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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註> 이 글은 포덕 147(2006)년 4월 28일 오후 2시부터 춘천 한림대학교 고령사회 연구소 국제회의실에서, 춘천 민예총이 주관하고, 춘천 문화 도시연대가 주최한 '靑吾 車相瓚 先生 60 週忌 宣揚 심포지움' 에서, 前 새싹회 이사장이신 신현득 박사의 '잡지 언론의 선구자 청오 차상찬' 과 함께 제가 발표한 "청오 차상찬과 종합잡지 개벽"의 주제논문의 초고를 이날 추가 발표한 내용과 시간상 발표하지 못한 내용과 각종 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
이 發題文의 내용이 매우 길어(200자 원고지 약 200매 정도) 청오 차상찬의 생애와 작품을 통한 평가를 다룬 前半部만 천도교 홈의 자유게시판과 각 교구 홈에 게재하고, '종합잡지 개벽은 어떤 잡지인가' 라는 후반내용과 본 발제문에 인용하고 분석한 많은참고문헌 해설과 訓菴 車雄烈 선생이 수집하여 제공한 1 차 자료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의 필자가 수정 보완한 청오 선생 年譜와 硏究資料 文獻目錄을 揭載한 全 文章을 吾菴 東學思想 硏究所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개방된 사이트인 金用天 資料室에서 계속 읽기와 필요하다면 자료 이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연보와 연구문헌 목록자료의 정리는, 금년 말에 출간 예정인 청오 차상찬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논문과 청오의 文才와 筆力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청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選定된 10여 편의 글과 함께, 청오 선생 환원이후 최초로 정리하여 출간될 (가명)"청오 차상찬 연구" 란 신간 책 末尾에 싣기 위하여, 완벽하게 확인 정리 작성된 것을, 책이 출간되기 전에. 처음으로 이 글 뒤에 첨가하여 발표합니다
<添記> 靑吾 車相瓚 선생의 60주기 행사는 반드시 우리 교단이 해야 했다. 우리는 다 잊고 있는데, 밖에 사람들이 알아 청오선생의 思想과 삶을 宣揚한다고 하니 매우 부끄럽다. 청오가 還元한 지 벌써 60週忌를 맞게 되었고, 또 올해가 靑吾와 같은 名門敎人家(천도교 회월보의 2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형 차상학과, 상준, 사돈인 개벽 창간 동인이며 인쇄인 민영순, 민영순의 권유로 청오 3 형제가 천도교에 입교함.)의 입교 101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이기 때문이다. 청오는 近代 韓國史에서 言論과 雜誌史에 第 1 人者로, 이 分野에 從事한 사람들의 異論없는 合意로 자리 매김한 지 이미 오래됐다. 이는 천도교가 현도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追求하고 實現하려 했던 出版文化運動의 最高의 功勞者란 것을 의미한다. 교단이 隆盛했다면, 1 世紀를 넘게 代를 이은 繼代 名門 敎人家를 찾아 그 信心을 높이 기려 표창함이 올바른 길이다. 이는 顯道 100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이고, 後代를 위한 준비이고, 새로운 신앙을 시작하는 교인들에게 崇仰의 대상이며, 모범이 되고, 교인들 가슴을 뜨겁게 피가 끓는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靑吾家와 같이 천도교에 至大한 貢獻을 한 名門敎家의 表彰과 宣揚은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동학창도 140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교단에 赫赫한 공로를 세운 중요한 교역자의 후손들이 한, 두 代로서 신앙이 무너져 천도교를 떠나는 실정에서 더더욱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있고, 매우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逆境 속에서, 항상 그 중심에 서서 萬難을 避하지 않고 酷毒한 試鍊을 心身을 다 받쳐 堪耐하면서 교단을 이끌어 온, 동학과 천도교단에 공헌한 선배 동덕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고마워하고, 그들이 목숨을 草芥같이 던져 가며 보여준 천도교에 대한 남다른 愛情과 信仰心을 얼마나 본 받을 수 있을까 自問하면서 돌아보고, 천도교에 대해 말하고, 신심을 키울까? 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이러한 분들을 연구하는 사람이 교단에는 없다는 것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 한다.
靑吾 車相瓚과 綜合雜誌 "開闢"
金 用 天
吾菴 東學思想 硏究所 代表
1. 청오 차상찬의 삶과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
청오(道號는 蘆菴) 차상찬 선생에 대한 연구 내지 소개한 글 약 50여 편 중, 한 두 편을 제외하고는 개벽을 중심으로 한, 동시대의 인물들의 회고담과 단편적인 일화의 소개에 끝이고 있다 아직 언론인으로서의 청오, 그가 남긴 글 속에 담겨있는 청오의 사상과 청오문학의 구체적인 분석 평가의 연구는 미흡한 형편이다. 雅號인 靑吾의 의미는 맑고 깨끗한 나, 싱싱한 나, 獨也靑靑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 알려졌으며 20대 때부터 썼다고 한다.
일제시대 초창기에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악질적으로 작두질해버린 "開闢"을 생각할 때마다, 이 선구적 잡지에 종사한 선인들의 의지를 되새기게 된다. 개벽 하면 우선 창간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차상찬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개벽의 고난의 역사를 돌아볼 때 차상찬은 개벽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차상찬은 1887년 2월 12일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송암리에서 成均進士 부친 車斗永과 모친 청주 한씨 사이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4년(17세)에 두 형(상학, 상준.)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 당시 신생활 운동이라 알려졌던 甲辰 開化運動의 일선에 앞장섰다. 그 후 삼 형제가 함께 천도교에 입교하여 청오는 셋째형 상학과 함께 일생을 천도교에 몸담았다. 그는 23세에 보성고보를 제 1회로 졸업하고, 그 해 9월엔 "천도교회월보" 제 2 호부터 학술부를 담당하면서부터(통권 2호부터 8호 까지 6회에 걸쳐 화학의 기초와 이론을 게재했다.) 그의 文才와 筆力이 나타나게 되어 평생을 언론계와 인연을 맺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6세에 보성전문 법과(6회)를 졸업하고 이어 모교에서 신익희, 김병로, 임 규, 남형우, 이한종과 함께 교수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20년(33세) ' 開闢'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여 폐간 때까지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개벽창간 동인은 이돈화, 박달성, 이두성, 민영순, 김기전, 등이며 뒤에 방정환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온갖 고초속에서 개벽사와 개벽을 이끌어 갔다. 그 많은 잡지들을 살펴볼 때, 선생의 글이 나오지 않는 데가 없다. 기자로서, 시인으로서, 편집자로서, 논객으로서, 지사로서, 사학자로서, 민속학자로서 1 인 10역의 역할을 하면서, 신문, 잡지에 쓴 글이 700여 편이 된다. 그 것은 취재기사에서부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준열하게 비판하는 논설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사회풍자와 인물만평 등의 수많은 칼럼 그리고 민족의 생명인 사화, 설화, 민담까지 발굴하는 작업을 하였으니 그 소재의 다양함과 방대함이나 박학다식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자와 해학이 가득찬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역사학에 밝은 학자이면서 문필가였다. 1922년(35세)에 잡지 "婦人"을 발간했고. 천도교 청년회에서 최초로 창립한 '어린이 날' 제정을 비롯한 어린이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차상찬은 1923년 2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개벽사의 집필진이 전국 각도를 답사하면서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취재할 때에, 특히 壯快한 筆致로 文才를 드러냈다. 해박한 지식과 유머러스한 표현 그리고 개벽이 갖고 있는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었다. 청오와 개벽사를 말할 때 둘이 아니오 하나라 했다. 청오와 개벽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잡지 뉴스/1997년 9월호에 게재된, 잡지 100년/흘러간 잡지-잡지인 이야기 <4>.최덕교(출판인 창조사 대표)가 쓴 "일제와 싸운, 큰 잡지 <개벽>"에 소개된 이야기 중에
개벽사가 간행한 수 많은 잡지에 관여한 청오를 잘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의된 청오에 대한 공통된 평가는. 일제시대에 있어서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잡지인 한 사람을 내세운다면, 전설적인 인물로, 차상찬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세평이라는 점과 차상찬이 목이 달아나면 달아났지 그에게서 바른 말을 없앨 수 없다"는 청오의 강건한 성격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일제 식민지시대 억눌리며, 짓밟히며 살던 조선 사람들은 하고싶은 말 한마디하지 못하던 그런 세상인데 "直言, 直筆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차상찬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윗 글은 필자가 요약한 것임.
