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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빙겐의 대학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늦게 등단한 사람은 나이가 많은 헤겔이었다. 그는 대학을 끝내면서 독일지역에 머물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못해 스위스 베른에 있는 법률가의 집 가정교사로 갔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헤겔은 대학에 있을 때부터 관심이 깊었던 종교문제에 열중했다. 칸트의 종교철학을 읽고 크게 느낀 바 있는 헤겔은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방향으로 재정리함으로써 정신계의 어떤 변화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우리 나라의 어떤 학자가 조선왕조 때 유교의 전통을 바꾸어 새로운 정신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그러면서 법 및 국제법에 관한 연구도 병행시키고 있었다. 자기보다 연소한 셸링이 대학으로 진출했고 휠덜린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는데, 자신만이 독일 밖으로 밀려나온 것 같은 열등의식과 우울함을 느낀 헤겔은 휠덜린에게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가정교사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히테도 연구해야 했고 동창이었던 셸링의 저서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점차로 신학보다는 철학에의 길을 되찾기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약간의 유산도 상속받을 수 있게 되면서 헤겔은 본격적으로 철학을 위한 정열을 불태울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헤겔은 섬광과 같은 철학의 한 주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에는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짤막한 문구는 무한히 크고 많은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철학을 제창했고, 피히테는 그것을 자아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셸링은 거기에 자연을 포함시켜 동일성의 철학을 성취시켜 놓았다. 동일성 안에는 이성과 자아는 물론, 자연까지도 포함된 동일성이다. 그러면 그 동일성은 무엇인가? 헤겔은 그것을 정신(Geist)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은 어떤 본질을 갖는가? 변증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셸링이 동일성과 계시의 철학으로 규정한 것을 정신의 변증법으로 대치해놓은 것이다.이렇게 큰 계기를 넘긴 헤겔은 예나 대학에 가 있는 셸링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신의 철학을 뒤따라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자신을 얻어 철학으로 방향을 굳히기로 했으니까 후계자로서 좀 이끌어달라는 청이다. 그 때 셸링은 예나에서 외로운 위치에 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철학교수들이 모여 있는 데서 자신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헤겔이 온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헤겔은 30세를 넘기면서 겨우 시간강사의 자리를 얻어 오래 그리던 대학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셸링과 공동집필을 하는 연구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셸링이 주제와 방향을 잡아주고 헤겔은 집필해서 완성시키는 후배로서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근면과 정열을 겸비한 헤겔은 꾸준히 자신의 철학을 연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체계화된 저서가 유명한 "정신현상학"이다. 이 책은 세부분 3권으로 되어 있다. 첫권을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출판사에서는 더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둘렀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진격해오는데 인세를 받아야 재정적 곤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고를 끝내고 나니 프랑스 군대가 사열을 받고 있었다. 헤겔이 후일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문과 첫부분을 셸링에게 증정하고 격려의 뜻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은 셸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거기에는 자시의 철학을 보잘것없는 낡은 것으로 밀쳐버리고 헤겔 자신이 새로운 결정적인 철학을 완결했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셸링은 마침내 예냐 대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헤겔을 라이벌이 아닌 적대심에 가까운 기분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셸링은 죽을 때까지 헤겔에 대한 적대감정을 눅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런 셸링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몹시도 둔감한 성품이었다. 얼마 후 헤겔도 예나를 떠나게 되었다. 하숙집 주부와의 불륜의 사랑에 빠져 아들을 얻게 되고, 마침내는 전쟁 도중에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당분간은 교수직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다. 17,8세기의 철학자들은 가정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이 삼총사는 모두가 여성문제로 고난을 겪는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헤겔도 그때 얻은 아들때문에 오래 정신적 고통과 가정적 시련을 겪어야 하는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역사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대륙봉쇄형 공포
1808년: 유럽, 반도전쟁(포르투갈에서 영국군과 나폴레옹과의 싸움.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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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대학을 떠난 헤겔은 신문편집도 하고 고등학교 책임도 맡아보는 몇 해 동안 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해나갔다. 그 덕택으로 "정신현상학"이 인정을 받게도 되고 다시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독일인들은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고, 그 어려운 것을 알아야 철학자다운 자부심을 갖는지 모른다. 어쨌든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유명했다. 계속해서 저서가 나올수록 그 난해의 도는 심해져가는 경향이었다. 그의 "철학백과전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를 체계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취급되지 않은 학문과 세계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큰)논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큰 책은 누구도 전체를 기억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어려우면서 체계적인 것이다. 그 책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에 "철학백과 전서"의 처음 3분의 1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따로 떼내어 "작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정도이다. 그 뒤에도 "법철학"이 출간된다. 그 책은 요새 우리들이 얘기하는 사회철학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이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책이다. 말년에 헤겔은 다시 강의록으로 된 "예술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을 내놓는다. 예술과 종교문제는 누구나 취급하고 있으나, "역사철학"은 헤겔의 특수한 과제라고 보아 좋을 만한 책이다. 사람들은 옛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저술한 이후 처음 나온 역사철학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실 역사를 독립된 철학의 주제로 취급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부터는 수많은 역사철학이 나오기 시작했다.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을 받을 때 이야기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헤겔의 초청 여부를 놓고 교수들의 의견이 쉬 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헤겔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그 보고에 따라 초빙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그 보고서에는 '대단히 난해하기는 하나 대가다운 장래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초청해보자'는 의견이 들어 있었다. 어떤 때는 헤겔이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오면 학생들이 남아서 우리 교수님의 철학이 어떤 것이냐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헤겔의 조교를 맡아보던 헤닝을 시켜 직접 가서 물어보게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헤닝이 가서 선생님의 철학은 이런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헤겔은 '그것이 아니네, 내 철학은 나밖에 아는 이가 없다.' 