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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 외곽지대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했으며 이때부터 마을이 크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마을 앞으로 봉황천이 흐르고 뒤에는 덕망을 준다는 덕기봉이 있어 덕천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평대리, 월평리, 초현리, 홍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덕천리 함. - 면적은 6.0㎢이며 130가구에 337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벌대부 들의 한쪽을 차지한 곳에 마을이 있어 벌대부, 평대, 평대리라 부르며 들에 있는 큰 마을 이라 그리 부른다 - 덕 천(德川) 산과 냇물이 조화를 이루어 덕망있는 사람이 많이 배출된다 해서 덕천리 함. - 월평리(月坪里) 마을에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이 있어 월평리라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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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에 속함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했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인삼의 고장으로 각광을 받은지역이며 잦은 사화와 정변에 따른 명문의 낙향지 또는 피난지로 알려진 곳이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말을 키우는 마장이 있어 마장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삼태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장리 함. - 면적은 6.7㎢이며 175가구에 442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마 장(馬壯) 조선시대에 말을 먹이는 곳이라 마장이고 함 - 삼태골 마을지세가 삼태육향(三台六鄕)이 나온다 하여 삼태리라고 함. - 비모골 풍수지리설에 따른 쌍호휘미(雙虎揮尾)의 형국이므로 호미동 또는 비모골이라고 부른다. - 옴팡거리 마을지형이 옴팡 들어가 그리 부른다. - 옹기점 옛날에 옹기를 파는 옹기점이 있어 불렀다 함. - 흔터골 허무른 집터가 많은 마을이라 흔터골 이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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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에 속함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신라 이전으로 보고있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동수 위쪽이 되므로 웃동수 또는 상동수, 상동리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동리,마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동리라 함. - 면적은 5.5㎢이며 116가구에 312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정착농원 1955년 11월에 화재민 구호대책으로 처음 정착시킨 마을이라 정착농원이라 부름 - 상동(上桐) 마을지형이 꼭 오동나무에 새 집이 앉아있는 모습이라 해서 상동 또는 웃동수, 상동리라 부름 - 동수(桐藪) 옛날에 오동나무숲이 있었다 해서 동수라 부름 - 아랫동수 동수마을 아래쪽에 있다 해서 아랫동수, 하동수, 하동이라 부름 - 다릿골 마을에 다리가 있다 해서 다릿골, 교동이라고 부름 - 만석동 옛날에 만석을 자랑하는 장자가 살은 마을이라 만석동이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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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고려시대 전후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사기소 아래에 새로 마을이 크게 생김으로 새말 또는 신동리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수철리, 사기리를 병합하여 신동리라 함. - 면적은 3.7㎢이며 85가구에 211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사구시 새말 서남쪽 산속에 있는 마을을 사기소시라 부르며, 조선시대에 사기를 굽던 사기소가 있어 사기소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사구시 라고도 부른다. - 새말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말, 신동(新洞)이라 부른다. - 수천리(壽泉里) 마을 한가운데에 약수로 통하는 샘이 있어 사람들이 장수한다 하여 수천리라 한다.
