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안동여고34회(79졸업)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두심
1960년대, 1970년대 진로소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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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좌)와 70년대(우)에 생산된 진로소주. 70년대 소주는 30도로 지금의 소주(약 25도)보다 알코올 농도가 높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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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0개의 소주 회사가 있다. 이 회사들은 서울을 비롯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에 각각 근거지를 두고 저마다 특색 있는 소주를 생산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소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때는 1920년대. 소주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어오며, 각 지방에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다.
‘소주 수집가’ 도창종(영남일보 편집위원) 씨는 지난 20년간 소주를 수집해 왔다. 14일 그를 통해 소주의 역사를 비롯해 60~70년대 서민의 설움을 달래주던 소주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또 그런 소주들이 지금껏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아보았다.
소주는 고려시대 말(1280년) 몽고와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소주는 고급 술이었다. 이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소주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 같은 ‘고급 술’ 소주가 서민들의 술로 탈바꿈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2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일반 가정에서도 소주를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됐다. 지금의 진로소주는 1924년에 처음 생산됐다.
1920년대 우리나라에는 3175개에 이르는 소주 제조업체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시대상황 탓에 이들 업체의 76% 정도는 사실상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 회사였다.
해방 뒤 1965년. 정부가 양곡관리법을 시행한 이때부터 곡물로 소주를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정부가 양곡 수급을 조절해 곡물 가격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증류식 소주(곡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소주)를 만들던 업체 3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희석식 소주가 처음 등장했다.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 타피오카 등을 발효시킨 뒤 연속식 증류기에서 증류시켜 얻은 알코올에 물을 타 만든 소주를 말한다. 현재 생산되는 소주는 대부분 이 같은 희석식 소주다.
변혁기를 겪으며 1972년에 68개로 업체 수가 줄어들었던 소주업계는 1998년에 이르러서야 활기를 되찾았다. 이때부터 소주 시장이 전면 개방되며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리고 전통주에 관심이 쏠리며 안동소주 등 사라졌던 증류식 소주도 다시 등장했다.
도 씨는 “요즘 소주는 대개 돌려서 따는 뚜껑이 달린 녹색 병에 들어있지만, 20년 전 소주는 그렇지 않았다”며 “소주가 변해온 모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새삼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대표소주’ 안동소주 |
화끈하게 취하고 깨끗하게 끝난다. ‘안동소주’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나라 ‘대표 소주’로 불리는 까닭이다.
시인 유안진은 “사나이의 눈물 같은, 피붙이의 통증 같은, 첫사랑의 격정 같은 내 고향의 약술”이라고 노래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화끈거리는 불의 힘이 느껴지는 45도 화주(火酒). 이 고장 시인 안상학의 구수한 술타령처럼 “뒤란 구석진 곳에 소주고리 엎어놓고 장작불로 짜낸 홧홧한 안동소주”에는 “취한 두어 시간 잠에서 깨어나 머리 한번 흔들고 짚세기 고쳐 매고 길 떠나는 등짐장수”와 같은 우리네 모습과 정서가 배어있다.
#안동소주, 우리나라 소주의 역사
우리나라에 증류주인 소주가 전해진 시기는 쿠빌라이가 고려를 침략한 13세기로 전해진다.
몽골은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아랍의 알코올 증류법을 배워 소주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몽골의 전진기지가 있던 개성과 안동, 제주를 중심으로 전파됐다는 설이 보편적이다.
칭기즈칸 후예의 약탈 상흔과 함께 남은 증류주 문화가 재탄생한 것이 안동소주인 셈이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에 김진(金眞)이란 무장이 임지인 경북 북부지방에서 소주 먹기를 즐겨하여 소주도(燒酒徒)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사대부들이 호사스러워져서 소주를 많이 마셔 취해야만 그만뒀다는 등의 내용이 눈에 띈다.
이같은 기록 등으로 미뤄 권문세가에서 소주를 빚어 마시거나 약으로 이용되다 일반 백성에게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만주까지 명성 ‘명품소주’
안동소주는 안동지방 명문가에서 가양주로 전승돼왔다. 처음으로 대량 생산된 것은 1920년대 참사를 지낸 권태연이 안동시 남문동에 공장을 세우고 상품화한 ‘제비원 소주’다. 전통 누룩대신 배양균을 이식하는 일본식 흑국을 사용한 개량된 방식으로 생산, 일본과 만주에까지 판매되면서 명성을 떨쳤다.
64년 정부의 양곡정책에 따라 쌀을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개량된 방식으로 생산되던 소주마저 생산이 중단됐다. 일제 강점기와 주세법 개정으로 안동소주의 전승이 위태로웠지만 민간에서는 몰래 만들어 마시며 맥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87년 안동소주 제조 비법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고 조옥화씨(83)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90년 민속주로 생산과 판매가 이뤄지면서 ‘대한민국 대표 소주’로 부활했다.
#밤이슬이 만들어 그윽하구나
안동소주를 만드는 재료는 깨끗한 물과 누룩을 만드는 밀, 고두밥을 만드는 멥쌀이 전부다. 다른 첨가물은 전혀 없다.
누룩은 통밀을 씻어 말린 다음 적당히 바수어 물을 섞어 버무리면서 꼭꼭 뭉쳐 누룩틀에 넣어 만든다. 20일 정도 띄운 다음 콩알 정도의 크기로 부숴 널어놓고 밤이슬을 맞힌다.
멥쌀로 고두밥을 쪄 그늘에 멍석을 깔고 넓게 펴서 식힌 다음 깨끗한 물을 부어가며 고두밥과 누룩을 손으로 버무려 술독에 넣어두고 15일 정도 숙성시키면 노르끄레하면서도 감칠맛나는, 증류하기 이전 단계인 전술이 된다.
발효된 전술을 솥에 넣고 소주고리와 냉각기를 솥 위에 얹은 뒤 불을 지펴서 열을 가하면 전술이 증발하면서 냉각기에 닿아 액체로 변해 소주 고리관을 타고 떨어진다. 처음에는 70~80도의 높은 도수의 소주가 흘러나오다 점점 도수가 낮아지는데 45도가 됐을 때 증류를 멈추면 맛과 향이 뛰어난 안동소주가 된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깨고 뒤끝 없고 ‘싸나이 술’
안동소주는 도수가 높은 만큼 빨리 취하고 빨리 깬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이 쌀로 다져졌기 때문에 쌀과 밀 등 순곡으로 만들어진 안동소주의 위 흡수력이 빨라 빨리 취하고 몸에 부담도 덜 준다고 안동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도수가 높기 때문에 안주로는 육류 등 기름진 것이 좋다. 안동 특유의 음식인 가오리찜과 삶은 문어, 상어전, 고기를 넣은 파산적이 안주로 제격이다.
안동 사람들은 곧잘 ‘쌀과 보리의 만남’이라며 안동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안동소주 폭탄주’인 셈이다.
애주가인 김휘동 안동시장(61)은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면 양주를 섞을 때와 달리 거품도 안 생겨 깨끗하게 마신 뒤 깨끗하게 깬다”며 “안동소주야말로 뒤끝없는 사나이의 술”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