라고 씁쓸해했다는 이야기다.어려울수록 매력을 느끼며 모르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일지도 모른다. 후에 헤겔은 베를린 대학으로 초청을 받는다. 베를린 대학은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독일 대표하는 관립대학으로 명색을 갖춘 곳이었다. 그때부터 헤겔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철학은 독일에서, 독일철학은 베를린대학이, 베를린대학철학의 주인은 헤겔로'라고 전해질 정도로 헤겔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져갔다. 한때 헤겔은 국립대학의 어용교수라고 불릴 정도로 친정부적이기도 했고, 그의 철학적 성향이 그런 방향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든 헤겔은 철학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의 철학체계가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헤겔은 취급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 많은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취급했으니, 누구도 그 뒤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나 그보다 더 난해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인 변증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변증법은 철학의 마법사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변증법으로 모든 문제를 조작해내며 해결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프랑스나 영국 철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변증법은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헤겔의 후계자들이 그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가 그 대표자 중의 하나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읽으면 변증법은 헤겔식이 아닐때 대단히 중요한 면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을 정신에서 물질로 바꾸어 철학과 사상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르크스와 그 후계자들이다. 심지어는 모택동이나 김일성까지도 모순과 혁명을 연결짓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밖에 있었던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 밖에 있었던 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통해 다시 세계무대에 등단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변증법은 어떤 방법론인가? 누구도 그 완결된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모두가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가능한 것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들이 이런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윤곽적인 설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모순, 대립, 통일: 헤겔의 변증법
그 때 세계에서는
1809년: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독립운동활발
1811년: 영국, 러다이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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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증법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변증법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변증은 개념의 분석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화 또는 토론의 뜻을 더 많이 지니게 된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변증법의 어원은 대화로 되어 있다. 대화 또는 토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갑은 A를 주장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을은 A에 반대되거나 A가 아닌 B를 주장한다. 그래서 A냐 B냐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A도 B도 아닌 C를 택하게 된다. C는 A와 B를 합친 것이면서도 A와 B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타나 C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D라고 말한다. 그러면 C와 D를 두고 토론하던 두 사람은 C도 D도 아니면서 그것을 합쳐 초월하는 E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더 높은 차원의 결론으로 유도, 발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와 대립에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는 대화와 토론의 기능,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모든 저서는 대화법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계속되는 대화에서 명백하고 믿을 수 있는 개념을 얻어내는 것을 변증적 사고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 것이다. 인식과 역사는 물론 철학적 존재론에까지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법의 방법은 논리학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헤겔의 "논리학"을 다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논리학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것은 논리학이라기보다는 논리학을 포함하는 변증법이며 변증법 자체가 그의 철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그로부터 어떤 사상이나 예술관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정(Thesis)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다. 괴테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서로 어긋나고 반대되는 점이 있었다. 괴테는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반(Anthesis)의 위상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대립시켜보면서 더 높은 제 3의 사상이나 예술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정과 반의 합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만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즉 반이 없었다면 양적으로 더 많은 지식은 얻을 수 있으나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은 탄생되지 못한다. 그 다음에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하자. 그 때는 합의 위치의 지식이 정이 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의 자리를 차지해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의 사상과 예술관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인식과 지식이 성장,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견해를 변증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카톨릭의 위치로 굳어져 왔다. 그 안에 갈등도 생기고 모순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가 나타나 반카톨릭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카톨릭은 루터를 파문에 처하고 추방해버린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크게 성장해 마침내는 카톨릭과 동등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두 갈래의 대립상대를 만들게 되나, 결국은 그 때문에 기독교는 더 성숙되고 원만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린다면 카톨릭이라는 어머니는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발전에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 작용을 변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변증법이 인정받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하게 되는 것은 동질적인 내용은 변증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되는 내용들은 어느 정도 대립과 변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순관계는 반드시 변증적 발전을 일으킨다. 그래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의 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간다. 반대개념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중간 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유와 무는 중간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모순은 논리에서는 항상 비라는 개념을 동반한다. 유와 비유 같은 헤겔의 애용개념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어도 변증법적 사고는 있을법하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정, 발달시킨 대표자가 마르크스였고 키에르케고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