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千佛이 나다 / 이미란
기린 목이 되어 기다리던 가을이다. 가을에는 상쾌한 소슬바람이 콧등을 쓰다듬고, 귀뚜라미가 창밖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정겨운 계절이었다.
하지만, 올가을은 시원한 바람은 고사하고, 에어컨 밑이 아니면 숨도 못 쉬겠다. 연일 햇빛에 나가지 말고, 조심하라는 재난 문자가 공포를 조성하는 여름의 연속이다. 이상기후 날씨만 더운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뉴스가 더 덥게 만든다. 남편은 정밀 기계를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주 거래처가 H자동차인데 여러 가지로 힘든 모양이다.
대통령께서는 미국에 정상회담 하러 갔다. 전세기를 띄워 떠들썩하게 부부가 팔짱까지 끼고 갔다. 공항에 도착해서 레드카펫 행사는 고사하고 옆집 아저씨 마중 나온 것처럼 겨우 교포 몇 분과 관계자 몇 사람의 안내를 받고도 좋다고 웃었다. 나라의 영부인이 갔는데도 저쪽 영부인은 환영 행사는 고사하고 얼굴도 안 보였다.
대통령이 외유 중일 때는 비서실장이 국무國務를 지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사람이 정상회담의 사전 물밑 작업을 위해 급파되었다. 애걸복걸해서 겨우 이루어진 정상회담의 진행이 이 모양이다. 가슴의 열이 펄펄 달아오른다. 천불이 난다.
정상회담 개최도 약속 시간보다 한참 동안 기다려 겨우 이루어졌다. 이것저것 비위 맞추려고 준비한 선물만 공식, 비공식적으로 안겨줬다. 중요 안건은 다루지도 못하고 어물쩍 넘겼다. 공동 합의문조차 없고, 언제든지 바꾸어서 목을 조일 수 있는 빌미를 주고 왔다. 서로 바라보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며 자기들은 100점 만점에 120점이란다.
후한 점수를 받을 만큼 성공한 외교일까. 서로 웃으며 잘해보자고 정상회담을 마친 이틀 후 미국 현지 공장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직원 삼백여 명을 중죄인처럼 쇠사슬에 묶어 잡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보태어 관세로 여전히 겁주고 있다. 혈연의 동맹국이라고 치켜세우더니 다 퍼다 주고 뒤통수 맞은 꼴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우리 집도 유탄을 맞았다. 미국에 있는 자동차 부품공장에 수출 계약한 비싼 기계가 완공되어 공장 귀퉁이에서 멍때리고 있다. 가슴이 답답하다.
국내 정치 사정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란 제도 아래서 소수의 의견이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다. ‘과반수의 찬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절대다수의 횡포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하다. 미래가 매우 불안하고 앞이 안 보인다.
논란이 되어 미루어온 법들을 하나같이 다수당의 특권으로 일사천리 통과시켜 버렸다. 노동삼법을 제정하자 곧바로 이 혼란한 시국에 노동쟁의가 일어나고 있다. 외국 투자 자본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게다가 그들 구미에 맞게 법을 새로 제정까지 한다고 하니 끝이 어딜까?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 수단인 합법적 의사 진행 저지 방법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제도도 24시간이 한계다. 하지만, 진행한다고 해도 하루가 지나면 다수당 뜻대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衆愚政治를 한다더니. 다수당을 만들어준 우리 국민의 책임이 크다. 적은 숫자의 야당은 제도상으로 불리하다. 그것도 하나로 단결하여 사생결단으로 저지해야 하건만, 스스로 분열하여 외치는 소리는 공중에서 흩어져 버린다.
온 국민에게 생활 지원금, 영세상인에게 경제 지원금, 공무원 식비 지원 등등 갖가지 명분으로 사탕을 나누어 주고 있다. 나라의 빚은 천문학적 숫자다. ‘눈앞에 돈이 생기면 내 배 속으로 낳은 아들딸보다 낫다.’라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 나 역시 얼른 받아 챙겼다. 받아쓰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일 이빨이 다 상하더라도 우선 먹는 사탕은 입에 달고 맛있다.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엄청난 빚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돈을 나누어 준다고 산업이 잘 돌아가고 수출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강대국이 휘두르는 보호무역이라는 칼에 시달려 공장은 여기저기서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의 세수稅收는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라살림살이의 수지收支가 맞지 않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
선거에서 찬성표를 얻기 위해, 국가 미래의 안녕을 낭떠러지로 밀어붙여 떨어뜨리려는 위험을 쉽게 자행하는 정치인들이다. 사탕발림이 좋아서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거와 그렇게 선택된 생각 없는 정치인들에 의해 실시되는 미래가 걱정스럽다.
강대국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칼을 휘두르는 자는 엉뚱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남의 펜이 맘에 든다고 “펜 그것 가지고 갈래요. 주시지.”라고 한다. 얼마나 상대를 가볍게 보았으면 할 수 있는 행위일까. 보이는 곳에서 이러니 병풍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사건의 회의 진행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용권만 가지고 있는 미군 부대 용지를 뜬금없이 소유권 이전을 요구하고 있으니 기절초풍할 일이다. 기본적으로 군대를 보내어 지켜줘서 고맙기는 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는 일들이다. 이처럼 국내, 국외에서 비상식적인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상이변의 가을 날씨 모양과 어찌 이렇게 흡사할까.
처서가 지난 지도 한참 되었는데 가마솥더위에 숨쉬기조차 힘들다. 병아리를 체 가려고 노리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살아가고 싶어 하던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우리 자식들이 감당해야 할 나라의 내일이 걱정된다. 내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도, 구할 수도 없다. 후회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천불이 난다.(14.8)
*천불千佛이 나다 : 1) 하늘에서 내린 불.(天火)
관용어로 ‘몹시 언짢아 속이 상하다.’라는 뜻.
2)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서 각각의 천 부처 가운데 현 재에 나타난 천 부처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