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지역
마을유래및
마을역사
연구
마을형성 |
1522년(중종17년)가리포진의 설치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895년에 페진되어1896년 완도군 설군과 함께 군청소재지가 되었고, 1916년 완도면 소재지가 장좌리에서 군내리로 이전됨으로써 완도의 중심마을로 형성됨 |
지명유래 |
중종17년(1522년)에 완도항을 가리포진으로 설진하고 수군 600명으로 해상을 지키게 하였으며, 마을명을 가리포라 하였고 그 후 군내리라 하였으나, 설군과 동시 군정의 중심지라하여 군내리로 개칭하였음 |
특기사항 |
군청소재지로서 군단위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상업을 주업으로 소득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완도읍, 군외면, 신지면, 청산면민의 생활중심지임
완도
시골동네는
대개
임진왜란
전란을
피해
외지에서
완도의
시골동네를
형성한게
특징이다
각동네마다
집성촌이
형성되엇습니다
각
동네마다
주를 이루는
성씨가
그것입니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여러분들이
살았던
마을
유래 전설을
알아보는
그런시간을
마련해
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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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읍(서부지역
마을)
▶석장石場里◀
마을형성 |
약460여년전 선조대 육구미 해변에 당쟁을 피해다니던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입향하고
그 후 완산이씨가 입주하였으며 몇 년 후 현 여러성씨가 입주하여 본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음. |
지명유래 |
약 200여년전 형성되었으며 배가 부락앞까지 드나 들도록 되어 있는 포구가 있었고 임진 왜란 당시 이순신장군께서 왜군과 적전을 대비해 돌을 많이 모아 두었다해서 석장포라 하였다가 현재는 석장리로 칭함 |
전 설 |
수령이 약 300여년된 사정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농어제를 지내 왔으며 현재도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함 |
▶도암道岩里◀
마을형성 |
선조대 임난후 노씨와 설씨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왔으나 현재 거주치 않고 240여
년전 중분리에서 김해김씨가 분가하여 거주하였으며 그 후 진주강씨,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왔음 |
지명유래 |
상하마을 중앙에 용과 거북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고 용과 거북을 보호하는 앞.뒷 산에 바위가 많고 중도, 정도, 화흥, 가용리등의 길의 중심지라 하여 도암리로
칭하게 되었음 |
전 설 |
마을입구에 암산바위가 있는데 옛부터 이 바위에서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바위제를
지내왔다하며 비가 오지 않을때는 지금도 바위제를 지내고 있다고 함 |
중도中道里
마을형성 |
선조대 임난 후 광산노씨, 김해김씨, 김휘원이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함 |
지명유래 |
마을뒷산의 형태가 범이 나무에 있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범림계라 했으나 일제 시대에 행정구역 편제시 중분리라 했음
도암리, 중도리, 사정리를 합해서 중도리라 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암리와 사정리는 분구되었음 |
사정射亭里
마을형성 |
약 300여년전 성산배씨, 배식, 배석형제가 나주로부터 병자호란을 피해 이주 하여 왔음 |
지명유래 |
청해진의 군사들이 활을 쏘는 사정(활량들이 모여 쏘는 활터의 정자)과 솔릿께(과녘)라는
곳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지명으로 보아 활쏘는 연습장이라 하여 사정리라 했다 함 |
전 설 |
마을 뒤 해변에 선바위가 있는데 한 장수가 각시와 애정의 다리를 놓으려고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각시는 조류에 밀려 구경짝지(지금의 구계등)앞 각시여가 되고 장수는 다리를 등에 멘체 선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사정리를 선바추라 부르고 있음 |
정도正道里
마을형성 |
이조, 선조, 임난후 라씨, 정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고 무안박씨, 최씨등이 입사하여
부락이 형성되었다 함 |
지명유래 |
옛지명은 정돌리라 했는데 샘정(井)자와 돌돌(乭)자로 정(井)자는 지혈출야, 땅에서 물이 많이 나와 고여있는 집수지란 뜻이며, 돌(乭)은 석야(石也) 또는 땅이름이다. 돌이 샘처럼 많이 고여 있는 곳이라 해서 정돌리(井乭里)라 부르다가 1916년 리동 통폐합시 불교용어 정도(正道)에서 인용 마을이름을 정도리(正道里)로 개칭하였다 함 |
화개花開里
마을형성 |
선조대에 창원감씨가 처음 입주한 후 전주이씨, 연안차씨, 경주김씨가 이주하여 왔다 |
지명유래 |
리명을 하리(下里)라 했는데 이것을 화개동(花開洞)이라 개칭하였고 1916년 부흥리와
합하여 화흥리라 부르다가 해방 후 1945년 분구되어 다시 화개리라 했음 |
전 설 |
마을 뒷산 바위잿터는 매년 정월 초하루날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제사를 모시는
장소가 있는데 마을의 연중행사로 앞산의 할미당제와 같이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있음 |
부흥復興里(화흥리)
마을형성 |
선조대에 수원백씨가 처음으로 제주에서 귀양생활을 하다가 풀려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상경하던 중수가 수려하여 입향하게 되었다고 함 |
지명유래 |
리명을 죽하리(竹下里)라 했다가 이조시대에 성을 쌓다가 황금이 나와 황금리(黃金里)로
개칭하였다 함
1916년 부흥리와 화개리를 합하여 화흥리로 부르다 1945년 해방후 분구될 시 새로
일어서는 부락이라는 뜻에서 부흥리라고 했다 함 |
전 설 |
연대는 미상이나 옛선조들이 화흥리를 황금미(黃金味)라고 칭하였는데 황금미라 칭한
것은 마을내에 황금이 산재해 있다하여 황금미라고 하였음 |
마을형성 |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천조씨가 서제등, 삼림동에 처음 이주하여 왔고 그 후
풍양조씨, 남평문씨등이 이주하여 왔다. |
지명유래 |
고산 윤선도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길에 산세가 수려함을 보고 뱃길을 돌려 가까이 와서
보니 지금 이동 뫼산이 큰 거북이와 같다 하여 大龜尾(대구미)라 했다가 글자가 획순이
많고 까다로와 후세에 대구미(大口里)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
전 설 |
마을 뒷산에 띠꽃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마을 주변을 나무숲으로 울창하게 가꾸어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현재도 바위주변
수목을 베지 않고 있다 함 |
대신大新里
마을형성 |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피해 묵씨가 처음 이주하여 왔으나 후손은 없고 그 후 초계최씨,
김해김씨, 해남윤씨, 전주이씨가 차례로 이주 해와 부락이 형성 됨 |
지명유래 |
지명은 설군이전에 지세가 가는 포구를 이루어 세포리라 했으나 250여년전 마을 가운데
큰 정자나무가 있어 신정리라 명하다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대구미와 신정리를
합하여 대신리라 칭하게 되었음 |
전 설 |
마을 가운데 수령이 약 500여년된 묵은 사정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제를 올렸으며 현재도 제를 지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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