개벽사에 근무했던 극작가 朴 珍은 그의 수필집 <歲歲年年. 1966년, 동화출판사>에서 당대의 제 일인자로 차상찬을 추억하면서
"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던 청오였다. 역사에 있어서는 뉘게도 뒤지지 않는 청오였고, 인물만평, 사회풍자, 재치있는 잡종기사, 훗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그러고도 신문과 다른 잡지에 왕성하게 글을 썼다.-중략- 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가 들보였다.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만화가요 잡지편집자인 崔永秀는 1946년 <民聲> 4월호에 "청오선생" 이란 글 속에서
"선생의 생애는 사업과 생활에 있어 함께 貧寒했다. 담배 한 갑 못 사 피우면서도 개벽사 외따른 방구석에서 물뿌리를 깨물어 뜯으며 일을 하셨다. 선생이 조선의 잡지계에서 不朽의 이름을 남기기까지의 그 노력은 人爲의 경지를 떠난 것이었다. 현 문단의 수많은 작가가 개벽사를 거쳐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오 선생의 運營自在한 그 실력의 가치를 넉넉히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오로지 安貧하는 철학 속에서 살았다."-이하 생략.
1933년부터 개벽사에서 <어린이>를 주간했던 원로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그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당시의 차상찬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개벽사를 이끌어 나가던 청오 차상찬은 하루 하루가 '조마조마'였다. 검열에 걸릴까봐 조마조마, 출두하라는 전화가 걸려 올까봐 조마조마, 비행을 둘춘 기사에 말썽이 붙을까봐 조마조마, 빚장이 나타날까봐 조마조마, 병날까봐 조마조마....이런 초조를 풀어주는 곳은 선술집밖에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청오의 호담장쾌하고 해학적인 글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하고 놀림감이 되는 술과, 대머리, 뚱뚱보란 소재를 다루어,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심정적인 태도를 기발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酒國憲法'(別乾坤. 19호. 1929.)과 '대머리(禿頭)철학강좌'(第一線 2권 6호. 1932.)와 '뚱뚱보 철학'(別乾坤. 8권 10호. 1933.)이다. 청오 자신이 술 잘하고, 대머리이고, 뚱뚱보였기 때문에 절실하고 실감나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酒國憲法'(別乾坤. 19호. 1929.)
余가 일반 麴民의 飮福을 增進하고 麴家의 隆昌을 圖하며 세계평화를 영원 유지하기 위하여 玆에 주국헌법을 발포하노라.
酒降生 1929년 2월 1일.
大酒國 賤者 御題
麴務 各 大臣 署名
1. 이 헌법에 위반되는 자는 1 년간 禁酒國이 유배함.
1. 이 헌법은 발표일로부터 시행함.
이상의 헌법 전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총 29조로 된 매우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이다. 주국의 영토와 조직과 지위의 명칭, 주국의 麴民이 될 수 없는 자의 명시(심신의 고장이 있는 자. 미성년자. 기독교인 등)와 酒國 입적의 불허. 國都의 지정(鐵甕城), 국민의 의무사항과, 음주의 양을 체질과 금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음주의 적절한 시기를 7가지로 분류하고, 음주의 예의와 금지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처벌의 양도 정했다. 21조에서 음주 행태의 꼴불견을 적시하여 十不出로 정하였으며 주국의 정당은 麴民黨, 麴水黨, 이외 타당은 불허한다고 했다. 끝으로 부칙에 해당하는 29조에는 본 법은 麴民黨員의 다수의 결의가 아니면 변경함을 부득함. 이라 하여 이 법의 개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대머리(禿頭)철학강좌'(第一線 2권 6호. 1932.)
대머리 대학 하기 강좌 란 부제가 붙은 글로 총 5 강좌로 되어 있다. 제 1강좌는 대머리의 10 대 공덕이란 주제로 다중이 모인 곳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어 대접받을 수 있어 상등의 머리라 했고, 이발소에 가면 요금 인하 요구권이 있으며 완전 대머리가 되면 이발소에 갈 필요가 없다, 또 머리에 이나 비듬이 끼지 않으며, 여름엔 시원하고, 필요한 때 변장하기가 편리하여 여러 종류의 사람으로 변장하여 도피하기 쉽고, 등등의 열 가지 덕을 나열했고, 제 2 장은 대머리의 5 대 위험이라 하여 방정맞은 여자가 잠결에 다듬이 돌로 알고 방망이로 때리면 위험하고, 제주에 가서 망건, 갓골, 탕건을 훔쳐갈 사람으로 오해 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고, 어린이와 잠잘 때, 요강으로 잘못 알아 오즘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등등의 피해를 입을 경우 등을 나열했고, 제 3 강은 대머리의 별명과 분류로 정하고 1종, 완전 대머리(全禿頭), 2종, 빛나는 대머리(光輝性禿頭), 3종, 일시성 불완전 대머리, 4종, 頭項禿頭=豪傑風의 學者, 5종, 後頭橫線禿頭 6종, 後頭禿頭, 7종, 片側性禿頭, 8종, 前頭禿頭=好色禿으로 분류했다. 제 4강은 대머리와 위인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대머리 위인으로 나포레옹, 비스마르크, 다윈, 톨스토이, 화이트만, 쇼펜하워, 스펜서, 레닌 등을 열거하여 대 사상가 대 철학자, 대 영웅, 대 문호와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많고 성품도 너그럽다고 했다. 제 5 강에선 대머리와 미인이란 주제로 대머리의 체질상 특징을 설명하고 대머리와 승려와 기생이 얽힌 해학적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뚱뚱보 철학'(別乾坤. 8권 10호. 1933.)
픽 笑笑는 대 금물, 뚱뚱이의 의의와 雅號, 역대 뚱뚱보의 名人名色, 뚱뚱보의 非常時이란 네 개의 소 제목으로 나누어, 첫째로 뚱뚱보를 보고 돼지=픽, 피그, 라고 웃는 것은 대 금물이라 했다. 둘째로 털보는 털털보, 곰보는 곰곰보, 난쟁이는 난난이, 키큰 사람을 키다리하고 키키라 하지 않는 데 뚱보는 애 뚱뚱보라 할까. 걸음이 뒤뚱뒤뚱해서, 급할 때 행동이 느려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다고 해서, 속이 의뭉스럽고 엉뚱해서, 살이 쪄서 키가 짧뚱해서, 말이 적고 뚱해서, 배가 뚱뚱 소리가 나 북소리 같아서, 뚱뚱보라 한다고 했다. 뚱보는 그 생김새로 인하여, 절구통, 채독, 데부짱, 다루마, 스모도리, 코끼리, 하마, 양도야지 은진미륵, 또는 땅차라는 별명이 있다. 라 했다. 그리고 역사서에 나오는 똥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끝으로 뚱뚱보로 인한 여러 비상사태를 열거하여 주의하자고 했다.
1924년(37세) 일제의 언론 탄압에 맞서 無明會를 비롯한 한국언론단체와 조선청년동맹를 비롯한 31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6월 7일에 결성한 언론집회 압박 탄핵회를 결성하고 실행위원을 맡아 6월 20일 대회를 강행하다 실행위원 尹洪烈, 安在鴻, 車相瓚, 金炳魯, 申明均, 李 仁 등 13명이 함께 강제 연행되었다. 1927년(40) 개벽지의 백상규, 김명순의 필화사건으로 방정환과 함께 왜경에 끌려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20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942년(55세) <朝鮮 白話集>을 탈고했으나 총독부 검열에 걸려 출판금지 되었고, 1945년(58세) 해방 후, "청오는 "개벽" 편집 고문이 되었으며, 청오가 돌아가신 후에도 개벽 속간은 총 9 호로 발행이 중단되었다(1946. 1. 1.-1949. 3. 25.).
