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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 統 전통과 慣관행 慣 行
- 이런 일 저런 이야기 - 김 희 상
모름지기 개인이건 한 집단이건 국가건 간에 그것이 언제나 성공적인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남으려면 항상 변화하는 여건과 환경에 스스로 유연하게 적응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통상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변화와 발전은 전통과 관행의 저항을 받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물며 국가적 기본가치를 항구적으로 수호 해 줄 최고의 엘리트들을 길러내야 하는,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육사에서야 더 말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실은 그럴수록 더욱 더 경직되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에 유연하고 효율과 실질을 살필 줄 아는 열려있는 사고(思考)와 태도가 바람직 한 데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육사에서의 많은 에피소드가 바로 여기서 나오곤 한다. 예컨대 생도시절, 각별히 가까웠던 한해 선배가 어느 훈육관님에게 불려가 아주 곤혹스러운 질책 아닌 한탄을 듣고 왔다면서 귀띔을 한다. 그 훈육관님이 태릉 숲을 돌아보다가 멀지 않은 숲 속에서 한 사관생도가 연인과 입맞춤을 하더라면서 “이제 육사는 다 망했구나. 어떻게 사관생도가 공공연히(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이니까) 삼금제도를 범할 수가 있느냐?” 아주 땅이 꺼지는 긴 한숨과 함께 잘 처리하라고 하시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우리가 3학년 때이니까 1967년 일인가 보다. 듣는 나로서는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하긴 생도규칙에는 ‘신사도에 입각한 여성교제는 허락 한다’고만 되어 있으니 그 한계가 좀 모호했을 것이다. 아마 그 규정 자체는 불변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의 기준은 대체로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 따라 많이 변화해 왔을 것이다. 초기엔 손만 잡아도 큰일이나 나는 줄 알았다고 하니 이 훈육관님께서는 입맞춤 정도는 매우 충격적인 삼금제도(三禁制度) 위반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때는 그래도 조용히 잘 넘어 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쨌건 그러고 보니 이 삼금제도는 육사의 생도규정 개선이 논의 될 때마다 그 존폐 또는 변경이 수시로 거론(擧論)되 왔던 것 같다.
육사 교관을 떠나 80위원회에 몸담고 있을 때 생도대에서 있었던 모종의 사건에 충격을 받은 육군본부에서 육사 개혁 방안을 연구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는 삼금제도 특히 음주(飮酒)와 흡연(吸煙)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 규정이 생도들의 사회적 적응력을 떨어뜨리고 인간성의 폭을 제한시키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졸업 후에 가만 보니(생도시절에는 몰랐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삼금(三禁), 그 중에서도 특히 적어도 음주(飮酒)에 관한 규정만은 그것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군 생활을 더 성공적으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그래서 선후배 동료들의 여론을 광범하게 수렴해 보았는데 찬반(贊反)은 거의 동수(同數)였다.
그래서 결국 그대로 존치(存置)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뜻밖에 생도시절 모범적으로 규정을 잘 준수했던 사람들은 ‘없애자’는 입장이 강했고 그 반대로 별로 잘 준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런 규정이라도 있었으니 내 행동이 그 정도에서 자제(自制)되었지 그런 규정도 없었어 봐라․‥’하는 명답(名答)이었다. 결국 오래 지켜져 온 규정이나 제도 관행 같은 것은 설사 얼핏 별 의미가 없어보여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 아닐까 싶다.
이러니 하물며 다른 변화, 조직과 제도의 변화 같은 것은 결코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73년인가 아니면 1974년이었던 듯한데 교수부의 조직을 개편한다고 우리가 속해있던 전사과(戰史科)를 역사학과로 통합시킨다는 계획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 전사과로서는 여기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당시 과장이었던 고(古) 최창윤 선배님이 학교 당국의 강력한 지침과 학과 후배들의 만만치 않은 반발의 중간에서 꽤 고심을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당시 김동근 교수부장님이 전사과를 방문하셨다. 아마도 나름으로는 반대하는 젊은 장교들을 잘 다독이고 설득을 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사과야 말로 육사가 육사일 수 있게 하는 학과(學科)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던 젊은 장교들에게 그게 어디 쉽게 될 일이던가? 논리의 싸움에 좀 밀린다고 생각하셨던지 마침내 ‘이것이 교장님의 확고한 의지이니 순응해야 한다’는 다분히 야전(野戰)적 설득논리를 내 세우셨다. 그것도 감히 장군의 말을 안 듣고 또박 또박 대꾸나 하는 이 건방진 젊은 장교(아마도 교관이라기보다는 그냥 장교의 한사람으로 보셨을 테니까)들에 대한 답답함과 짜증내지는 분노까지 참으며 내 뱉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그러나 우리로서는 마치 ‘육사의 운명’이나 걸린 것 같은 이 문제가 비논리적(?)인 이유로 마치 ‘폐과(廢科)’라도 되는 듯한 상황으로 몰려가는 듯하니 더욱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불현듯 나도 모르게 “이 육군사관학교는 교장님의 학교가 아닙니다.”고 되받았다. 마음속에는“이 교수부도 부장님의 교수부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김동근 부장님도 그렇게 느끼셨을 것이다.
