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 4
백발보다 아름다운 사람
첫눈이 내리던 아침이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은 산과 계곡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소진의 숲 카페 지붕에도, 마당의 장미 넝쿨에도, 겨울을 준비하던 텃밭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카페 안에는 장작 타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따뜻한 난로 옆에서 국화차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고, 창문 너머로는 첫눈이 아직도 느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소진은 창가에 서서 눈 내리는 산을 바라보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
"참 곱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지영이 안채에서 나왔다.
약간 길게 기른 머리를 빗으로 천천히 빗어 넘기고 있었다.
검은 머리 사이사이로 희끗한 흰머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기지만,
지영에게는 그것마저도 하나의 품위처럼 보였다.
소진은 한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지영."
"응?"
"긴 머리가 참 잘 어울려."
지영은 빗질을 멈추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그래?"
"예전에는 짧은 머리만 고집했는데."
"이제는 귀찮아서 그냥 기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긴 머리가 더 좋아."
"왠지 더 자유로워 보이고."
"더 따뜻해 보여."
지영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소진이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흰머리도 많이 늘었네."
지영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게."
"거울 볼 때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것 같아."
소진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해."
"왜?"
"늙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오히려..."
"더 멋있어졌어."
지영은 피식 웃었다.
"그건 당신이 좋게 봐줘서 그런 거지."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말했다.
"젊음은 세월이 주지만."
그는 소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품위는 살아온 시간이 만들어 주는 거니까."
카페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난로에서는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소진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좋은 원단을 고르고,
멋진 디자인을 완성하고,
누군가를 가장 아름답게 꾸며 주는 일이 행복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녀에게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입어도 거친 말투는 감출 수 없고,
아무리 화려한 장신구를 걸쳐도 따뜻하지 않은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반대로,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미소가 있었고,
낡은 외투 하나만 걸쳐도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지영이었다.
소진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내밀었다.
"국화차 한잔 할래?"
"좋지."
두 사람은 창밖의 첫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지영은 창밖의 눈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은 참 신기해."
"왜?"
"젊었을 땐."
"주름 하나에도 신경 쓰고."
"흰머리 하나에도 마음이 쓰였는데."
그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주름도 내 이야기 같고."
"흰머리도 내 시간이니까."
소진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리잖아."
지영은 웃으며 말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더니."
"당신은 아직도 그 말을 안 믿는구나."
소진도 웃었다.
"아니."
"나는 늘 느껴."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지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리지만."
"늘 내겐 어른이었어."
지영은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자랑도, 겸손도 없었다.
그저 오래 살아오며 사람을 이해하게 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편안한 미소였다.
첫눈은 저녁까지 조용히 내렸다.
카페 앞 마당은 어느새 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소진은 원고 노트를 펼쳐 오늘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천천히 한 줄을 덧붙였다.
'가장 아름다운 옷은 몸을 감싸는 옷이 아니라 마음을 감싸는 품위였다. 세월은 젊음을 데려가지만, 사람답게 살아온 시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노트를 덮은 소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 하얀 눈처럼,
지영이라는 사람도 늘 조용히 곁에 머물며 그녀의 삶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