그는 개벽 (1920.6.-1926.8.)에서뿐만 아니라 개벽사에서 발행한
부인-1922. 6월 1일에 창간, 1923. 8월호로 폐간.-통권 14호.
신여성-1923년 9월에 창간, 1934년 8월호로 폐간.-통권 38호.
어린이-1923. 3월 20일에 창간. 1934. 7월호로 폐간되었지만-통권 122호, 해방 후 복간되어 15호(1948.5.-1949. 12.)를 간행하여 총 137권이 된다.
조선농민-1925년 12월 13일에 창간. 1930년 5, 6월호로 폐간.-통권 57호(?).
별건곤-1926년 11월 1일에 창간, 1934년 7월 1일에 폐간.-통권 74호.
학생-1929. 3월 1일에 창간. 1930. 11월호로 폐간.-통권18호.
혜성-1931년 3월 1일에 창간. 1932. 4월호로 폐간.-통권 13호.
제일선-1932년 5월 20일에 속간, 1933. 3월호로 폐간.-통권 10호.- "彗星"의 改題 續刊임으 로 총 23권이 된다.
등을 발간했다. 청오는 위의 출판물에 주간, 편집인, 발행인을 맡아 그 공로가 지대하였다. 이외에도 천도교는 다양한 출판물이 계속 간행됐다.
신경제-1932년 5월에 차상찬이 발행인으로 창간, 창간호 200만 부를 인쇄하여, 개벽사의 4대 잡지(별건곤, 제일선, 신여성, 어린이 등을 말함.) 와 "농민" 애독자에게 홍보용으로 무료 배부하였다. 이 신문의 내용과 성격은 1932년 5월 29일자에 실린 내용 대한 기사를 보면, '取扱한 內容은 極히 넓어서 海內海外와 都會 農村과 社會方面이나 家庭方面이나 할 것 없이 經濟에 關한 것이면 모조리 取扱했으니 家庭살림하시는 이도 보시라 月給生活 하시는 이도 보시라. 상인도 보시라. 農夫도 보시라. 밥먹고, 옷입고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으시라.'라 하여 경제의 중요성과 모든 계층을 계몽하여 적정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국민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진 성격과 계몽교육과 신 경제생활로의 대전환에 대한 자신감이 꽉 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잡지는 이 해 7월 발행 이후로 간행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개벽사의 재정난이 얼마나 심각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농민-1930년 5월 8일에 창간. 1933. 12월호 통권 38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조선농민"의 실질적인 後身이라 할 수 있다. 1934년 2월 10일에 타블로이드 판 "農民旬報(월 10일마다 3회 출간)," "農民時報(월 4회 출간된 週報.)"로 改題하여 계속 간행되다 언제 폐간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외로 천도교가 출판한 것을 살펴보면
1. 萬歲報-天道敎의 機關紙 성격을 가진 日刊新聞으로 1906년 6월 17일.(대한제국 말. 고종 10년)의암 손병희의 발의로 창간됐다. 발행소는 서울 南署 會洞 85統 4號였고, 사장에 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申光熙, 주필에 신소설 血의 淚의 작가인 李仁稙이 맡았다. 여기에 출판에 경험이 많은 普文館 館長 權東鎭과 帝國新聞에서 일했던 張孝根등이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신문의 구독료로 월 20전을 받던 것을, 11월부터 8면으로 대폭 增面하고 월 30전, 1년 先納 3원으로 인상했다. 구독료도 징수하고, 고종으로부터 內帑金으로 1 천 원까지 下賜받기도 하고, 천도교의 재정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이 심하여 제 293호로 1907년 6월 29일에 終刊했다.
2. 천도교회월보-1910. 8. 15.에 창간하여 1937. 6. 15일에 통권 296호까지 발행하고 중단하고 중단되었다. 이 월보는 출판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려고 갈구했던 천도교가 만세보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들어낸 국판형의 잡지이다. 경술국치 2주전인 8월15일에 창간호 1호가 출간되는 運命的인 奇緣을 안고 출발했다.
3. 천도교 청년회 회보- 3.1운동을 주도한 후유증으로 교단의 지도자들 대다수가 수감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전국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앞장 서 1919년 9월 2일에 人乃天 宗旨의 硏究宣傳과 布德廣濟의 目的達成 및 新文化의 向上發展을 위한 活動體로서 <天道敎 靑年 敎理 講硏部>를 창립하고 다음 해 4월 25일에 강연부를 발전적으로 해체를 하여 <천도교 청년회>로 바뀌면서 편집부 사업으로, 청년지도자들의 교육용으로 천도교서를 저술출간 하는 한편 1920년 6월 25일에 한국 역사 최초로 종합잡지 개벽지를 창간하고 1921년 1월에 청년회보 5,000부를 발행하여 전 회원에게 배포했다. 이 회보는 부정기 간행물로 연 3, 4회 간행한 것으로 4호 이후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신인간- 교화 목적으로 출간된 천도교 기관지로 1926. 4월 1일에 창간하여 현재 통권 668호(2006. 4월호 현재.)로 계속 간행하고 있다.
5. 黨聲과 黨友-天道敎 靑年會가 1923년 9월 2일에 天道敎 靑年黨으로 개칭되었고, 1925년 12월 신구파 분리 때도 신파에선 天道敎 靑年黨(구파는 天道敎 靑年同盟)으로 고수했고, 1931년 12월에 신구파가 합동되자 1932년 2월 16일에 신구합동대회를 열어 天道敎 靑友黨으로 통합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이에 따라 신문형태의 청우당 기관지인 당성이 발행인 金道賢으로 하여 1931년 4월 1일 매월 1일을 발행일로 하여 간행됐다. 그러나 1933년 4월 신구파 다시 분열하게 되어 신파측에선 동년 6월 1일 12호부터 鄭應琫을 발행인으로 교체하여 계속 당성을 간행했고, 구파측은 6월부터 黨友란 제호로 발행했다. 1935년 12월호 통권 41호(현재 확인된 것만)로 폐간됐다.
6. 東學之光-청년당 일본 동경 당부 주관하여 기관지로 崔光龍을 발행인으로 하여 1927년 11월 10일에 국문위주의 책(필경본)으로 국내외 정세와 청년당의 활동에 대한 학술적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내용으로 간행됐다. 상당기간 휴간하다가 1933년 천도교 청년당 건당 10주년을 기념하여 9월에 속간했다가 1933년 11월 15일에 11월호 총 1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7. 衆聲- 1929년 3월 7일에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李鍾麟(천도교회월보 발행인을 겸하고 있었다.)하여 구파측에서 간행한 구파의 대표적인 국판형의 대중잡지에 속한다. 3호까지 발행후 일시 휴간했다가 12월에 속간하여 1930년 4월호를 끝으로 폐간된 듯하다.
8, 새벗- 구파 새벗사에서 高炳敦이 발행인이 되여 1929년 3월 1일로 간행하여 6월호까지 간행된 것은 확인되었으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폐간시기도 알 수 없고 총 간행권수도 알 수 없다.