순간 분위기는 매우 굳어졌다. 물론 나 역시 긴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동근 부장님이 누구시던가? 야전에서 교수부장으로 오신 분들이 으레 한차례 그런 과정을 겪으시지만 이 분은 특히 부임도 하시기 전부터 대단히 엄(嚴)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교수부를 얼어붙게 만드셨고 부임 이후에도 우리를 항상 긴장하게 하고 여러 가지로 용명을 날리시던 분이 아니시던가? 후에 최창윤 과장님이 ‘적어도 재떨이는 날아갈 줄 알았다.’고 회고 했듯이 일순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천만 뜻밖에도 “여보 여보‥ 김대위 거 신경 긁는 소리 하지 마시요. 그럼 이 학교가 김대위 학교란 말이요?” 언성도 높고 화도 단단히 나신 목소리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났다. 사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더라면 그 정도로 용서해 주었을까 ?’생각하니 대단히 죄송스럽고 민망한 일이었다. 우리는 육사에 이런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 항상 고맙고 자랑스럽다.
가만 생각해보면 얼핏 육사의 교육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극히 경직된 것 같이 생각되기 쉽지만 실은 이처럼 옳고 그름을 찾고 신념에 성실할 수 있는 기개와 인품을 기르고 닦게 하는 데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그에 대한 찬반(贊反)의 국민투표를 할 때였던 듯한데, 아마도 단순한 낭설(浪說)이었겠지만 당시 군부대 내에서의 투표는 보안사령부에서 그 결과를 확인한다는 말과 함께 부재자 투표를 한 생도들 중 일부 반대표가 있었다는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 육사 교장은 최우근 중장이셨는데, 그분의 평소 언행이나 군인된 성품으로 보아 ‘아무리 소수라도 어떻게 생도가 이 중차대한 국가적 행사에 반대 할 수가 있는지’ 대단히 이상하고 생도들의 그런 무지(無知)가 매우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학교 강당에 주로 2학년 이상의 이른바 유권자(有權者) 생도를 다 모아 놓고 대통령의 국가에 대한 충정과 이 사안의 국가적 중요성에 대한 일종의 교육 내지는 설득을 시작 하셨다. 그런데 이 분은 원래 학교에 대한 애착이 크고 생도와 교관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깊어 각종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고 교관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등 학교 발전에 여러 가지로 큰 공헌을 하셔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러나 말씀은 그리 잘 하시는 편이 못되었다. 오히려 눌변(訥辯)에 가까웠다.
그러니 무슨 설득이 되겠는가? 불란서를 비롯한 유럽의 사례(?)까지 제시하면서 열심히 설명을 하셨지만 듣는 사람으로서는 이야기가 동서남북을 헤매고 있을 뿐 감동은 별로 오지 않았다. 생도들의 표정을 살펴보시던 교장님도‘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마침내 결단을 내리는 표정으로 “너희들의 직속상관인 내가 찍으라 하고 우리들의 최고 직속 통수권자이신 대통령 각하께서 찍으라 하시는데 그것을 반대하면 명령 불복종 아니냐?”고까지 발전되었다. 생도들의 반응이 어떠했겠는가 ? 생도들 뒤쪽 강당 2층에서 내려다보는 우리들의 눈에도 불만 가득한 생도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이쯤 해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교장님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생도가 더욱 답답하셨던 모양이었다. “내 말에 불만 있어? 질문 있으면 해봐.” 그런 삼엄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서 질문은 무슨 질문이 나오겠는가. 이제야 다 끝 났구나하고 일어서려는데, 아 이런! 한 생도가 손을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긴장한 채 보고 있는데 제법 당당한 목소리가 온 강당을 울렸다.
