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대화를 나누다
최 화 웅
새벽 6시가 되면 나는 투석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나선다. 겨울에는 어둡고 찬바람이 휘몰아치지만 여름이면 먼동이 터오는 새아침이 한없이 맑고 밝다. 아파트 단지의 작은 소나무숲 여기저기서 까마귀의 아침인사가 한창이다. 나를 보고 “까아악, 까아악, 잘 잤느냐?”고 안부를 묻고 이어 “까르르, 까르르, 어디를 가느냐?” 고 묻는다. 대답이 없으면 “까악, 까악” 다시 되묻는다. 그때 나는 큰소리로 응답하며 십자 성호를 긋는다. 그렇게 까마귀들과 몇 차례 나름의 대화와 감정을 나눈다. 개인주택에 살면 주위에 씨앗이나 곡류를 뿌려주고 싶었으나 그것도 아파트 공동생활에서는 여의치 못하다. 아침을 알리는 까마귀의 목소리는 여유롭고 맑다. 그러나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져 천둥번개가 치거나 해거름에 가족들을 불러들일 때는 다급한 목소리를 질러댄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달하는 목소리가 온 동네에 가득하다. 오늘의 날씨와 먹이사냥 정보를 교환하는 까마귀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어떤 때는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몇 번이고 뒤돌아보게 된다.
새벽부터 까마귀 가족들과 소통을 하면 순수 그 자체다. 러시아어로 고통스럽다는 이름, 고리키의 단편「거짓말하는 검은 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에서 숲속의 새들 중에서 까마귀를 염세주의자라고 표현한다. 나는 까마귀야말로 낙천적이고 다정다감하다고 여긴다. 아침인사를 나누며 까마귀가 처한 분위기와 말에 충분히 귀 기울인다. 까마귀는 울지 않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작은 새나 풀벌레가 소리를 내는 소리를 싸잡아 ‘운다’라고 표현한다. 우는 것은 사람이 기쁘거나 슬프거나 아파서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며 내는 소리다. 심지어 문풍지가 바람에 운다고 하고 그리운 사람이 멀리서 타고오는 기차의 기적과 만선의 고깃배가 귀항을 알리는 뱃고동을 두고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어 배가 운다고 표현한다. 조용한 새벽이나 깊음 밤이면 산사의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을 향해 운다. 이런 표현에 비해서 ‘우짖다’와 ‘지저귀다’는 소리가 좀 더 크고 우렁차며 거칠다. 지저귀다에 비해 우짖다는 큰 소리로 계속해서 짖는 것이고 지저귀다는 작고 조용한 속삭임이다.
사람들은 더운 여름날 매미울음과 까마귀 울음을 시끄럽고 귀찮아한다. 나는 무더위 속에서 울어대는 매미소리와 까마귀 울음이 자연의 소리로 결코 거슬리지 않는다. 공사현장의 기계소리나 거리의 소음 보다는 자연스럽다. 까마귀의 어원은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실험한 1445년 발행한「용비어천가」에서 ‘가마괴’라고 썼고 그에 앞서 고구려 오회분 4호묘의 발이 셋 달린 삼족오를 숭상했으나 신라에 와서 흉조가 되었다. 당시 북방관계의 갈등이 빚은 감정일까?「삼국유사」사금갑조에 따르면 “까마귀가 매일매일 날아와 왕을 어딘가로 인도했는데, 인도한 곳으로 가보니 공주와 중이 간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까마귀는 가마리, 가막귀라고도 부른다. 까마귀 ‘烏’자는 온돌방을 본 떠 만든 한자라고 한다. 귀 기울이면 참새의 속삭임으로부터 검정색 긴 넥타이를 맨 박새, 머리에 흰 두건을 쓴 딱새, 목소리가 구르는 방울새. 그리고 까치와 까마귀가 아름다운 하모니로 플래시몹(Flash Mob)을 연출한다. 햇살 좋은 날 텃새들의 화음은 아름다기 이를 데 없다.
이솝 우화에는 300가지의 이야기 중에 까마귀가 8번이나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와 로마 신화의 큐피트는 날개를 달았다. 그리스 로마판 패러디는 신의 아기 천사(Angel)의 등에 날개를 달았던 그림이 전해진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까마귀를 창세신화의 주역으로 삼았고 스칸디나비아 삼국의 북유럽에서는 주신으로 삼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까마귀는 악마의 새라고 여긴다.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모친이 지은 시조 ‘백로가(白鷺歌)에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한 말이 요즘 같은 난세에 사람들을 움츠리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난주 칠석을 지내며 밤하늘을 통해 그리운 오작교(烏鵲橋)의 전설을 상상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게 하려고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을 잇대어 다리를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이 가슴을 울린다.