9. 前線- 黨友를 改題하여 전선으로 1933년 1월부터 구파 천도교 청년동맹 명의로 간행됐다가 1937년 5월 휴간공고 후 간행여부와 총 발행 호수는 알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은 한국 근, 현대사의 출판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세계 역사상 강대국에 의한 수많은 식민지 국가가 있었지만 한국과 같은 혹독한 일제 식민지시대에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과 같은 일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출판문화사업을 통하여 민중의 지식 계발운동을 하여 기미독립운동과 같은 전 민족이 하나같이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불씨를 피워준 예도 없다.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의 커다란 공적은 대략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출판물을 통하여 밖으로 조선의 전 민중을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과 세계의 사상과 국제정세와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독립의 의지를 배양시켰다는 것과 안으로는 교인들을 교육시켜 수운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사람이 되게 하여 지상천국 건설에 역군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리서와 신문, 월간잡지들이 작게는 3, 4000 부에서 많게는 2백 만 부를 간행하여 조선 민중과 교인들의 지식계발운동의 교재가 되게 하였으며 1910년 전후에 100만 교도가,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20년대 전후엔 200만으로, 청년당 또는 청우당이 출판운동과 7개 부문운동이 최고에 달했던 30년대 중반에는 300만의 교도와 당원이 민중에 선봉에 서,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 인구로 대비하여 추산해보면, 출판물이 월간 약 4, 50만 부를 간행 배포하였음으로 월간 100만 부에 해당하며 교도 300만 명은. 약 1000만 명으로 계산됨으로 그 규모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출판문화 중심에 천도교 월보에서 시작하여 개벽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신명을 바친 청오 차상찬이 있었으며 출판문화의 놀라운 성공 속에 청오의 피와 땀과 삶이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청오와 같은 인물을 찾아 육성하여 신명을 바쳐 지대한 공을 이룩하게 한 것은 천도교의 복이었다.
청오는 개벽이 3, 1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족주의의 분출구로 자처하고 나섰던 그 창간의 참뜻을 기리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8년 만에 속간하게된 개벽 속간호의 권두언에서 그는 이렇게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우리는 각오하고 결심하였습니다. 최후 1인 최후의 1각까지라도 본 지를 위하여 분투용전하려고.... 오늘에 사세가 비록 沈寂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주의와 정신이 변치 않는다면 만천하 동지가 다 우리를 응원하고 지지할 터인즉 우리는 거기에 다시 자신이 생기고 자위가 생기고 앞으로 백 배 천 배의 용기를 내어 光榮의 역사를 가진 개벽자의 사명을 다하려 합니다."
1926년 8월 1일에 통권 72호로 폐간 처분 당하여 문을 닫을 때 장검을 집고 비분을 참지 못하여 개벽사 전 직원이 사진을 찍은 지 8년 만에, 차상찬은 다시 민족 개벽을 위하고 자유독립을 바라는 그 생령을 살리었다. 1934년 11월 1일에 차상찬은 속간 개벽의 발행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여 속간 4호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이폐간은 어떤 의미에선 청오를 이빨 빠진 사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차상찬은 이처럼 개벽과 함께 생애를 살다가 갔던 것이다. 그는 豪談明快하여 술 잘하고, 재담이 많은 인물이었다. 초창기 잡지계에 거인다운 풍모로서 그의 글은 섬광처럼 번득이는 가운데 독자를 녹였다.
청오의 생애와 업적과 작품에 관한 글로는,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 최덕교의 "일제와 싸운, 큰 잡지 <개벽>에서
"그는 개벽이 죽고 나서 잡지가 없는 세월을 한때는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1937년 <野談> "야사와 민담"을, 1938년<조선 중앙일보>에 역사소설 "장희빈"을, 1939년 <매일신보>에 "징기스칸"을 연재하면서 많은 저술을 했다." 라고 쓰고 있다.
1946년(59세)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3월 24일(음 2월20일)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던 그는 중풍과 영양실조로 안타갑게 59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또 하나의 출판 문화의 커다란 별이 사라진 것이다.
필명 靑吾, 壽春山人, 月明山人, 三角山人, 鷲棲山人, 翠雲生, 江村生, 觀相者, 史外史人, 車記生,
車夫子, 車賤子, 酒賤子, 風流郞, 考古生, 門內漢, 傍聽生, 禿頭博士, 차돌이, 각살이, 三淸洞人,
嘉會洞人 등
유고 <朝鮮史 千年悲史,> 1934.
<海東艶史> 1937.
<朝鮮 白話集> 1941.
<朝鮮史 外史> 1947.
<韓國野談史話 全集 5> 1959.
계속되는 글은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개방된 사이트인 김용천 자료실에서의 계속 읽기와 자료 이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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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開闢"은 어떤 잡지인가?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여 대 변신을 한, 제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와 1894년 동학혁명 당시부터 고락을 같이 했던 교단의 다수의 최고 지도자들의 꿈은 출판문화사업이었다. 1894년의 갑오 동학 혁명과 문화혁신운동인 1904년의 갑진 개화운동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지상천국 건설을 최후의 목표를 삼았던 천도교가 가만히 앉아서 일본의 침략야욕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의도를 꿰뚫어 본, 교단지도자들의 일치된 생각은, 민족을 애국애족의 국민으로 만드는 것과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신인간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신문과 잡지의 출판이 필요했다. 그래서 천도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난을 헤쳐가며 1906년 6월 17일에 만세보 제 1호를 간행하게된다.
이로부터 근, 현대사 100년 동안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은 금자탑을 세웠고 한국신문 잡지의 모범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만세보는 1906년 6월 17일에 창간 제 1호로 출발하여 1907년 6월 29일 까지 만 1년여 동안에 293호 종간 된 것과 1910년 8월15일에 창간호를 내어 통권 296호 까지 1937년 6월에 종간된 천도교 회월보는 일제가 가혹하게 검열을 강화했던 이 시대에 있어 최 장수 신문과 잡지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천도교의 기관지로서 사명도 다했지만, 일제 침략하에 있어서의 한국의 언론문화에 기여한 공헌도도 최고라 할 수 있다. 또한 1926년 4월에 창간호를 낸 신인간은 2006년 4월까지 통권 668호를 내고 있는 또 하나의 장수 잡지이다. 창간 80돌을 맞은 신인간은 통권 960호가 출간되어야 하지만, 일제 말기와 어지러웠던 해방공간과 6,25사변으로 인한 혼란을 정비하기 위한 50년대 말까지 휴간과 격월간 등으로 인하여 300호 정도가 간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이 시기의 천도교가 침체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출판문화의 광범위한 천도교의 활동은 그 깊고 폭넓은 지식을 가진 능력있는 수많은 인물과 다양한 출판물의 경험은 개벽을 창간하여 문학분야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과 저력이 되어 훌륭한 잡지가 됨으로서 최장수의 잡지가 될 수 있었다. 만세보의 최초의 신문 연재소설, 천도교 기관지인 회월보의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언문으로 게재한 장편소설(掌篇小說)과 시문학 등의 수용은 경이로운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과 집필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무형의 천도교의 자산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의암과 그를 둘러싼 교단의 최고 지도자들이 조선의 인재 24명을 선발하여 1차로 1902년 3월에 일본에 유학을 시켜 조선의 각 분야의 지도자로 육성하려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그 후 수차에 걸쳐 수십 명이 유학하여 조선의 각 분야에 지도자가 됐다.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천도교를 통해 일본을 유학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제 개벽과 같은 훌륭한 종합잡지가 될 수 있었던 창간의 저력이 된 만세보와 천도교 월보의 창간 배경과 성격, 편집 구성과 게재된 글들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萬歲報의 刊行準備는, 광무10년 2월 6일자 帝國新聞을 보면 '新聞將刊-천도교주 손병희씨는 장차 그 교회 중 기관신문을 발행하기로 준비중이라 더라'라고 알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천도교단은 신문을 발행할 계획을 적어도 상당기간 전부터 추진된 것으로 추측된다.