“교장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고 젊잖게 어두(語頭)를 연 뒤 “군(軍)에서의 명령-복종관계와 정치에 있어서의 국민의 참정권(參政權)은 서로 차원(次元)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의 모두가 긴장하다 못해 굳어진 창백한 얼굴로 눈도 꼼짝 못한 채 하회(下回)를 기다리는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은 옳은 말이나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그 동안 열심히 설득한 전공(前功)은 다 어디로 가겠는가? 교장님으로서도 정말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벽력같은 호통이 있었다. “뭐-ㅅ이야?” 그러나 무어라고 질책을 하시겠는가? “너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 “예 ## 고등학교 나왔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평소 ‘모름지기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들은 육사로 들어와야 한다’고 확고히 믿고 우수한 학생들의 모집에 일구월심(日久月深) 노력하신 교장님인지라 아마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나온 말씀이실 것이라고 다들 이해는 하는 표정이었다.
오죽하고 이른바 1류 고등학교 출신의 우수 학생들을 각별히 아끼신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어느 해, 합격자들 중에 1류 고교 출신자들이 제법 많아 크게 기뻐 하셨는데 불행히도 그들 중에는 고교시절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섞여 있어 컸던 기대에 비해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들은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도 있었던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쨌건 들어보니 질문한 생도는 누구나 인정하는 전국적인 1류 고교중의 하나가 아닌가? 잔뜩 긴장했던 사람들의 얼굴에 점차 웃음기가 퍼져 가자 교장님은 더욱 당황하셨다. “생도대장은 무얼 했느냐?”고 느닷없이 백행걸 생도대장을 질책을 하시더니 생도대장에게 ‘잘 교육(?)하라’고 하고는 휑하니 학교본부로 올라가셨다. 이렇게 되어 ‘아까운 생도 한명이 희생될지도 모르겠구나.’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우선은 호랑이 같이 무섭다는 백행걸 장군이 이제 또 얼마나 호통을 치실지 지레 그것부터 겁을 먹고 교수부 교관들조차도 감히 일어설 생각을 못하고 무겁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뜻밖에 생도대장의 말은 지극히 조용하고 간단했다. “생도들 수고했다. 생도대로 돌아가라.” 후일 백행걸 생도대장은 이임식 때 “참된 군인의 명예는 어디서 어떤 직책을 담당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이 맡은 임무에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느냐에 있다.”는 말로 생도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기도 했다. 교장님의 후문은 더욱 의외로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교장님이 교장실로 들어서자마자 하신말씀, “하! 고놈 참 똑똑한데‥”. 그리하여 우리가 우려하던 사태는 기우로 그쳤고 그 생도는 무사히 졸업을 하고 군 생활을 임기까지 훌륭히 마쳤다.
우리 생도시절에도 비슷한 에피소드는 많았다. 고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온 군인의 귀감이 되고 있을 때 교관님 한분이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사람이 그렇게 죽으면 뭘 해 ? 자기는 영웅이 될지 몰라도 부인이 아이를 안고 한 없이 울고 있는 데 못내 안쓰러워 못 보겠더라. 너희들은 그러지 말아라.” 강재구 선배님과 동기생으로 평소 각별히 가까웠다는 분이니 원체 안타까운 마음에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못 참는 칼날 같은 생도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아니 교관님, 교관으로써 생도에게 할 말이 있고 할 수 없는 말이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순간적으로 안전사고(安全事故)에 대한 중압감이 있었을 개연성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위국헌신(爲國獻身)을 본분으로 삼는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 아닙니까. 그래서 부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 성(聖)스러운 죽음을 온 나라가 떠받들며 그 정신을 되살리고 모든 군인으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교관님으로서는 당연히 강재구 선배님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으라고 강조하셔도 우리가 바르게 설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교관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뜻밖의 반박을 받은 교관님, 당연히 당황할 밖에…그러나 화는 못 내시고 “그러니까 우리끼리니까 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겨우 겨우 시간을 끝내셨다.