신동리 공비토벌(6.25동란) - 1951년 11월 17일 밤0시경 총성을 듣고 공비의 행방을 알아낸 의용경찰은 지서장 지휘 아래 객별산고지에서 적을 공격 공비는 나팔부대라고 불리우는 300여명이었다. 그후 다시 나타나 신동리 새적골에서 잠복근무중이던 의용경찰 30여명과 격전 끝에 의용 경찰 1명이 전사하고, 1951년 11월 말에는 신동리 사기소 부락민 의 신고에 따라 공산군 패잔병 소령이 볏짚더미에 은신하고 있는 것을 의용경찰이 출동 생포하였으며, 공비사살 5명, 생포 1명, 약탈해가는 소 20두, 백미 수십가마를 되찾았으며 경찰은 3명의 전사자를 냈다. 남일면의 공비 토벌은 대체로 경찰, 의용경찰, 부락민들이 합심하여 토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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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백제시대 이후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큰 정자나무가 새롭게 단 장함으로 신정이란 이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덕흥 리, 홍도리 일부를 병함하여 신정리라 함 - 면적은 5.6㎢이며 130가구에 336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원동(院洞) 조선시대 길을 안내하는 금남원이라고 부르는 관집이 있었던 마을이 라 원동이라 함 - 신정(新亭)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새로 단장을 했다 해서 신정이라 부름 - 홍도리(紅桃里) 마을에는 홍도낙반형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며, 복숭아나무가 많았 으며 꽃이 피면 절경이었다 한다.(1997년 충청남도 지정 4천만이 살고 싶은 마을로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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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신라 이전으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봉황천, 즉 새내가 가되 므로 새내 또는 신천이라는 이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양대리와 남이면 매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정리함 - 면적은 4.9㎢이며 72가구에 2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돌독골(벌너머) 옛날부터 사람들이 돌들기를 하였다는 돌이 있으므로 돌독골이라 함 - 새내 신천이라고도 하며 새내가에 마을이 있어 새내라고 함 - 양대부(陽大部) 양지쪽으로 마을이 있어 양대리 또는 양대부라고 부른다. - 용실목 마을지형이 단지처럼 생겼다 해서 용실목 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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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백제 전후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넓은 들판인 대붓들 음달 쪽에 있으므로 음달대부 또는 음대부라는 이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음대리하 함 - 면적은 4.0㎢이며 141가구에 319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음대(陰大) 음대, 음달대부, 음대부라 하며 대붓들 음달쪽에 있는 마을이 있으 므로 그리 부른다. - 돌모랭이 마을 모롱이에 돌이 많으므로 그리 부른다
고적(古蹟) - 충혼탑(忠魂塔) 6. 25동란 때 희생된 남일면 출신 장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탑 - 산천재서원 소론파의 명재 윤증(尹拯)이 숙종조에 개설한 소론파의 근거가된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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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백제 전후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인맥을 조성한다는 풀고 개, 구름고개의 그 아래가 되므로 풀고개, 구름고개 또는 초현, 운현이 라는 이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덕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현리 함 - 면적은 4.0㎢이며 184가구에 469명이 거주하고 있다 - 남일면 의 중심지로 면사무소를 비롯한 행정기관이 위치한다
자연부락 - 풀고개 풀고개, 구름고개의 그 아래가 되므로 풀고개, 구름고개 또는 초현, 운현이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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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백제때는 진내군의 지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해 내려오다 이곳에서 태어난 김신의 공로로 금산일원이 금주로 승격하는 그 영광의 터전이며, 충렬왕 31년 (1305)부터는 금주고을의 발생지가 됨 -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 금산군 속하였으며, 인류의 정착 은 백제 이전으로 본다.
명칭유래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만리황풍비의 이름을 따서 황풍동 또는 황풍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사 미리, 삼태리, 마장리 일부와 부서면 나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풍리 라 부름 - 면적은 6.6㎢이며 167가구에 439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부락 - 황풍동(皇風洞) 고려시대 중국에서 크게 벼슬을 하여 요양행성 참정에 올랐던 김신 (금산김씨의 시조)이 살았으며 그를 위해 세운 萬里皇風이라고 새긴 비가 있다 해서 황풍동 이라 부름 - 사미리 새미실, 새미리 이라고 하며 마을에 이름난 선비가 많이 나온다 해서 그리 부른다 - 새터 갈가에 새로된 마을을 새터 또는 신기라 부른다 - 안터 마을 안쪽에 있다 해서 안터 또는 내기라 부른다
민간신앙(탑제) - 황풍리 탑제 및 사미리 탑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과 정월 초사 흔날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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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을 찾아줘 많은 공부했답니다 .... 준현 후배님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