천도교의 출간의지를 잘 나타낸 창간사에 '신문이란 지식을 계발하는 하나의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국제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으며 정치를 지도할 수도 있을 만큼 여론의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라고 전제한 다음 이어서 설립의 목적이 오로지 2천만 인민에 교육에 있음과 동포의 지식 계발을 焦眉의 일로 여기고 온갖 정신을 교육중심으로 할 것과 국권회복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발행취지는 社長 吳世昌의 第一號 發刊 社說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萬歲報라 名稱한 新聞은 何를 爲하야 作함이뇨 我韓人民의 智識啓發키랄 爲하야 作함이라 噫라 社會랄 組織하야 國家랄 形成함이 時代의 變遷을 隨하야 人民知識을 啓發하야 野昧한 見聞으로 文明에 進케하며 幼穉한 知覺으로 老成에 達케함은 新聞敎育의 神聖함에 無過하다 謂할지라도 是로 以하야 環球萬邦에 流通하난 近世風潮가 人民의 智識啓發하기를 第一主義로 認定하야 新聞社를 廣設하고 文壇에 牛耳를 執하고 袞鉞의 責任을 擔荷하야 已啓已發한 人民의 智識도 益益進步키를 企圖하거든 況此未啓發한 人民의 敎育이야 엇지 一刻一抄랄 遲緩함이 可하리오 新聞의 效力으로 言할진대 個人의 智識랄 啓發할뿐아니라 一則 國際의 關係와 政治의 挽回와 甚至戰爭을 激成하며 平和랄 恢復하난 一機關이오 二則 善을 彰하며 惡을 懲하고 上化가 下에 浹하며 下통이 上에 達케하며 加之 生活上步趣와 開化的階級이 各히 個人의 品性資格을 隨하야 水의 漸漬함과 如히 全國을 開導誘掖하난 一탁약이니 生存競爭의 時代랄 遭遇하야 新聞社會의 多數興旺함이 亦是 人民을 警省하난 處處主人의 一木鐸이라 謂할지로다. 嗚呼라 (中略) 二千萬同胞난 孜孜愛讀하기랄 不怠하며 吾제난 蒸蒸進就하기랄 不懈하야 天然한 善良效果랄 得할 地頭에난 人民智識은 自然啓發하기로 斷言하노니 此난 鬼神에 質하야도 疑가 無하깃고 聖人을 俟하야도 惑지아니할지라 善良效果라 謂하난 成蹟은 何에 在하뇨 學問이 增進하고 殖産이 發達하야 國家와 人民의 實力을 養成하야 國威國光이 萬歲에 奮揚할지니 此萬歲報난 國家人民과 共히 永遠光耀하기로 第一號發刊에 深祝하노라>
이러한 창간 취지를 밝힌 속에는 천도교의 교리의 집중교육을 포함하고 있다. 만세보(萬歲報)는 창간 1개월을 조금 지나자마자, 천도교의 초기교육 교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교리서 수 편을 연재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朴孟洙, 崔起榮의 韓末 天道敎 資料集 (1)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천도교전(天道敎典) 5회(1906년 7월 24일-28일),
천도교지(天道敎志) 5회(1906년 7월 29일- 8월 3일),
천도 태원경(天道太元經=道全體圖說) 4회(1906년 8월 4일-8일),
준비시대(準備時代) 31회(1906년 8월 9일-9월 18일),
교우자성(敎友自省) 18회(1906년 11월 23-12월 14일),
현기문답(玄機問答) 15회(1907년 3월 30일- 4월 17일),
천도교문(天道敎門) 11회(1907년 4월 18일-5월 2일)등을 1면에 계속해서 연재되었다.
이렇게 연재된 교리서들은 천도교의 출판사인 普文館에서 1906과 1907년에 걸쳐 單行本으로 간행하여 교인들의 신앙심을 공고히 하는 自學 學習書로 사용했다. 또 보문관은 만세보에 연재된 교리서 외에, 1907년엔 관감록(觀感錄), 천약종정(天約宗正), 대종정의(大宗正義), 동경연의(東經演義), 삼수요지(三壽要旨), 성훈연의(聖訓演義) 등을 간행함으로서 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교리교육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성공적인 출판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新聞創刊에 앞서 광무10(1906)년 5월 16일부터 3일간에 걸쳐 帝國新聞과 皇城新聞 및 大韓每日申報 등 日刊紙에 萬歲報가 6월 1일부터 발행하겠다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었으나 2주가 조금 지난 6월17일로 지연되었다. 이는 新聞印刷에 關聯된 機器들이 船便輸送에 따른 遲延으로 不可避했다. 6월 17일에 제1호를 발행한 후, 10일 동안은 휴간을 하고 제2호는 6월 28일에 발행한 것으로 보아 시설준비가 미진한 상태에서 창간호를 발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本社난 京城會洞에 設立하고 六月日一日붓터 發行할터온듸 本報난 社會的進步主義로 國民知識啓發達의 捷徑을 硏究하야 我國의 未曾有한 新發明이 許多하며 且每朔에 巨額의 探報費를 支出하야 神出鬼沒한난 通信의 敏捷함이 有하니 此報를 購覽하시난 僉君子난 社會上 新耳目新知識을 可得하실 것이오며 一朔新聞價난 新貨二十錢이오니 請覽君子난 發行前期한야 左記處로 通知하심을 望함, 南署會洞八十五統四戶 萬歲報 社長 吳世昌, 總務兼主筆 李仁稙" -李東初 -天道敎機關紙『萬歲報』에 關한 考察에서
이 日刊新聞 萬歲報는 창간호를 수 만 부를 인쇄하여 대량 배포했고 판매보급소를 서울에 9개소를 서점, 정거장, 약국 등을 중심으로 설치했다. 이 新聞의 版型과 體裁는 한국초창기 신문들의 Tabloid版에서 탈피하여 블랭킷 배판(倍大版 가로33.5cm 세로48.5cm) 4면으로 간행하였다. 이 당시 신문의 일반적인 판형은 8단이었는데 과감히 7단을 채택하고, 1행 14자로 1단 59행, 국한문 혼용체로 조판 간행했다.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자 옆에 독음(."Ruby"=(한글吐)을 달다가 1907년 3월 9일자부터 독음을 없앴다.
천도교가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문학을 수용한 것으로 인식되는 신소설의 최초 작품인 이인직의 "혈의루"를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우리나라 신문사상 처음으로 신문연재소설을 게재했다. 이어 10월 14일부터는 "鬼의聲"을 연재하고. 1907년 1월 1일에는 短篇小說《白屋新年》을 作家 名없이 실었으며, 30호부터는「海東永言」欄을 신설하여 歌辭와 時調등을 連載하고 있다.
만세보는 이와 같이 국내외 소식과 기초 교리서, 문예작품 등을 게재함으로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천도교의 출간의지를 잘 나타낸 만세보의 창간사에서 '신문이란 지식을 계발하는 하나의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국제 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으며 정치를 지도할 수도 있을 만큼 여론의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라고 전제한 다음 이어서 설립의 목적이 오로지 2천만 인민에 있음과 동포의 지식 계발을 焦眉의 일로 여기고 온갖 정신을 교육중심으로 할 것을 밝히고 있다.
만세보는 사전검열을 통해 여러 가지 내용들을 삭제하는 직접적인 간섭외에도 親日勢力들과 宋秉駿一派의 國民新報와 같은 親日紙에 대항하면서 民族言論紙로써의 사명을 다함과 아울러 敎書를 비롯해서 교회의 宗令, 公函, 敎區聖化會 消息 등을 게재하고 때로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천도교 기관지로써의 역할을 다하였다. 1907년 6월 29일 만세보가 일제의 획책으로 재정난에 부딛쳐 폐간된 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는 對 一進會 鬪爭을 위한 機關紙 발행을 꾀하여 梁漢默을 主筆로 吳尙俊, 林明善, 林明洙, 尹益善 金永倫, 李瓘 등이 주동되어 月刊 타블로이드版으로『晴雨期』를 創刊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創刊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신문은 종간된 후 시설 전부를 매입하여 인수한 이인직이 1907년 7월 18일자로 "大韓新聞"으로 題號를 바꾸고 간행했다
만세보가 그간의 천도교의 출판문화운동의 목적을 실현해주었고 교리서 간행에도 만족할 만한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지만, 일제의 가혹한 직, 간접 검열과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폐간이 되자 천도교의 출판문화운동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출판사 普文館를 설립하여 급한 교리서와 해설서를 출판하여 보급하였지만 3년여에 걸친 경영에 따른 내분이 법정문제로 까지 발전하여 더 이상 보문관을 통하여 출판문화운동과 교리서 간행보급이 어렵게 되고 지연되자, 1910년에 彰新社라는 인쇄소를 설립하고 여러 해 동안 월보의 간행준비를 하였다.천도교회월보는 1910년 5월 25일에 신문지법에 의한 月刊誌 발행허가를 받기 위해 발행인에 金完圭, 편집인에 金源植, 인쇄인에 李敎鴻으로 허가원을 제출하여 다음달 6월 25일에 朴齊純 內務大臣 名義의 허가서를 받았다. 인쇄인 이교홍이 한국이 일본에게 병탄되자 외국 각국 영사에게 일본의 韓國侵奪을 罵倒하는 성명서를 만들어 돌려 聲援을 요청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월보사의 간부 수 명이 투옥되어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직토록 하여 車相鶴을 임명했다.