이렇게 지내놓고 생각해보니 생도들의 사고력(思考力)이라고 할까, 이런 말 한마디도 가끔은 제법 날카로운 데가 있다. 백행걸 장군님이 이임하시고 육사 창설 이래 4년제 정규 육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1기 김복동 장군님이 생도대장으로 오신 후이니까 1974년 늦은 봄이 아니던가 싶다. 날씨도 좋고 해서 전사과 4학년 생도들과 범무천 옆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야외수업을 가졌다. 학교 다방에서 커피도 한잔씩 시켜 놓고 마냥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김복동 생도대장님이 멀리 지나가다가 들리셨다. ‘들켰구나’하는 낭패감도 없지 않았지만 원체 안목이 넓고 통이 크신 분이라 생도들이 다들 반가워하며 환영해 마지않았다.
헌데, 생도대장님을 이렇게 자유스럽게 만난 이런 호기에 생도들이 생도대장에게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생도대 훈육에 대한 불평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받을 훈육관이라도 적어도 훈육관으로 재직 중에는 존경은 커녕 환영도 받기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더욱이 당시 훈육관 중에는 야전(野戰)에서는 유능함으로, 생도대에서는 그만큼 더 엄하기로 교수부에까지 이름을 떨친 분들도 여럿 있었으니 더 말 할 여지가 없었다. 생도대장에 대한 생도들의 존경과 신뢰는 분명해 보였지만 “품위 없는 말을 한다, 이런 비합리적 기합도 받는다” 등등 생도 훈육에 대한 불평이 쏟아지고 그것도 점점 발언 수위가 높아가자 마침내 생도대장으로서도 한마디 변명을 아니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 모두 다 내가 시킨 것이다.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훈육을 잘 하려는 열정(熱情)이 너무 뜨겁다 보니 더러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목이 마른 말을 냇가에 데려가 물을 먹이려 해도 말이 스스로 먹지 않으려 하면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법이다. 너희들은 모두 다 4학년이니 모범을 잘 보여 훈육관이 그런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라.” 꽤나 간곡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즉각 대답한 한 생도의 말이 절묘했다.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짐승을 길들일 때는 말 마(馬)변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순육(馴育)이라고 하고 사람을 기를 때는 말씀 언(言)변에 내 천(川)자를 써서 훈육(訓育)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순육(馴育)인지 훈육(訓育)인지 모르겠습니다.”
가히 결정타가 아니었을 가 싶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 생도들에 대한 애정(愛情)이 각별했고 생도들도 그것을 훈훈하게 느끼고 살았지만 그것도 마음 뿐, 말이 빠르고 재치 있다는 평은 듣지 못했던 생도대장님, 얼른 적절한 대꾸를 찾지 못하시고 얼굴빛만 상기되니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교관으로서는 그렇게 미안 할 데가 없었다.‘야외수업이라는 것도 말이 좋아 야외수업이지 보기에 따라서는 봄나들이 한 것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약삭빠른 현실 인식도 얼핏 머리를 스쳤다. “요즘 생도들은 정말 부럽습니다. 이런 애교스런 불평도 과거 우리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운 좋게, 어떤 말씀을 드려도 모두 포용해 주실 것을 믿는 존경하는 선배님 앞이기에 이런 행복한 어리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바짝 얼어서 ‘훈시말씀’이나 기다리지 어떻게 감히 생도대장님과 이런 정담(情談)을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
분위기를 좀 바꾸어 보려고 급히 주워섬긴 임기응변인데 해 놓고 보니 미상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 가? 교수부에서 “야외수업 권장” 지시(?)가 하달되었다. 다들 “아니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서도 이 합법적인 “봄나들이”를 즐기는 분들이 적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도 창설 된지 60주년이 지났다. 그 동안 국가 보위는 물론 여러 가지 차원에서 조국을 위한 육사의 공헌은 누가 아무리 폄훼(貶毁)하려해도 할 수가 없을 만큼 컸다. 그러나 요즈음의 이 혼란스러운 시국을 보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육사가 그 본래의 역량을 더욱 더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온 陸士人이 한 마음으로 굳게 뭉쳐 소중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조국의 통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고 아침저녁 맹서하던 대로 상황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지라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더 정의로운 뜻을 확고히 밝히고 ‘해야 할 바’를 의연하고 철저하게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의지(意志)의 바탕을 튼튼하게 하고 그 길을 찾는 지혜를 밝게 해 주는 것이 우리 회랑교수회 육사교관들의 기본 사명의 하나였음을 되새기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옛 나날들을 회고(回顧)해 본 것이다.
글, 김희상 (전사, #24, 1972-77)