용기와 진실을 보여주는 아메리카 원주민 레니 레나페 부족의 옛 전설에 따르면 원래 까마귀는 '무지개 까마귀'였다. 무지개 까마귀와 함께 멀고 먼 옛날로 날아가 보자. 어느 춥고 어두운 겨울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더니 사방이 꽁꽁 얼어붙었다. 모든 동물가족들은 지치고 굶주려 얼어 죽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빼미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리 중 가장 용감한 친구가 태양을 찾아가서 온기를 달라고 간청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보라와 폭풍이 휘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치는 태양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험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모든 새드을 위해 무지개 까마귀가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태양으로부터 불타는 막대기를 얻어 깃털에 품고 악천후를 뚫고 돌아왔다. 그 일로 오색찬란하던 깃털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목소리는 꺽꺽 갈라지고 부리로부터 꼬리까지 옛 모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무지개 까마귀'의 의지와 삶이 희생의 제물이 된 셈이다.
까마귀는 예로부터 효도하는 새로 잘 알려져 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도록 어미가 품어주고 깨어나면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키운다. 둥지를 벗어날 때쯤이면 나는 연습과 낙하 연습을 시킨다. 까마귀 새끼도 알에서 깨어나면 어미새의 보호와 먹이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반포(反哺)라고 일컫는다. 까마귀 같은 새도 늙은 어미에게 효도하듯이 세상의 불경함을 우회적으로 꾸짖는다. 그래서 까마귀를 반포조(反哺鳥)라고도 한다. 반포지효(反哺之孝)란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이 점은 오늘 날처럼 효사상이 차츰 희박해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깨우친다. 사람이 만든 신과 종교, 역사와 정치권력, 심지어 멀쩡한 세상에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놓은 뒤 어진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이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세상을 까마귀는 다 알고 지켜보는 것이다.
까마귀는 얼마나 영리할까? 호두와 같은 딱딱한 껍질 속의 알맹이를 먹기 위해서 자유낙하 원리를 이용한다. 높은 곳에서 열매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열매를 길바닥 위에 놓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거나 달리는 자동차 바퀴 앞에 호두를 던지기도 한다. 도시에 사는 까마귀들은 둥지를 짓기 위해 아파트 베란다나 옥상의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걷어내고 옷걸이만을 가져가기도 한다. 잡식성인 까마귀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자연 청소부라 송장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죽어서 거두어 주는 사람 없이 버려지는 걸 ‘까마귀밥이 된다.’고도 한다. 텃새가 된 까마귀는 사시사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갈까마귀는 추운 겨울에 내려와 알을 나호 새끼를 키운다. 2004녀 12월「사이언스」지에서는 어느 과학자의 관찰과 실험 결과 까마귀의 지능이 침팬지만큼 높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나는 새벽길에서 마을까마귀들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 기울이며 대화를 나눈다. 요즘같이 무더운 날이나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려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더욱 요란하게 “책책책” 거린다. 가족들을 불러 들이고 세상에 빗소식을 알리기에 마음이 바쁘다. 그 보다 더 절실한 것은 그림과 문학작품, 그리고 전설과 신화, 우화를 통해서 갖는 공감일 것이다. 지난 80년 부산출신 민중화가 오윤의 목판화 ‘검은 새’가 바로 창틀에 앉은 까마귀다. 나에게는 짙은 연민과 함께 민주화의 시대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응시할수록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외로운 디아스포라 이중섭의 까마귀와 맥이 닿아 있고 오베르 시절 반 고흐가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과 ‘구름낀 하늘 아래 밀짚더미’, ‘빗속의 오베르 풍경’의 내면에서 짙은 페이소스(pathos)와 인간적 외로움을 느낀다.
까마귀가 목청을 돋우는 것은 지배자의 독선과 불통에 대한 항변이요, 우리의 어리석은 삶을 꾸짖는 외침이다. 신과 신화, 역사와 권력까지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려는 사람들이 자연의 파수꾼, 까마귀를 두고 마음대로 이야기한다. 고대 신화에서는 까마귀가 영조(靈鳥)로 등장하고 우리나라 고대신화에는 세발 달린 삼족오가 신의 사자로 등장했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까마귀가 주신(主神) 오딘의 어깨에 앉아 오딘과 인간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일본에서도 까마귀는 신성한 새로 취급한다. 울산에는 해마다 10월 말경부터 이듬해 3월까지 몽골 북부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5만여 마리의 까마귀들이 내려와 태화강 둔치에서 인간과 더불어 겨울을 난다. 울산 태화강의 생태복원을 반겨 찾아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울산이 까마귀 떼 도래지로 학술적 연구와 보호에 앞장설 만하다. 영혼이 깃든 침묵 속에서 까마귀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첫댓글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영수 소설가 아들 오윤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