이 무렵에는 교회 재정에 여유가 있어 普成 3校를 인수 운영하는 한편 보성사 인쇄소를 인수하여 창신사와 합쳐, 普成社로 개칭하여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인쇄소가 되었다. 1911년 1월호부터 보성사에서 출간했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다해서 일본은 그 보복으로 보성사를 放火燒失하였으므로, 1920년 7월호는 대동인쇄소, 1932년 2월은 창신사, 1934년 10월은 鮮光印刷株式會社, 1935년 8월은 平和堂, 1936년 2월은 漢城圖書등으로 옮겨가며 인쇄 발행했다. 그간의 일본정책에 반한다 하여 압수, 삭제, 발행정지로 인한 휴간 등으로 겨우 겨우 지탱해오다 1938년 9월 15일 출판허가가 失 되어 간행이 정지됐다.
이 회월보의 편집구성은 기본적으로 천도교 기관지이므로 교리중심으로 되어있지만 통권 24호까지는 다양한 내용들로 구성하고 있다. 창간호부터 대략 敎理部, 學術部, 技藝部, 物價部, 中央總部彙報 등 5개 부로 편성되어 있다. 이 중 학술부의 다양함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살펴보면, 物理學, 化學, 地文學, 經濟學, 歷史學, 森林學, 養豚學, 社會學 등 이였고, 物價部에는 內外國의 貿易額, 我國의 農業의 槪要 등이 게재됨으로서 종합지 성격을 띠었다. 통권 4호부터는 雜俎란 난을 신설하여 국내외의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고 있다. 漢主國從體 또는 國漢文 混用體의 글과 언문부를 신설하여 한글기사와 교리 교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의 문장이 세련되어 갔다. 창간호부터 단편소설(지금의 분류방법에 따르면 掌篇小說 또는 콩트.)이 실렸다. 창간 1호부터 5호까지만 살펴보면, 1호엔 모란봉, 2호엔 海棠花下夢天翁, 4호엔 가련홍(可憐紅), 5호엔 감츄풍별정우(感秋風別情友) 등이 상하 2단 4-6페이지 정도의 이야기를 실었다. 이후 계속해서 소설과 시문학 등의 문예작품들이 많이 실렸다. 통권 3호에는 천도교 역사상 최초로 천덕송을 작곡 작사하여 天宗新樂-부제 뎨일장 하날님의 덕(PP.45-46.)이란 곡의 악보와 1, 2절 가사를 게재했다. 이 천덕송은 뒤에 제28장 '한울님의 덕'란 이름으로 천덕송에 편입됐다. 기반의 여유로 인하여 그간 단편소설 정도만 한글로 인쇄하던 것을 擴大하여 諺文部를 신설(1911년 7월호-통권 12호부터 언문부가 신설됨.)하였다. 이 난의 설치는 모국어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긴 것이며 한글 기사를 많이 게재하여 독자층의 범위를 넓혀 일반대중을 계몽하려 했다. 월보가 천도교의 충실한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면서 발전해 가는 동안 일제의 간섭을 배제해가면서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이 꽃을 피웠다 이는 한국 신문화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다고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1910년 8월(창간호)호부터 1913년 3월(통권 32호)호 까지 吳尙俊이 本敎歷史를 동학시대의 교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술하여 게재를 시작하였다. 이 교사엔 수운의 탄생과 동학의 창도로부터 해월신사의 순도까지 정리하였다. 이 글은 한주국종체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 수준의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신도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매우 힘든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1911년 6월(통권 11호)부터 李鍾一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일반신도들의 교육을 위하여 한글로 번역 1915년 4월(통권 57호)까지 38회에 걸쳐 1906년까지의 교사를 정리하여 게재하였다. 이 두 기록들은 후에 1920년대 천도교회사 초고, 천도교서, 1930년대의 천도교 창건사 등에 底本이 되었다.
천도교가 천도교 회월보를 간행하면서 교인만이 아닌 조선의 전 민중을 상대로 계도할 잡지 발행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된 것은, 3 1독립운동의 사실상의 실패로 인하여 민족이 좌절감에 빠져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지쳐 살아가는 민중을 도탄에서 빨리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나와 기미독립이후 일본이 조선민중의 회유를 위하여 어떤 정책을 폈는가를 이선근이 기술한 대한국사 중 기미독운동 전후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약하고 보완설명해보면
전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한 우리 민족의 3 1독립운동은 일제 당국의 군대 동원과 무력탄압에 의하여 수많은 사상자와 수만에 달하는 투옥자를 내고는 표면상으로는 진압된 듯 하였으나, 이로 인해 크게 당황한 일본은 한국의 식민통치방법의 일부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교묘한 방법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조선민중을 기만하여 합병한 후 근 10년에 걸친 헌병 경찰에 의한 武斷統治를 버리고 이른바 文化統治 라는 새로운 식민정책을 표방하기에 이른 것이다.
1919년 일제는 문화통치의 선행조치로 무단통치의 총 책임자인 하세가와 요시미찌(長谷川好道)를 같은 해 8월 3일자로 해임하고 사이또 마꼬도(齊藤實)로 하여금 조선총톡으로 임명하였다. 1919년 8월 19일에 일황은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즈음한 조서를 통하여 '짐은 일찍이 조선의 康寧을 爲念하고 그 민중을 愛撫함이 一視同仁하여 짐의 식민으로서 추호의 차이가 있음이 없으며---' 라는 것을 宣明함으로써 조선을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내세우는 동시에 우리민족을 회유하려는 몇 가지의 개혁안을 勅令으로 발표하였다.
이 개혁안 안에는, 일본이 식민통치에 있어 무리하게 운영하여 조선민중의 반발을 사게되어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시급한 4 개항의 개선과 폐지를 함과 동시에 언론, 출판, 집회 등의 제한을 완화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등의 창간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그 유례없이 가혹했던 무단통치를 완화하혀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기미독립운동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자신들의 야만성을 일시 감추기 위하여 僞裝粉飾하기 위한 羊頭狗肉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종합잡지인 개벽이 출판허가를 받았다. 1970년 12월에 개벽 영인본 목차집을 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개벽의 발행전모를 밝힌 바에 의하면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동아, 조선, 시대일보 등 일간신문 창간에, 종합잡지 <개벽>이 위의 일간들과 동일한 신문지법에 의해 창간(발행인 이돈화. 1920년 6월 25일자)되었다. 이후 6년 3개월 동안 개벽은 통권 72호(1926. 8. 1.)까지 발행하고, 일제에 忌諱되어 폐간 당했고, 그 후 8년만인 1934년 11월 1일자로 續刊 開闢이 일반 잡지허가를 받아 차상찬씨 발행으로 4호까지 간행된 것과 8. 15해방이후 1946년 1월 1일자 김기전씨 발행인으로 復刊號가 나온 후 3 개월 간 휴간되다가 4월호부터 李應辰씨 발행인으로 속간되어 이 복간 개벽은 9호(1949. 3월호)까지 나왔다. 세 번에 걸쳐 나온 책들을 모두 합치면 통권 85권이 된다."라고 했다.
