 있는 제자들은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지혜를 깊이 체득한 원숙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에 쥐어진 분노의 채찍으로
하느님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들을 견책하고 있지만
왼손으로는 의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헤아리며 자애로운 손길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오른손으로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하고 있고,
왼손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예수님 뒤에 있는 부조에는 <뉴욕의 성전 정화>와 같이
왼쪽에는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가 있고,
오른쪽에는 <이사악 희생 제사>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왔고,
인간의 순종으로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런던의 성전 정화>는 큰 작품이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탈리아 사람에서 스페인 사람으로 바뀐 것도 확연하게 알 수 있고,
등장인물들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동작과 느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의 일치감은 채색의 특징에서도 나타난다.
붉은색과 푸른색 옷을 입고 있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면서
각각 노란색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싸여 있고,
그 다음 원형을 이루면서 청자 빛의 색깔이 노란색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예수님의 역동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림 전체에 안정감이 넘치는 이유는
바로 의도적으로 배치된 색깔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바닥타일이 흰색과 갈색으로 체스판처럼 그린 <뉴욕의 성전 정화>보다
바닥타일을 단색으로 보이게 청회색조로 그린 <런던의 성전 정화>가
더욱 안정감 있게 보이는 것도 이 그림의 특징이다.
엘 그레코가 이 주제의 마지막으로 1610-14년경에 그린
<마드리드 산 기네스의 성전 정화>는 엘 그레코의 표현주의 정신을 대변해 준다.
1600년 이후부터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근대적 작가주의”를 서서히 획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17세기 초반에 이미 인상주의의 첫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마드리드 산 기네스의 성전 정화>에서는
베네치아의 감성주의와 피렌체의 이성주의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사실주의를 비롯하여 원근법과 명암법조차 완전히 무시하며,
작자의 의미 전달을 위해 애매모호한 감성과 무미건조한 이성을 모두 버리고
작가의 표현 의지대로 그림을 그렸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앞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시고 있다.
오른쪽에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제자들이
그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고,
왼쪽에는 장사꾼들이 예수님의 채찍을 피해 쓰러지고 있다.
왼편 건축물에는 <베네치아 판>에 등장하는 아폴로 신상이 다시 등장하고,
그 아래에는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아폴로는 시선과 손짓으로 미사를 드리는 성전의 중앙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느님 성전의 세속화를 막고
미사로 성전의 본래의 거룩한 모습을 되찾는 것이
바로 성전 정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행위와 미사를 봉헌하는 행위가
모두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는 행위라는 것에 공감한다.
미사를 통해 우리가 우상으로 섬기는 모든 세속화를 막는 것이
성전 정화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고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라며
채찍을 휘두르시는 예수님의 행동에도 동감한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