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증오받은 권력과 경멸받는 권력 —지금 잃고 있는 것은 지지율만이 아니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반드시 피해야 할 두 가지를 말했다. 증오와 경멸이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인지를 분명히 했다. 증오에는 대응할 길이 있지만 경멸에는 없다는 것이다. 재산을 빼앗아 미움을 샀다면 돌려주면 되고, 억울한 일을 했다면 바로잡으면 된다.
그러나 경멸은 행위가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한 판단이어서 손댈 지점이 없다. 경멸받는 군주는 이미 권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증오는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할 때 온다. 경멸은 다르다. 마키아벨리는 다섯 가지를 꼽았다. 변덕스러움, 경박함, 유약함, 우유부단함, 무기력함. 이 가운데 하나라도 나타나면 경멸이 시작되고, 경멸은 소문처럼 퍼진다.
=두 종류의 무너짐=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무너짐을 연달아 보고 있다. 윤석열은 증오를 받았고, 이재명은 경멸을 받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밤에 벌어진 일은 증오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계엄은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직접 겨눴다.
그런데 그 권력이 무너진 방식을 보라. 절차가 작동했다.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갔고, 의원들이 담을 넘어 표결했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증오는 저항을 조직한다. 그리고 조직된 저항은 다음을 남긴다.
경멸은 그렇지 않다.
경멸받는 권력에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광장이 열리지 않고 격렬한 반대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조용히 등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을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옳은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더 무서운 것은 손쓸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증오는 해명하고 사과하고 바로잡으면 풀릴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경멸은 해명하려 할수록 오히려 깊어진다. 변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기력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지난 3월 60%대였던 국정 지지율이 40%대로 내려앉았다. 어떤 곳은 30%대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지율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지율은 회복될 수 있다. 경멸은 회수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꼽은 다섯 가지 가운데 지금 걸리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보자.
첫째가 변덕이다. 오늘 한 말과 내일 한 말이 다른 것.
검찰개혁의 당론은 분명했다. 올해 1월 공청회에서 여당 대표가 직접 말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처럼, 기소는 검사에게 수사는 경찰에게라고. 수사와 기소의 분리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대원칙이라고 했다.
그런데 9월 18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원래 최대치의 목표가 법무부 안에서 수사 검사와 기소 검사를 나누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법무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법무부 안에서 나누는 것을 최대치로 서술한 것이다.
청와대는 기관을 나누자는 원칙을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고 설명한다. 사실 관계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15개월 동안 국민이 들어온 말과 다르게 들린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둘째가 경박함이다. 작은 일에 흔들리는 것.
그 발언을 두고 한 작가가 국민을 속인 것이라 비판했다. 그러자 청와대가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크기의 불균형이 있다. 대통령과 작가가 가진 힘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큰 쪽이 작은 쪽의 말에 국가기구로 대응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이 옳았는지를 묻기 전에 그만큼 아팠구나로 읽는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 검토만 하고 하지 않으면 협박으로 남고, 실제로 하면 탄압이 된다. 어느 쪽이든 경멸은 깊어진다.
셋째가 그 둘이 겹치는 자리다.
9월 18일 회견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미운 마음이 들면 자신과 정부의 부족함을 탓해달라고. 국민은 언제나 옳다고. 성과와 성원 앞에서 두려움과 겸손함이 줄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이튿날에는 지지층을 향해 혐오와 비아냥과 감정적 비난을 버리고 품격 있는 설득과 따뜻한 호소에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닷새 뒤 청와대가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지자에게는 품격 있는 설득을 요구하면서 청와대는 법을 꺼내 든 형국이다. 부족함을 탓해달라 해놓고 탓한 사람에게 법적 조치를 검토하는 것이기도 하다. 회견의 진정성이 통째로 의심받는 지점이 여기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자에게도 경멸은 온다=
세종은 신하들의 직언을 보호했다. 틀린 말을 해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했다.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하들의 정면 반대를 받고도 물러서지 않았으나, 반대한 자를 벌하지는 않았다.
권위 있는 자가 직언을 수용할 때 그 권위는 더 강해진다. 거꾸로 말하면 이렇다. 경멸은 강압적인 자에게만 오지 않는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자에게도 온다.
설령 그 비판이 틀렸다 해도 그렇다. 틀렸다면 논거로 반박하면 된다. 왜 그것이 원래 목표였는지, 어떤 대안이 검토되고 무엇이 왜 배제됐는지, 지금의 안이 그것을 어떻게 넘어섰는지를 근거와 함께 내놓으면 된다.
논쟁에 맞설 것은 논거이지 법이 아니다. 법정으로 가져가는 순간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누가 힘이 세냐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 순간 이긴다 해도 잃는 것이 더 크다.
=설명하지 않은 15개월=
기만이었는가를 묻지 않아도 된다. 내심은 다툼의 대상이고, 다투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확인 가능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당론은 수사를 경찰에게 넘기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검사 출신들이 옮겨가는 새 기관이며, 그 변경이 왜 일어났는지가 국민에게 설명된 적이 없다.
경찰에 모든 수사를 넘기면 경찰이 비대해진다는 우려는 타당하다. 그래서 제3의 기관을 만든 것이고, 설계 자체로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 판단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칙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밝혔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15개월이 지난 뒤 원래 목표를 다시 서술하면, 그 서술이 사실이라 해도 사후 재정의로 읽힌다.
상앙은 변법을 시행하기 전에 나무 한 그루를 옮기는 사소한 약속부터 지켰다. 사마광은 그것을 두고 신의야말로 나라의 큰 보배라 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기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그리고 10월 2일이 온다=
검찰청이 폐지되고 공소청과 중수청이 출범한다. 법은 통과됐고 조직은 꾸려졌다.
주권자가 이 결정을 되물을 방법은 없다. 국민투표를 부칠 권한은 대통령에게만 있고, 5만 명이 동의한 청원은 처리되지 않으며,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통로가 없다.
방법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가장 무거운 대목이다.
=잃고 있는 것은 지지율만이 아니다=
증오받은 권력을 끌어내린 뒤 들어선 권력이 경멸받는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두 번의 광장에 섰던 사람들, 12월 3일 새벽 국회로 달려갔던 사람들, 23주 동안 자리를 지키고도 쓰레기를 주워 담았던 사람들. 그들이 증명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흐려진다.
그리고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다시 광장에 나갈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바꿔봐야 같더라는 말만큼 민주주의를 빠르게 무너뜨리는 것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한 정권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경고다. 권위와 경멸 사이의 거리는 짧고, 그 사이 어디에 설지는 매일 다시 정해진다.
되돌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지금이라도 설명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고, 물을 자리를 열어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증오에는 대응할 길이 있지만, 경멸에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