또 1969년도 5월경에 개벽 영인본을 내면서 개벽의 영인본에 붙이어 란 글 속에서 개벽이 출간될 시기의 시대적 상황과 종합잡지 "개벽"의 성격과 창간에서 폐간까지의 가시밭길을 소상히 밝힌 자료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제2차 특별연구계획 중 일제치하의 한국연구의 일환을 정리된 '開闢誌 小巧-號別 總目次에 붙여서' 란 자료를 참고하여 요약 보충하면
1919년 9월 2일 李敦化 朴達成 李斗星 등의 발기로 개벽사의 창립준비를 하였고 平北 博川의 유지 崔宗楨씨가 1,000원을, 邊君恒씨가 500원을 기부한 기금으로 경영의 기금으로 하여, 1920년 6월 25일에 사장 崔宗楨, 편집인 李敦化, 발행인 李斗星, 인쇄인 閔泳純으로 서울 종로구 송현동 34번지 천도교 경성 교구안에 사무실을 두고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정책하에서 모든 신문과 잡지의 발행이 그랬듯이 악랄한 검열에 의한 정간과 폐간의 가시밭길이었다. 개벽은 이중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서 혹독한 검열의 대상이었고 악랄한 수법에 의하여 정간으로 폐간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였다. 어떤 측면에선 개벽이 천도교의 준 기관지적 존재에 지나지 못했으나 본격적인 종합잡지요 이 땅에 신문화사상에 큰 영향을 준 가장 권위있는 대표적 종합잡지임을 아무도 부인 못할만한 월간지였다.
개벽은 이 시대에 간행됐던 靑春, 學之光, 서울, 曙光, 新天地, 朝鮮之光, 現代評論, 東明 등과는 比肩될 수 없는 매우 뛰어난 종합잡지였다. 창간호부터 검열에 걸려 연이어 두 번이나 압수를 당하여 개벽 임시호와 개벽호외로 시작된 개벽은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로 발행금지 처분을 받을 때까지 발행 6년여 동안, 발행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발행정지 1회로 많은 글이 삭제되어 간행되거나 임시호로 간행됐다. 폐간된 1926년은 천도교 청년당이 이미 부문단체 중심으로 부인, 신여성, 학생, 조선농민을 간행하여 문맹퇴치와 신문화 교양과 공생조합 등의 사회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년 8월 18일에 勞動, 農民, 幼少年, 女性, 學生, 靑年, 商民 等의 7個 部門運動을 제창하여 각자 간판을 내걸었다. 또한 개벽 속간호가 출간된 1934년은 1월에 <自修大學 講義>를 출간하여 신문화 수립을 위한 전문지식을 교육하기 위하여, 宗敎-李敦化, 哲學科-金亨俊, 政治科-李晶燮, 經濟科-李肯鍾. 社會科-孔濯(孔鎭恒), 藝術科-咸大勳, 體育科-金保榮 等 7科(민족주의와 사회운동의 기초를 닦기 위한 3년 간의 自學運動 用)를 집필하여 1933년7월 1일부터 <自修大學 講義>란 이름으로 월간으로 천도교 청년당 본부에서 11권까지 간행되다 중단된 것을 합본(국판으로 총 520여 페이지)한 것이다. 이것은 천도교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청년당의 대 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던 시점이었다.
개벽이 앞에서 기술한대로 그렇게 많은 회수를, 검열에 걸리게 된 이유는 개벽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창간호의 창간사와 창간 3주년 기념호(통권 37호)에 실린 권두언에 잘 나타나 있다.
창간호 창간사.
소리 l 있어 넓이 世界에 專하니 온 世界 모든 人類 l 이에 應하야 부리짖기를 始作하도다.强者도 부르짖고, 弱者도 부르짖으며 優者도 부르짖고 劣者도 부르짖도다. 東西南北,四海八方이 다같이 이 소리 中에 묻혀 있도다. 霹靂이냐, 地震이냐, 神 이냐, 魔哭이냐 우리는 아즉 이 소리의 正邪를 判斷할 수 없도다. 左右間 多數가 渴仰하고, 多數가 要求하는 人民의 소리임은 明白하도다.
哲人은 말하되 多數人民의 聲은 곳 神의 聲이라 하엿나니, 神은 스스로 要求가 없는 지라 人民의 소리에 應하야 其 要求를 發表하는 것이오, 神은 스스로 渴仰이 없는 지라 人民의 소리에 應하야 또한 其 渴仰을 나타내는 것이다. 多數 人民의 渴仰하고 且 要求하는 소리는 곳 神의 渴仰하고 要求하는 소리니 이 곳 世界展開의 소리로다.
神은 無何有의 一物로 붙어 進化를 始作하엿도다. 無有를 肇判하고 太陽系를 組織하고 萬物을 내엇나니 이 곳 宇宙의 展開이며 ,사람은 神의 進化한 者로 萬物을 代表하야 漁獵을 始하며, 農業을 營하며 商工業을 起하야 進化를 加하는 中 오늘날 이 世界大改造라 하는 革新의 起運을 맛보게 되엇나니 이 곳 開闢의 開闢이엇도다.
時 l 開闢하고 事 l 開闢하고 人物이 開闢하는 此際에 吾人으로 이 開闢史를 쓰게됨은 實로 時에 適, 事에 適精神에 適하는 神의 要求라 아니 할 수 없도다. 人民의 소리는 이 開闢에 말미암아 더욱 커지고 넓어지고 徹底하야지리라.
嗚呼라 人類의 出生 數 十萬年의 오늘날, 처음으로 이 開闢雜誌가 나게됨이 어찌 偶然이랴.
개벽 창간 3주년 기념호(통권 37호)의 장문의 글 권두언 '돌이켜 보고 내켜보고'의 2단(p.3)에서
(前略)-개벽 잡지가 이미 조선민중의 잡지이오, 一個人 一 團體의 所屬物이 아닌 이상은 民衆의 향상이 곧 開闢의 向上이요, 이 잡지의 노력이 곧 민중의 노력인지라 민중과 한 가지로 興廢存亡을 결하여 민중의 정신으로 정신을 삼으며, 민중의 心으로 心을 삼을 것 밖에 없음을 단언하는 것이 그 하나이며,
개벽 잡지의 主義는 개벽이라는 '열림'이 곧 그 주의가 되는 것이니. 물질을 열며, 정신을 열며, 과거를 열며, 현재를 열며, 미래를 열며 乃至 萬有의 正路를 열어 나아감이 그 주의인지라, 그러므로 개벽은 어디까지든지 現象을 부인하고 현상이상의 신현상을 발견하여 新進의 正路를 개척함이 그 둘이며,
개벽의 사업에는 스스로 엄정한 비판을 요하는 것이라, 不偏不黨, 公正嚴明한 고찰로 邪를 破하고 正을 顯하여 사회를 整頓하며 신운동을 助長하여 正見과 正思, 正言, 正立의 道를 振興함이 그 셋이며,
개벽은 구체적으로 사회운동, 農村啓發運動 등의 正面에 立하여 스스로 신사회 건설의 전 책임을 부담함이 그 넷이라.
그러나 如斯한 대 사업을 성취코자 함에는 그마마한 盤根과 錯節, 手段과 勇力을 가지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이 점에서 개벽은 일층 민중의 自助力을 바라며 諸位諸位의 직접 간접의 성의와 由來開闢에 대하여 많은 同情으로 馨咳를 더 저줄 諸公의 合力을 아울러 일층 飛龍在天의 成效가 있을 믿사오며 다만 직접의 당국인 우리 사원에 이르러는 민족의 애독하는 지도하에서 犬馬의 汗勞로써 일신을 犧牲코저 하는 丹心을 가졋을 뿐이올시다. 라고 피력하여 개벽이 은연중에 조선민중의 잡지로 일 개인 일 단체의 소속이 아님을 강조하여 개벽의 성격을 재 강조하는 한편, 전 직원의 개벽간행에 임하는 단심의 각오를 밝히고 있다.
개벽지가 조선민중의 잡지임을 자처했고, 물질을 열며, 정신을 열며, 과거를 열며, 미래를 열며, 乃至 萬有의 正路를 열어 나아감을 그 주의로 했고 사회운동, 농촌계몽운동등의 정면에 서서 스스로 신사회를 건설함을 그 책임으로 했다. 개벽은 초창기에 人乃天主義의 硏究와 水雲先生의 思想과 朝鮮의 東學思想의 正體 等 天道敎的 色彩가 짙은 글들이 실렸다. 이는 천도교에 있어서의 개벽은, 동학의 창도주인 수운의 사상 중의 핵심인 후천개벽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개벽이 출간될 시기의 교단에서의 수운주의 실현을 위한 목적으로 개벽을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의 단계를 완성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는데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호를 전후하여 천도교적 색채는 줄어들어 점차 조선민족의 잡지로 전환해 갔다.
이 잡지의 사상적 경향은, 통권 63호에서 XY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多量의 人道主義와 自由主義위에 社會主義를 加味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民族主義的 色彩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1923년 3월부터 전국 13도를 實地 探査하여 우리문화의 기본조사에 착수하여 지상에 연재함으로써 문화민족의 긍지를 불러일으킨 문화적 공헌은 간과할 수 없다. 核心主題가 곧 諸 社會問題의 原因 及 趨向, 産業敎育 及 宗敎狀況 如何, 人情 風俗의 如何, 中心人物 及 主要 事業機關의 紹介 及 批評, 名勝古蹟 及 傳說의 照査 探究, 其他 一般 狀勢에 關한 觀察과 批評 等을 우리 손으로 조사 연재한 점은 新文化史上 特筆할 意義있는 사업이었다.
또 개벽의 업적 중에 하나는, 종합잡지로서 문학을 위하여 매호에 거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이나 지면을 할애하였고, 때론 신춘문예 특집호 또는 현대해외문학소개 등을 발행하여 우리 문학계에 끼친 공헌도 결코 적지 않다. 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개벽이 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개벽이 최초로 원고료를 지불한 것과 신인들의 등단을 문학사상 처음으로 추천제도를 만들어 능력있는 신인의 발굴하여 개벽에 발표하도록 지원해준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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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吾 車相瓚先生 年譜
1. 1887년 2월 12일. 江原道 春城郡 新東面 松岩里에서 成均進士이신 부친 車斗永과 모친 청주 한씨 사이에서 5 남 1 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2. 1924년(17세) 두 분의 형님(상학, 상준.)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 당시 신생활 운동이라 알려졌던 甲辰 開化運動의 일선에 앞장섰다. 그 후 삼 형제가 함께 천도교에 입교하여 청오는 셋째형 상학과 함께 일생을 천도교에 몸담았다.
3. 1910년(23세) 보성 중학교 제 1회로 졸업하고 이 해 9월, "천도교회월보" 제 2호 부터 학술부를 담당하면서, 그의 文才와 筆力이 나타나게 되어 평생을 언론계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1913년(26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제 6회로 졸업.
5. 1916년(29세) 모교인 보전에서 교수가 되어 신익희, 김병로, 임 규, 남형우, 이한종과 함 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6. 1920년(33세) "開闢"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여 폐간 때까지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개벽창간 동인은 최종정, 이돈화, 이두성, 민영순, 김기전, 등이며 뒤에, 일본에서 귀국해 개벽사에 취임한 방정환과 함께 온갖 고초 속에서 개벽사와 개벽을 이끌어 갔다. 개벽사에서 출간된 그 많은 잡지를 살펴볼 때, 청오선생의 글이 나오지 않는 데가 없다. 기자로서, 시인으로서, 편집자로서, 논객으로서, 지사로서, 사학자로서, 민속학자로서 1 인 10역의 역할을 하면서 신문, 잡지에 쓴 글이 무려 700여 편이나 된다. 그 것은 취재기사에서부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준열하게 비판하는 논설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사회풍자, 인물만평 등의 수많은 칼럼, 그리고 민족의 생명인 사화, 설화, 민담까지 발굴하는 작업을 하였으니 그 소재의 다양함과 방대함이나 박학다식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7. 1922년(35세) 잡지 "婦人"을 발간. 천도교 청년회에서 최초로 창립한 어린이 날 제정을 비롯한 어린이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8. 1923년(36세) "어린이" 잡지 편집에 참여하여, 주로 우리 역사에 관하여 집필했고, 조선 소년 지도자회 실행위원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9. 1924년(37세) 일제의 언론 탄압에 맞서, 無明會를 비롯한 한국언론단체와 조선청년동맹를 비롯한 31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6월 7일에, 언론집회 압박 탄핵회를 결성하고 실행위원을 맡아 6월 20일 대회를 강행하다 실행위원은 尹洪烈 安在鴻 車相瓚 金炳魯 申明均 李 仁 등 13명이 함께 강제 연행되었다.
10. 1925(38세) 전조선 기자대회 집행위원으로 서울에서 4월 15일부터 3일간 '죽어 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보자' 라는 구호 아래 대회를 개최했다. 첫 날 회의에서 이상재가 회장으로 선출되고, 청오는 서기를 맡아 5 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1. 1926년(39세) 개벽사의 이사로 일하며, "신인간" 창간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6. 10만세 운동을 앞두고 예비 검속을 당했다. 8월 1일 "개벽" 72호가 일제에 압수되어 작두질을 당하고 발행금지가 되어 최종 호로 폐간되었다.
12. 1927년(40) "개벽"지의 백상규 김명순의 필화사건으로 방정환과 함께 왜경이 끌려 가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20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3. 1928년(41세) 잡지 "別乾坤"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됐다. 또 밖으로는 모교인 보성전문학교 교우회의 기별간사가 되어 활동했다.
14. 1929년(42세) 잡지 "朝鮮農民"에 이사가 되고, 한편으로는 민요를 발굴하여 연재했다.
15. 1930년(43세) 잡지 "學生" 편집인이 됐다.
16. 1931년(44세) 잡지 "彗星"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됐다. 또 "新女性"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창간했다.. 소파의 장례위원장이 되었으며. 이돈화, 김기전에 이어 제 4 대 개벽사 주간으로 취임하고. 조선 잡지회 창립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7. 1932년(45세) 잡지 "第一線"을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창간했다.
18. 1934년(47세) "개벽"이 폐간된 지 8년이 지난 이 해, 11월 1일에 "개벽"지 續刊으로 開闢 續刊號를 발행인으로 간행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다음 해 3월 1일 통권 4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19. 1935년(48세) 조선어학회 표준어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朝光"
"女性"에 史話를 연재하였다.
20. 1937년(50세) <海東艶史>를 집필하였고, 경성중앙방송국 방송위원으로 野史와 民譚을 방송했다. 잡지 "야담"에 野史 연재.
21. 1938년(51세) 조선중앙일보에 역사소설 '장희빈'을 연재하다 폐간으로 중단.
22. 1939년(52세) 경성 공생 약업사가 발행한 "건강조선"의 주간이 됐다.
23. 1942년(55세) <朝鮮 白話集>을 탈고했으나 총독부 검열에 걸려 출판 금지됐다.
24. 1945년(58세) "개벽" 編輯 顧問이 됐다. 해방 후 개벽 속간은 총 9 호를 발행하고 중단.
25. 1946년(59세)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急患으로 3월24일(음 2월20일)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던 그는 59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필명 靑吾, 壽春山人, 月明山人, 三角山人, 鷲棲山人, 翠雲生, 江村生, 觀相者, 史外史人,
車記生, 車夫子, 車賤子, 酒賤子, 風流郞, 考古生, 門內漢, 傍聽生, 禿頭博士, 차돌이,
각살이, 三淸洞人, 嘉會洞人 등
유고 < 朝鮮史 千年悲史,> 1934.
<海東艶史> 1937.
<朝鮮 白話集> 1942.
<朝鮮史 外史>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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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연보와 연구문헌 자료는 차웅렬선생이 자료수집과 1차 정리한 것을,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김용천이 2차 수정 보완 정리하고 격식에 맞도록 조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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